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을 우리 손으로 만들어 내지 말자

사진: 민중의소리

김영숙 보육 노동자

 

강남역 ‘묻지마’ 살인사건에 대한 담론들이 넘쳐난다. 이런 우리 사회에 누적되고 곪아터지다시피한 사건들은 항상 새로운 국면으로 넘어가는 게 일상다반사다. 물론 결과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이 사건은 자신의 입장을 구축하고자 하는 진영의 큰 목소리에 비해 한 마디로 요약하기 어려운 사건이다.

정신장애로 인한 묻지마 살인이라면 그의 개인적 질병의 징후인 피해망상으로 저지른 살인으로 정신장애인의 위험성과 관리미비점을 질타하며 또 다른 소수자를 잠재적 범죄자로 낙인찍는 일로 귀결될 것이다. 또 한편으로 ‘여성혐오’ 범죄로 결론이 난다면(절대 그럴 리는 없겠지만) 딸 가진 부모의 공포, 번화가의 방범안전에 대한 걱정, 자매애로써의 위로 같은 부르주아 중산층의 가족주의 안에서 맴도는 일회성 탄식과 슬픔으로 언론에 회자되는 이벤트밖에는 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거기다 남녀대치구도로 확장돼서 여성혐오가 반드시 남성들만의 전유물인 것처럼 기정사실화하고 ‘잠재적 가해자’로서 적대의식을 갖는 것도 이성적이지도 않고 건강하지도 않은 감정의 낭비라고 본다. ‘여성 혐오’란 개념이 언제부터 회자되어오는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등골이 서늘할 정도로 노골적인 비하, 무시, 배제, 증오의 악의적 감정으로 여성을 폄훼한다는 것으로 나는 인식한다.

이와는 반대로 ‘개저씨’라는 악의적 용어도 있다. 이 용어는 남녀를 불문하고 나이든 중년남성들의 갑질이나 무지한 행태를 고발하는 대표적 단어이기도 하다. 이런 세태풍자와 현상들의 근저에는 우월한 위치에 있는 자가 자신 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혐오와 폭력을 가한다는 사실이다. 경제공황과 맞물린 전반적인 사회의 보수화, 경제적 불안과 차단된 계층이동으로 인한 절망과 불만들이 만들어낸 자신의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의 하나가 바로 여성으로 각인된다는 점이 우려스럽다. 그리고 여성혐오가 아니고 단순 질병으로 인한 묻지마 살인인 것을 침소봉대하며 편 가르기 한다고 다시 혐오하는 사람들도 짜증을 유발한다.

당사자인 여성들에게 ‘여성혐오’란 무엇인가를 물어보면 자신의 처지에서 경험으로부터 드러나는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단지 조롱과 비난, 폭력으로 야수의 얼굴로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언제 어느 곳에서나 보이지 않게 은밀한 방식으로 여성을 속이고 여성의 생각을 은폐하고 도용하고 보호하는 척하면서 이용해먹는 남자들 또는 여자들도 다 한통속인 것이다.

그래서 계급적 관점이 필요한 것이다. 여성차별과 사회적 불평등이란 이중의 굴레 속에서 신음하는 여성들에게 언론들, 더구나 그나마 중도적인 신문이라고 하는 언론도 본질은 회피한 채 여성비하적인 기사나 싣고 있다.

‘사표 쓰고 싶은 날엔 종이 한 장 꺼내 사표손익계산서’를 써보고 ‘여유롭게 웃는 자기의 모습을 상상’하라고 분노를 삭이고 영리하게 처신하라는 말은 곧 ‘노예근성’으로 살아남으라는 말이다. 개인 필살기로 살기를 권장하고 있다.

파업기간에 가족을 굶어죽이지 않으려고 출근하는 파업 파괴자는 외면한 채 ‘가족의 이익이 우선’이라고 악다구니를 쓰는 부인 탓을 하기보다는 ‘계급의 이익이 우선’이라는 노동계급 이데올로기의 기본인 동지애를 바탕으로 소유욕에 얽매이지 않는 역사의 경험이 필요하다.

점점 파국으로 치닫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러 층위들의 문제를 가지고 계속 우리는 싸워야 한다. 하지만 역사의 모든 경험은 사회집단이 적대적 사회세력들과 투쟁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낸다는 말의 의미를 재확인하며 적대적 사회세력이 누구인가를 가장 명확하게 견지해야 할 것이다. 남성인가? 여성인가? 아니면 정신장애인인가? 우리가 직시해야할 것은 지배계급의 강자들이 비웃고 있을 ‘소수자가 소수를 침탈하고, 약자가 약자를 죽이는’ 비극이다. 더 이상 비극은 없다.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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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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