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권의 파쇼성을 한사코 부정하려는 사람들에 대해

그림: 박문석

박근혜 정권이 파쇼가 아니라고 한사코 주장하는 사람들, 세력들이 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을 포함한 이른바 경제주의 노선에 빠져 있는 ‘좌파’ 일부들이다. 권력기구와 그 하수기관들이 총출동한 댓글공작과 개표 조작 같은 총체적 부정선거로 권력을 찬탈해도 이들에게는 박근혜 정권이 파쇼 권력이 아니다.

군사 파쇼 정권 이후에 최초로 내란죄가 부활하고 합법적으로 활동하던 통합진보당이 해체당하며 진보정당 국회의원을 비롯한 활동가들이 감옥에 수년 동안 유폐돼도 이들에게는 파쇼권력이 아니다. 이 권력이 세월호 학살을 저지르고 학살만행을 은폐하기 위해 조작과 왜곡을 일삼고 세월호 의문사 유가족들과 국민들을 감시, 통제, 사찰해도 이들에게는 파쇼 권력이 아니다. 기본적 생존권을 외치며 싸우는 농민을 학살해도 이들에게는 파쇼 권력이 아니다.

제국주의 세력들과 반도에서 연일 전쟁책동을 강화하고 평화를 송두리째 파괴하는 전쟁 책동을 벌여도, 이승만, 박정희 군사 파쇼를 정당화하고 민중 대학살을 은폐하고 배반의 역사를 써도 이들에게는 파쇼권력이 아니다.

민주노총과 공공운수노조가 두 번씩이나 침탈당하고, 지역본부 및 노동조합들이 연거푸 침탈당해도 이들에게는 파쇼권력이 아니다. 민주노총 위원장을 파렴치한 중대 폭력범으로 내몰고, 파쇼 언론은 비방과 조롱을 일삼아도, 군사 정권 시절의 소요죄를 부활시켜도 이들에게는 파쇼 권력이 아니다. 5인 미만 인터넷 언론을 폐간하고, 국민을 테러리스트 취급하는 테러방지법과 복면금지법 제정 기도로 집회 및 시위를 말살해도 이들에게는 파시즘이 아니다. 이제와 발뺌을 하고 있지만, 정권이 자본을 위해 ‘긴급명령’을 발동해서라도 노동악법을 통과시키겠다고 검토를 해도 이들에게는 파시즘이 아니다.

이들은 도대체 박근혜 권력의 야수성이 어느 정도까지 드러나야 파시즘이라는 것을 인정할 것인가?

이들은 왜 박근혜 정권의 파쇼성을 한사코 부정하는가?

이들의 개인적 인식이 어떻든 이들의 자유지만, 이러한 인식이 파시즘에 대한 우리들의 저항과 투쟁을 가로막을 것이기 때문에 심각하게 비판받아야 한다. 그런데 이들은 왜 한사코 박근혜 정권이 파쇼 권력임을 부정하는가?

이들은 파시즘으로의 국가 형태 전환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파시즘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들이 말하는 파시즘으로의 국가 형태 전환은 바로  ‘의회 해산과 일당독재 체제’ 수립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들은 파시즘의 대두와 강화, 파시즘의 최종적 승리라는 상황 중에서, 파시즘의 최종적 승리 이후에 나타난 극단적인 상황만을 염두에 두고 이 상황이 아니면 파시즘이 아니라는 규정을 한다. 이들은 독일 파시즘의 최종적 승리 이후에 나타난 파시즘의 중대한 지표만을 가지고 이러한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파시즘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의회 해산과 일당독재라는 파시즘의 중대 지표만을 고집하면서, 파시즘의 대두와 강화 시점에서도 권력의 파시즘적 성격을 부정하고 이로 인해 파시즘을 막을 수 없게 만든다.

그런데 만약 박근혜 정권 하에서 의회 해산과 일당독재로 전환되는 끔찍한 상황이 온다면, 그 때에는 이미 변혁운동을 하는 조직이나 개인들의 목이 달아난 상황이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박근혜 파쇼 권력의 무자비한 폭압을 보면서도 종파주의와 과학적 인식의 부족으로 인해 파시즘을 부정하다가 결국은 파시즘의 최종적 승리가 와서 파시즘을 인식할 수 있게 되는 상황에서는 인식활동을 하는 두뇌를 떠받치고 있는 목이 달아난 상황이 될 것이기 때문에 평생 파시즘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게 되는 불행한 사태를 맞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설령 운이 좋아 목이 보전된다 하더라도 이때에는 파시즘이라는 괴물을 막기에는 때가 너무 늦어서 훨씬 더 많은 희생을 치러야지만 파시즘을 격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의회해산과 일당독재 체제로 전환되지 않았기 때문에 현 박근혜 권력이 파시즘이 아니라면, 박정희 군사 파쇼 독재도 파쇼 권력이 아니게 된다. 박정희는 군사 쿠데타로 등장했지만, 이후 대통령 선거를 통해 합법성의 외양을 띠고, 다당제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의회 해산과 일당 독재 체제를 근거로 파시즘이라고 인정하는 히틀러 하의 독일 파시즘의 경우에도, 처음에는 합법적인 선거로 등장하고 다당제 체제를 유지했다.

이들은 현 박근혜 권력을 파시즘으로 규정하고 이에 맞서, 노동자 계급이 중심이 돼서 현 박근혜 파쇼 권력에 반대하고 저항하는 모든 세력을 결집시켜 파쇼 권력을 분쇄하자는 주장에 대해 극렬하게 반대한다. ‘반파쇼 민주주의 투쟁’에 대한 반대이다. 왜 이들은 반파쇼 민주주의 투쟁을 한사코 반대하는가?

이들은 반파쇼 민주주의 투쟁 혹은 반파쇼 인민전선 투쟁을 하는 것은 노동자 계급의 독자성을 잃어버리게 하고, ‘노자 협조주의’, 또는 ‘야권연대’로 귀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도대체 노동자 계급이 중심이 되어 현 박근혜 파쇼 정권을 끌어내자고 하는 주장이 왜 노자협조가 되고, 야권연대가 되는 것인가?

