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스주의 관점으로 본 남과 북의 주택·토지문제

북의  ‘선군정치(先軍政治)’와 토지를 비롯한 생산수단 국유화

유투브 채널 <왈가왈북>(2020. 9. 21.)에서는 “북의 수해복구에 대해 우리 언론들이 말 못하는 두 장의 사진”이라는 제목으로 영상이 올라왔다. “우리 언론들이 말 못하는 사진”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우리사회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는 일들이 북에서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8월초 황해북도 금천군 강북리에서는 물난리로 협동농장 농경지와 800여 세대의 주택이 침수됐다. 그런데 겨우 한 달여가 지나서 800여 세대의 주택이 완전히 새롭게 조성됐다. 9월말까지는 새 주택이 완성되고 10월에는 주민들이 입주하게 되는데, 각 세대에게 무상으로 공급된다고 한다.

수해로 피해를 입은 주민들에게 새롭게 주택을 건설해서 무상으로 공급한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그 공사에 투입된 인민군들이 주민 텃밭에 채소까지 심어 놓아서 주민들이 입주 뒤에 그것을 먹을 수 있도록 세심하게 배려까지 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이쯤 되면 <왈가왈북>에서 “북의 수해복구에 대해 우리 언론들이 말 못하는 두 장의 사진”이라고 제목을 붙인 이유를 알 것 같다.

우리 언론에서는 이른바 북한 전문가들이라는 자들을 내세워 성과를 폄하하고 왜곡하기에 여념이 없다.

조한범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이날 “수해 피해를 본 주택이라면 복구하는 게 상식적이지만, 북한은 건물을 빠르게 다시 짓는 모습만 보여준다”며 “주민들을 위한 게 아니라 당의 성과를 내세우기 위한 ‘정치적 선전’”이라고 지적했다.(김지현 기자, “겉만 번지르르?…내실 없는 김정은의 ‘수해 정치'”, 한국일보, 2020.09.15.)

물난리로 주택이 파괴된 주민들에게 무상으로 새 주택을 공급해주는 게 우리사회 언론에게는 주민들을 위한 게 아니라 당의 정치선전을 위한 것이 된다.

그런데 과연 우리사회에서는 수해피해로 주택이 파괴된 주민들에게 800여 채는 고사하고 단 한 채라도 새 주택을 지어 무상공급해준 적이 있는가? 그것이 당의 정치선전을 위한 것이라면 비록 그렇다 해도 그것이 주민의 이해와 배치되는가?

언론에서는 이솝 우화의 ‘여우와 신포도’ 이야기처럼, 북의 수해지역 새 주택공급 사례를 폄하, 왜곡하기 바쁘다. 그러나 여명거리 살림집이나 미래과학자거리의 주택무상공급 사례나 이전 2010년 압록강 일대 수해나 2017년 함경북도 수해피해 현장에서의 대규모 새 주택 건설 사례를 보면 위 사례가 비단 당의 정치선전이 아니라 무상체제, 무상주택공급의 원리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언론들이 황해북도 금천군 사례에 대해 제대로 말 못하거나, 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먼저 군대의 문제다. 우리에게 군대는 제주4.3항쟁과 여순항쟁에서 보듯 해방 이후 민간인 학살과 박정희, 전두환 쿠데타와 광주 민중의 학살로 반민중적 권력찬탈기구로 역사적으로 알려져 있다. 민중의 항쟁으로 군사독재체제가 무너졌지만 여전히 군대는 통제받아야 할 경계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

