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스주의 고전읽기] 엥겔스 《권위에 대하여》 – (범)무정부주의자들에게 내리치는 준엄한 철퇴

일시: 2020년 10월 10일 16시

장소: 용인 인근

문의: 010-3398-0248

* 이번 세미나는 수련회 형식으로 일시와 장소를 바꿔 진행합니다.

 

2020년은 위대한 엥겔스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이자 서거 125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맑스주의라고 부르는 사상은 실제로는 맑스엥겔스주의입니다.

맑스와 엥겔스의 공저인 《공산당 선언》과 《독일이데올로기》를 포함하여. 엥겔스의 명저들,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 《반뒤링론》, 《가족 국가 사유재산 제도의 기원》, 《포이어바흐의 독일고전 철학의 종말》 등은 그야말로 명저로서 왜 맑스주의가 실제로는 맑스엥겔스주의이자 엥겔스주의인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또한 맑스는 《자본론》 2권과 3권을 초고만 남겨두고 사망했는데, 맑스의 유언에 따라 이를 정리한 것도 엥겔스입니다. 《자본론》 2권, 3권이 맑스와 엥겔스의 사실상의 공저라는 얘기가 괜히 나오는 게 아닌 것입니다.

게다가 엥겔스는 일찍이 1848년 혁명운동에 직접 참가하여 목숨을 걸고 싸웠을 뿐만 아니라 국제노동자계급 운동을 혁명적으로 실천적으로 지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맑스 사후에 독일사회민주주의 노동자당을 사상적으로나 조직적으로 최강의 혁명당으로 만들어 놓았으며 이것이 레닌과 러시아 볼셰비키당을 비롯해 국제적으로 탄생하는 혁명적 당들의 모델이 되기도 했습니다.

레닌은 “타오르기를 멈춘 이성의 등불이여! 뛰기를 멈춘 심장이여!”라는 조사로 강렬하게 위대한 혁명가 엥겔스를 추모했습니다.(레닌의 추모사는 최근 우리의 홈페이지에 실린 번역글을 참고하기 바랍니다.)

그런데 엥겔스는 사회주의와 국제노동자계급 운동의 발전에 이바지한 공적만큼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엥겔스는 쏘련 사회주의 해체에 사상적으로 중대한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까지 비난 받고 있기조차 합니다. 도대체 누가, 무슨 의도로 이런 악의적인 비난을 유포하는 것일까요?

무정부주의자들과 범무정부주의자들이 바로 국제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전통의 최정상에 있는 엥겔스를 중상비방하는 주범들입니다. 여기에는 기존의 무정부주의와 이와 동일한 반열에 있는 신좌파 계열, 심지어 트로츠키주의 세력 일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엥겔스의 철학, 특히 자연변증법이 쏘련사회주의 지도자였던 스탈린으로 대변되는 이른바 ‘관변 철학’의 출발점이 됐다는 것입니다. 이는 (범)무정부주의자들이 국가 일반에 대한 부정 내지 적대감으로 인해, 권력을 잡은 프롤레타리아가 국가 차원에서 정치경제학 교과서를 만들고 사상학습을 장려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이들은 평생을 역사상 유례없는 지적동지, 혁명동지였던 맑스와 엥겔스의 사상이 다르다며 맑스와 엥겔스를 사상적으로 분열·분리시킵니다. 그 기초작업을 완료하고서는 맑스 자체를 초기 맑스와 후기 맑스로 분열·분리시켜서 휴머니스트로서의 맑스를 내세웁니다. 변증법적 유물론과 계급투쟁적 프롤레타리아 독재사상으로서의 맑스주의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맑스주의는 초기의 급진적 민주주의에서 출발해 《독일이데올로기》 와 《공산당 선언》 을 기점으로 변증법적 유물론의 기초를 닦으면서 명실공히 성숙한 공산주의 사상으로 발전해 갑니다. 그러나 초기 사상의 정립과 이것의 지양과 발전 없이 성숙한 맑스주의도 있을 수 없습니다.

결국 이들의 방법이 무슨 의도를 가지고 진행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변증법적 유물론으로서 철옹성인 맑스주의의 총체적 세계관을 이런 식으로 비열하게 뒤흔들고 파괴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는 쏘련 및 현실사회주의를 중상모략하기 위한 것이기도 한데, 현실사회주의의 실질적 건설자인 스탈린을 중상하고 이를 통해 쏘련 및 현실 사회주의를 비난하기 위해 레닌, 엥겔스, 맑스의 사상을 해체시키는 수순을 밟는 것입니다.

 

2

 

자신들은 부정하지만 아나키즘의 본질은 무정부주의입니다. 이들은 국가일반, 권위 일반을 부정함으로써 아나키즘의 본질이 무정부주의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은 러시아혁명 이후 들어선 혁명권력에 대해서도 독재권력이라고 하면서 격렬하게 반대하고 심지어는 반혁명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이들 무정부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 독재권력이 반혁명 분자들에게 사용하는 혁명적 권위를 반대하고 공장위원회별 자치와 노동자통제를 주장하며 중앙집중적 계획과 산업 국유화에 격렬하게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레닌은 노동자통제가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에 의한 노동자통제임을 분명하게 강조하며 무정부주의자들은 생산의 구체적인 원리와 작동에 무지하고 그럼으로써 사회주의 생산을 파괴하고 이를 통해 자본주의로 복귀시키려 한다고 경고했습니다.