이들은 먼저 1935년 코민테른(국제 공산당) 제7차 대회에서의 ‘반파쇼 인민전선’이 바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부정하는 부르주아 노자협조주의의 전형이고, 이 노자협조주의 노선이 스페인 인민전선 정부를 낳게 하고, 이 정부의 잘못된 노선 때문에 스페인 내전이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는 선험적 인식을 하고 있다. 여기서 세세하게 다룰 부분이 아니지만, 이들은 영웅적이고 위대한 스페인 인민들의 계급전쟁이었던 ‘인민전선’을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다. 지배계급만 역사왜곡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도 특유의 종파주의로 인해 역사왜곡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일명 <디미트로프 테제>로 알려져 있는 코민테른 7차 대회의 위대한 결정에 대해서도 심각한 왜곡과 비방을 하고 있다.

코민테른 7차대회 결정 초안의 기초자인 디미트로프는 반파쇼 인민전선에 대해 무엇이라고 하는지 보자! 길더라도 역사적으로 중요한 글이기 때문에 인용해보겠다.

우리는 소비에트 민주주의의 지지자이지만 노동자계급이 오랜 세월에 걸쳐 완강한 투쟁으로 쟁취한 민주주의적 획득물을 한걸음도 양보하지 않고 지켜내며 또 그 획득물을 확대시키기 위해 강고하게 투쟁할 것이다.

영국의 노동자계급이 파업의 권리, 노동조합의 합법적 존재, 집회·출판의 자유, 선거권의 확장 등을 쟁취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렀는가! 19세기 프랑스에서의 혁명적 전투에서 기본적 권리와, 착취자와 투쟁하기 위해 세력을 조직할 합법적 가능성을 획득하려고 몇만의 노동자가 생명을 바쳤는가! 모든 나라의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조아민주주의적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많은 피를 흘렸다. 그러므로 그들은 당연히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 싸울 것이다.

부르조아민주주의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모든 조건 아래서 동일하지는 않다. 예를 들어 10월 혁명시에 러시아의 볼셰비키는, 부르조아 민주주의의 옹호를 내걸고 프롤레타리아독재의 수립에 반대한 모든 정당과 필사적으로 투쟁하였다. 볼셰비키가 이러한 정당들과 투쟁한 것은 당시 부르조아민주주의라는 기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에 반대하는 투쟁으로 모든 반혁명 세력을 동원하기 위한 기치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금 여러 자본주의국가들의 상태는 이와 다르다. 현재 파시스트 반혁명파는 근로자에게 매우 야만적인 착취와 억압의 체제를 만들어 내려고 부르조아민주주의를 공격하고 있다. 지금 많은 자본주의국가의 근로대중은 구체적인 당면문제로, 프롤레타리아 독재인가 아니면 부르조아민주주의인가가 아니라 부르조아민주주의인가 아니면 파시즘인가 사이의 선택에 직면해 있다.”(G.M. 디미트로프, 파시즘에 반대하여 노동자계급의 통일을 이루기 위해(1935813일 공산주의인터내셔널 제7회 대회에서의 보고 맺음말))

위 인용문 앞에 나오는 문장이지만, 이 당시에도 반파시즘 투쟁이 “대중에게 민주주의적 환상을 심어 주지 않으려고, 민주주의적 요구를 적극적으로 정식화하는 것에 대한 의구심이 있었다.”라는 제기가 있었다. 디미트로프는 이러한 일각의 우려에 대해 “그것은 부르조아민주주의에 대한 태도의 문제를 잘못하여 비변증법적으로 제기하는데서 오는 것이다. 우리 공산주의자는 소비에트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지지자다.”라고 주장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인가 아니면 부르조아민주주의인가가 아니라 부르조아민주주의인가 아니면 파시즘인가 사이의 선택에 직면해 있다.”는 부분이 바로 코민테른이 프롤레타리아 독재 노선을 폐기한 것이 아니냐는 근거로 종종 인용된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디미트로프 주장처럼 비변증법적이다. 일국혁명과 세계혁명의 관계도 통일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비변증법적으로 보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민주주의 투쟁과 프롤레타리아독재 투쟁의 관계도 이처럼 비변증법적으로 바라본다.

디미트로프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레닌의 글을 인용한다.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은 프롤레타리아트를 사회주의혁명으로부터 샛길로 빠지게 할 염려가 있다든가 혹은 사회주의혁명을 가려 버림으로써 그늘로 밀어넣을 염려가 있다는 등으로 생각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승리한 사회주의에서 완전한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밖에 없듯이 민주주의를 위한 전면적이고 일관된 혁명적 투쟁을 수행하지 않은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조아지에 대한 승리를 준비할 수 없다.”(같은 글)

디미트로프는 여기서 “민주주의적 권리를 위한 투쟁을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노동자계급의 투쟁과 결부시킬 수 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선 부르조아민주주의를 옹호하는 문제에 대한 도식주의적 태도를 버릴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디미트로프는 “부르조아민주주의인가 아니면 파시즘인가”라는 정식화는 프롤레타리아독재를 폐기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도식주의적 의구심에 대해 “프롤레타리아혁명으로의 이행 혹은 접근의 형태를 찾아내는” 것에 모든 주의를 집중하라는 레닌의 주장을 소개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에의, 즉 부르주아독재 타도에의 이행과 접근의 형태에 관해 말했던 것이지 부르조아독재와 프롤레타리아독재 사이의 이행형태에 관해서는 전혀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디미트로프, <파시즘의 공세와, 파시즘에 반대하여 노동자계급의 통일을 추구하는 투쟁에서의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임무>(1935년 8월 2일, 공산주의인터내셔널 제7회 대회에서의 보고))

사회주의 혁명을 외치면서도 박근혜 정권 퇴진 투쟁이 변혁에 걸림돌이라고 주장하는 세력들과 개인들은 혁명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단 한 번도 현실에서 사고해보지 않은 구제불능의 ‘좌익 몽상가’들이다. 이들은 ‘이행강령’을 신주단지처럼 모셔놓고 시도 때도 없이 외치면서도, 변혁을 위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이행과 접근의 형태”에 대해 단 한 번도 고민해보지 않았다.