반면 수해복구 지역에서 주민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새 주택을 지어주고 심지어 세심하게 주민들의 텃밭에 채소밭까지 일궈놓은 북의 군대를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선군정치(先軍政治)’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선군정치는 단순하게 군대를 우선시 하여 육성하고 군사무기를 개발에 집중하는 정책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김일성이 사망하고 ‘고난의 행군’ 강행군이 시작된 이후 김정일은 자신의 시간과 정열의 대부분을 군에 대한 현지지도에 투자하였다. 김정일이 군을 현지지도 한다는 것은 단순하게 군을 챙기기 위함만은 아니었다. 두 차례에 걸친 7개년 계획의 실패로 경제에서 시장의 영역을 확대하는 정책들이 도입되고 그것이 지속되면서 사회 전체적으로 다시 ‘사상’과 ‘정치’는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고 있었으며, 소련이 몰락하고 사회주의경제권의 붕괴로 인하여 ‘개혁과 개방’의 압박이 가중되고 당조직마저 사상적으로 흔들리고 있는 상황에서 김정일은 군을 통해 다시 ‘사상’과 ‘정치’를 앞세우려고 하였던 것이며 이것이 바로 ‘선군정치’의 핵심이다…

군부대에서는 김정일의 지시대로 콩 농사, 염소 키우기, 텃밭 이용하여 야채와 채소 키우기 등 식량을 스스로 공급하기 위한 온갖 노력을 하고 그 모범을 창출하여 공장과 기업소 그리고 협동농장 등 사회단체들이 따라 배우도록 하였다. 또한 군부대들은 나라 곳곳에 파견되어 발전소와 도로 그리고 토지정리 등 방대한 공사와 건설에서 양어장과 오리공장, 돼지공장 그리고 유원지 등 인민생활에 직절(결)되어 있는 공사와 건설까지도 도맡아 하였다. 이들이 거둔 성과는 곧 김정일의 자력갱생노선이 옳다는 증표가 되었으며 최고사령관의 명령을 사수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바치는 ‘혁명적 군인정신’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이들의 행적과 행보는 외부에서 압박하여 오는 소위 ‘제국주의의 도전’을 막아내는 방패이며 내부에서 자라고 있는 물질적 이기주의의 싹을 자를 수 있는 칼로 자리 매김을 하였던 것이다.(박후건, “DPRK에서의 경제건설과 경제관리체제의 진화”, 도서출판 선인, 2019년 11월 8일)

선군정치는 일시적 정책의 의미를 넘어 북이 항일무장투쟁을 하던 시기에 형성되었던 ‘혁명적 군인정신’이고, 이 정신은 쏘련 및 동유럽 사회주의가 해체된 뒤 1990년대 중후반 ‘고난의 행군’ 같은 시련의 시기에 다시금 집중 부각되었다. 원래 ‘고난의 행군’이 항일무장투쟁 시기 일제의 대대적 유격대 토벌작전에 맞서 전개했던 혹한 속의 극한적 투쟁을 일컬었던 만큼 북의 전 국가 차원에서 ‘고난의 행군’은 극단적 시련기였고 이 시기에 군대가 항일유격대 정신으로 무장하여 고난을 극복하는 ‘돌격대’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북에서는 군대의 이 정신이 자력갱생의 정신이며 군이 인민을 위해 전력하는 이민위천(以民爲天)의 정신이라고도 주장한다. 이러한 배경을 이해할 때만이 군인들이 수해지역에 나가 파괴된 주민들의 주택을 하루속히 재건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심지어는 채소밭까지 일궈놓은 세심한 배려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알 수 있다.

두 번째는 무상주택의 문제다.

레닌은 《국가와 혁명》에서 엥겔스의 《주택문제》를 인용하는데, 여기서 엥겔스는 “‘노동대중’이 주택이나 공장, 그리고 노동수단에 대한 집단적인 소유자로 남게 되며, 적어도 이행시기 동안에는 ‘노동대중’은 개인이나 단체들이 댓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그러한 것들을 거의 사용하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 똑같은 방식으로, 토지의 사유를 폐지하는 것도 토지임대의 폐지가 아니라, 한마디로 말해서 토지소유를 사회로 이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임대차관계의 보존을 결코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는다”(김영철 옮김, 논장)라고 주장한다.

