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주 교수의 자가당착의 현실사회주의관과 범무정부주의

* 이 글은 <청년문화신문>과 <전국노동자정치협회>에 공동으로 실립니다.

변혁당 기관지에 기고한 김정주 교수의 글은 스탈린 시대 쏘비에트의 거대한 역사적 성취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중앙계획기구를 통한 경제 운용은 스탈린 시대 이후 1960년대까지 매우 강력한 효과를 발휘했다. 1929년 대공황으로 서구 자본주의 경제는 파국에 직면했지만, 사회주의 러시아의 경제는 농업국가에서 공업국가로 빠르게 변모하며 매년 놀라운 성장률을 기록했다. 2차 세계대전 동안 러시아는 그 어떤 나라보다도 치열하게 반反파시즘 전쟁을 수행했고, 그 결과 다른 나라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엄청난 인적, 물적 피해를 보았다. 하지만 종전 후 그 어떤 나라보다도 빠르게 회복했으며, 주택‧교육‧보건 등에 걸쳐 전全인민적 복지를 강화하면서 강대국의 지위에 올랐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많은 사람들이 습관처럼 지적하듯 중앙계획경제가 늘 비효율적이고 문제투성이였던 것은 아니었다. 반대로 그것은 성공적이었으며 시장 중심 자본주의 경제에 비해 훨씬 효율적이기도 했다.”(김정주 충남대 경제학, ‘사회주의 중앙계획경제의 실제와 교훈’, “사회주의 경제 뜯어보기 ① 계획경제는 애초부터 틀렸다?”, 사회변혁노동자당, 변혁정치 100호)

이는 쏘련의 거대한 성취를 인정했다는 점에서는 그 동안 변혁당의 반쏘비에트 일변도의 평가에 비해 진일보한 것이다. 그런데 그는 주로 스탈린 시대에 그 초석을 쌓아 만들어진 쏘비에트의 이러한 거대한 성과를 한 편으로는 인정하면서도 스탈린과 스탈린 시대의 정치와 경제운영 전반에 대해서는 인색하다 못해 혹독하게 비난하고 있다.

“스탈린의 조치들은 무자비할 정도로 신속하고 단호했다. 소비에트를 비롯한 모든 자치조직과 국가기구를 당에 종속시킴으로써,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사실상 당의 독재가 됐다. 모든 공장을 국유화하고 농업에서 집단농장화를 단행함으로써 ‘사회주의적 소유란 곧 국가 소유’라는, 무모하리만큼 단순한 원칙을 모든 인민에게 각인시켰다.”

“무엇보다 중앙계획경제 하에서 기업은 어떤 권한도 갖지 못한 채 할당된 목표 생산량을 달성해야 하는 실행단위에 불과했기 때문에, 생산에 대한 이들의 자발적 책임성을 끌어내기가 무척 어려웠다.”

“사회주의 러시아의 경우 계획경제의 목표를 주로 중화학 산업의 집중적 육성을 통한 공업화에 맞추고 있었기 때문에 경제적 자원을 소비재 산업보다는 중화학 산업에 우선적으로 투입했다. 따라서 경제 규모가 커지는데도 소비재 부족 문제가 일상적으로 발생했다.”

“게다가 경제 규모가 커질수록 중앙계획기구 자체가 비대해지고 관료화됐으며, 그 결과 계획을 수립하기 위한 ‘계획 비용’ 자체가 어마어마하게 증가했다. 결국 1970년대 들어 커지는 경제적 비효율성이 드러나면서 사회주의 러시아의 경제는 점차 활력을 잃고 침체 국면에 들어서게 된다.”(김정주, 같은 글)

모든 국가기구와 자치기구가 당에 종속됨으로써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당의 독재로 전락하고, 기업은 생산에 대한 어떠한 권한도 없어 자발적 책임감도 발휘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중화학산업 우선 정책을 취함으로써 소비재 부족문제가 일상적으로 발생하고 중앙계획 기구가 비대해지고 관료화 되었다면 도대체 그 역사적 성과는 어디로부터 나왔나? 하늘에서 떨어지기라도 했단 말인가? 땅에서 솟기라도 했단 말인가? 아니면 스탈린과 당의 이 모든 무원칙과 실책과 관료주의에도 불구하고 성취를 거뒀단 말인가? 게다가 “중앙계획기구를 통한 경제 운용은 스탈린 시대 이후 1960년대까지 매우 강력한 효과를 발휘했다”면 스탈린이 1953년에 사망했는데 그 이후 17여년이 지난 뒤까지 스탈린은 책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참고로, “1970년 이후의 침체기라 불리는 이 기간 동안에도 1인당 국내총생산은 27%나 성장했다. Allen, 2003, 스티븐 가우언스(Stephen Gowans), 공적소유, 계획경제는 유효한가?(2), 2012년 12월 21일)

그런데 이러한 태도는 쏘비에트의 실제적인 건설자였고 거대한 성취의 중심에 있었던 스탈린에 대해 극단적으로 혐오하는 부정적 태도에서 비롯됐다. 이는 지적으로 부정직할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는 종파주의다.

