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용균 1주기,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난 자본가들이 공장과 기업을 운영하는 한 노동자 살해는 끝나지 않는다!

자연 재해를 제외한다면, 인류가 생존을 위해 노동을 이어온 이래 어느 사회구성체에서 일하다가 가장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는가? 문명 이전의 ‘야만의 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고대노예제 사회에서의 생산노동도 자본주의에서만큼 이토록 지속적이고 집중적으로 중대재해 사망자와 직업병이 많이 생기지는 않았다. 자본주의 이전 사회에서는 과소생산이 빈곤을 낳는 반면에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과잉생산이 빈곤을 낳는 것처럼, 자본주의 이전 사회는 과학기술의 저발전으로 노동과정에서 사망자가 생겨났다면, 자본주의 사회는 생산력의 엄청난 발전에도 불구하고 이윤을 추구하는 체제이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죽어나가고 있다. 이 점에서는 ‘야만사회’가 야만이 아니라 ‘문명사회’가 가장 야만적이라는 역설이 성립되는 것이다.

엥겔스가 《영국노동자 계급의 상태》에서 1800년대 중반 무렵 영국에서 공장과 광산 등에서 자본의 안전시절 미비로 죽어나가던 노동자들의 참상을 고발했는데, 이후 자본가들은 이것이 산업자본주의 초기의 모습이라고 노동자 학살의 고발에 대해 자기변명을 하고 있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아 “포스트 마르크스주의”, “마르크스주의의 위기” 운운하는 ‘시민사회론자’들 역시 “시민권의 확장이 계급적 차이를 완화시켜온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 피라미드형의 계급양극화보다는 다이아몬드형의 계급계층구조가 두드러지게 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하면서 “계급관계로 환원되지 않는 시민사회의 다원성”을 외쳤다.

그런데 자본가들과 그 자식들이 일하다가 죽고 다치고 병드는가? 노동자들의 집단적, 집중적인 참상 앞에서 과연 “시민권의 확장”과 “계급적 차이의 완화”, “다아아몬드형의 계급계층구조” 따위를 더 이상 떠들어댈 수 있겠는가? 21세기 고도로 발전한 자본주의 문명 하에서 노동자들이 일상적으로 겪고 있는 참상을 보노라면 아무리 관대한 사람일지라도 자본가들에 대한 적개심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이 참상을 계급적대가 아니라면 무엇으로 달리 설명할 수 있는가?

오늘도 3명이 퇴근하지 못했다

작업장에서 살해당했기 때문이다!

2019년 11월 21일 경향신문 1면에는 “오늘도 3명이 퇴근하지 못했다”는 제목과 함께 2018년 1월부터 2019년 9월까지 노동부에 보고된 주요 5대 사고로 사망한 1200명 노동자 명단이 실렸다. “오늘도 3명이 퇴근하지 못했다”는 슬프고 다소 비유적인 제목과 달리 집단적으로 사망한 노동자 명단을 보면 경악과 공포와 슬픔과 분노가 교차할 수밖에 없다. “오늘도 3명이 퇴근하지 못했”던 것은 모두 자본에 의해 살해당했기 때문이다. 전쟁도 아니고 저토록 많은 사람들이 도대체 일하다가 참혹하게 죽어나갈 수 있는가? 저 수많은 노동자들의 비통한 죽음 앞에서 또 얼마나 많은 노동자 가족들이 오열하고 평생을 지워지지 않을 끔찍한 고통을 겪을 것인가!

경향신문이 따로 만든 1692명 재해자 아카이브를 보면 그 수많은 사망자 명단마다 끔찍한 사망 원인들이 나온다. 그 1692명의 재해자 아이콘을 임의로 몇 개를 누르면 다음과 같이 재해 사연들이 나온다.

사고유형 – 깔림·뒤집힘

공장 이전 과정에서 사용중인 지게차를 운전(무등록)하여 신규이전공장으로 이동하던 중 공장 인근 이면도로 내리막길에서 브레이크 제동 능력 상실로 도로변 옹벽에 충돌 후 전복되는 지게차에 깔림

재해일시2018-06-04 07:50

업체명원청조일피혁하청-

재해자서○○I64세I원청I상용

사고 원인

기계/차량 등의 정기 검사 및 정비 미실시

차량계 건설기계 안전벨트 미착용

굴삭기, 기계차 등 면허 없는 사람이 조종

사고유형 – 질식·중독

반응기 내부 밀폐공간 바닥에서 폐촉매 제거작업 후 상부 출입구로 나오려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다 작업선이 걸려 상승에 장애가 되자 잠시 송기마스크를 벗었다가 질식으로 추락

재해일시2018-09-05 11:15

업체명원청에쓰-오일(주) 울산공장하청(주)대신기공

재해자박○○I46세I하청I일용

사고 원인

안전감시단 미배치 혹은 관리자 감시 소홀

안전한 작업통로/작업공간 미확보

불명확한 의사소통 방법/신호로 인한 사고

작업환경이나 기계/작업도구의 구조적 결함

작업공간 내 산소 및 유해가스 농도 미측정

떨어져 죽고, 질식해죽고, 깔려죽고, 익사해죽고, 끼여 죽고, 부딪혀 죽고, 물체에 맞아 죽고, 폭발로 죽고 노동자들은 이처럼 저마다 끔찍한 재해를 당하고 참혹하게 죽어나갔다.