레닌은 이 말을 인용하면서 “집세없는 거주지 공급이 가능해질 수 있는 상황으로의 이행이란 국가가 완전히 ‘사멸하느냐 마느냐’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북에서는 모든 생산수단이 국·공유화되어 있으며 토지의 사적소유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에 따라 주택은 상품이 아니고 매매할 수 없다. 주민들은 주택소유권을 가지지는 않으며 사용권만을 가진다.

북에서는 형식적으로 국가에 극히 저가의 임대료를 지불하고 사실상 영구적으로 살림집 이용 허가증을 받는 것이다. 북에서의 무상주택은 엄밀하게는 임대차관계 형식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다. 맑스는 《고타강령 비판》에서 사회주의에서는 자본주의 같은 착취는 없지만, 노동의 생산물 전부를 다 받지 못하고 생산확대를 위한 자금이나 기계의 마모를 상각하기 위한 비용, 행정에 필요한 비용, 교육, 의료, 노후보장 등을 위한 비용은 공제한다고 했는데, 북에서는 이 예비비용을 동원해서 수해지역에 긴급하게 파괴된 주택을 새롭게 지어서 주민들에게 제공한 것이다.

남의 주택문제

“23번째 부동산 대책”은 실상 무대책

남과 북의 체제가 각자가 저마다의 장단점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다른 것은 몰라도 남에서 주택문제는 가장 심각한 사회문제 중 하나이다. 남에서 대다수 국민은 자기주택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고 매번 치솟는 전세가로 주택부채가 급증하고 있다. 이들 대다수는 열악한 주거환경 속에서 고통 받고 있고, 은행부채로 자기 주택을 마련하는데도 수십 년이 걸리고 이 과정에서 은행의 채무노예로 전락해 있다. 청년들은 고시원을 전전하고 있고 주택을 마련하지 못해 결혼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빈번하다.

역대 정권마다 부동산 대책이랍시고 주택공급 정책을 펼치고 있으나 이는 건설자본의 배만 불릴 뿐이다. 우리사회에서 임대사업자 상위 30명이 소유 중인 임대주택은 모두 1만1,029채로 이는 1인당 평균 367채에 달한다. 국내 최대 임대주택 보유자는 총 594채를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주택이 소수의 자본가들과 부자들에게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아파트를 비롯한 주택은 과잉공급 되고 일부는 미분양인 상태로 남아 있으나 자기 주택 가진 사람은 절반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 들어 23번째 부동산대책이 나왔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아직 싸늘하다. ‘역대급’, ‘초강력’ 대책이란 반복되는 평가에도 문제가 풀리리라는 기대는 별로 없다. 이렇게 커진 정책 불신이 놀랍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어제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1967년 ‘부동산투기억제에관한특별조치세법’ 제정을 시작으로 1978년 ‘8.8 부동산투기억제대책’을 거치며 등장한 수많은 대책 뒤의 결과도 실은 비슷했다.(“이래서 부동산은 정권의 ‘무덤’이 되었다 [부동산은 있고 주거는 없다 ①] 한국 주거정치의 기원”, 오마이뉴스, 20.09.08.)

“투기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투기용 다주택 소유자에 대한 ‘초강력’, ‘역대급’ 부동산 정책이 쏟아지고 있으나 여전히 주택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다. 이 ‘전쟁선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주택자들은 기를 쓰며 주택을 보유하고 있고 보유세를 피하기 위해 자식들에게 증여를 하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다. 이에 따라 “2018년 기준으로 2030 세대가 물려받은 주택과 빌딩 등 건물 건수는 1만4602건에 달했다. 증여 규모만 해도 3조1596억원에 달한다. 건수와 금액 모두 근래 들어 최고치다. 특히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2017년부터 증여 건수·금액이 급증했다. 2014~2016년 3년간 1734건 늘어났던 2030의 건물 증여는 2017년 들어 9856건으로 전년대비 1682건 증가했고, 2018년에는 무려 4746건 늘어 1만4062건을 기록했다.”(강상엽 기자, “규제하니 ‘부 대물림’…2030 물려받은 부동산 3조 넘어”, 조세일보, 2020.09.17.)

