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법정에서 이정훈은 무죄다! 그런데 왜 현실의 법정에서 이정훈은 ‘죄인’이 되었는가?
* 이 글은 <노동자정치신문> 편집위원장이 4.27시대에 객원 연구위원으로 [긴급 기고]한 글입니다.(편집자 주)
이정훈(4.27시대연구원 연구위원, 이하 직책 생략)은 왜 ‘죄인’이 되었는가? 이정훈은 도대체 무슨 악랄한 짓을 저질렀기에 1985년 20대 가장 빛나는 청춘의 시기에 3년이라는 시간을 전두환 파쇼 군사독재의 쇠창살에 갇혀 자유를 박탈당해야 했는가? 40대 초반인 2006년 노무현 정권 시절에는 “6.15 이후 최대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간첩죄’를 뒤집어쓰고, 민주노동당을 분열시킨 ‘주범’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3년의 옥고를 치러야 했는가? 그도 모자라 이제 50대 후반을 바라보는 나이에 ‘촛불혁명정부’라는 문재인 정권 하에서 “북한의 지령”을 받아 “회합·통신”하고 “친북 저작”을 쓴 ‘종북인사’로 또다시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어 기약 없는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야 될지 모르는 가혹한 운명에 처해졌는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이정훈을 잘 안다고도 잘 모른다고도 할 수 없다. 광주 항쟁 직후부터 지금까지 40여년 반독재 반미항쟁의 한 길을 걸어왔던 이정훈과 맑스레닌주의자를 자처하며 뒤늦게 활동에 뛰어든 나는 정파가 다르고 정세인식이 다르다는 이유로 한 번도 직접 만나지 못하고 각자 다른 길을 걸어왔다.
뒤에서 더 말하겠지만 내가 이정훈의 이름을 처음으로 접한 것은 2006년 이른바 ‘일심회’ 사건이었다. 그런데 몇 년 전에야 비로소 4.27시대연구원에서 이정훈을 만나 같이 공부도 하고 토론도 하고 수차례 뒤풀이 자리를 가지면서 서로에 대한 이해폭을 넓히고 조금씩 신뢰를 쌓아 왔다. 그러나 일반적 수준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활동가들 사이가 보통 그렇듯, 뒤풀이 자리에서도 정세일반에 대해 주로 대화를 나눴을 뿐, 개인사나 개인적 신념에 대해서는 거의 얘기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이정훈의 삶 전체를 온전하게 소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못하다. 대신에 나는 이번 이정훈 국가보안법 사건을 통해 다시 부각된 그의 몇 가지 이력을 가지고 그의 삶과 투쟁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1985년 고려대 광주학살원흉 처단투쟁위원회 위원장, 삼민투 위원장을 지냈다. 서울 미문화원 점거농성으로 3년 옥고
말로만 듣고, 역사책에서만 접하던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에 이정훈이 있었다. 그런데 전두환이면 전두환이지 왜 미국인가?
1980년 5월 말 미군은 오키나와의 조기경보기를 파견하고, 필리핀에 있던 항공모함 코럴시호와 일본에 있던 미드웨이호를 각각 진해와 부산에 전진배치 했는데, 당시 광주 시민들은 “인권”과 “민주주의”의 나라 미국이 신군부의 학살과 쿠데타를 막아줄 것이라고 소박하게 기대하고 있었다. 1980년 5월 26일 광주의 민주화 항쟁 대학생대책본부는 “부산에는 미 항공모함 2대가 정박 중에 있습니다. 잔인무도한 저들의 살육이 더 이상 계속되는 것을 방지하고 광주시민을 지원하기 위하여 왔습니다. 시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라는 가두방송을 했다.
그러나 이후 미국이 광주항쟁 진압에 개입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소박한 친미의식은 결렬한 반미의식과 반미항쟁으로 불타올랐다. 5월 21일은 광주 시민들이 계엄군과 싸워 계엄군을 몰아냈던 다음 날, 5월 22일 미국이 항공모함 코럴시호를 부산에 입항시켰던 5월 22일은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에 의해 ‘반미의 날’로 선포됐다.
