[성명] 우리는 더 이상 조사[弔詞]를 쓰지 않을 것이다 – 쌍용자동차 노동자 김주중을 떠나보내며
사진 출처: 한겨레
“저기 있네.”
몸을 동그랗게 만 남자가 경찰 방패를 몸으로 받고 있었다. 남자가 방패 삼아 들고 있던 솥뚜껑 위로 경찰의 시위 진압 방패가 내리 찍혔다. 빔프로젝터가 쏘는 뉴스 영상과 영상을 띄운 하얀 스크린 사이에 김주중이 섰다.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채 경찰 방패와 진압봉에 무너지는 남자의 모습 위로 김주중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그가 남자의 ‘정체’를 밝혔다.
“이 사람, 나다.”
공장 지붕에서 벌레같이 찌그러지는 작은 형체들 중에서 그는 스스로를 구별해냈다.
(10년 만에 쌍용차 복면인들 “이제야 말한다, 나였다고”, 한겨레, 2018-06-23)
우리가 이 기사를 접했을 때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함께 이구동성으로 한 말은 “그래도 잘 지내고 있네” 였다. 생계에 바쁜 김주중 동지를 본 기억이 가뭇가뭇하지만 그래도 기사를 통해서라도 보니 반가웠다. 그래도 씩씩하게 잘 지내고 있고, “이제야 말한다, 나였다고” 할 정도로 그 괴물과 같은 국가폭력을 견디고도, 감옥생활을 견디고도 잘 지내고 있구나! 하는 안도와 반가운 감정이 교차했다.
그런데 김주중 동지의 자결 소식이 전해졌다. 김주중 동지는 다음과 같은 짧은 유서를 남겼다.
“그동안 못난 남편 만나 고생만 시키고 마지막에도 빚만 남기고 가는구나. 사는 게 힘들겠지만 부디 행복해라.”
“그리고 천하에 못난 자식 어머님께 효도 한 번 못하고 떠나서 정말 죄송하다고 전해주라.”
“형 그동안 고마웠어요. 신세만 지고 가네요.”
김주중 동지는 77일 동안 펼쳐진 쌍용자동차 공장 점거 투쟁 동안 선봉대로 가장 앞장서서 투쟁했다. 활동가답게 ‘흔들림 없이’ 투쟁했다. 고도로 훈련된 시커먼 경찰특공대가 헬기를 동원해 폭우처럼 최루액을 쏟아 부으면서, 용산철거민 학살진압 때 사용했던 개조된 진압 콘테이너를 타고 하늘에서 작전을 펼치고, 족히 1만여 명 이상에 달할 경찰 병력들이 공장을 완전 포위하고 4천 여 병력이 공장 옥상으로 기어 올라오는 동안 선봉대답게 앞장서서 투쟁하다가 구속까지 됐다. 그러나 77일 동안 펼쳐진, 그 이전의 투쟁까지 포함하면 더 긴 시간 동안 전개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투쟁은 “영웅적인 투쟁”이었지만, 뼈저리게 패배하고 처절한 투쟁이었다.
위력적인 전국적 총파업도 전개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봉기’를 목표로 한 것도 아닌 고작 공장 안에 있는 고립된 쌍용차 동지들에게 생수를 넣어주기 위해 파이프까지 준비해 가며 진입투쟁을 했지만 철벽같은 경찰 병력 앞에 전진하지 못하고 매번 막혀야 했다. 우리는 연일 공장 밖에서 압도적으로 무장한 경찰병력에 쫓겨 치욕적으로 법원4거리까지 도망 다녀야 했다.