이러한 부동산 증여 급증에 대한 폭로는 ‘문재인 정부의 거래 규제와 집값 상승 실정이 자녀 세대인 2030의 증여 폭증이라는 풍선효과를 불러왔다”는 주장처럼, 3주택 이상 보유자의 양도세율을 최고 62%까지 올리는 8·2대책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의도에 불과하다. 그런데 문재인 정권의 부동산 정책 실행자들인 청와대 고위 관료들과 민주당 의원들 상당수가 바로 다주택 보유자들인 것만 봐도 그 정책의 실행가능성에 의문을 표할 수밖에 없다. 김대중의 아들 김홍걸이 다주택 보유로 민주당 국회의원에서 제명된 사실도 그렇다.

왜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가? 투기세력의 저항과 정책실행자들과 입법자들 대다수가 부동산 투기의 주범이라는 문제만으로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원인을 이해할 수는 없다. 이번 정권 들어서만 “23번째 부동산 대책”을 내놓았다는 것은 주택문제에 대한 무대책의 남발에 다름 아니며, 사실상 주택투기문제와 국민들의 주택 문제는 역대 정권이 매번 그러했던 것처럼, 이번 정권에서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게다가 국가와 금융자본은 자본주의에서 토지와 주택가는 지속적으로 오를 수밖에 없는 현실에 기대어 ‘부동산 불패신화’를 유포하고 개인들에게도 주택담보대출을 제공하여 부동산 건설붐과 주택수요붐을 불러일으킨다. 자본주의 과잉생산 공황이 발생하는 반대의 경우에도 건설산업을 부양시키기 위해 규제를 완화하고 자본가들과 부동산 소유자들에게 각종 특혜를 남발하여 개발과 투기를 조장함으로서 기존 부동산 정책을 스스로 무력화 한다.

주택소유문제는 자본의 이해가 본질적으로 관철되지만 순수하게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의 문제만은 아니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문제를 무주택자와 (다)주택 소유자의 대립으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우리의 공급 질서가 갖는 정말 특이한 점은, 여기서는 가계가 평범한 주택 소비자에 그치지 않고, 일종의 투자자로서 자본이득에 대한 강력한 동기를 내면화한다는 사실이다.

당장 집이 없는 세입자들도 예외는 아니다. 그들 역시 예비 소유자로서 미래의 혜택을 고대하고, 막상 내 집을 마련한 뒤에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난했던 소유자들의 행태를 따라 하곤 한다. 이런 식으로, 자신이 놓인 시장 위치에 따라 복잡한 이해충돌과 경쟁이 주거계층들 사이에 펼쳐진다….

깊고 첨예한 대립이 계속됨에도 불구하고, 갈등의 고리 자체를 끊는 노력은 별반 없었다. 기성 구조의 기본 뼈대를 유지하는 전제 아래 그때그때 제기된 문제에 대처하는 정책만이 있었을 뿐이다. 그 결과, 민간자원에 기댄 투기적 공급구조가 허용하는 관성 범위 안에서 경기 여건이나 사회정치적 상황에 따라 시장 안정화(규제강화)와 활성화(규제완화)를 오가는 정책들이 반복됐다.(오마이뉴스, 같은 기사)

주택이 보통 국가나 공공차원의 자금으로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민간차원의 투기적 공급구조로 지어지다 보니 조합원이라는 명목으로 자본을 댄 개인들, 그 대다수가 노동자들인 개인들도 주택투자자로서의 이해를 가지게 된다.

노동자들은 현재의 주택소유자들이거나 미래의 소유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데 여기에 기대어 자산 소유자적 의식으로 자본주의의 투기적 행태에 포섭되는 경우도 많다. 이명박이 뉴타운 건설 장밋빛 전망으로 서울시장이 된 사례만 보아도 이를 잘 알 수 있다.

결국 그렇다면 주택문제는 보다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고 인식할 수밖에 없게 한다.