1980년 12월 9일에는 ‘광주 미문화원 방화투쟁’이 벌어졌다. 당시 언론은 이 사건을 “전기누전에 의한 화재”라며 1단 기사로 처리했지만 사건의 진상은 빠르게 입소문으로 전해지면서 많은 사람들을 격동시켰다.
광주에서 격동시킨 미문화원 방화투쟁은 1982년 3월 18일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을 촉발시켰다. 이 항쟁은 전두환 파쇼도당의 공포정치에 숨죽이며 분노를 삼키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광주 민주항쟁을 알리는 횃불”의 역할을 했다. 부산 문화원 방화사건 당시 현장에서는 “광주민주항쟁의 배후인 미국은 물러가라”, “남북통일을 분단시키는 미국은 즉각 미군을 철수하고 물러가라”는 내용의 유인물이 뿌려졌다. 이 사건 다음 달인 4월에는 강원대생들의 성조기 공개소각 사건이 벌어졌다.
이렇게 선도투쟁의 양상으로 반미항쟁이 점차로 격렬해지는 가운데, 1985년 5월 23일 낮12시 5분부터 26일까지 72시간 동안 서울의 5개 대학의 학생 73명이 “광주 학살 책임지고 미국은 공개 사죄하라”라는 요구를 내걸고 미국문화원 2층 도서실을 점거하여 대규모 농성을 벌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농성기간 동안 5월 24일에는 학생 특 대표들과 미국측 대표가 세 차례 회담을 가지고, 밖에서는 전국 17개 대학 8천여 명이 집회 및 시위를 전개했다.
이 투쟁을 주도한 것은 1985년 4월 17일 고려대에서 결성된 전국학생총연합(전학련)과 그 산하 대학에 조직된 전위적 투쟁조직이라고 하는 민족통일민주쟁취민중해방투쟁위원회(삼민투위)였다. 당시 전학련 의장은 김민석 서울대총학생회장이었고, 삼민투위 위원장은 허인회 고려대총학생회장이었다. 이정훈은 앞의 이력에서 공개됐듯이 고려대 삼민투 위원장이었고 점거농성을 직접 주도했다. 이정훈이 참가했던 서울 미문화원 점거농성은 반미항쟁과 1987년 6월 항쟁으로 나아가는 기폭제가 되었다.
이후 1996년 ‘광주의 진실’을 폭로한 미국 탐사보도기자 팀 셔록이 ‘체로키 파일’을 폭로하면서 미국이 광주학살의 배후라는 사실이 공개적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팀 셔록은 미국은 발포 책임자를 비롯해 미국이 수행했던 민감한 사안들은 빼고 공개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누군가 지령으로 자기 삶을 다 바쳐 투쟁할 수 있는가?
1970년대가 박정희의 암살로 막을 내렸다면, 1980년대는 미제를 등에 업은 전두환 신군부 쿠데타와 광주학살로 시작됐다. 1980년대에 이 땅의 대다수 청년들, 지식인들, 노동자, 농민은 살인마 전두환과 미제국주의에 대한 격렬한 분노와 광주 항쟁자들과 최후까지 도청에서 저항하다가 죽은 열사들에 대한 부채의식으로 살았다. 이 분노와 부채의식은 역사의식이 되고 그 역사의식은 반미항쟁으로 불타올랐다. 1980년대 광주학살에 분노하여 타오르기 시작한 반미의식은 현대사에 대한 학습을 하고 인식이 깊어지면서 미제국주의가 일제를 대신하여 반도 이남을 강점한 “점령군”이고 분단의 주범이라는 역사의식으로 한층 더 깊어졌다.