사실 내전 당시의 전시공산주의 정책과 신경제정책을 번갈아 가며 사회주의 건설을 했던 레닌 당시에도 그랬듯이 러시아혁명과 계획경제의 도입만으로 사회주의 건설이 거대한 성취를 거둘 수는 없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필수적인 당의 전위적 성격의 유지, 강화와 그 중심에 있는 혁명적 지도력, 노동자계급 중심성과 노농동맹의 강화, 반혁명 책동의 분쇄, 원칙을 유지하면서도 상황에 따라 전술과 정책을 변화시키는 유연한 태도, 대중의 정치의식의 고양과 자발적 참여의 유도가 없었다면 신생 쏘비에트 권력은 사회주의의 위업은커녕 존속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대부분은 생산과 행정의 문제인 동시에 혁명적 정치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스탈린 시대 대두된 정치적 쟁점들

좀 더 구체적으로 레닌 사후 스탈린 시대는 다음과 같은 첨예한 정치적 쟁점들과 과제들을 안고 있었다.

먼저 ‘일국사회주의’냐 ‘국제사회주의’냐의 쟁점이다. 스탈린은 앞의 대명제의 상징이고 트로츠키는 뒤의 대명제의 상징이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 설정 자체가 역사왜곡인 동시에 비변증법적이다. 당시 논쟁은 고대하던 유럽혁명, 특히 독일혁명이 패배로 돌아간 상태에서 쏘련에서 사회주의 건설이 가능한가의 문제였다. 그러나 김정주 교수는 스탈린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왜곡하고 있다.

“스탈린 집권 이후 ‘일국一國 사회주의’ 노선(세계혁명 없이도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를 완성할 수 있다는 노선)을 통해 후자의 방식으로 귀결했다.”(김정주, 같은 글)

스탈린은 “러시아에서의 사회주의 경제의 진정한 앙양은 구라파의 주요 나라들에서 노동계급이 승리한 후에야 비로소 가능하게 될 것이다”, “일국의 국가적 범위 내에서의 고립된 사회주의 건설이 불가능하다”는 트로츠키의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당은 한 나라에서의 사회주의의 승리라는 것은 사회주의가 그 나라에서 건설될 수 있다는 가능성 문제이며 또 이 과업은 한 나라의 힘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라는 것은 무력 간섭과 자본주의의 복구로부터의 보장이며 또 이 과업은 오직 혁명이 몇 개 나라에서 승리하는 조건 하에서만 해결될 있다는 것에서 항상 출발하였다. 이런데도 어떻게 이 두 개의 과업을 염치없이 서로 혼동할 수 있는가?”(스탈린, 보고 “우리 당내의 사회민주주의적 편향에 관하여” 결론, 스탈린 선집2, 1926년 11월 3일)

이처럼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 건설을 할 수 있다는 주장과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는 국제적 수준에서의 혁명의 승리로 가능하다는 주장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염치없이 서로 혼동”되어버렸다. 이러한 왜곡은 아주 상투적이고 전형적인 왜곡이다. 트로츠키 진영에서도 이와 같이 당시 입장을 왜곡했다.

스탈린은 위에서 보듯 “세계혁명 없이도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를 완성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자는 주장이 세계혁명을 회피하는 주장이거나 국제주의를 부정하는 것이라는 주장은 부정직한 사실왜곡이자 비변증법적이다. 일국에서 사회주의를 성공적으로 건설하는 것은 세계혁명의 교두보를 강화하는 것이다. 이미 차지한 사회주의에서 승리하지 않고 국제혁명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것인가? 일국에서 사회주의의 성공적 건설은 다른 나라에서 혁명의 전망을 밝히는 것이다. 그리고 쏘련은 경제적, 기술적, 인적 지원뿐만 아니라 스페인 내전과 제3세계 민족해방 투쟁, 베트남 전쟁에 이르기까지 국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도 프롤레타리아의 국제적 단결이라는 과제와 국가적 수준에서의 사회주의 생산의 조직화라는 문제가 일국사회주의냐 국제사회주의냐는 문제로 뒤섞어져 버렸던 것이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정치적 의도로 뒤섞어버리고, 특히 쏘련 해체 이후 스탈린과 쏘비에트 체제에 대한 중상비방으로 쏘련 사회를 단순화, 왜곡시키는 정치적 조류들이 유행처럼 일어났는데 김정주 교수는 여기에 손쉽게 편승해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김정주 교수는 쏘비에트의 역사적 업적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인정하면서도 그 업적을 일구는 쏘비에트 체제의 지도자에 대해서는 간단하게 중상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혁명적 지도자에 대한 부정으로부터 지도 일반에 대한 부정으로 나아가는 것은 무정부주의의 정치적 특성이기도 하다.

이 논쟁에서 스탈린이 승리함으로써 쏘련은 독일혁명의 패배라는 난관 속에서도 의기소침하지 않고 일국에서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방향을 제대로 잡아갈 수 있었다. 계획경제 체제의 확립이라는 조건만으로 전인미답의 사회주의 건설을 해야 했던 쏘련에서 사회주의가 거대한 성취를 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쏘련은 일국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가능성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그 방향대로 일관되게 몰고 갔기 때문에 사회주의 발전의 기초가 확립될 수 있었다.

농업 집산화의 시기와 방식의 문제

레닌 사후 쏘비에트 권력 내부에서는 사회주의 건설에 있어 가장 중대한 요소였던 농업 집산화 시기와 방식을 둘러싼 첨예한 논쟁이 벌어졌다.