레닌은 《국가와 혁명》 에서 맑스와 엥겔스의 국가에 관한 일련의 저작들을 가지고 무정부주의자들과는 기존 부르주아 국가파괴 사상은 일치하는데 무정부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국가사멸의 조건을 부정하고 곧바로 공산주의로 나아가려 한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무정부주의는 바쿠닌 유의 전투적 무정부주의 계보에 해당합니다. 오늘날 무정부주의자들은 대다수가 프루동(Pierre-Joseph Proudhon), 뒤링((Karl) Eugen Dühring),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의 거두인 크로포트킨(Peter Kropotkin)의 계보를 따르는 온건 무정부주의자들입니다. 이들은 자본주의 생산관계 내부에서 자치와 부조를 주장하고,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파괴하지 않고 그 정점에 있는 화폐를 없앨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사회주의 건설을 예비하고 그 경험으로써의 의미를 가진 협동조합이 아니라 혁명의 대체물로서의 협동조합주의도 그 중 일부입니다. 그런데 대다수 협동조합주의자들이 국유화와 함께 전국적인 생산의 담당자였던 쏘련사회주의의 콜호즈와 현실사회주의 협동조합 생산체제에 대해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심각한 자가당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혁명에 대한 적개심에 다름 아닙니다. 이는 협동조합을 나날이 파괴하는 자본주의 생산에 대한 역설적인 굴종과 찬미에 다름 아닙니다.

 

3

 

결국 무정부주의자들의 본질에서 나오는 세 가지 정치적 특성은 중앙집중주의에 대한 부정, 쏘련 및 현실사회주의에 대한 부정, 지도자에 대한 부정입니다.

자, 이렇게 무정부주의자들의 대표적 특성을 정리해보니 이는 신좌파나 트로츠키적 정치세력들의 특성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사회주의를 자처하는 정치세력들 대다수도 지령경제니, 명령경제니 하며 중앙집중주의를 부정하고, 민주적 계획, 민주적 사회주의니, 노동자참여니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니 하며 무정부주의자들의 정치적 특성을 유사하게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중앙집중이 바로 민주적 중앙집중이며, 노동자통제와 참여가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에 의한 바로 그것이며, 지도가 대중으로부터의 피지도를 포함하고 있으며, 위와 아래가 하나로 굳건하게 단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국에서 사회주의 건설과 국제혁명을 대립시키는 형이상학자들이 비변증법적 사고에 빠지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들 가짜 사회주의자들은 쏘련과 현실사회주의의 실제적인 생산과 정치의 문제에 대해 단 한 번도 구체적으로, 실사구시적으로 조사해보지 않고 트로츠키 식대로 상투적 비난만을 답습합니다. 대개는 창의성도 없을 뿐더러 문필조작까지 자행하기도 합니다.

<사회진보연대>가 일괴암주의 운운하며 프롤레타리아독재와 전위당을 비난했는데 <사회주의자>는 쏘비에트 다당제 운운하며 통일적당을 부정하는 다원주의에 빠져 있기도 합니다. <변혁당>도 트로츠키적으로 현실 사회주의의 생산경험을 무시하고 그 사회의 지도자들을 중상모략하기에 바쁩니다. 트로츠키주의로 대놓고 자처하는 <노동자연대> 등 트로츠키주의자들이야 말해 뭣하겠습니까?

이 글의 부제에서 엥겔스의 《권위에 대하여》가 (범)무정부주의자들에게 내리치는 가장 강력한 철퇴라고 했는데 그 글 일부를 소개하며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사회 혁명이 일어나, 오늘날 자신의 권위로 생산과 부의 유통을 관리하고 있는 자본가들을 권좌에서 끌어내렸다고 가정해 보자…

대공장의 기계 자동화는, 노동자를 고용하는 소자본가들도 이제까지 결코 그렇게 하지 못했을 정도로 훨씬 더 전제적이다. 적어도 노동 시간과 관련해서는, 이런 공장들의 대문에 다음과 같이 씌어 있을 수도 있다; 들어가는 사람은 자치를 모두 놔둘 지어다! 인간이 지식과 창조적인 재능으로 자연의 힘을 굴복시키기는 했지만, 인간이 자연을 이용하는 한, 자연은 인간으로 하여금 모든 사회 조직과 별개로 이루어지는 진정한 전제주의에 놓이게 만듦으로써 인간에게 복수하고 있다. 대공업에서 권위를 폐지하기를 바라는 것은 산업 자체를 폐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물레로 되돌아가려고 증기 방적기를 부수고자 하는 것이다…

그들은 사회 혁명의 첫 번째 행위가 권위의 폐지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양반들은 혁명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단 말인가? 분명히 혁명은 존재하는 가장 권위적인 것이다; 그것은 인구의 일부가 가장 권위적인 수단인 소총, 총검 대포로 또 다른 일부에게 자신들의 의지를 강요하는 행위이다; 승리한 당파는, 싸운 것을 헛되지 않게 하려면, 자신들의 무기가 반동배에게 불러일으키는 공포를 통해 이 지배를 지속시켜야만 한다. 빠리 꼬뮌이 무장 인민들의 이러한 권위를 부르주아지에 맞서 이용하지 않았더라면, 단 하루라도 버틸 수 있었겠는가? 반대로 빠리 꼬뮌에 대해서는 권위를 충분히 광범위하게 사용하지 않았다고 질책해야 하지 않을까?(엥겔스, 《권위에 대하여》, 맑스·엥겔스 저작집 제18권, 305-308면, 1872년 10월과 1873년 3월 사이에 씌어짐,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이경일 번역, 박종철 출판사)

엥겔스가 부르주아뿐만 아니라 (범)무정부주의자들에게도 적의를 불러일으키는 대상인이지를 이 글만 봐도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세태가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는 더욱더 저 위대한 엥겔스의 사상을 빛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21세기 혁명적 맑스엥겔스주의 만세!

혁명적 엥겔스주의 만세! 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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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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