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양반아, 노동자들의 처지가 근본적으로 바뀐 게 무엇이란 말이야?

한석호 씨는 이번에는 과거 대우자동차에 이른바 학출로 위장취업해서 현장 노동자로 남아 있는 이범연 활동가의 <위장취업자에서 늙은 노동자로 어언 30년>이라는 책을 소개하며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엥겔스의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라는 책이 있다. 1800년대 중반 영국 노동자계급의 노동조건과 생활상을 분석하고 운동 방향을 제시한 책이다. 그로부터 100년이 흐른 유럽에서 더는 노동운동 지표로 활용되지 않았다. 노동자계급의 처지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논리체계가 구축되기 시작하던 1980년대 한국 노동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한국 노동자계급의 상태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80년대 한국 노동자계급 다수는 재산이 없는 무산계급이었다.

그로부터 한국 노동운동에는 30년이 축적됐다. 민주노조운동이 꽃피고 자본·정권에 맞서 치열하게 싸웠다. 노동자계급의 임금·복지·노동조건은 향상됐다. 그 결과 한국 노동자계급의 상태가 바뀌었다. 착취의 쇠사슬밖에 잃을 것이 없던 무산계급에서 음식물 쓰레기를 남기는 처지로 안정됐다. 중심부 노동자는 이 체제에서 지킬 것이 더 많은 집단으로 계층 상승했다(한석호, “이 양반아, 조합원의 처지가 바뀌었단 말이야”, 매일노동뉴스, 2017.12.11.).

한석호 씨의 이 글을 읽으면서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한석호 씨가 지금 운동 내에서 어떠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지와 상관없이 과거 사노맹으로부터 출발해서 전노협, 현재 민주노총 고위 간부까지 맡고 있는 쟁쟁한 활동가일진데 과거에 학습을 한 것이 얼마나 빈곤한 것인지 이 글을 통해서도 드러났기 때문이다. 한석호 씨는 일전에도 한 번 지적한 적이 있지만 무산계급(無産階級)이라는 말을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나 빈농처럼 재산이 없어 자기의 노동력만으로 생활하는 하층 계급”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맑스주의에서 무산계급은, 사전적 설명인 “재산이 없어” 자기의 노동력만으로 생활하는 계급이 아니다. 맑스주의에서 무산계급은 토지, 기계, 공장, 기업 등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하는 계급을 말한다.

무산계급(無産階級) 의미에 대한 정치적 무지

자본주의에서 노동자 계급은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 계급한테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 임금을 받고 생활해 나가는 계급을 말한다. 자본가들은 생산수단의 소유자이고 법은 이 사적소유권을 보호하고 국가권력은 폭력적 힘 등으로 소유권을 지켜내는 것이다. 노동자가 파업으로 자본의 사적소유권에 저항하고 착취질서를 침해할 때 자본가 국가는 어김없이 폭력과 법을 동원해 가차 없이 노동자를 탄압하고 짓밟는 것이다. 자본가 언론 역시도 자본의 나팔수로 노동자를 비난하고 자본의 질서를 옹호하고 나선다. 자본의 이데올로그들은 전문가, 교수, 연구자라는 직위를 내세워 자본의 착취질서를 옹호하고 노동자들에 대한 비난에 앞장선다. 종북 이데올로기가 노동자나 민중의 투쟁을 제압하는 한국 지배계급의 대표적인 전가의 보도다. “이 가뭄에 웬 파업이냐”는 자본가 언론의 나팔수가 어디까지 파렴치하게 자본의 이데올로기를 대변하는지를 제일 잘 보여주는 사례다.

폐일언하고, 위의 얘기는 한석호 씨가 맑스·엥겔스의 위대한 저서인 “공산당 선언”만이라도 제대로 읽고, 이해했어도 나올 수 없는 소리다.

공산주의의 특징은 소유 일반을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적 소유를 폐지하는 것이다 … 공산주의의 이론은 사적 소유의 폐지라는 한마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우리 공산주의자는 다음과 같은 비난을 받아왔다. 너희들은 자력으로 입수한, 자신이 노동해서 얻은 소유, 다시 말해 모든 개인적인 자유와 활동과 자립의 기초인 이 소유를 폐지하려 한다고(‘2. 프롤레타리아와 공산주의자’, “공산당선언”, 범우사, 서석연 옮김).