김정주 교수는 스탈린이 “‘좀 더 신속하고 전면적인 방식’으로 자본주의적 이행과 사회주의적 이행을 동시에 성취”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자본주의적 이행”을 “사회주의적 이행”과 동시에 성취한다는 주장도 해괴한 주장이면서 동시에 사실과도 맞지 않다. 신경제 정책을 폐기하고 부농과 네프맨(신흥부자)들과의 미증유의 계급투쟁을 통해 달성한 농촌에서의 대대적인 협동조합으로의 전환이 어떻게 한 편으로 자본주의적 이행을 성취한 것이 될 수 있는가? 집산화 과정에서 봉건제적 요소들, 혁명 이전 거대토지를 소유했던 러시아 정교회의 잔존분자들, 농민 내부의 봉건적, 종교적 인습 등과의 투쟁이라면 그것은 봉건제적 유산들과 싸우며 사회주의 요소를 강화한 것이다.

주지하듯 레닌 시대 전시공산주의는 내전과 제국주의자들의 쏘비에트 권력 분쇄 기도에 맞서 계급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취해진 불가피한 방책이었다. 전시공산주의 정책으로 말미암아 쏘비에트 권력은 승리하고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시공산주의 정책은 농민으로부터 일정 정도의 식량을 징발해 도시에 공급하고 군량미로 썼는데 이로 말미암아 노농동맹이 위태로워졌다.

크론슈타트 반란에서 보듯 전시공산주의로 인해 생긴 농민의 불만을 이용해 반혁명 책동이 조장됐다. 레닌과 볼셰비키는 당내 심각한 논쟁을 통해 식량징발 대신 현물세를 도입하고 전시공산주의 정책을 종식시켰다. 새로운 정책이 바로 신경제정책이었다. 신경제 정책은 농업 생산물에 거래의 자유를 주고 농업에 인센티브를 주기도 했다. 레닌은 이 신경제정책이 사회주의 권력 하에서 부분적으로 자본주의 방식을 도입한 ‘국가자본주의’적 방식이라고도 했다. 신경제 정책은 이후 고르바초프를 정점으로 하는 우익 수정주의자들이 근거로 삼는 정책이었다. 그러나 레닌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노기 장군을 포위전을 예로 들면서 이것이 자본주의에 대한 일시적 양보이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적 요소를 포위하여 사회주의를 강화하기 위한 조치라는 것을 강조했다.

전시공산주의처럼 신경제 정책도 전략이나 사회주의의 근본원리라기보다는 일시적 방책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 어떻게 농업을 집산화 하느냐의 논란이 볼셰비키 당 내에서 첨예하게 벌어졌던 것이다. 게다가 ‘가위위기’라고 불리는 ‘협상가격차 위기’로 내전으로 인한 공업기반 시설의 파괴 등으로 급격하게 치솟는 공업생산물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생산성이 높은 곡물가가 낮아지면서 도시는 식량조달의 위기를 겪었다. 여기에 신경제정책으로 생겨난 농촌의 네프맨들은 곡물을 매점매석한 채 곡물가의 인상을 기대하며 곡물을 내놓지 않고 있었다.

신경제정책은 내전으로 인해 황폐해진 경제를 활성화 시키고 농민과의 동맹을 복원시켰지만 이제 그 역할을 다하고 새로운 전환의 시기가 다가왔던 것이다.

당시 당내 ‘좌익 반대파’의 중심에는 트로츠키가 있었다. 프레오브라젠스키로 대변되는 당내 좌경주의자들은 가장 먼저 “초공업화 정책”의 제안자들이었는데, 이들은 1924년 1월 13차 당대회에서 이른바 “공업독재”라는 명목으로 “국영기업에 의한 독점가격 정책”을 주장했다. 이는 “식민지” 농업의 희생, 즉 농민에 대한 “착취”로 “사회주의의 본원적 축적”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모리스 돕, 《쏘련 경제사》 참고)

반면 부하린은 신경제 정책을 계속 유지하며 심지어 “부자가 되라”는 주장에서 보듯 우경적 입장을 대변하고 있었다.

스탈린은 그 둘의 입장이 좌우편향이라고 주장하면서 1928년부터 대대적인 집산화를 주장하였고 그 이듬해인 1929년에는 농촌에서 대대적인 집산화 투쟁이 벌어졌다. 이 전환은 빈농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는데, 이 과정에서 부농과 구체제의 잔존세력들은 집산화에 저항하며 콜호즈 활동가들을 살해하는가하면 자신들이 기르던 가축 수백만 마리를 도살하며 극렬하게 저항했다. 이 미증유의 계급투쟁은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설득과 정치적 지도 대신에 강압적 방식이 일부 취해져서 중농 일부가 반발하는 사태도 벌어졌다. 스탈린은 “성공에 취하여”라는 글을 발표하며 혁명적 극단주의를 바로잡기도 하였다.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쏘비에트 농촌에서의 집단적 농업으로의 전환에 대해 영국의 유명한 맑스주의 경제학자였던 모리스 돕은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탄생을 위한 고통은 실로 가혹했고 그 산고는 더없이 거칠고 잔인했다. 그러나 이 수개월 간이 격동이 20세기 유럽과 아시아의 경제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으로 여겨지게 되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모리스 돕, 같은 책)

이 집산화가 러시아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끼친 영향만큼 반혁명 분자들과 제국주의자들의 악선전은 지금까지도 이 역사적 격동기와 이 시기의 스탈린에게 집중되고 있다. 그러나 결국 이로써 쏘비에트는 농촌으로까지 사회주의 생산관계를 강화할 수 있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이 가장 먼저 공업화 정책을 주장했는데, 그렇다면 이들이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인가? 모리스돕은 이러한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조소했다.