2009년 8월 5일 공장이 감옥처럼 폐쇄되고, 도장공장만으로 포위망이 좁혀오면서 철저하게 고립무원 상태에서 김주중 동지는 새까맣게 몰려오는 공권력을 맞이해야 했다. 가냘픈 몸으로 잔악한 경찰특공대의 방패에 무차별적으로 찍히고 진압봉에 머리가 깨지면서 벌레처럼 몸을 웅크리면서 혼자서 그 고통과 공포의 순간을 견뎌야 했다. 해고되고, 구속되고, 가난으로 가정이 무너져 내리고, 해고 동료들과 가족들의 연이은 죽음을 목도하면서 동지도 같이 무너져 내리기도 했다.
죽음을 선택하기 전에 친형과도 같았던 동지와 아내에게 보내는 유서에는 자신을 해고시키고 10여 년 동안 철저하게 무너뜨렸던 쌍용차 자본과 무자비한 폭력을 자행했던 진압경찰에 대한 한 마디의 적개심도 없다. 그 동안 동지는 자본과 권력, 사회적 살인을 자행하던 거대 살인 집단에 대한 적개심은 내면 깊숙하게 감춘 채, 오직 피해의식과 개인적 상처와 회한과 자기모멸과 자학, 자책만 안고 고통 받아야 했다. 그리고 주변 동지들, 동료들에 대한 미안함과 빚과 두 아들과 부인과 노모의 애를 끊는 고통만 남기고 동지는 떠나갔다.
그러나 우리의 적들, 사회적 학살자들은 달랐다. 저들은 피도 눈물도 양심도 없는 자본의 피조물들이었다. 저들은 용산철거민에 이어서 이 도심의 ‘테러리스트’를 진압한 정의의 사도로 자신들을 규정했다. 당시 진압 책임자 조현오(당시 경기경찰청장)은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점거 파업을 진압한 것을 가장 자랑스러운 업적이며, “선진 인류 경찰로 만들어 가는데 소중한 자양분”이라며 대 노동자 전투 승리를 자축했다. 동시에 경기경찰청의 수십 명 사이버 댓글 부대들은 폭도가 어쩌니 하며 노동자들을 모욕하고 경멸하며 이 “자랑스러운 업적”을 포장하기 위한 비열한 공작을 자행했다.
경찰과 함께 또 다른 학살 공동정범은 대법원이다. 양승태의 지휘 하에 2004년 11월 대법원은 “쌍용차 정리해고는 무효”라는 서울고법의 판결을 정당한 해고라고 뒤집었다. 양승태는 박근혜 정권과 공모한 “사법거래”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을 사지로 내몰았던 것이다. 그러나 법정거래라는 추악한 범죄에 앞장섰던 양승태는 컴퓨터 하드 디스크에 남아 있는 범죄증거를 모조리 삭제했다.
범죄자 양승태가 증거인멸을 자행할 것인 뻔한 상황에서도 즉각적인 체포영장을 발부하지 않음으로써 법원은 사실상 양승태 범죄를 은폐하는데 가담했다. 문재인 정권 하의 김명수 대법원장이 양승태의 범죄증거 의혹을 감싸고 있다는 언론 보도도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김명수는 양승태와 공동정범과 다를 바 없는 “법원장”들의 요구를 거스르지 못하고 있다.
양승태가 박근혜와 “재판거래”를 통해 파렴치한 반사회적 범죄행위를 저질렀다면, 문재인 정권의 김명수는 양승태와 “거래”를 통해 재판거래의 그물에 같이 걸려 있는 것이다. 양승태와 김명수는 피착취자, 피억압자들에 대한 공통의 지배감정, 이해를 가지고 체제와 체제의 보루인 사법부를 사수한다는 사명감을 가진 지배계급의 공동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김명수 대법원 체제 하에서도 “재판거래”로 자행한 범죄행위가 하나도 원상회복되지 않고 있다. 노동자 대량 정리해고를 정당화 하고, 전교조, 공무원노조 노조 파괴기도, 내란죄 적용과 통합진보당 해체 등 끔찍한 민주주의 파괴 행위에 대해 처벌받는 자들은 하나도 없다. 반면에 범죄 피해자들은 여전히 거리에서, 감옥에서 고통 받고 있다.