당시에도 공산주의자들의 “사적 소유 철폐” 요구에 대해 지배계급은 개인적 소유를 폐지, 또는 강탈하려 하는 무뢰배라고 어처구니없는 악다구니를 써가며 비난했던 것이다. 부르주아처럼, 개인적 소비물자의 소유 여부를 가지고 “80년대 한국 노동자계급 다수는 재산이 없는 무산계급이었다.”라며 이제는 “조합원의 처지가 바뀌었단 말이야”라고 한석호 씨는 호통을 치고 있는 것이다.

맑스와 엥겔스의 사적 소유 철폐는 남의 노동을 가로채서 그 성과를 자본으로 만들어 착취를 일삼는 자본가들의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권을 박탈하여 노동자들의 집단적이고 공적인 소유로 바꾸려고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본은 노동자들을 착취해서 나온 노동자들의 과거 노동의 산물, 남의 노동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이는 원시적 축적으로, 자본주의의 초기 식민지 지배로, 악랄한 노예노동으로, 수세기에 걸쳐 농민을 토지로부터 내쫓는 엔클로저(울타리치기) 운동 등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만약 자본가들이 자기 노동으로 초기 자본을 일궜다면 그것에 대해서는 노동자 권력이라고 하더라도 합당한 보상을 해줘야 한다. 그것은 조족지혈도 안 될 것일텐데, 그러나 그 이후 노동자의 노동력을 착취해서 거대자본을 일궜다면 그것은 노동자의 집단적 노동의 성과이기 때문에 집단적이고 공적인 소유로 전환하는 것이 이치적으로도, 논리적으로 맞다.

게다가 현대 자본주의에서 보편적인 기업형태인 주식회사는 이미 사회적으로 분산되어 있는 화폐자본을 주식투자 형태로 집중시켜서 자본가들이 그 기업에 대한 소유권을 발휘한다. 심지어 대재벌들은 계열사 전체에 대해서는 1% 남짓한 소유로 전체 기업을 지배하기도 한다. 주식회사를 놓고 보더라도 기업은 자본가들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소유하고 있는 자본가들로부터 사적 소유를 빼앗아 집단적 소유, 공적 소유로 하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이고 온당한 행위다.

자본가들은 관리노동과 혁신, 창의성 등을 가지고 자본형성에 대한 자신의 정당한 기여를 주장하곤 하는데, 관리노동과 혁신, 창의성은 그 대부분이 노동자 착취를 최고도로 높이는 행위인데, 현대의 거대자본은 그것에서조차도 면제되어 자본의 소유권만으로 자본에 대한 절대적 지배자가 된다. 현대의 거대 자본가들은 하등 존재할 필요가 없는 기생충 같은 존재이다. 그 기생충들이 이 사회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데, 각종 불법, 편법을 동원하여 2대, 3대, 4대로 재벌의 자식의 자식들한테로 그 소유가 이전된다. 대다수 노동자 자녀들이 삼포, 4포, 심지어 칠포로 절망하고 흙수저, 무수저에, 헬대한민국 현실에 짓눌려 고통으로 아우성칠 때, 철부지 재벌의 자식들은 자본형성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았으면서도 재벌 자식이라는 하나의 이유로 자본과 부를 계승하여 절대적 부와 권력과 풍요와 행복마저도 자동 승계한다.

결국 그렇기 때문에 1980년대나 2017년에나 “사적소유 철폐”라는 운동의 근본목표는 달라질 수 없는 것이다. “착취의 쇠사슬밖에 잃을 것이 없던 무산계급”의 위치는 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음식물 쓰레기 남기는 처지”가 노동자들 처지의 변화?

이제 한석호의 무지를 무죄라 한다 치고, 한석호 씨가 이해하는 “무산계급에서 음식물 쓰레기를 남기는 처지로 안정됐다. 중심부 노동자는 이 체제에서 지킬 것이 더 많은 집단으로 계층 상승했다.”는 의미의 조합원들의 처지는 어떻게 변했는가?

한석호 씨는 “음식물 쓰레기 남기는 처지”처럼 소비수단이 남아도는 노동자들의 사례를 근본적인 삶의 전환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노동자를 개, 돼지로 간주하지 않는다면 소비수단이 남아도는 것만으로 노동자들의 삶이 근본적으로 변했다는 지표로 삼아서는 안 된다.