“많은 사람들은, 1928년에 부농에 대한 새로운 공격과 빨라진 공업화 템포를 지지한 자들의 대부분이, 그것이 1925년에 반대파의 정책이었을 때는 그것을 비난했던 바로 그 사람들이라는 사실에 당황했다. 만약 1925년에 그것이 틀렸다면, 3년 후에도 역시 틀린 것이 아닌가, 그리고 만약 1928년에 옳았다면 1925년에는 그 비난이 오류였다는 것이 이로써 입증되지 않았는가? 그러나 1928년 혹은 1929년에 실천가능한 것이, 공업과 농업이 더 허약했던 이전 시기에도 필연적으로 실천가능했다고는 볼 수 없다. 혹은 1928년 상황에서는 절박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 농촌과 곡물시장에 대한 부농의 영향이 더 작았던 시기에도 똑같이 요구된다는 식으로 결론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모리스 돕, 같은 책)

집산화의 성공은 집단화된 협동농장에 트랙터와 콤바인 등 기계를 공급할 수 있는 도시공업의 발전, 농촌 일각에서 이미 시행되고 있었던 국영농장의 경험의 성과 등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처럼 다시금 이 농업 집산화를 보더라도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강화와 성취는 “누가 누구를”(누가 지배하고, 누가 지배당하는가?)이라는 사회주의 계급독재와 계급투쟁의 문제, 고도의 정치적 판단과 확고한 정치적 실천이 필요한 문제임을 알 수 있다.

중공업 우선이냐 소비재 우선이냐의 빗나간 비교

앞에서 스탈린이 중화학 산업의 집중적 육성으로 소비재 부족 문제가 일상적으로 발생했다고 주장하는 김정주 교수의 글을 인용한 바 있는데, 이는 스탈린에 대한 상투적 비난의 단골메뉴이기도 하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이를 초공업화 정책으로 비난하면서 농촌 집산화와 함께 이를 쏘련이 국가자본주의로 전환되었다는 근거로 삼기도 한다. 김정주 교수는 이 정도는 아니지만 중화학공업의 집중육성을 비난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화학산업과 소비재간의 비교는 잘못됐다. 하나는 산업이고 다른 하나는 산업의 생산물이기 때문이다. 중화학 생산 역시 공업생산의 일부일진데 과연 공업생산의 집중적 육성은 소비와 무관한 것인가? 스탈린은 사회주의 생산의 목적이 “전체 사회의 부단히 성장하는 물질적 및 문화적 수요의 최대한의 충족”(“쏘련에서의 사회주의의 경제적 제 문제”)이라고 했다. 또한 “사회의 수요를 충족시키는 것과 유리된 생산은 쇠퇴하여 소멸한다”며, 생산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수요를 가진 인간”을 중심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스탈린은 맑스의 《자본론》 2권에 나와 있는 ‘재생산론’이 “사회적 생산을 생산수단 생산과 소비수단 생산”으로 구분하면서, “확대재생산에서 생산수단 생산의 우선적 성장에 대한 명제”라고 했다. 맑스의 재생산론의 이러한 명제는 자본주의뿐만 아니라 생산이 이루어지는 모든 사회에 해당되는 것이다.

예로 들어보자! 먼저 공업생산에는 소비수단 생산도 있다. 공업생산의 집중적 육성은 소비수단 생산을 촉진하고 이것이 소비재 생산을 만들어내게 된다. 일례로 트랙터와 콤바인 같은 공업생산물의 증대는 곡물생산의 증대를 가져오고 곡물생산의 증대는 당연하게 소비를 충족시킨다. 화학공업의 경우도 비료 생산을 늘리면서 곡물생산을 증대시킨다. 게다가 공업생산력의 상승은 소비재의 가격을 대폭 낮출 수 있다.

인민들이 굶고 있는데 소비재공급은 소홀히 하고 공업에 집중투자를 하니 스탈린은 이 얼마나 냉혈한인가? 이것이 스탈린에 대한 비난의 근거인데, 얼마나 악의적이고 무지한 비난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스탈린이 공업, 특히 무기생산에 집중육성한 것은 당시 이미 대두하고 있었던 파시즘과 제국주의와의 전쟁을 염두에 둔 것이기도 했다. 실제 1930년 초반부터 일본의 대륙 침략 야욕이 노골화되면서 쏘련 동부에서 일제의 침략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중공업에 대한 집중적 육성 필요성이 증가했다. 더욱이 스탈린이 이 주장을 하고 나서 10년 뒤인 1939년에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였고 이로부터 2년 뒤인 1941년에 쏘련을 공격하였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무기생산을 가지고 자본주의적 경쟁이라고 하고 이를 이유로 경쟁이 작동하는 쏘련이 국가자본주의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들의 주장은 파시즘의 침략과 제국주의자들의 군사적 위협 앞에서도 사회주의 권력은 무기를 들지 말고 투항하라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혁명의 현실주의가 아니라 공상주의인 것이다.