도대체 노동자 계급이 중심이 되어 현 박근혜 파쇼 정권을 반대하는 모든 계급과 세력을 결집시켜 파시즘을 분쇄하자는 주장이 왜 “노자협조”가 되고, 몰계급적이고 의회주의적인 야권연대가 되는 것인가?

파시즘에 대한 고전적 정의가 무엇인가? 파시즘은 “금융자본의 가장 반동적이며 가장 배외주의적이며 가장 제국주의적인 분자의 공공연한 테러독재다.” 금융자본 즉 독점자본의 “가장 반동적이며 가장 배외주의적이며 가장 제국주의적인 분자의 공공연한 테러독재”를 분쇄하는 것이 과연 변혁을 가로막는 것인가?

위기에 처한 독점자본과 독점자본주의 체제를 영속화하기 위해 노동자 민중에 대한 테러독재를 강화하고 있는 권력을 끌어내리는 것이 과연 노자협조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

이들은 ‘자본주의 철폐 투쟁’을 해야지 “박근혜 정권 퇴진 투쟁을 해봐야 또 다른 자본가 정부가 들어서면 끝이다”라는 식의 주장을 하면서 정권 퇴진 투쟁에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이다. 노동자가 민주주의 투쟁의 전위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부정하고 민주주의 수호, 반파쇼 민주주의 투쟁을 “쌍팔년도 개뼉다구 같은 소리”라고 비아냥거리고 있다. 현실 정세가 ‘쌍팔년도’로 나아가고 있는 것을 종파주의 관념으로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치는 경제의 집중적 표현이다”라는 말이 있다. 과연 독점자본을 위해 노동자 민중에 대한 테러 독재를 강화하고 있는 박근혜 정권을 분쇄하지 않고 어떻게 사회주의로 이행하고 접근할 수 있다는 말인가? 자본을 위한 상부구조로서 고도로 조직된 폭력체인 국가권력을 내버려 둔 채 자본의 지배체제를 혁파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들은 원리주의적, 근본주의적 태도로 혁명을 관념적으로 희화화 하고 박근혜 정권에 반대하고 분노하고 있는 대중들에게 회의주의와 패배주의를 심어 준다.

이들은 반파시즘 투쟁과 야권연대를 연결시키는데 과연 반파시즘 투쟁이 의회주의 세력들의 몰계급적 주장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한쪽에서는, 과거에도 그랬고 또 2016년 총선을 앞두고, 우경적인 의회주의적 시도가 강화되고 있는 반면에, 다른 한쪽에서는 야권연대에 대한 비판을 빌미로 반파쇼 민주주의 투쟁을 반대하는 ‘좌익적’ 오류가 존재하고 있다. 관념적 ‘좌익’들은 반파시즘 민주주의 투쟁이 노동자 계급의 독자성을 상실하고 새정치민주연합(새민련)과 같이 하는 투쟁이라는 근거를 들어 노자 협조주의라는 주장도 한다. 이들 종파주의자들에게는 새민련이 파쇼 지배 체제의 부속물이라는 비판도, 여야의 협잡물인 국회가 아니라 대중투쟁을 중심으로 하자는 주장도, 새민련에 대한 대대적인 폭로와 규탄도 종파주의적 편견과 아집에 사로잡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반파쇼 민주주의 투쟁은 노동자 계급이 중심이 되어 박근혜 파쇼 권력에 반대하는 모든 계급과 세력을 총집결시키는 투쟁이라고 했다. 그런데 과연 한 때 권력을 잡고 지배계급의 일파인 새민련이 박근혜 정권을 반대하는 투쟁에 일관되게 같이 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럴 가능성이 추호도 없지만, 새민련이 노동자 민중의 투쟁이 거세지자 마지못해 반파쇼 투쟁에 임한다고 하면 그것이 과연 문제가 될 수 있는가?

그런데 현실에서 새민련의 문제는 새민련이 아니라 다른 정치적 대안이 없어서 새민련과 새민련 소속 정치인들을 번갈아가며 지지하는 대중들의 문제다. 이들 중 상당수는 노동자 계급의 일원이거나 소자산가 계급이기도 하다. 이들은 아직 자본주의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지만, 부정선거를 반대하여 투쟁하거나, 세월호 학살에 분노하여 진상규명을 외치며 투쟁하거나, 박근혜 정권의 역사왜곡에 맞서 투쟁하거나, 언론 민주화를 위해 싸우거나, 천안함 진상규명을 외치며 싸우거나, 4대강 반대와 원전과 케이블카 반대, 제주 군사기기 건설 반대, 송전탑 건설 반대 등 다양한 영역에서 투쟁하고 있다. 이들 중에는 사회주의연하는 정치세력과 개인들이 근본주의적 관점으로 현실 투쟁에서 기권할 때 이들보다 더 확고하고 열정적으로 박근혜 권력을 규탄하며 싸우기도 한다.

이들이 과거 노무현을 지지했고, 현재 새민련의 지지자라고 하여 반박근혜 투쟁 전선에서 내칠 것인가? 새민련의 새로운 인물을 번갈아가며 지지하도록 고립, 방치할 것인가? 이들이 자본주의를 반대하지 않는다 하여 계급성이 부족하다고 이들의 투쟁에 기권할 것인가?

