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의 책임을 소련에게 묻는 유럽 국가들의 반소주의적 태도를 규탄한다!

사진설명: 소-독 불가침 협정 체결 직후인 1939년 10월 미국에서 나온 커툰으로 “허니문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라고 협정을 조소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소련도, 독일도, 서방의 그 누구도 협정으로 전쟁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협정이 얼마나 자신들에게 유리한지, 불리한지의 문제가 있을 뿐이었다.(편집자)

김남기(학생)

지난 1월에서 2월 폴란드를 포함하여 반소련 감정이 강한 유럽 국가들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책임을 놓고, 소련에게 책임이 있다는 식의 논리가 논란이 됐던 적이 있다. 특히나 반소련 감정이 극심한 폴란드는 제2차 세계대전의 책임을 나치독일과 더불어 소련에게 있다는 식으로 주장했다. 그 주장의 근거가 되는 것이 1939년 8월에 체결된 독-소 불가침 조약이다. 폴란드의 모라비에츠키 총리는 “스탈린이 폴란드를 분할하려고 공모하지 않았고 스탈린이 히틀러에게 천연자원을 공급하지 않았다면 나치 독일의 범죄 기구가 유럽을 점령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하며 반소련적 발언을 했었는데, 이것이야말로 제2차 세계대전의 역사를 왜곡하는 반소주의적 중상모략이다. 이들의 주장을 듣다보면 마치 독-소 불가침 조약을 맺은 히틀러와 스탈린이 군사적인 동맹을 맺은 것처럼 주장하는 것으로 들린다.

1939년 소위 몰로토프와 리벤트로프가 맺은 것으로 알려진 독-소 불가침 조약은 말 그대로 불가침 조약이었다. 또한 나치독일과 소련이 이 조약을 체결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1938년 9월에 영국, 프랑스, 나치 독일, 이탈리아 간에 체결되었던 뮌헨 협정(Munich Agreement)에 있다. 뮌헨 협정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히틀러 파시스트 세력이 독일 소수민족이 거주하는 주데텐란트를 접수하도록 허락했고, 영국과 나치독일은 소위 합동 선언에서 두 나라는 서로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소망을 표명하는 합의를 했다. 즉 영국과 프랑스 나치독일은 사실상에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그로 인하여 1939년 3월 독일은 어떠한 간섭 없이 체코슬로바키아를 합병할 수 있었고, 나치 독일의 이런 침략 행위에 대해 오직 소련만이 인정하지 않으며 “전제적이고, 폭력적인 침략적 행위”라고 주장했다.

당시 소련은 히틀러 파시스트 도당과 일본 제국주의자들에 맞서 시간을 벌어야 했다. 이오시프 스탈린이 공업화를 단행하던 1930년대에는 국제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31년 9월에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국을 침공했고, 1933년에는 독일에서 히틀러가 등장했다.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며 재무장을 시도했고, 유럽 정복의 야욕을 점차 드러냈다.

1931년 스페인 좌파는 선거에서 승리해 스페인 제2공화국을 출범시켰는데, 스페인의 파시스트 프랑코가 반란을 일으켰고, 이것은 1936년 스페인 내전으로 이어졌다. 스페인 내전에서 파시스트인 프랑코는 나치 독일의 히틀러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에게 군사적인 지원을 받아가며 민주진영을 말살시키고자 하였다.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군사장비와 병력을 프랑코에게 제공했다. 당연히 소련은 이 전쟁에서 민주진영의 편에서 싸웠고, 소련 전차와 전차병이 민주진영 편에서 파시스트들에 맞서 싸웠다. 만약 소련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최소한 1939년까지 공화파 세력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스페인 내전에서 파시스트 진영을 도왔던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정복 야욕은 멈추질 않았다. 스페인 내전이 파시스트들의 승리로 끝나기 1년 전 나치는 이미 오스트리아를 합병했고, 1939년 3월 리투아니아 정부를 위협했다. 무솔리니의 이탈리아도 1939년 4월 알바니아를 점령했고, 두 파시스트(무솔리니와 히틀러) 열강은 1939년 5월 결정적인 ‘강철조약(Pact of Steel)’에 서명했다. 따라서 소련은 히틀러 파시스트 도당에 맞서 시간을 벌어야 했다. 이것이 바로 독-소 불가침 조약의 맥락이다.

소련군 총참모부는 스페인이 파시스트들에게 함락당한 이후 나치와 제국주의 블록의 침략이 소련에 파멸을 가져올 것을 두려워하고 우려했다. 그렇기에 스탈린과 소련은 나치가 공격하기 이전에 군사력을 건설할 시간을 벌고자 했고, 실제로 1939년 9월 소련은 항공기 생산 공장 9곳과 항공기 엔진 공장 7곳을 열었으며 1938년 150만의 군대를 보유했던 소련의 붉은 군대는 히틀러 파시스트 도당이 침공하던 1941년 6월에는 500만의 군대를 보유한 군대로 거듭났다. 그리고 독-소 불가침 조약을 스탈린이 체결한 또 다른 이유도 존재했다. 1939년 3월 10일 스페인 내전이 파시스트들의 승리로 끝나가자 스탈린은 “전쟁광들이 전쟁의 늪에 더 깊이 빠지도록 해야 하며, 조용하게 또 그렇게 하도록 부추겨야 한다”라고 역설했다. 만약 독일과 영국이 전쟁에 들어간다면, 양국은 서로를 “악화시키고 소진시켜” 소비에트 연방이 “새로운 힘을 가지고” 싸움에 끼어들 수 있게 되고 결국 “악화된 교전국들에게 강화 조건을 제시해 평화”를 끌어낼 수 있게 된다는 전략적 계산이 있었다.