김정주 교수는 “중화학공업의 집중적 육성”이 아니라면 직접적으로 소비재를 생산하는 경공업의 확대를 주장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당시 공업이 미약한 쏘련 상황에서 경공업을 확대하려면 외국으로부터의 자본재의 수입에 의존해야 했다. 이러한 주장은 실제 1925년 14차 당대회에 제출된 주장이었다. 이에 대해 스탈린은 “만약 우리가 우리 스스로 생산수단을 제조하지 않고 외국으로부터 수입해야만 하는 이런 발전단계에 머문다면, 우리는 우리조국이 자본주의 체제의 한 부속물로 전환되는 것에 저항하는 어떠한 방위수단도 가질 수 없다”(모리스 돕, 《소련경제사》 재인용)며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전쟁 후 그 어떤 나라보다도 빠르게 회복했으며, 주택‧교육‧보건 등에 걸쳐 전全인민적 복지를 강화하면서 강대국의 지위에 올랐다.”(김정주, 같은 글)

“주택‧교육‧보건 등에 걸쳐 전인민적 복지의 강화”, 이 보다 더 뚜렷하게 인민 소비의 대대적인 강화 사례가 있는가? 중공업 우선 정책은 과학이었다. 이 정책이 없었다면 쏘련은 파쇼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일찌감치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을 것이다. 또한 중공업 우선 정책은 생산전반의 성장과 함께 쏘비에트 복지의 토대를 제공했다. “주택‧교육‧보건 등”에서 “등”의 강화에는 문화적 발전과 향유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회주의 생산의 증대가 “주택‧교육‧보건 등에 걸쳐 전全인민적 복지를 강화”하고 인민의 문화적 풍요를 가져오는 나라가 자본주의에 한나라라도 있는가? 자본주의에서 복지의 강화는 오직 노동자 인민의 투쟁의 성과이며 사회주의 체제로 변혁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자본과 국가의 양보책이었을 뿐이다. 이러한 성취도 계급투쟁의 약화에 따라 언제든지 무너질 수밖에 없는 그러한 불안정한 것들이었다.

이를 볼 때, 여전히 21세기를 살고 있는 전 세계 자본주의 인민들의 염원이 쏘련에서는 스탈린 시대에 이미 성취되지 않았던가!

계획과 시장의 문제

스탈린은 사회주의 생산의 경험을 이론적으로 총화하면서 “쏘련에서의 경제적 제 문제”라는 유명한 논문을 남겼다.

계획과 시장의 문제 중 어디에 집중해야 하는지, 둘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지의 문제는 쏘련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국가 모두에서 첨예하게 논란이 되는 문제였다.

자본주의는 상품생산과 교환, 시장이 지배하는 사회다. 자본주의 생산과 시장은 무정부성을 특징으로 한다. 사회주의 계획체제는 자본가들의 사적소유를 철폐하고 무정부성을 극복하여 노동자 인민이 집단적으로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이를 통해 이윤이 생산의 목적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발전과 복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회이다. 따라서 자본주의를 철폐한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상품생산과 시장을 종식시켜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단박에 행정적 명령으로 종식시킬 수는 없다. 특히 사회 전반의 소생산자들을 강제력을 동원하여 사회적 생산으로 몰아넣을 수도 없다. 소생산자뿐만 아니라 협동농장(콜호즈) 간 생산물의 거래와 국유기업과 콜호즈 생산물과의 교환도 상품거래였다. 물론 스탈린 시절에 국유기업의 생산물인 트랙터와 기계는 소유권이 이전되지 않고 임대되는 것으로 상품이 아니었으나 후르시초프 시절부터 기계와 트랙터는 상품이 되었다.

레닌과 스탈린은 소생산은 자본주의의 유산인데, 이 유산이 근절되지 않으면 소상품 생산은 사회주의 내 수정주의 사상의 경제적 기반이 되고 이를 통해 자본주의 반혁명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사회주의에서 계획과 상품생산과 시장은 어떠한 관계를 가져야 하는 것인가? 스탈린은 이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상품과 상품생산이 있는 곳에서는 가치법칙도 존재하지 않을 수 없다.

가치법칙의 작용 범위는 우리나라에서는 우선 상품 유통, 즉 매매를 통한 상품교환, 주로 개인 소비 상품 교환에 미치고 있다. 물론 이 분야에서는 가치법칙이 일정한 범위 내에서 조절자의 역할을 지니고 있다 … 그런데 가치법칙의 작용은 상품 유통범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 작용은 생산에도 미친다 … 문제는 생산과정에 지출한 노동력을 보상하는 데 필요한 소비품이 우리나라에서는 가치법칙의 작용을 받는 상품으로서 생산되며 실현된다는 데 있다 … 이와 관련하여 우리 기업소들에서는 독립채산제와 수익성 문제, 원가 문제, 가격 문제 등등과 같은 문제가 현실적인 의의를 가진다 … 그것은 생산 속에 은폐된 예비를 짓밟아 버리지 않고 탐구하며 발견하며 이용하는 것을 우리경제 일꾼들에게 가르쳐주므로 나쁘지 않다. 그것은 생산방법을 계통적으로 개선하며 생산원가를 저하시키며 독립 채산제를 실시하며 기업소의 수익성을 높이도록 노력하는 것을 우리 경제 일꾼들에게 가르쳐주므로 나쁘지 않다 … 불행은 가치법칙이 우리나라에서 생산에 영향을 준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불행은 우리 경제 일꾼들과 전체 일꾼들이 소수를 제외하고는 가치법칙의 작용을 잘 알지 못하며 그것을 연구하지 않으며 그것을 자기의 계산에서 고려할 줄 모르는 데 있다.”(스탈린, “쏘련에서의 경제적 제 문제”)