1948년 제주와 여순의 민중이 그러했듯, 반미항쟁은 자연스럽게 분단을 반대하고 외세의 개입 없는 통일운동으로 나아갔다. 또한 분단에 반대하는 통일운동이 분단과 대북 적개심에 기초한 반공주의 사회와 맞서 싸우고, ‘민족대단결’ 정신에 기초하여 북의 사회주의에 대해 친화성을 가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정치적 결론이었다. 반북을 하면서 통일을 주장하는 세력들은 진보세력이 아니라 극우반공주의 세력으로서, 이들은 실제로는 영속적 분단과 영속적인 미제국주의 주둔을 찬성하는 반통일 세력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역사적 맥락 속에서 형성되고 분단과 반공주의 사회인 이남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가지게 된 사상과 신념을 가지고 “종북(從北)”이니 심지어 누구의 “지령”을 받은 활동이니 하면서 꼭두각시로 취급하는 것은 바로 악랄한 지배계급의 이념이다. 한 시대의 지배적 여론은 바로 지배계급의 사상이며 이 지배계급의 사상은 주지하듯 관념론이다. 저들은 지배계급의 사상에 맞서 저항하는 사람들이 마치 누군가의 일방적인 주입과 강요, 지령으로 움직인다고 간주하며 자주적 투쟁에 대해 악선전을 퍼붓는다. 그런데 지배계급의 사상이 지배계급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담고 있으며 이 사회의 모순을 은폐하는데 반해, 진보적 신념과 사상은 이 사회의 구조적, 역사적 모순 속에서 피지배계급의 이해를 안고 형성된다.
한 사회에 모순이 존재하지 않는데 가상으로 저항적 신념과 사상이 형성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능동적이고 자주적인 인식 없이 누군가의 지령으로 목숨 걸고, 감옥을 들락거리고 가난에 시달리고 가족들 전체를 같이 고통에 빠뜨리면서 평생을 신념과 사상을 견지하여 투쟁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지배계급과 ‘진보’ 내의 맹목적인 추종자들은 그렇다고 한다.
2006년 이정훈은 이른바 ‘일심회’ 국가보안법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 이 일심회 사건에 대해 악랄하고 저열한 모략극이 펼쳐졌다. 당시 기사를 검색해보면,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부장검사 오세인)는 “일심회, 6·15 공동선언이후 최대 간첩사건”으로 규정하고, “북한 지령에 따라 ‘일심회’를 구성하고 국가 기밀을 누설한 혐의(국가보안법 위반)”를 적용하였으며, 공안검찰은 이날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5부(부장판사 김동오) 심리로 열린 결심공판에서 “피고인들의 범행은 국가의 존립과 안전을 위협하는 중대 범죄인만큼 관용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며 ‘가담자’들에게 15년, 12년, 10년의 구형을 내렸다.
참으로 가당치도 않는 구형이고 구형사유이다. 그런데 대다수 공안사건이 그렇듯 ‘일심회’ 사건은 조작이었는데, 지배계급의 법정에서도 “국보법상 일정한 위계 및 체계를 갖춘 조직이라고 보기 어렵다”며 무죄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일심회가 조작사건으로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무찬양”과 “회합·통신” 등의 명목으로 장민호 씨는 7년을, 이정훈은 3년 동안 수감생활을 해야 했다. 당원 명부를 북에 넘겨줬다는 사안 역시 증거 채택조차 되지 못했다.