오히려 이들은 반파쇼 민주주의 투쟁에서 같이 투쟁해야 할 주요한 세력들이다. 노동자 계급이 반파쇼 민주주의 투쟁에 적극적으로 임함으로써 이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투쟁에 나설 때만이 이들을 새민련과 부르주아 정치인들에 대한 지지자가 아니라 변혁적인 노동자 계급의 확고한 지지세력으로 만들 수 있다. 여기서 변혁적인 노동자 계급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원래는 이는 노동자 계급의 선진적이고 전투적인 변혁정당을 말한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이러한 정당은 아직 없다. 노동자 계급은 노동자 계급이라는 계급적 처지 그 자체만으로 변혁적으로 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선진 활동가들과 노동자 계급이 이러한 민주주의 투쟁에 적극 나서서 각성한 계급이 될 때만이 변혁적인 노동자 계급이 되어 민중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

물론 박근혜 정권 퇴진 투쟁 역시 그 자체로 변혁적 투쟁으로 나아갈 수는 없다. 그 투쟁의 양상과 정도에 따라, 합법적인 수준으로 대통령이 하야하고 다시 대선이 치러지거나 하여 새민련이 그 수혜자가 될 수도 있다. 아니면 그 양상이 더 심각하고 격렬하게 되어서 파쇼 지배 체제 자체를 뒤흔들 수도 있다. 이 투쟁의 목표가 더 격렬하게 더 근본적으로 될 수 있도록 투쟁해야 한다. 그러나 그 투쟁의 수준이 아직 변혁정치세력의 부재로 말미암아 부르주아 제도권 정치를 재생한다 하더라도 노동자 민중은 이 투쟁을 통해 계급역관계를 변화시키고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하게 될 것이다.

파시즘을 부정하면 어떠한 해로운 결과가 초래되는가?

단지 파시즘의 성격을 인정하느냐 마느냐의 학문적인 문제라면 그다지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없다. 또한 박근혜 정권에 대해 파시즘이라는 규정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 반동적 성격을 포착하고 거기에 걸맞은 투쟁에 나서고 있다면 그것이 그렇게 문제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

12월 12월 <노동개악 분쇄! 박근혜 정권 퇴진! 총파업 성사를 위한 활동가대회>에 제출된 글에서도 현 정권의 파쇼적 성격을 부정하는 내용의 글이 제출됐다.

2) 반 박근혜 전선(공동투쟁)의 의의, 한계, 과제

▶ 반 박근혜 전선이 강화되고 있으며 그 정치적 성격 또한 수렴되고 있음

– 2012년 대선 불복, 세월호 투쟁 등을 두고 운동진영 내에서 ‘박근혜 퇴진’ 투쟁을 둘러싸고 이견이 존재한 바 있음. 또한 ‘통진당’ 강제 해산에 대한 투쟁에서도 공동대응이 미약했음.

– 그러나 노동개악/역사교과서 국정화 저지를 매개로, 또한 지난 11월 14일, 12월 5일 1, 2차 민중총궐기 투쟁을 계기로 반 박근혜 전선이 강화되고 있으며 그 정치적 성격 또한 박근혜 정권 퇴진 요구로 수렴되고 있음. ……

▶ 반 박근혜 전선이 여전히 민주 대 반민주 구도에 갇혀 있는 것이 약점으로 작용하고 있음.

– 박근혜 정권의 행태를 두고 반노동/반민주/반민생 정권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정치 선동 차원에서 문제될 바는 없음. 그러나 박근혜 정권의 정치(사회과학적)적 성격을 이른바 ‘유신 독재’ 내지 ‘파시즘’으로 규정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임

– 지금의 정세는 세계적으로 자본주의(세계체제)/부르주아 민주주의 자체를 문제 삼아야 하는 형국임. 한국의 정세(계급역학) 또한 과거의 민주 대 반민주 구도를 넘어 노동 대 자본의 대립이 정세의 중심을 이루고 있음

– 노동자 계급이 민주주의 투쟁에서도 앞장서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 근거와 전망은 노동자계급 독자의 이데올로기에 바탕해야 하는 것임. 즉 민주주의 투쟁과 자본가정권(부르주아민주주의) 철폐 투쟁 사이에 만리장성을 쌓아서는 안 됨.”(김동수(노동전선), <민주노총 총파업을 아래로부터의 투쟁을 통해 현실화시키자!)

왜 “운동진영 내에서 ‘박근혜 퇴진’ 투쟁을 둘러싸고 이견이 존재한 바 있”는가? 그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한 편에서는 박근혜 정권이 개악하려고 하는 노동법 개악의 개별 정책을 반대하는 투쟁을 통해 이후 박근혜 정권 퇴진으로 나아가자고 하는 세력이 있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이미 박근혜 정권은 총체적 부정선거로 등장한 찬탈 정권이고, 세월호 학살에 더해 노동자에 대한 총공세를 자행하는 정권이기 때문에 박근혜 정권 퇴진이라는 정치적 요구를 전면화 해야 한다는 주장의 대립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정권 퇴진 투쟁이 현실성이 없다는 것과 이미 대중적 투쟁 속에서 현실적인 요구로 되고 있다는 주장의 대립도 있었다. 또한 위에서 언급한 바처럼, 정권 퇴진 투쟁은 자본주의 반대를 내걸지 않고 있다는 ‘근본주의’ 세력과 반대로 정권 퇴진 투쟁을 전면화 하지 않고 자본주의 반대를 외치는 것은 현실에서 권력과의 투쟁을 회피하는 공허한 주장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대립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의견 대립은 “반 박근혜 전선이 강화되고 있으며 그 정치적 성격 또한 박근혜 정권 퇴진 요구로 수렴되”고 있다는 주장처럼, 객관적 사태의 추이와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대중들의 요구 속에서 자연스럽게 정권 퇴진 투쟁 요구가 터져 나오면서 정리가 됐다.