사회주의 생산을 조직한다는 것, 그것도 제국주의의 포위와 전쟁위협이라는 조건 속에서 전국적인 범위에서 생산을 조직하기 위해서 역시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에 정통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레닌이 강조했던 것처럼 행정에도 정통해야 한다. 사회주의의 지도자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사회주의 시장의 부분적인 활용을 넘어 시장사회주의로 나아간다면 그것은 우경적 오류일 것이고. 이는 종국에는 현실 사회주의의 사례가 보여줬던 것처럼 자본주의의 복귀를 낳을 수밖에 없다. 반면 사회주의에서 시장과 상품거래를 단박에 절멸시키려 하거나 독립채산제 같은 부분적인 이윤체계를 적절하게 활용하지 못한다면 원가절감과 기업수익성을 제고하지 못하고 경제를 침체시키는 좌경적 오류에 빠질 수 있다.

여기서도 계획생산이라는 경제적 조건 자체를 넘어 사회주의 정치적 지도의 문제가 핵심인 것이다.

무정부주의의 영향: 국가소유에 대한 부정적 태도

이른바 ‘좌파’들은 자본주의의 국가와 권력에 대해 부정적이고 심지어 혐오한다. 그런데 이른바 ‘좌파’들은 이를 넘어 쏘련과 현실 사회주의에서의 국가와 권력에 대해서조차 부정적이고 혐오한다. 이 점에서는 무정부주의자들도 마찬가지다. 무정부주의자들의 정치적 특성이 이른바 ‘좌파’들에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대다수 ‘좌파’들이 실제로는 범무정부주의자들인 것이다.

김정주 교수는 “대부분의 기업은 가급적 적은 목표 생산량을 할당받으면서 더 많은 설비를 보유하길 원했다. 따라서 그들이 보유한 생산능력이나 설비에 대한 거짓 보고가 만연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전국적, 전 인민적 계획에 있어서는 더더욱 전위당의 정치적 지도가 필요했다.

기업이나 공장단위 노조는 생산과 분배에서 지대한 역할을 했다. 레닌에 따르면, 사회주의에서 노조는 통치기관의 일부이면서도 개별 노동자들의 물질적 이해를 대변하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다. 사회주의에서 노조의 후자의 역할, 바로 이 때문에 노조는 당의 정치적 지도가 없다면 전 사회적 전 인민적 목표 보다는 기업, 공장단위 이익에 매몰되는 경향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김정주 교수의 쏘비에트 체제에 대한 대다수 부정적인 평가는 무정부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러다보니 쏘비에트 국유화, 국가의 역할에 대해 부정적이고 중앙계획과 참여에 대해 대립적으로 사고하고,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자주관리”를 강조하고 있다.

“스탈린의 조치들은 무자비할 정도로 신속하고 단호했다. 소비에트를 비롯한 모든 자치조직과 국가기구를 당에 종속시킴으로써,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사실상 당의 독재가 됐다. 모든 공장을 국유화하고 농업에서 집단농장화를 단행함으로써 ‘사회주의적 소유란 곧 국가 소유’라는, 무모하리만큼 단순한 원칙을 모든 인민에게 각인시켰다.”

“러시아혁명 이후 확립된 중앙계획경제는 결국 소비에트 정치가 당과 국가의 정치로 협소해지고 사회주의적 소유가 국가 소유로 귀결하면서, 모든 인민의 의지를 오직 ‘국가만이 대신할 수 있다’는 ‘사회주의 정치’에 대한 왜곡이 낳은 결과물이었다.”

“1917년 혁명 이후 러시아에선 모든 토지를 즉시 몰수해 농민들에게 분배했고, 모든 공장은 자본가의 경영이 아닌 노동자 자주관리를 통한 운영으로 전환했다. 그러나 혁명 이후 오랜 내전과 제국주의 국가들과의 전쟁이 벌어지며, 새로운 사회의 이상을 이야기하고 있기엔 너무도 절박한 절체절명의 상황이 펼쳐졌다. 사회주의로 나가고자 하는 첫 조치들은 원대한 이상의 구현보다는 지금 당장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임시방편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그 효과 또한 불확실했다.”(김정주, 같은 글)

김정주 교수의 주장 중 먼저 “모든 공장을 국유화” 했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핵심적인 산업과 은행을 국유화 했다. “모든 토지를 즉시 몰수” 했다는 주장 역시 사실과 다르다. “모든 공장의 노동자 자주관리 운영” 역시 사실과 다르다. 사실을 말하자면, 레닌은 좌익공산주의자들이 노동자 자주관리를 주장할 때 이를 무정부주의라고 신랄하게 비난했다.