한석호 씨는 먼저 “조합원들”, 아마도 대공장, 대기업 노동자들처럼 삶의 조건이 개선된 일부 노동자 집단만을 예로 들고 있는데 이는 온당치 못하다. 여전히 절대 다수 노동자들은 청년실업으로, 노년 실업으로 고통 받고 있고, 반(半) 실업자인 비정규직으로 저임금으로 빈곤 상태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이 누리는 거대한 풍요와 행복에 비해 절대 다수 노동자들이 누리는 삶의 상태는 참담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한석호 씨처럼 수정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베른슈타인도 엥겔스 사후인 1800년대 말과 1900년 초 자본주의의 적응능력의 발전으로 전면적 위기가 줄어든다고 하는 한편, 독일 노동자들의 부분적인 삶의 개선을 가지고 ‘중산층’ 논리를 구사해가면서 사실상 사회주의 운동을 포기하고 자본주의를 개혁하는 새로운 운동으로 전환해나갈 것을 요구했다. 이러한 베른슈타인 논리에 대해 로자 룩셈부르크는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는 글로 베른슈타인의 논리를 체계적으로 반박했다. 로자는 카르텔, 신용체제 등 적응수단의 발전으로 공황을 제어하고 노동자의 안정적인 삶의 개선이 가능하다는 베른슈타인의 논리에 대해 카르텔과 신용수단의 발전이 자본주의 무정부성과 공황을 제어하기는커녕 더 격렬한 형태의 새로운 위기를 조장한다고 비판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맑스주의 혁명정신을 간직하고 ‘맑스주의의 교황’이라는 권위를 가지고 있었던 카우츠키 역시 이른바 “상대적 궁핍화론”을 가지고 베른슈타인의 주장을 공박했다. 과거에 비해 절대적으로는 노동자들의 상태는 개선됐으나 자본의 성장이나 부에 비해 노동자들의 상대적 처지는 악화됐다는 주장이었다. 카우츠키의 이 주장이 부분적으로 맞기는 하지만 맑스의 이른바 궁핍화 테제를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맑스의 궁핍화 테제는 절대적 궁핍화와 상대적 궁핍화를 다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자본주의에서는 실업자들처럼 수많은 노동자들이 절대적 궁핍에 시달리고 있다. 상대적 궁핍은 말할 것도 없다. 특히 공황이 닥치면 상대적으로 처지가 좋았던 노동자들의 처지도 급격하게 삶의 상태가 악화된다. 쌍용자동차 정리해고자들을 보면 절대적, 상대적 궁핍에 시달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가정이 붕괴되기도 하고 정신적으로 피폐화돼 있기도 하다.

비정규직 5명 중 1명은 60대 이상 노년 노동자들이다. 이처럼 극소수 운 좋게 정규직으로 정리해고 되지 않고 정년퇴직을 한다 하더라도 60대 이후는 대다수 노동자들이 실업자나 비정규직의 삶을 살아야 한다. 연금으로 안정적으로 노후를 보낼 수 있는 노동자들이 얼마나 있는가?

오늘날 보편적인 고용형태인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보면 대다수가 빈곤상태에 빠져 있다. 이들 대다수가 최저임금 이하나 최저임금 상태로 기아 상태를 간신히 벗어나거나 그 주변을 맴돌기도 한다.

자살로, 심지어 고시원에서 무연고사로 발견되는 청년들의 참담한 상태나 병고, 고독고, 무위고로 이중삼중의 고통에 시달리는 다수 노인들의 삶을 두고 상대적, 절대적 궁핍에서 벗어났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맑스는 자본론의 유명한 문장에서 궁핍화론(또는 양극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법칙은 자본의 축적에 대응한 빈곤의 축적을 필연적인 것으로 만든다. 따라서 한 쪽 끝의 부의 축적은 동시에 반대 편 끝[즉 자기 자신의 생산물을 자본으로 생산하는 노동자계급의 측]의 빈궁 · 노동의 고통 · 노예상태 · 무지 · 야만화 · 도덕적 타락의 축적이다(맑스, 제25장,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법칙, 자본론 1권 하, 김수행 역, 비봉출판사, 881쪽).

맑스는 노동자 계급의 무지와 야만화와 심지어 도덕적 타락조차도 자본주의 사회가 만든 사회적 문제라고 보고 있다. 자본의 지배가 빈궁과 노동의 고통과 노예상태는 물론이고 노동자들을 무지와 사회적 약자에 대해서조차 혐오에 가득찬 존재로 타락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한석호 씨가 예를 든 “영국노동자 계급의 상태”에서 엥겔스 역시 같은 관점으로 보고 있다.