그런데 “‘통진당’ 강제 해산에 대한 투쟁에서도 공동대응이 미약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통진당’ 즉 통합진보당 강제 해산은 박근혜 정권의 부정선거와 함께 파쇼 권력의 파쇼적 본질을 일깨우는 신호탄이 됐다. 이때 내란죄가 부활됐다. 정의당과 새민련은 파쇼 권력이 알오(RO)사건 조작으로 내란죄 부활을 통해 종북몰이 공세를 강화하자, 이석기 의원 국회 제명에 동조함으로써 파쇼권력에 동조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운동진영 내부에서는 이러한 중대한 사태를 보면서도 정권의 파쇼성을 부정하며 안이하게 인식하거나 종파주의적으로 대응했다. 파쇼 권력은 마침내 통합진보당 해체에 이어 개별 노동조합과 민주노총 자체를 말살하고자 하는 시도를 하게 됐다. 파쇼 권력의 파쇼적 탄압 고조의 중대한 신호탄이었던 통합진보당 해체를 강 건너 불 보듯 한 결과 파쇼 권력의 공세가 한층 더 강화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반 박근혜 전선’은 확고하지 못하고 미약하지만, 박근혜 정권의 폭압에 반대하여 반파쇼 민주주의 투쟁이 폭넓게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민중 총궐기 투쟁본부가 1차, 2차 총궐기 집회를 통해 이 전선을 부분적으로 끌어가고 있지만, 총궐기 집회 준비 기구 이상으로 나아가고 있지 못하여, 이것이 <박근혜 독재 정권 퇴진 투쟁본부>처럼, 확고하고 일관된 반파쇼 민주주의 투쟁 기구가 되지는 못하고 있다. 게다가 이 투쟁을 주도할 노동자 계급은 민주노총 중심으로 집회에서 주요한 투쟁을 했지만, 실질적인 총파업 투쟁을 조직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 그 한계가 과연 “반 박근혜 전선이 여전히 민주 대 반민주 구도에 갇혀 있는 것이 약점으로 작용”해서 그런 것인가? “박근혜 정권의 행태를 두고 반노동/반민주/반민생 정권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정치 선동 차원에서 문제될 바는 없”으나 “‘유신 독재’ 내지 ‘파시즘’으로 규정하는 것은” ‘사회과학적’이지 못한 문제인가?

“반노동/반민주/반민생 정권”이라는 박근혜 정권이 보이는 ‘행태’가 바로 박근혜 정권의 성격을 파시즘으로 규정하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파시즘을 다시 고전적으로 정의하자면, 바로 위기에 처한 독점자본을 위한 “가장 반동적이며 가장 배외주의적이며 가장 제국주의적인 분자의 공공연한 테러독재다.” 박근혜 정권의 파쇼적 억압은 독점자본의 이해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 바로 독점자본의 이해를 위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악법을 도입하고 노동조합을 말살시키고 민생을 파괴하고 민주주의를 말살시키는 것이다.

‘유신 독재’(회귀)는 박근혜 파쇼 권력의 직접적인 지향점이다. 물론 대중적 저항을 모조리 진압해야 한다는 정치적 부담이 있기는 하겠지만, 박정희 시대를 찬양하고,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역사 쿠데타를 자행하는 정권의 시도는 이 지향점과 직접 관련이 있다. 현 지배계급은 박정희 시대의 이데올로기로 무장하고 박정희와 전두환 시대의 인물 구성들로 채워지고 있다.

박정희 군사 파쇼 권력은 노동자 민중에게는 지옥이었지만, 한국에서 독점자본의 성장과 영구적 지배 체제를 구축하는데 최상으로 복무했다. 반공주의로 무장하고 장시간 노동, 저임금, 노조 파괴, 인권 유린, 노동자와 민주인사에 대한 해고 구속 및 잔학한 고문과 암살, 학살로 권력을 유지했던 잔혹한 파쇼 지배 체제였다. 박근혜 권력이 과연 파시즘이 아니고 유신을 지향하지 않는가?

반 박근혜 투쟁 전선의 약점은 “여전히 민주 대 반민주 구도에 갇혀 있”어서가 아니라, 노동자 계급이 앞장서서 민주주의의 문제를 더 폭넓게 제기하지 못하고, 그것이 바로 계급투쟁의 일환임을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 1947년 미군정 하에서부터 시작된 ‘농지개혁’도, 한국전쟁도, 그 이후 이어지는 백색 공포정치도 모두 이 계급투쟁의 구체적이고 특수한 전개형태들이었다. 그리하여 일반적으로 ‘독재’라고 말하는, 이승만·박정희·전두환 등으로 이어지는 백색 공포정치에 관해서 말하자면, 그것을 이렇게 계급투쟁의 한 형태로 보는 대신에 단순히 미국적 혹은 부르주아적 민주주의의 부정으로 보는 것은 오로지 현상에 사로잡혀 그 배경과 조건, 본질을 보지 못하는 협소한 (소)부르주아적 시각의 표현이다. … 아무튼 6월 항쟁의 대상이 된 ‘독재’가 이렇게 제국주의 독점자본에 의한 위로부터의 계급투쟁의 구체적이고 특수한 한 형태였다면, 그에 대항한 반독재 민주화 투쟁, 그 정점으로서의 6월 항쟁도 역시, 단순한 민주화 투쟁, 혹은 미국식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 아니라, 노동자·민중의 아래로부터의 계급투쟁의 구체적이고 특수한 한 폭발형태였다.”(채만수, <6월 항쟁과 민주주의, 그리고 노동자계급>, 《피억압의 정치학(상)》)

이처럼 “과거의 민주 대 반민주 구도”는 한국에서 역사적으로 “노동 대 자본의 대립”과 상반되는 전선이 아니었다. 바로 노동 대 자본의 대립이 한국 사회에서 민주 대 반민주의 계급투쟁으로 격렬하고 생생하게 나타난 것이다. 다만 이승만 파쇼 독재와 박정희 군사 파쇼 체제의 야수와 같은 탄압으로 한국 전쟁 이후에 노동자 계급의 진보적 역량이 사실상 말살되어, 민주 대 반민주로 나타난 계급투쟁을 변혁적인 노동자계급이 지도하지 못하여 제도권 부르주아 야당의 성과로 수렴됐던 것이 문제였다.