원칙대로라면 파시스트와 협상하는 것은 있어선 안 될 일이다. 그러나 독-소 불가침 조약은 소위 현실정치의 영역이기도 하다. 위에서 상술했던 대로 여기엔 소련이 히틀러 파시스트 도당에 맞서 군대를 강화하고 시간을 벌기 위한 계산이 존재했다. 1941년 7월 히틀러 파시스트 도당의 군대가 소련 영토 깊숙이 침공해 들어올 때, 이오시프 스탈린은 방송 연설에서 1939년에 왜 독-소 불가침 조약을 체결했는지를 솔직하게 고백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파쇼 독일이 전 세계에서 침략국으로 인정받으리라는 것도 고려하지 않고 1939년에 체결된 독-소 불가침 조약을 불의에 배신적으로 위반하였다는 사실도 적지 않은 의의를 가지고 있다. 물론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나라는 솔선수범해서 조약을 위반하려 하지 않았으므로 배신의 길에 들어 설 수 없었다. 혹 이렇게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어떻게 소련 정부는 히틀러나 리벤트로프와 같은 배신적인 악한들과 불가침 조약을 체결할 수 있었는가? 이 점에서는 소련 정부가 착오를 범한 것이 아닌가? 물론 착오가 아니다! 불가침 조약이란 양국 간의 평화 조약이다. 1939년에 바로 이러한 조약을 독일이 우리에게 제의했던 것이다. 소련 정부가 이러한 제의를 거절할 수 있었겠는가? 나는 어떠한 평화 애호 국가도 그 이웃 나라가 히틀러나 리벤트로프 같은 그런 악한이나 식인종들의 지도를 받는다 해도 그 나라와의 평화 협약을 거절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것은 물론 하나의 필수적 조건 하에서만 즉 평화 협약이 그 평화 애호 국가의 영토 완정과 독립과 영예에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나 저촉되지 않는 조건에서만 그렇다. 다 아는 바와 같이 독일과 소련 간의 불가침 조약은 실로 이런 조약인 것이다.”

비록 독-소 불가침 조약 체결에도 불구하고 파시스트들과의 전쟁을 준비했던 스탈린의 소련은 독일군의 침공을 받았을 때, 레닌그라드는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지고 모스크바와 스탈린그라드까지 후퇴를 해야 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이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소련 인민과 군대의 영웅적인 투쟁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소련 붉은 군대의 육해공군은 히틀러 파시스트 침략자들을 1943년 쿠르스크 전투를 기점으로 무찔러 나갔다.

스탈린의 공업화로 지어진 군수공장에선 파시스트들의 잔혹한 전쟁기계를 파괴하는 전차와 항공기, 기관총, 대포 등이 생산되었고, 그런 무기로 무장한 소련인민들은 나치의 전쟁기계를 파괴했다. 또한 아우슈비츠를 포함하여 나치가 만들어 냈던 죽음의 수용소와 같은 반인륜적 유대인 학살 수용소의 대부분을 해방시킨 것도 역시 소련의 붉은 군대였다. 소련인민은 2700만의 희생으로 히틀러 파시스트 세력을 무찌르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것이 바로 소련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이룩한 세계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 치른 과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소련주의가 강한 폴란드나 발트3국 우크라이나에서는 마치 독-소 불가침 조약과 폴란드 분할을 예시로 들며, 제2차 세계대전 승리의 주역 소련을 마치 나치 독일과 같은 전범국가로 내세우고 있다. 이것은 최소 유대인 학살의 3배(1700~1800만) 이상의 민간인이 나치에게 학살당했던 러시아 입장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고, 분노할 수밖에 없는 사안이다.

거기다 제2차 세계대전을 소련에게 책임을 묻는 국가들이 절대 언급하지 않는 것은 독-소 불가침 조약 그 이전에 소위 자본주의 국가들이 파시스트들과 체결한 조약 및 협정이 적잖게 있다는 사실이다. 그 조약 및 협정들을 나열해보면, 1934년 독일-폴란드 불가침 조약, 1936년 독일-일본 반코민테른 조약, 1938년 9월 독일-영국 불가침 조약, 1938년 12월 독일-프랑스 불가침 조약, 1939년 3월 독일-루마니아 경제 협정 등이 있다. 따라서 제2차 세계대전에서 히틀러 파시스트 도당을 무찔렀던 소련을 그 파시스트 전쟁의 책임론자로 모는 일부 국가의 시각은 반소련 반공주의적 관점에 머물러 있는 지극히 편향적인 시각이고, 역사를 왜곡하는 행위이다.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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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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