모든 공안사건이 그러하듯, “6.15 이후의 최대 간첩사건”이라는 거대한 소동은 “6.15 이후의 최대 간첩조작 사건”으로 태산명동서일필로 끝났다. 그러나 당시 조중동은 말할 것도 없고 한경오(한겨레, 경향, 오마이) 등 ‘진보’언론에서도 행여 이에 뒤질세라 비열하고 저열한 방식으로 악을 쓰며 중상비방에 앞장섰다. 이 사건을 계기로 심상정, 조승수, 주대환, 한석호 등 우리 안에 존재하는 국가보안법의 무리들은 “헌법 내 진보”, ‘종북주의’ 운운하며 종북몰이에 혈안이 되었다. 결국 이러한 비열한 악선전과 모략극은 2008년 민주노동당을 분당으로 치닫게 하였고, 이후 똑같은 수준의 논리와 방식을 통해 ‘내란음모’ 사건 조작과 통합진보당 강제 해산 사건을 낳았다. 달라진 게 있다면 ‘일심회’가 ‘알오’로 명칭을 달리 하고 조작사건의 규모가 더 방대해졌다는 것일 뿐이다.
묻겠다.
북한의 배후 지령 운운하며 이정훈을 구속시킨 검찰과 판사 같은 당신네들은 과연 신념 없이 누군가의 지령으로 40년 동안 자기 삶을 다 바쳐 투쟁할 수 있는가? 국가보안법의 “진보 내” 추종자 당신들 역시 과연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미국 노동운동의 대표자들은 스탈린과의 담화에서 “미국 공산주의자들은 모스크바로부터 지령을 받고 있으며 그 때문에 그들은 자기 동맹보다도 외국 조직에 더 충실한 이상 훌륭한 직업동맹 활동가로 될 수 없다”는 주장들을 소개하며 스탈린의 견해를 물었다. 스탈린은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미국 공산주의자들이 “모스크바의 지령에 따라” 사업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옳지 않다. 당신들은 공산주의자 치고 자신의 신념과 의사에 반하여, 또 정세의 요구를 거역하고 외부의 “지령에 따라” 행동하는데 동의하는 그런 사람은 지구상 어디에서도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또 그런 공산주의자들이 만일 어떤 곳에 있다면 그들은 한 푼의 가치도 없는 자들일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가장 대담하고 용감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수많은 적들에 반대하여 투쟁한다. 공산주의자들에게서 가치 있는 것은 그들이 자기 신념을 고수할 줄 안다는 점이다. 따라서 미국 공산주의자들을 자기 신념이 없고 오로지 외부 “지령에 따라” 행동할 줄 밖에 모르는 사람들처럼 말하는 것은 괴이한 일이다…
미국노동총동맹 내의 그린과 그의 동료들이 “모스크바의 지령”이라는 자본가들의 막말을 맹목적으로 되풀이하면서 미국 공산주의자들을 비방하고 있는 것이 명백하지 않은가?
모스크바에 있는 국제 공산당의 위원들은 들어앉아서 모든 나라들에 띠울 지령이라 쓰는 것만을 일삼고 있는 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스탈린, <제1차 미국 노동자 대표단과의 담화>, 1927년 9월 9일)
스탈린의 말대로 “자신의 신념과 의사에 반하여, 또 정세의 요구를 거역하고 외부의 ‘지령에 따라’ 행동하는” 꼭두각시 같은 얼빠진 활동가들을 지구상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는가? 평양에 있는 인사들이 할 일이 없어서 남에 있는 인사들에게 지령문이라 쓰고 앉아 있겠는가?
자주적 활동가들은 누구의 종복도 아니고, 누구의 강요를 받고 움직이는 비주체적인 인간도 아니다. 오로지 자신의 신념과 양심과 사상에 입각하여 활동을 한다. 이정훈이 평생을 싸우게 한 원동력은 누군가의 지령이 아니라 광주에서 민중에게 자행된 학살극이고 민중의 저항정신이었다. 외국군이 주둔하고 있고 분단된 우리 사회의 모순 자체였다.
오월광주가 이정훈에게 투쟁하라고 지령을 내렸다
역사는 반복되고 있다. 한 번은 비극으로, 또 한 번으로 희극으로가 아니라, 희비극이 교차하면서 반복되고 있다.