현재의 민주주의 투쟁 역시 이 연장선상에 있는 투쟁으로서, 자본주의의 전반적 위기의 시대에 제국주의와 국내외 독점자본의 이해에 복무하기 위해 노동자 민중에 대한 ‘총궐기’에 나서고 있는 박근혜 파쇼 테러 독재 체제에 맞서는 계급투쟁이다. 이 계급투쟁은 노동 대 자본의 대립이라는 자본주의 근본모순이 민주 대 반민주의 형태로, 박근혜 퇴진 투쟁을 통해 주요모순을 해결해야 하는 형태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 파쇼 정권이 자본과 노동자의 계급대립, 자본과 민중의 계급모순을 폭력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파쇼 지배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공세를 펼친 결과 민주주의가 유린되고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 파쇼 권력은 노동법 개악은 물론이고 파쇼 권력에 맞서는 저항의 거점인 노동조합과 민주노조의 총집결체인 민주노총 자체를 와해하려 시도하고 있다. 이 투쟁의 중심에 있는 한상균 위원장을 폭도로 매도하고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있다. 노동자 민중의 기본권과 인권이 말살당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이 바로 현 정세에 대한 과학적 인식인 것이며, “노동자 계급 독자의 이데올로기에 바탕”을 두는 것이다. 민주주의 투쟁의 성격이 바로 노동자와 자본가의 계급투쟁을 바탕에 두고, 파쇼 정권 대 노동자 민중의 대립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 투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바로 자본과 파쇼 권력의 공세를 막고 자본주의 모순을 해결하는 주요한 고리가 될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 투쟁과 자본가 정권(부르주아민주주의) 철폐 투쟁 사이에 만리장성을 쌓”는 것은 바로 현 시기 박근혜 정권의 파쇼성을 부정하고 민주주의 투쟁에 소극적이거나 부정하는 개인과 세력들이다.(여기서 자본가 정권은 부르주아민주주의 정권이 아니라 부르주아 민주주의조차도 부정하는 부르주아 독재 정권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하다. 부르주아 독재가 권력의 본질적 성격이라면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파시즘과 함께 부르주아 독재의 통치 형태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활동가대회에는 위와 또 다른 문서가 제출되었는데, 이를 중심으로 현 시기 노동자 총파업이 성사되지 않은 이유와 어떻게 총파업을 현실화 시킬 것인지에 대한 토론을 진행됐다.

“노동개악을 막기 위한 투쟁은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위한 것이다. 그럼에도 스스로 총파업에 참여하겠다는 사업장을 우리주변에서 볼 수 없다는 건 그만큼 많은 사업장 지도부가 아직 총파업을 결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밀리는 것이 보이는데도 총파업은 이렇게 어려운 것일까? 바로 여기 있는 우리가, 아니 현장에 있는 ‘활동가’로 불리는 동지들이 제대로 현장을 조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은 소극적이지만 조합원들은 당장 노동개악이 도입되지 않겠지만 이후를 위해 막아야 한다며 파업 지침에 따르겠다고 한다. 바닥은 위기감이 있지만 시간적 여유도 있다. 하지만 노동개악은 실제 상황이다. 이는 현실을 제대로 전달하고 긴장감을 불어넣어야 하는 활동가들의 현장 활동이 미약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국회일정에 따라 지침을 지속적으로 폐기해도 현장은 분노하지 않는다. 단체협약으로 막아 낼 수 없음에도 총파업을 뒤로하고 임단협에 매진해도 현장은 침묵하고 있다. 이러한 현장을 바꿔야 한다.”(<노동개악 분쇄 총파업 성사를 위해 현장과 지역을 넘어 전국적 구심을 만들자!>(최병승, 현대차 노동자)

전반적인 현장 상황이 위 분석과 비슷할 것이다. 그런데 이날 토론에서 나왔던 얘기처럼, “국회 일정을 따라 가는 투쟁을 했기 때문”이거나 ‘상층 관료’들이 총파업 선언을 하지 않아서 총파업이 되지 않는 것인가? 오히려 민주노총 지도부는 2015년 한 해 국회 일정이 가시화되기 이전에 세 차례에 걸쳐 총파업 선언을 했다. 그런데 세 차례 ‘총파업’은 노동법 개악이 점점 더 현실로 다가오는 절박함과는 정반대의 양상으로 점점 더 총파업과는 거리가 먼 투쟁이 되었다. 왜 민주노총 지도부가 결의한 세 차례의 총파업 투쟁을 사업장 지도부들은 결단하지 않았는가? 이것이 단순히 지도부의 결단 여부의 문제인가? 그런데 위 분석에 의하면 그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현실을 제대로 전달하고 긴장감을 불어넣어야 하는 활동가들의 현장 활동도 미약했”고, 총파업 “지침을 지속적으로 폐기해도 현장은 분노하지 않”고, “단체협상으로 막아 낼 수 없음에도 총파업을 뒤로하고 임단협에 매진해도 현장은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토론에서는 총파업이 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노동자들이 당장 나의 문제가 아니라고 인식”하고 있다는 얘기도 나왔다. 결국 종합하면 지도부들의 투쟁의지도 부족하고 현장 활동가들의 활동도 미약하며 조합원들도 부분적인 위기의식은 있으나 단체협상으로 막아낼 수 있다고 아직 여유를 부리고 있기 때문에 총파업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노조 지도부는 총파업 보다는 임단협에만 매진하고 있는 것이다.