토지를 비롯한 생산수단의 사적소유가 주택문제의 원인

우리사회에서 주택은 상품이다. 상품인 주택은 일반 상품과 마찬가지로 거래가 된다. 모든 상품은 사용가치를 위해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교환가치를 위해 생산되는데, 주택 역시 상품이므로 인민들의 안정적인 삶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막대한 이윤을 채우기 위해 지어진다. 중층하도급제는 각종 부패와 부실건축을 부르고 건설자본의 책임회피와 함께 막대한 이권의 원천이기도 하다.

주택문제는 건축비와 수선비도 있지만 그 보다 근본적으로는 토지문제이기도 하다. 제한된 토지에 대한 극소수의 독점적 지배와 그 소유권을 보호하는 자본주의가 주택·토지문제의 근본 원인이다.

맑스는 이를 “지구에 대한 개개인의 사적소유”(《자본론》3권 하, 김수행 역, 비봉출판사)이며, 이는 “인간에 대한 사적소유와 꼭 마찬가지로 불합리한 것”이라고 규탄했다. 맑스는 토지에 대한 사적소유권은 바로 “생산관계의 의해 창조된 것”이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철폐되면 토지에 대한 사적소유 역시 사라지게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자본은 생산수단에 대한 지배권과 자금으로 토지도 독점하게 되는데, 특히 업무용 부동산이라는 명목으로 토지보유세를 감면받게 됨으로써 이것이 재벌의 토지독점을 가속화 하는 원인이 된다.

헨리 조지는 자본주의는 그대로 둔 채 토지 불로소득에 대한 보유세를 주장하였다. 오늘날 재벌의 토지독점과 빈자들의 토지로부터의 배제를 보고 헨리 조지(Henry George)를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맑스주의에서는 토지의 독점이 자본주의 생산의 독점에서 출발한 자본주의 문제로 보고 토지와 함께 모든 생산수단을 몰수하여 집단적 소유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엥겔스는 1880년대에 미국 노동운동에 나름의 영향을 미치고 있던 헨리 조지에 대해 자본주의에서 임금노동자계급은 “토지몰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의 발전 즉 현대적 대공업 및 대농업의 발전”(“아메리카에서의 노동자 운동”, 칼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6, 박종철출판사)에 의해 창출된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엥겔스는 맑스의 《자본론》의 근거를 들어 “오늘날의 계급 대립과 노동자 계급의 오늘날의 굴욕의 원인은 노동자 계급이 당연히 토지를 포함하여 모든 생산수단을 몰수당한 데 있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서 엥겔스는 토지를 포함하여 모든 생산수단을 몰수하여 공동으로 소유하여 공동으로 운영하여야 사회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데, 헨리 조지는 “임대만을 조정하여 지금과 똑같이 토지를 조금씩 개인들에게 임대하고, 그 지대는 지금처럼 개인의 지갑이 아니라 공동의 금고에 흘러가도록 하는 것에 만족한다”고 비판하였다.

헨리 조지의 방식은 마치 “생산과정과 직접적 연관관계가 없는 ‘문어발식 집중’”이 문제라며 이 집중을 해체한다고 하는 변혁당식 “재벌체제해체”와 같다.

설사 변혁당식대로 “생산과정과 직접적 연관관계가 없는 ‘문어발식 집중’”을 “해체”하고 “재구성” 한다 하더라도 “생산과정과 직접적 연관관계가 있는 ‘문어발식 집중’”은 필연적으로 “생산과정과 직접적 연관관계가 없는 ‘문어발식 집중”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법칙의 의지와 정책을 넘어서는데, 생산의 집중은 금융과 유통의 집중으로 필연적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혁명의 문제를 심오하게 회피하는 변혁당의 ‘재벌체제해체’ 노선”, 노동자정치신문, 2017년 6월 5일)

우리는 “재벌의 문제가 곧 자본주의의 문제라면 자본주의 체제를 변혁하지 않고는 재벌의 문제는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재벌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노동자에 대한 착취와 억압은 계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재벌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재벌의 소생산자와 소상공인들에 대한 수탈과 이들의 파산과 빈곤의 심화는 막을 수 없는 것이다”라고 변혁당을 비판했는데, 헨리 조지에 대해서도 같은 비판이 가능하다.