이정훈은 2021년 또다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국가보안법 최대 독소조항이 7조 고무찬양부터 우선 폐기하라는 요구가 있고, 7조가 국회 법사위에 상정돼 있는 상황에서 이제는 “회합·통신” 8조를 근거로 국가보안법이 적용됐다. 이정훈이 쓴 《주체사상 에세이》와 4.27시대연구원 공동저술인 《북 바로 알기 100문 100답》이 또다시 누군가의 지령을 받고 저술된 것이라는 희극적 죄목으로 이정훈과 그 가족들은 또다시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도대체 이정훈이 북측관련 인사와 “회합”하고 “통신”한 것이 어떻게 죄일 수 있는가? 이정훈이 북측 관련 인사를 만나 테러를 모의하였는가? 파괴를 모의하였는가? 무슨 반사회적이고 반인륜적인 범죄를 모의하였는가? 어떻게 구체적인 범죄행위와 그 모의 내용이 아니고 “회합·통신” 그 자체가 범죄가 될 수 있는가? 또한 2010년 수감 당시 옥중에서 이미 초고를 구상한 책이 어떻게 그 한참 뒤의 “회합·통신”에 의해 지령을 받고 저술한 책이 될 수 있겠는가? 극우들의 준동과 소란이 있지만, 김일성 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조차 합법적으로 출판이 되는 세상에서 정치적 신념에 따라 쓴 학문적 저술 작업이 범죄가 될 수 있는가?
기괴한 망령이 준동하는 세상이다. 국가보안법은 사문화 된 것이 아니라 시퍼렇게 살아서 광기와 살기를 내뿜고 있다. 지금은 남북관계가 악화되었지만, 남과 북 지도자들이 수차례 “회합·통신”하고 분단의 선을 넘나드는 시대에, 우리의 동시대인 2021년을 그것이 제정된 1948년의 과거로 강제로 끌고 들어갈 만큼 시대착오적이고 반역사적이다. 국가보안법은 반통일적, 빈민족적, 반민주적, 반지성적, 반문명적, 반양심적인 악법이다.
1953년 9월 쿠바의 위대한 혁명가 피델 카스트로가 바티스타 독재정권에 항거하여 몬 카다 병영을 공격하다 체포돼 구속된 뒤 법정 최후진술에서 그는 이렇게 외쳤다
온갖 협박과 비열한 광기에 의해 위축되어 있는 인간에게는 감옥이 혹독한 곳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70명의 내 동료들을 살육한 야비한 독재자의 광분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감옥 역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나에게 유죄판결을 내리시오. 그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할 것입니다.
역사의 법정에서 이정훈은 무죄다. 그런데 현실의 법정에서 이정훈은 유죄가 되었는가?
국가보안법의 법정에서는 국가보안법을 위반하며 사는 것이 바로 중범죄다.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것이 이정훈의 첫 번째 죄목이다.
이정훈과 함께 동지적 맹세를 하며 미국 문화원 점거 농성에 참여했던 인사들 중에는 하루아침에 양심과 신념을 팔아먹는 변절자들이 생겨났다. 이 변절자들은 이제 권력자가 되어 이정훈을 탄압하는데 부역하고 있고, 오월 광주정신을 팔아먹고 있다. 기회주의자들, 변절자들의 배신, 투항, 부패와 타락이 판치는 세상에서 이정훈은 40여 년의 긴 세월동안 단 한 번도 탄압에 굴복하지 않고, 일신상의 안일과 권력의 회유에 빠지지 않고, 미문화원 점거 농성을 할 때의 청춘의 열정과 신념으로 지금까지 투쟁하고 있다. 이것이 또한 이정훈의 두 번째 죄목이다.
오월광주 열사들의 숭고한 정신과 민중의 항쟁이 이정훈에게 지상명령을 내리는 부동의 진짜 배후다.
변치 않는 반미항쟁 통일전사 이정훈은 무죄다.
국가보안법을 철폐하라!
미군은 물러가라!
남과 북은 하나다!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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