엥겔스의 “영국노동자 계급의 상태”를 가지고 산업자본주의 초기의 모습에는 그렇지만 현대 자본주의는 그렇지 않다고 했는데, 엥겔스는 영국과 아일랜드 노동자들의 비참한 상태에 대해 폭로하면서도 이들의 상태가 개선될 여지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투쟁으로 성취한 노동자 계급 상태의 부분적 개선을 가지고 엥겔스의 저서를 인용하여 자본주의의 근본변화상의 예로 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게다가 엥겔스가 당시 영국의 광산 노동자 등의 직업병이나 끔찍한 재해에 대해 폭로했는데, 노동자들의 끔찍한 참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지하철 외주 청년 노동자의 구의역 사망사건이나 고교 실습생들의 투신과 벼랑 끝에 내몰린 노동권과 인권, 최근 건설현장에서 크레인 사고로 끔찍하게 죽어가고 있는 노동자들의 죽음의 행렬을 보더라도 노동자들의 삶은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

“상생, 타협, 나눔”으로 노동자 현실 은폐하고 자본에 복무

현대 자본주의에서 노동자들의 노동의 고통은 여전히 야간노동으로, 장시간 노동으로 계속되고 있다. 자본에 대한 노동자의 종속과 노예화는 계속되고 있다. 요즘 유행하는 갑질문화가 이른바 자본의 지배 모습이고 노동자가 그 횡포에 고통 받고 있는 사태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일부 소비수단이 남아돈다 하더라도 그것은 노동자들을 생물학적으로 개, 돼지 수준으로 전락시켰을 때에야 해당되는 말이고 실제 노동자들의 문화적, 정신적, 물질적 향유 수준은 턱없이 낮다. 특히 무상의료, 무상교육, 무상보육, 무상주택의 혜택을 누렸고, 현재도 누리고 있는 사회주의 국가 인민의 삶에 비해 자본주의, 특히 한국자본주의 노동자들이 누리는 삶은 여전히 절대적, 상대적 궁핍상태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자기주택을 가지기 위해 수십 년씩 부채인생을 살아야 하는 것이 대다수 노동자들의 삶이기도 하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수천만 원씩 빚을 지고 출발하고 실업상태에 내몰리거나 취업을 하더라도 비정규직으로 내몰리는 청년의 삶도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노동자 계급이 아닌 농민의 삶은 노동자 계급의 상태보다도 대다수가 열악하다. 소상공인들은 재벌의 지배로 퇴직금도 없이 파산을 면치 못하거나 노동자 계급 이하의 삶을 살고 있다.

이것이 현재 대다수 한국 노동자 계급의 상태다. 대다수 한국 민중의 상태다. 따라서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전반적인 삶의 상태가 과거보다는 나아졌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노동자들의 근본적 상태는 변하지 않았다. 게다가 일부 변화라 하더라도 역대 정권의 노동법 개악 기도와 최근 ‘촛불정권’을 자처하는 문재인 정권 하에서의 근로기준법 개악 기도에서 보듯 자본의 반격에 의해 언제든지 후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공황과 전쟁위기로 절멸의 재앙을 부르는 자본주의, 미제국주의 전쟁터로 변한 한국의 참담한 상태는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한석호 씨는 자본주의의 이러한 실태를 미화하고, 노동자들 전반의 끔찍한 상태를 항상 은폐한다. 현실을 은폐하고 호도한다는 것, 이것은 자본주의의 옹호자들이 항상 하는 짓이다.

이제 한석호 씨에게 남은 것은 “중심부 노동자는 이 체제에서 지킬 것이 더 많은 집단으로 계층 상승했”기 때문에 이들 노동자들의 “나눔 · 양보 · 타협”(한석호, “한국 노동조합운동의 이율배반”, 매일노동뉴스, 2017.08.07.)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는 노동자들이 투쟁으로 성취한 권리를 비정규직이나 사회적 약자한테 나누자는 선의로 포장돼 있는데, 이러한 논리는 노동귀족론, 고임금론으로 노동자들에게 공세를 취하는 자본과 권력의 파렴치한 이해에 복무하게 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조합원들의 처지’가 변화했다는 것을 근거로 노동자들의 삶이 근본적으로 변화했기 때문에 80년대와 같은 혁명적 운동이 필요하지 않다는 한석호 씨의 수정주의 논리는 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상생, 타협, 나눔”으로 노동자의 임금양보와 노사정위원회 복귀 같은 사회적 대화 노선으로 사회적 대타협이라는 반노동자적인 “대안노조 운동”을 설파하는 한석호 씨 같은 부류의 논리도 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이 양반아, 도대체 노동자들의 처지가 무엇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단 말이야”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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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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