즉, 토지의 문제가 곧 자본주의의 문제라면 자본주의 체제를 변혁하지 않는 한 재벌의 독점적 토지소유는 계속될 것이며, 토지소유 문제와 관련이 있는 주택문제는 계속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토지의 사적소유를 유지하는 가운데 불로소득자에 대한 보유세 인상은 그 자체로도 그 정책을 시행하는 고위 관료나 부르주아 정치권, 자본의 언론과 재벌일가들의 이해관계에 의해 무력화되거나 시행된다 하더라도 지극히 미미한 효과를 거두게 될 따름이다. 또한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불로소득자가 아닌 업무용이라는 명목으로 세금을 탕감 받으며 투기와 생산적 투자를 넘나드는 자본가들의 토지소유 독점을 가속화하게 될 것이다. 헨리 조지나 변혁당식 방식대로 한다면 만사 도로 아미타불이 되는 것이다.

헨리 조지나 변혁당 같은 비과학적 공상가들에 비해 맑스와 엥겔스는 오늘날 주택문제를 마치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공정한 관찰자라면 누구나 인정하듯이, 생산수단의 집중이 심하면 심할수록 그에 따라 노동자들은 일정한 공간에 그만큼 더 집중되며, 따라서 자본주의적 축적이 빠르면 빠를수록 노동자들의 주택사정은 그만큼 더 비참해진다. [부의 증대에 따르는] 도시의 ‘개량’ – 불량주택 지역의 철거, 궁전과 같은 은행과 백화점 등의 건설, 영업용 운송수단과 사치스러운 마차나 시간전차의 도입 등을 위한 도로의 확장-은 빈민들을 더욱 불결하고 더욱 비좁은 빈민굴로 몰아낸다. 다른 한편, 누구나 다아는 바와 같이 집세는 그 질에 반비례해 비싸고, 또한 주택투기꾼들은 빈곤이라는 광산을 포토시[볼리비아 남부의 도시]의 은광산채굴보다 더 많은 이윤과 더 적은 비용으로 채굴하고 있다.(맑스, 《자본론》1하, 김수행 역, 비봉출판사)

근대 대도시의 팽창은 도시의 몇몇 지역, 특히 도시의 중심에 있는 토지의 가치를 인위적으로, 때로는 엄청나게 상승시킨다. 그러나 이 토지위에 이미 세워져 있는 건물들은 그 가치가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떨어지는데 그것은 이 건물이 이미 변화된 조건에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 건물들을 철거하고 다른 건물로 바꾼다. 여기에서 무엇보다 먼저 철거의 운명에 처해지는 것이 도시 중심지에 있는 노동자의 주택이다. 이 노동자 주택의 집세는, 아무리 많은 입주자를 집어넣는다 하더라도 일정한 최대한계를 결코 넘어서 올라갈 수는 없으며, 또한 올라간다 할지라도 아주 천천히 올라갈 수 있을 뿐이다. 이 주택들은 철거되고 그 대신 상점, 창고, 공공건물이 들어선다. … 그 결과 노동자들은 도시의 중심부로부터 변두리로 추방되고 노동자들의 주택 및 소규모 주택들은 보기 드물게 되고 또 값이 비싼데다가 때로는 전혀 구할 수조차 없는 형편이다. 그것은 이러한 조건에서 건축업이 비싼 주택을 훨씬 더 유리한 투기대상으로 보고 노동자들의 주택은 오직 예외적으로만 건축하기 때문이다.(엥겔스, 《주택·토지문제》, 두레, 김정수 역)

이처럼 지구라는 제한된 공간, 특히 생산과 상업, 행정과 교육의 중심지인 대도시에서는 제한된 토지에 비해 토지수요가 급증함으로써 토지가를 천정부지로 높이고 있다. 자본은 끊임없이 기존 주택과 건물을 허물고 각종 초고층 주상복합 건물, 초호화 상업건물과 공공기관 건물 등 투기용 건축에 집중한다. 인구 이동이 집중되는 주요 전철역마다 백화점들이 들어서서 토지가가 건물가를 높이고 있다.