“조합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는 행정에의 참가라는 실제의 경험을 고려하지 않고, 또한 달성된 성공이나 정정된 오류에 엄밀히 입각하여 이 경험을 더욱 발전시키려 하지 않고, 경제관리의 기관들은 ‘선출하는 생산자대회들 혹은 생산자대회’라는 것을 직접적으로 슬로건으로 내걸고 있다. … 그리고 우리는 소비에트 국가에 의해 시작된 새로운 경제형태들의 건설이라는 실제의 업무를 계속하고 시정해가는 것이 아니라, 이 업무에 대한 쁘띠부르조아적이고 무정부적인 파괴를 목도하고 있는데, 이러한 파괴행위는 부르조아 반혁명의 승리로 귀결될 뿐이다.”(V.I 레닌, “러시아공산당 제10차대회의 결의. 우리 당내의 생디칼리즘적, 무정부주의적 편향에 대하여의 최초의 초안”)

이처럼 무정부주의적 좌익공산주의자들의 제안이 고려되기는커녕 철퇴를 맞았다. 그런데 여기서 김정주 교수는 “노동자 자주관리”가 시행됐다는 주장으로 사실관계에서만 오인한 것이 아니다. 그는 노동자 자주관리라는 “새로운 사회의 이상”, “원대한 이상”이 내전과 제국주의 개입으로 인해 무너졌다고 한탄하며 가치판단을 개입시키고 있다. 따라서 그러한 무정부주의적 관점에 입각해 봤을 때, 쏘련은 “당의 독재”가 됐고, 쏘비에트 정치는 “당과 국가의 정치로 협소화”되고, 모든 인민의 의지를 “국가만이 대신”함으로써 “‘사회주의 정치’에 대한 왜곡”을 낳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사회진보연대>는 쏘련이 프롤레타리아 독재 대신에 당독재를 낳았고 이것을 ‘일괴암주의”(一塊岩主義)’라며 당의 정치적 통일과 규율, 전위성을 비난한다. 이 점에서는 김정주 교수도 사회진보연대 류의 범무정부주의자들과 사회주의관, 쏘비에트관이 일치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사회진보연대가 당독재 대신에 올바른 독재를 옹호하지 않는 것처럼, 김정주 교수 역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강화를 위한 방책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소비에트를 비롯한 모든 자치조직과 국가기구를 당에 종속시”켰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노조의 경우에도 앞에서 말했듯 레닌 당시부터 노조는 국가기구의 일부이자 동시에 독립적인 조직임을 강조했다. 오히려 전시 공산주의 시절에 “노조의 국가기구화”를 주장한 것은 트로츠키였다. 레닌과 스탈린의 당과 국가기구의 관련에 대한 입장은 국가기구를 당에 종속시키려 하기 보다는 철저하게 그 성격을 구별하는 것이었다. 당은 선진적 일부이기 때문에 국가가 당과 일체화 되는 것을 오히려 반대했던 것이다. 당에 종속되는 것은 자치조직과 국가기구가 아니라 당원들이었다. 이는 볼셰비키당의 엄격한 전통이자 일관된 원칙이었다.

스탈린은 심지어 모스크바 시 스탈린 선거구에서 선거 전 회의에서 한 연설에서 “선거 운동이 집권 당인 우리의 공산당을 심판하는 선거자들의 법정”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공산당은 비당원들과 동맹하여 선거에 참가”한다고도 했다.

볼셰비키의 원칙이나 원리는 당이 각급 대중조직과 엄격하게 분리되면서도 당은 지도하는 것이라고 했다. 당의 대중조직에 대한 지도는 성격이 다른 “조직”을 하부에 “종속”시킴으로써 가능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올바름과 헌신과 동의와 설득으로 가능한 것이다. 이를 “종속”이라고 비난한다면 당의 정치적 지도를 거부하고 분산적이고 무정부적인 원리를 지지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김정주 교수는 “사회주의적 소유란 곧 국가 소유”라는, 무모하리만큼 단순한 원칙을 모든 인민에게 각인시켰다”라고 주장하면서, 이 주장에 주를 달아 “스탈린 시대에 생겨난 집단농장(콜호즈)은 농민들의 협동조합 형태로 구성됐기 때문에 국가가 운영하는 국영농장과는 다른 것이었다 … 그러나 집단농장의 모든 생산활동과 운영방식 또한 국가의 엄격한 통제 하에 있었다는 점에서, 토지 사용에 관한한 모든 권한은 실질적으로 국가에 귀속될 수밖에 없었다”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토지 사용에 관한한 모든 권한”이 “실질적으로 국가에 귀속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 김정주 교수에게는 비난받을 일이다. 협동조합이라 할지라도 그 토지 소유를 매매하지 못하게 철저하게 관리하는 것은 사회적 소유를 보전하는 길이다. 협동조합 토지가 국가소유라 하더라도 그 협동조합이 조합으로서의 임무에 충실하다면 그 토지는 영구임대될 수 있었고 임대료는 면제되었다. 이 대가로 협동조합은 일정 정도의 생산물을 국가에 판매하고 남은 잉여 생산물을 판매해야 했다.(이 부분은 시드니 웹 · 베아트리체 웹SIDNEY and BEATRICE WEBB, “쏘비에트 러시아에 관한 진실THE TRUTH ABOUT SOVIET RUSSIA”, 1942년 초판을 참고)

그런데 이는 “종속”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국가에 의한 협동조합 생산활동과 운영의 철저한 보장에 가깝다.

쏘련에서 주요 기업, 주요 토지와 산림, 강과 주요 공장, 광산, 철도, 은행, 기본적 주택, 국영농장과 기계-트랙터스테이션(machine-tractor stations)은 기본적으로 국가소유, 즉 전 인민적 소유였다. 이는 헌법에도 명시됐다. 국가소유는 국가가 소멸되기 전의 낮은 수준의 공산주의, 즉 사회주의에서 국유화는 가장 높은 수준의 사회화이다.

