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초기 미국의 전쟁 개입사

김남기(학생)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아시아에서 일어난 한국전쟁(Korean War)은 참혹하고 파괴적인 전쟁이었다. 대략 200~300만 명 이상의 인명피해를 초래한 이 전쟁에 미국은 즉각적으로 개입했고, UN군이라는 이름으로 대규모 지상 병력을 한반도에 투입하여 대한민국 이승만 정권을 지키고자 했다. 당연히 UN군에서 압도적인 병력을 차지한 것은 미군이었고,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미국은 크고 작은 전투를 이어나갔다. 3년간의 전쟁에서 3만 6000명 이상의 미군이 전사했고, 2150대의 항공기를 잃었으며, 항공모함·전함·구축함·순양함 등을 포함한 371척의 함대를 한반도 주변 해역에 배치했었다. 그러나 미국은 승리하지 못했다. 설사 빈말로라도 그것이 승리라고 말한다 치더라도 대한민국 이승만 정권을 유지한 절반의 성공이었을 뿐이었다. 무승부라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2013년 미국의 버락 오바마(Barack Obama) 대통령은 수도 워싱턴 DC에서 열린 정전협정 60주년 기념식에서 “한국전쟁은 미국과 대한민국이 승리한 전쟁이다”라고 하며 지극히 반공주의적인 연설을 했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바마와 미국과 한국의 소위 보수주의자들이 믿고 싶어 하는 하나의 믿음이었을 뿐이었다. 이러한 믿음은 소위 오바마를 포함한 미국의 반공주의자들과 한국의 반공주의자들의 생각일 것이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패배할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숨기려는 경향이 강하다. 한국전쟁이 1953년 휴전협정으로 끝났다는 점에서 필자는 이 전쟁 자체가 무승부이거나 양측의 반쪽짜리 승리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 글에선 한국전쟁에서 누가 최종적으로 지고 이겼냐를 따질 생각이 없다. 필자가 이 글을 쓰는 진짜 목적은 미국의 오만함 혹은 정세판단 부족으로 빚어진 전쟁 초기의 패배 및 후퇴를 조명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은 한국전쟁 시작부터 인천상륙작전 이전까지의 미군의 전황을 다룰 생각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대량생산 체제를 통해 소련과 견줄만한 군사력을 길러낸 미국이 한국전쟁 초기 신속한 개입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동맹국인 한국에서 사실상 끝자락까지 후퇴한 것은 20세기 미국 전쟁역사에서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이에 대해 알아보는 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라 할 수 있겠다. 미국이 한반도에서 패권을 휘두르게 된 것은 1945년 9월이었다. 당시 일본 제국주의를 패망시킨 미국과 소련은 38선을 기점으로 한반도를 남과 북으로 분단시켰다. 한반도 이남에 절반의 패권을 장악했던 미국은 미군정이라는 형태로 통치를 했고, 일제시기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한 것으로 알려진 이승만을 지원했다. 이런 미군정의 지원으로 1948년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자리에 오르게 됐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은 미군정기 전라도 정읍에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발언을 했던 인물로 확실히 한반도 분단론자였다. 여기에 더 나아가 단독정부 수립을 통해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소위 ‘북진통일론(北進統一論)’을 주구장창 주장했다. 북진통일론이란 말 그대로 무력을 통해 북한정권을 정복해서 통일을 이룩하자는 주장이다.

1950년 미국은 애치슨라인(Acheson line)이라는 것을 발표했는데, 이것은 미국의 태평양 방어선에서 한국을 제외한다는 선언이었다. 이에 따라 미군 또한 한반도에서 점진적인 철수를 감행했고, 한반도 이남에 주둔하는 미군의 숫자는 줄어들었다. 이에 따라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시기 한반도 이남에 남아있던 미군사고문단 500명뿐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대한민국에 대한 군사지원을 포기한 것은 아니어서 대포나 트럭 같은 군수물자들을 한국군에게 지원했는데, 스탈린으로부터 지원을 받았던 북한군과 비교해보았을 때 매우 열악했다. 이것은 결국 한국군과 북한군의 전력에 큰 공백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를 모르고 있던 이승만은 북진통일론을 주장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적인 공격으로 전쟁이 시작되자, 군대의 규모나 훈련, 장비, 기술면에서 떨어져 있던 한국군은 인민군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인민군은 38선에 있던 한국군 주력부대를 궤멸시키고 전쟁 발발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은 이승만 정부가 도망치면서 폭파해 놓은 한강 다리를 가설하는데 시간을 지체하긴 했지만, 단기간에 한국군 측 중부전선군을 무너뜨리고 춘천과 홍천을 점령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미국은 즉각적으로 개입했다. 1950년 6월 27일 미국의 해리 트루먼(Harry Truman) 대통령은 유엔 안보리에서 북의 군사적 행위를 침략으로 규정했다. 서울이 인민군에게 점령당하던 6월 28일 미극동공군은 작전을 개시했고 6월 29일에는 172회나 출격했다. 6월 29일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는 일본 도쿄를 떠나 비행기를 통해 전선을 둘러본 뒤, 수원에 도착하여 이승만과 회담한다. 1950년 7월 2일에는 미군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 지상부대가 부산에 상륙하게 된다.

미국의 즉각적인 개입으로 인민군 측 Yak 전투기들이 대다수 파괴되었고, 제공권은 미국이 장악하게 됐다. 1950년 7월 초 미군이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면서 B-26 폭격기와 F-80 전투기가 한반도 상공을 뒤덮었다. 7월 2일 미군의 지상부대가 부산에 상륙한 이후 스미스(Charles B. Smith) 중령이 지휘하는 제24 보병 사단 1개 대대가 남하하는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해 오산으로 보내졌다. 7월 5일 미국의 스미스 부대는 제107전차연대를 앞세운 인민군 제4사단과 전투를 치르게 되었는데,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스미스 부대의 전투원 504명 중 최소 150명이 전사했고, 31명이 실종됐다. 결국 스미스 부대는 T-34 전차를 앞세운 인민군에 밀려 후퇴했다.