노동조합 지도부들은 공공만 보더라도 철도노조를 기점으로, 서울지하철, 서울도시철도 노조가 줄줄이 임금피크제를 합의했다. 조합원들도 정년 연장과 결부시켜서 임금피크제를 선호하고 있다. 대공장에서는 수당보전 및 정년 연장과 임금피크제를 맞바꾸려 하고 있다. 조합원들 다수도 이를 원하고 있다. 지도부들이 전체 계급의 문제 앞에서 총파업이라는 정치투쟁을 하기 위해 열성을 다하기 보다는 눈앞의 임단협에만 매진하고 있고 조합원들도 아직은 이를 선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조합주의, 경제주의에 빠져 있는 우리 운동의 심각한 퇴보와 지체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노동조합이 자신의 조합주의적 이해에만 사로잡히고, 활동가들의 전반적 상태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게다가 노동자들이 사회 전체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투쟁할 수 있도록 하기 보다는 눈앞의 경제주의적 이해관계에만 몰두하게 만든 것도 심각한 문제다. 우리 운동 전반이 조합주의, 경제주의로 빠져들어 가면서, 이번 노동법 개악처럼 직접적으로 자신의 문제와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도, “당장 나의 문제가 아니라고 인식”하고, 임단협에만 매진하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 첫해인 2013년에는 부정선거와 댓글 공작 등 국정원 해체 또는 개혁을 위한 투쟁이 광범위하게 벌어졌다. 이 투쟁은 6월에는 10만이 시청광장에 결집하는 광범위한 투쟁으로 확산되기도 했다. 2014년 4월 16일부터는 세월호 학살과 진상규명을 위한 정치투쟁이 광범위하게 전개됐다. 2015년에는 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는 정치투쟁이 광범위하게 벌어지기도 했다.

전국적인 수준에서 펼쳐진 이러한 투쟁은 모두 노동자 민중의 경제적 이해관계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정치투쟁이었다. 그리하여 총파업이 지지부진한 상황에서도 전체 노동자 민중이 결집하는 총궐기 투쟁은 이러한 투쟁을 통해 전국적인 투쟁전선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위 발제문에서도 이처럼 전국적으로 펼쳐진 정치투쟁이나 민주주의 투쟁에 대해서 한 마디 언급도 하지 않고 노동 현안문제만을 협소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열성적으로 투쟁을 하고 있는 한국의 내로라하는 ‘선진’ 활동가들 역시 경제주의적 시야에 갇혀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 투쟁에 대해 소극적이거나 잘못된 태도를 보이고 있는 한국의 정치운동의 현 상황도 마찬가지로 우리 운동의 지체와 후진성을 고착화하는데 무한 책임을 져야 한다. 파시즘에 대한 부정과 경제주의는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것 같지만, 둘 다 공히 현 박근혜 권력의 공세의 성격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가로막게 하고, 민주주의 투쟁에 대한 노동자들의 관심과 참여를 가로막는다. 노동자들과 민중의 강력한 결합을 막는다. 노동자들을 고립시킨다.

반파쇼 민주주의 투쟁만이 활로를 열어준다!

이날 활동가 대회 토론회 결의문에서는 “박근혜 정부는 무엇을 해도 상상 이상의 것을 보여주고 있다.”, “정부와 자본가들은 87년 이래 노동자들이 투쟁으로 쟁취한 모든 성과를 빼앗기 위해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질주할 것이다. 상상 이상의 재앙이 덮치게 된다.”고 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파시즘이 아니면 무엇인가?

박근혜 정권의 파쇼적 지향점은 유신독재로의 회귀라는 구체적인 정치적 목표를 가지고 있다. 노동법 개악은 권력으로 하여금 파쇼적 폭압을 자행하게 하는 세계적인 공황과 관련이 있다. 아무리 규모가 큰 노조라 할지라도 박근혜 파쇼 권력의 총공세를 개별 노조의 단체협상으로 막아낼 수 없다. 오늘날 민주노총을 비롯해, 그 중심이 되는 민주노조들에 대한 전면적 침탈, 공무원노조, 전교조, 건설노조 등에 대한 노조 파괴 공세에서 보듯, 박근혜 파쇼 권력은 파쇼 공세에 맞서는 최대의 저항기구인 노조를 파괴하기 위해 사활을 걸고 있다. 현재 ‘공안탄압’은 1차 총궐기 하나를 가지고 일시적으로 자행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앞으로 훨씬 더 집요하고 악랄하고 광범위하게 자행될 것이다.

박근혜 정권의 파쇼적 성격을 분명하게 인식할 때만이, 단체협상으로 막아낼 수 있다는 안이한 인식을 혁파하고 노동법 개악이 그 자체로 파괴적일뿐더러 단협파괴, 노조말살로 이어지고 생존권 전반의 말살로 이어지게 될 것이라는 현실 인식을 할 수 있게 된다.

더욱이 지금은 GM대우에 다시 한 번 몰아치고 있는 희망퇴직 공세와 두산인프라코어의 3천명 희망퇴직과 희망퇴직을 빌미로 한 강제 무급휴직과 정리해고 공세, 조선산업 대규모 구조조정 등 자본의 공세가 가중되고 있는 위중한 상황이다.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기아차, 현대차도 중국의 과잉생산 공황과 미국의 금리인상 시도, 인위적으로 부양해 왔던 한국의 부동산 과잉생산의 붕괴 등의 여파를 직접적으로 받게 될 것이다.

자본가와 파쇼 권력은 공황의 부담을 모조리 노동자 민중의 어깨에 전가하려 하고 있다. 전체 노동자들에게 태풍이 몰려오고 있다. 지금 보다 한층 더 격심한 빈곤과 대량 실업이 다시 노동자 민중을 강타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당면 목표는 노동법 개악 그 자체만이 아니다. 노동법 개악을 추진하고 있는 파쇼 권력과 전면전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생존 자체를 기약할 수 없다. 파쇼 권력을 분쇄하지 않고는 노동권도 노조도 없다. 노동자의 제반 권리와 인권조차도 말살된다.