반면 콜호즈(협동농장)는 사회화된 기업이지만 국가 소유 보다는 더 낮은 수준의 사회화된 공동 소유형태이다. 개별적 협동조합도 있었고 연합된 협동조합도 있었다. 이 협동조합은 국가가 소유하여 협동조합에 사용권을 임대한 경우도 있었고, 협동조합 참여 농민들이 공동소유권을 가진 경우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협동농장의 생산물은 상품생산으로 국유기업의 생산물이나 다른 협동농장의 생산물과 상품으로 거래되었다.

쏘련에서는 생산수단의 사적소유와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를 철폐한 사회였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가들이 기업과 은행, 토지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 소유였다. 쏘련이 해체된 이후 올리가르히라는 러시아판 재벌이 주요 기업을 소유한 것을 볼 때도 이를 입증할 수 있다.

“사회주의적 소유란 곧 국가 소유”라는 원칙 때문에 쏘련이 해체된 것이 아니다. 반대로 국가소유 및 협동조합적 소유가 해체되고 사적 소유가 부활하면서 자본주의로 복귀했다. 김정주 교수는 사회주의적 소유의 최고 형태인 국가소유에 대해 대단히 부정적인 태도를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김정주 교수는 “러시아혁명 이후 확립된 중앙계획경제는 결국 소비에트 정치가 당과 국가의 정치로 협소해”졌다고 비난한다. 그런데 김정주 교수는 여기서 “소비에트”와 “국가”를 어떻게 사고하고 있는가? 주지하듯 쏘련은 쏘비에트사회주의연방공화국이다. 즉 쏘련은 쏘비에트 체제이고 쏘비에트 국가, 곧 쏘비에트가 중심이 되는 대중국가, 인민의 국가이다. 그렇다면 김정주 교수의 주장은 “소비에트 정치가 곧 당과 소비에트의 정치로 협소”해졌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김정주 교수는 말이 되지 않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김정주 교수는 여기서 당이 쏘비에트 국가 위에 군림하면서 쏘비에트를 협소하게 하면서 관료화 되거나 대중참여를 억압하고 민주주의를 부정했다는 주장을 하는 것으로 보여 진다. 그렇다면 스탈린 시절 대중참여와 민주주의가 어떻게 작동했는지 사례를 들어보겠다.

스탈린 시절인 1936년에 새로운 쏘비에트 헌법이 제정됐다. 이 헌법에서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를 철폐하고 생산의 권리에 대한 보장, 노동자와 인민, 여성의 권리, 각 민족의 권리가 명시됐다. 이 헌법 초안은 약 5개월간에 걸쳐 전체 인민이 참여하여 열광적으로 토론이 됐다. 국가에서는 헌법초안을 인쇄해서 배포했다. 헌법초안은 10여 번에 걸쳐 발행되었고 약 6천만장이나 발행됐다. 게다가 이 헌법초안은 팜플렛 형태로 1만개 이상의 신문에 전문이 실렸고 총발행은 370만 부수에 달했다.

모든 농장, 공장, 광산, 학교, 노동자 클럽, 노조, 소비자협동조합, 지방 쏘비에트에서 수차례 토론이 열렸다. 이 모든 곳에서 52만7천 번의 회합이 열리고 3천650십만 명이 이 회합에 참여하였는데, 이들 모두는 의견을 제출하고 수정안을 낼 자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 초안에 대해 개인과 단체에서 제안된 개정 의견은 총 13만4천회에 달했고 이들 중 일부는 채택되었다.(시드니 웹 · 베아트리체 웹, 같은 글 참고)

이 보다 쏘비에트 민주주의와 주민 참여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있을까?

지금까지 일국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문제, 농촌 집산화의 시기와 방법의 문제, 중공업 우선 정책, 계획과 시장의 문제 등 스탈린 시대 쏘련에서 첨예한 정치적 논란이 된 문제들을 살펴보았다. 쏘비에트 사회주의 건설의 과제 앞에서 그 중심에는 항상 당이 있었고 당과 대중조직, 대중 간 결합과 지도의 문제들이 있었다. 맑스주의 원칙에 충실할 때 쏘련은 전진했고, 맑스주의를 수정했을 때 쏘련은 후퇴하다가 결국 자본주의 반혁명으로 해체됐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건데, 이처럼 계획경제의 객관적 존재만으로 쏘비에트의 성취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김정주 교수의 스탈린과 쏘련에 대한 평가는 자가당착적이다. <변혁정치>에 실린 김정주 교수의 글에 대해 <변혁당>이 아무런 이견도 표시하지 않고 글을 실을 것을 볼 때, 이 글은 <변혁당>의 입장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쏘련사회주의와 현실사회주의에 대해 맑스주의 입장으로 고찰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왜곡하고, 심지어 무정부주의적 사상에 기대면서 “사회주의 대중화”를 운운한다고 사회주의 대중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 대중화를 주장하는 주체들이 올바른 혁명적 역사의식과 맑스주의의 과학적 사상으로 무장하여 이를 대중들이 받아들일 때만이 사회주의가 대중화 되고 한국사회의 변혁도 실현할 수 있는 것이다.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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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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