“촛불혁명” 정권이라는 문재인의 흰소리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의 삶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국정원, 검경 및 언론 등 체제의 기구는 그대로 작동되고 있다. 착취자들은 그대로 남아 무한착취를 일삼고 있다. 재벌은 여전히 막가파적 폭력적 “갑질”을 계속하고 있다.
“일자리위원회” 설치에도 불구하고 만성적 실업은 계속되고 있다. 일자리 창출은커녕 구조조정으로 노동자들이 대량으로 거리로 내몰리고 있다. 쌍용차를 비롯한 정리해고자들은 아직도 복직되지 못하고 있다.
고작 7,530원의 최저임금 인상에 대해 자본과 자본의 언론들은 세상이 다 망할 것처럼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언론과 자본이 고용한 전문가라는 부역자들은 자본주의의 고유한 문제인 실업을 최저임금 인상 탓으로 돌렸다. 재벌의 시장 침투로, 소상공인들 간의 경쟁의 격화로, “등골 브레이커”라는 본사 로얄티, 임대료, 가맹점 수수료로 파산하는 현실을 은폐하고 최저임금 탓으로 돌렸다. 자본의 일사불란한 반격을 등에 업고 문재인 정권은 민주당을 내세워 자유한국당과 합작하여 최저임금법을 개악했다.
문재인 정권은 “노동존중” 정권을 내걸고 자본존중을 위해 노동자에 대한 공격을 서슴지 않고 있다. 비정규직 천백만의 시대, 저임금 자본주의 시대는 계속되고 있다. 노동자 파업을 파괴하고 보이지 않는 노동자 학살범인 손배가압류 문제도 아무런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이번에 자결한 쌍용자동차 김주중 동지에게는 손해배상 청구액 24억 원이 삶아갈 의욕과 의지를 말살하는 족쇄와 멍에로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유서에서 언급한 고인의 빚에는 천문학적인 손해배상 청구액과 생활고로 빌린 고리의 이자들이 포함돼 있었던 것이다.
너희들이 청구한 손해배상은 착취의 중단에 대한 손실 비용이다. 너희들이 청구한 손해배상은 살인폭력 진압에 대한 손실 비용이다. 너희들의 손해는 사람을 죽이는 것에 대한 손실비용이다. 너희들이 입었다는 손해로 인해 노동자와 가족 30명이 죽어야 했다. 너희들이 입었다는 손해로 노동자 가족들은 삶이 파탄 났다.
우리는 더 이상 조사[弔詞]를 쓰지 않을 것이다. 대신에 자기모멸과 자기학대와 죄책감 같이 개인에게 모든 사회적 살인의 책임을 모조리 전가하고, 피지배계급의 일원들을 분열시키는 비열하고 잔학한 착취체제에 맞서 싸울 것이다. 고인이 된 동지의 내면에 숨기고 표출하지 못한 적들에 대한 적개심과 복수심을 가슴에 안고 투쟁해 나갈 것이다.
정리해고 단일 사업장 노동자와 가족 30명 사회적 학살이라는 전대미문의 학살범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또 노조도 없이 “우울증”, “가정불화”, “신병비관” 등으로 포장하여 사회적 학살이 은폐된 채 소리 소문 없이 죽어나간 수많은 노동자들에 대한 사회적 학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뻔뻔하게 작동되고 있는 이 체제에 맞서 투쟁해 나갈 것이다.
꽃도 없고 이름도 없고 종소리도 없고
눈물도 없고 한숨도 없고 사나이답게
너의 옛 동지들 너의 친척이
너를 흙에 묻었다
순난자여 흙은 너의 영구대
꽃도 십자가도 없는 무덤
오직 하나의 기도는
동지여 복수다 복수 너를 위해
오직 하나의 기도는
동지여 투쟁이다 투쟁 너를 위해
<꽃도 십자가도 없는 무덤 중>
2018년 6월 29일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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