민주주의 투쟁 없이 노동자 계급은 정치적으로 각성될 수 없으며, 민중의 지도자가 될 수 없다. 민주주의 투쟁 없이 해방이 있을 수 없다. 오늘날 부르주아 민주주의라 할지라도 그것은 노동자 민중의 피와 눈물과 땀이 배어 있는 투쟁의 획득물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 자본가 계급 독재를 강화할 것이라며 반파쇼 투쟁을 부정하는 세력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이중적 측면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노동자 계급과 민중이 오늘날 아베 파쇼 정권에 맞서 평화헌법 개정 저지 투쟁에 나서고 있는 현실을 보라! 헌법의 본질은 부르주아의 계급 지배 도구이지만, 노동자 민중의 계급투쟁의 성과도 반영하지 않을 수 없다. 아시아 수십억 민중뿐만 일본 노동자 민중도 일본 제국주의가 치른 전쟁의 희생자들이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패망이 전후 평화헌법 체제를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오늘날 노동자 계급과 민중만이 민주주의에 사활적인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 민주주의는 노동자 계급과 민중 자신의 노고가 담겨 있는 획득물이며, 공기와 같이 노동자 민중의 인간적 생존과 존엄, 완전한 해방을 위한 필수적인 수단이다.

노동법 개악 분쇄뿐만 아니라 정치적 자유의 확보, 국가보안법 철폐, 제국주의 군대의 철수, 평화협정 체결, 종북몰이 이데올로기 척결과 노동자계급의 자주적 이데올로기 투쟁은 파쇼 공세가 점점 더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현실에서 반파쇼 민주주의 투쟁의 주요한 요구들이다.

보통선거제가 지배계급을 재생산하는 합법적 수단이 되었다는 이유로 선거의 자유를 지키고 확대하는 투쟁에 소극적이어서는 절대 안 된다. 박근혜 파쇼 권력의 총체적 부정선거로 인해 노동자 민중이 피땀으로 쟁취한 선거의 자유가 난폭하게 유린되었다. 이 부정선거를 막지 못한다면 민중의 의지는 더 노골적으로 배반당하게 될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부르주아적 권리인 선거권마저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세월호 청문회에서 다시금 분명하게 조작과 은폐가 폭로되고 있다. 세월호 학살은 세월호 진상을 흐리는데 일조하는 주장처럼, 비정규직 문제, 규제완화, 신자유주의 문제가 아니라 학살과 학살 배경이 은폐, 조작되어 있는 의문사다. 노동자들은 경제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처럼, 비정규직, 규제완화 같이 자신의 문제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파쇼 권력의 학살과 은폐, 조작이기 때문에, 우리 이웃이 당한 참상의 문제이기 때문에 싸워야 하는 것이다.

반파쇼 민주주의 투쟁에서 박근혜 정권을 반대하는 모든 계급과 세력을 다 결집시키자는 의미는 무엇인가?

박근혜 정권이 파쇼권력이라면 여기에 맞서는 투쟁도 반파쇼 민주주의 투쟁이 되어야 한다.

박근혜 정권에 반대하거나 비판적인,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모든 계층 및 세력들이 총집결해야 한다. 반파쇼 민주주의 투쟁에 있어서 노동자 계급 내부의 단결과 투쟁이 없이는 이 투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 노동자 계급이 이 투쟁의 중심에 서야 한다. 노동자 계급 내부의 단결과 민중과의 결합은 통일적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노동자 계급의 총단결과 통일이 이 투쟁 승리의 필수적인 요소이지만, 노동자 계급만으로 우리는 이 투쟁을 승리로 이끌 수 없기 때문이다.

노동자 계급과 농민, 특히 전농 중심의 농민들도 같이 싸워야 한다. 여기에 철거민, 노점상, 영세상공인이 같이 결집해야 한다. 역사 교과서 왜곡에 맞서는 투쟁 중심이 청년과 학생들이었던 것처럼, 반파쇼 민주주의 투쟁에서 청년들이 앞장서야 한다. 특히 청년, 청년 실업자들을 장년 노동자, 취업 노동자와 분열시키는 것으로 노동법 개악을 정당화하려는 자본과 정권의 거짓 선전이 판을 치는 이때에 청년들이 이 거짓 선전을 폭로하고 타격하는 투쟁에 앞장서야 한다.

반파쇼 민주주의 총궐기 투쟁 본부를 총궐기 집회를 준비하는 기구의 성격을 넘어 <박근혜 독재 정권 퇴진 투쟁본부>처럼, 확고하고 일관되게 반파쇼 민주주의 투쟁 기구로 확대, 개편해야 한다. 노동자가 중심이 되어 박근혜 파쇼권력을 퇴진시키는 민중항쟁을 조직해야 한다.

우리는 과연 박근혜 파쇼 권력에 맞서 승리할 수 있는가? 단연코 승리할 수 있다. 파쇼권력의 폭압성이 날로 가중되지만 총칼만으로 권력은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없다. 자각하고 권리의식을 획득한 21세기의 노동자 민중이 독재 시절의 야만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정권의 공세를 그대로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다.

파쇼 권력 폭압성의 원천은 바로 경제적, 정치적 위기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파쇼 권력은 철권통치를 자행하고 있지만, 그것은 권력의 강성함의 표시가 아니라, 역으로 불안정성, 허약함, 위약함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게다가 노동자 계급과 소부르주아 다수를 파쇼 권력의 동원부대, 지지부대로 만들었던 히틀러 파쇼 도당에 비해 박근혜 권력은 얼마나 권력기반이 취약한가? 노동자, 농민은 물론이고 지식인, 문화예술인, 종교인들도 정권에 등을 돌리고 있지 않은가? 박근혜 파쇼 권력의 낡은 지역기반과 연령 기반을 노동자 민중의 투쟁으로 날려버려야 한다. 조중동, 종편 같은 파쇼 언론 기구의 기만과 종북몰이 공세를 척결해야 한다.

파쇼 권력의 억압이 가중될수록 노동자 민중의 저항도 거세질 것이다. 최근만 보더라도 1, 2차 총궐기에서의 성난 함성이 그것을 보여주지 않았는가?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하는 노동자들의 총파업 투쟁의 열기도 지금 보다는 점점 더 올라올 것이다. 파쇼 권력은 말로를 재촉하고 있다. 단발마적 발악을 하고 있는 파쇼 권력을 노동자 민중의 총단결과 거센 함성으로 끝장내자.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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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박근혜 정권의 파쇼성을 한사코 부정하려는 사람들에 대해”의 1개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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