기존 거주자들은 이럴 때마다 주택가의 상승을 감당하지 못하고 철거민 신세로 내몰리게 되는 반면에 투기용 건축자본가들은 막대한 이윤을 얻게 된다. 대다수 노동자들, 소상공인들은 치솟는 주택가, 전세비를 감당하지 못하고 점점 더 열악한 주택을 감수하거나 변두리로 밀려나게 된다. 세입자들은 재개발 조합으로부터 고작 몇 백만 원의 이주금을 지급받고서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게 되고, 영세상인들은 수억에 달하는 권리금을 떼이고 기껏해야 수개월 치에 해당하는 영업 보상금 수백만 원에서 수천 만 원 가량의 보상금을 받고 상가에서 쫓겨나야 한다.

자본에 의해 서로 싸우고 대립하며 분열되고 있지만 노동자들과 소상공인들은 하나의 운명공동체이다. 실업상태에 빠지거나 정리해고 된 노동자들은 소상공인들이 되고 있으며, 소상공인들이 파산하면 노동자,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로 전락하게 된다. 재벌이 소상공인들 영역까지 침투하면서 소상공인들 상당수는 파산하고 있으며, 파산하지 않은 소상공인들 간 경쟁이 격화되고 있는데 이는 높은 권리금으로 나타나고 있다. 중소영세 소상공인들은 건물주들에게 막대한 임대료를 납부하고 있다.

지난 날 행정과 정치, 상업 중심지 서울에서 백주대낮에 벌어졌던 용산철거민 학살에서 보듯, 뉴타운, 재건축, 재개발을 명목으로 국가권력을 내세워 기존 주민들을 살해하면서까지 재개발을 자행하기도 한다. 여기에는 재개발조합-폭력조직-재벌 건설사-구청의 ‘사각동맹’이 있는데, 이 동맹의 주도자는 삼성건설, 현대건설 등 재벌 건설사이다. 자본가 언론은 이 4각 동맹을 비호하는 동맹자들의 동맹자이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주택·토지문제로 인해 문재인 정권은 대책 없는 “23번째 부동산 대책”을 남발하고 있고, “이래서 부동산은 정권의 ‘무덤’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엥겔스는 주택문제의 근본해결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대도시에는 현재 이미 주택이 충분히 있으므로 이 건물들을 합리적으로 이용하는 경우에는 실제적인 “주택난”을 즉시로 완화할 수 있으리라는 점만은 확실하다. 물론 이것은 현재의 소유자들을 수탈하여, 집없는 노동자들이 또는 지금 지나치게 사람이 많이 들어 있는 주택들에 살고 있는 노동자들을 이 가옥에 이주시키는 방법에 의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 주택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사회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회문제를 해결함으로써만, 즉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폐지함으로써만 주택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주택난은, 유산계급이 가지고 있는 화려한 주택들의 일부를 수탈하고 그 나머지 부분에 사람들을 강제적으로 거주시킴으로써 곧 제거될 수 있을 것이다.(엥겔스, 《주택·토지문제》)

이처럼 “개혁이 혁명 보다 어렵다”는 부르주아의 볼멘소리가 주택문제에 있어서도 상당부분 진실을 담고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지금까지 남북의 주택문제를 같이 살펴보면서 “북의 수해복구에 대해 우리 언론들이 말 못하는” 진짜 이유가 남과 북은 하나의 민족이지만 서로 다른 생산양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서 비롯됐음을 알게 되었다.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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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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