거침없는 진격을 해나가던 인민군은 해방 5주년인 8월 15일까지 임시수도 부산을 점령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었다. 그들에게 있어 충청도에 있는 대전을 점령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었다. 1950년 7월 10일 미군과 한국군은 대전에 방어선을 구축해 놓았다. 그로부터 4일 뒤는 7월 14일 T-34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 4개 사단이 포병의 지원 하에 공격을 했고, 미군이 가지고 있던 2.36인치 바주카포는 소련제 탱크를 파괴하는데 역부족이었다. 7월 16일 한국군과 미군이 구축해 놓은 대전 방어선은 무너졌고, 19일에는 인민군이 미 제24사단의 퇴로를 차단함으로써, 대전에 투입되었던 미군 사단을 붕괴시켰다. 여기서 미군 지휘관이던 윌리엄 딘(William F. Dean) 소장을 포로로 붙잡았고, 최소 2000명 이상의 미군 사상자가 속출했다.

대전을 함락시킨 인민군은 그 기세를 몰아 한국군과 미군을 전선 전역에서 밀고 내려갔다. 대전 점령 이후 인민군은 전주를 점령하고, 전라남도 광주를 점령했으며, 7월 26~27일 여수까지 점령했다. 이렇게 되면서 한국군과 미군은 경상도와 낙동강 쪽으로 후퇴하게 됐다. 1950년 7월 말 경북 상주에 투입되었던 3600명 규모의 흑인 병사들은 인민군과의 전투에서 무기와 장비를 버려둔 채 도망가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었다.

1950년 7월 말 미군과 한국군은 전선에서 9만 2000명 규모(이중 절반은 미군이다)로 인민군보다 병력에서 우위를 점하기도 했지만, 그런데도 계속 퇴각했던 것이다. 병력 규모 면에서 인민군을 압도하게 되었던 것은 부산항을 통해 병력과 물자지원을 끊임없이 받았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렇게 지원받은 병력 중에는 미국의 제1기병사단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끊임없는 병력과 물자지원에도 불구하고 미군과 한국군은 1950년 8월 워커 라인(Walker Line) 즉 낙동강 전선을 형성하게 됐다.

8월 초 낙동강 전선이 형성된 이후 한국군과 미군은 9월 15일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 있기 전까지 그곳에서 교착된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즉 미군과 한국군은 인천상륙작전이 있기 전까지 전세를 뒤집을 반격 한번 거의 해보지 못 해봤다는 얘기다. 인민군이 수도 서울을 점령한 이후부터 낙동강 전선이 형성될 때까지의 전투 과정은 미군의 작전 실패 및 패배의 기록이다. 이런 미군의 실패는 인민군의 전투능력을 오리엔탈리즘적 편견에 빠져 과소평가했다는 점에 기인한다. 위에서 상술했던 스미스 부대 같은 경우에는 인민군이랑 교전하기 전 “인민군은 공포에 떨면서 후퇴할 것이다”라고 대다수의 미군은 생각했었다. 실제로 오산에서 공포에 떨면서 후퇴하게 된 쪽은 인민군이 아니라 미군이었다.

백인이 대다수이던 미군의 경우 북한군을 ‘열등한 노란색 인종’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것은 유색 인종과 그 문화를 비문명적이라고 생각하는 오리엔탈리즘적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여기에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을 항복시켰던 역사적 경험도 작용했다. 그리고 이런 인종차별은 미군 내에도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 12%가 흑인이었지만, 미군은 흑인들 부대를 백인들과 분리했다. 그랬기에 인종차별을 당한 흑인 부대는 전투력이 매우 저하된 상태에 놓여 위에서 상술한 상주 전투에서처럼 후퇴하기 바쁜 경우도 있었다. 또한 미군은 후퇴하는 과정에서 노근리에서 대량 300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는데, 동양에 대한 무지도 여기에 반영되었다.

거기다 초반에 미군이 마주했던 인민군 병력은 전투 경험이 많은 정예부대였다. 한국전쟁 초기 인민군 선봉대에 섰던 부대는 과거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에서 마오쩌둥 편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던 공산당 측 부대였다. 이들은 중국의 민족해방투쟁에서 일본 제국주의 군대와 미국의 지원을 받던 중국 국민당군 부대에 맞서 싸워 혁명에 승리하는데 큰 기여를 했었다. 이런 점을 생각해보았을 때, 한국전쟁 초기 미군이 인민군에게 밀렸던 이유는 허술한 군대를 보낸 이유만은 아니었다. 이처럼 미군 내부 문제가 심각하게 존재했던 것과 오리엔탈리즘적 편견에 빠졌던 것도 가장 큰 이유라 할 수 있다. 한국전쟁이라는 주제는 소위 보수세력들이 많이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역사적 사건이다. 그렇기에 한국전쟁 초기 미군의 실책이나 과오를 비판하는 건 색깔몰이 당하기 아주 쉽다. 따라서 브루스 커밍스와 같이 한국전쟁을 좀 더 넓은 시각에서 보는 시도도 필요하다. 그 시도 중엔 전쟁 초기 미군의 실책과 오만함을 분석하는 것도 필요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참고자료

《미국의 6.25 전쟁사》, 정길현, 북코리아, 2015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브루스 커밍스, 조행복, 현실문화, 2017

《한국전쟁》, 박태균, 책과 함께, 2005

《와다 하루끼의 북한 현대사》, 와다 하루끼, 남기정, 창비,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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