경향신문 산재사망사고 아카이브를 보면 643명이 떨어져 죽고, 190명이 끼여 죽고, 109명이 물체에 맞아 죽고, 116명이 부딪쳐 죽고, 146명이 깔리고 뒤집혀 죽었다.

건설업종에서 836명이 죽고, 제조업에서 422명이 죽었다. 공휴일에도 쉬지 못하고 일을 하다 366명이 죽었다. 공휴일 사망은 장시간 노동과도 관련이 있다.

사업장 규모별로 보면 5인 미만 사업장에서 739명, 5-49인 734명, 50-299인 133명, 300인 이상 41명이 죽었다. 50인 미만 사업장에서 다수인 1473명이 사망했다. 그러나 이들 통계는 외주화 실상을 정확하게 반영하지 않고 원청이 아닌 하청만 따로 분석해서 그렇다. 실제로는 ‘다단계 하도급’ 피라미드의 맨 위에서 거대 원청 기업이 자리 잡고 있다. 원청은 산재 사망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만 실제로 노동자 사망의 주된 책임은 원하청 착취사슬 속에서 피라미드 맨 위에 있는 원청이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미조직 사업장에서 사망자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망자 연령대별로 보면, 10대 6명, 20대 90명, 30대 135명, 40대 311명, 50대 564명, 60세 이상 491명이다.

한 해 6만여 명의 현장실습생들이 초저임금과 극악한 노동조건, 무권리 상태로 일하다가 빈번하게 끔찍한 사고를 당하고 있다. 2017년에도 LG유플러스 협력회사 콜센터와 여수산단 대림산업 협력업체인 금양산업개발에서 과도한 노동착취와 상급자 폭언 등으로 고통 받다가 자살하는 현장실습생들이 있었고, 제주 용암 해수단지의 한 음료제조 공장에서 산업체 현장실습을 하던 19살의 고등학교 3학년이 제품 적재기에 목이 끼여 사망하는 끔찍한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이후에도 대다수가 현장실습생들임에 분명한 10대의 청소년 노동자들이 6명이나 사망하는 참담한 일들이 계속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구의역 사고로 20세의 청년 노동자가 사망했는데, 2-30대 청년 노동자들도 225명이나 사망했다. 심지어 정년 이후에 연금으로 노후생활을 편안하게 영위해야할 60세 이상이 노동자들이 491명으로 50대에 이어 가장 많이 죽었다.

경향신문은 “산재보험 사각지대에 있는 특수고용노동자·1인 자영업자의 사망, 은폐된 사망 등은 여기서 제외된다”고 하고 있다. 과로사를 포함해 직업병으로 죽어간 노동자들, 업무관련성을 입증하지 못하는 사망자들이나 자살자들,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특수고용노동자, 산재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고, 기업에 의해 은폐된 산재 사망자 등은 누락된 것이다. 작업현장에서 다행히 죽지는 않았지만 부상당하고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 노동자들은 얼마나 많을 것인가!

경향신문이 만든 재해자 아이콘을 임의로 눌러보면 다음과 같이 사망 원인들이 나열돼 있다.

작업 공정의 위험성 등 안전교육 미실시

안전한 작업통로/작업공간 미확보

위험지역 출입금지 조치 미실시,

낙하물에 맞을 위험이 있는 곳에서 작업

안전대 미지급/미착용 혹은 안전대 부착설비 미설치/설치불량

위험 작업 시 마스크/내열성 앞치마/끼임방지 장갑 등 특수 보호구 미착용

기계의 정비/수리/확인 등의 작업 시 운전정지 하지 않음

단독 작업 혹은 작업지휘자(감시인,관리자) 없음

안전난간, 추락방호망 등 추락방지설비 없음

마모/훼손되거나 강도가 약한 로프/고리/발판 사용

기계의 안전장치 강제 해제, 불량/미비(뚜껑이 열리면 동작 안 해야 하는데 동작)

자본가들은 보통 중대재해에 대해 자신들의 책임을 면하고자 작업자들의 부주의나 태만, 실수 등으로 몰아갔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노동자들은 모두 자본의 직접적인 책임으로 사망했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중대재해 사망이 구조적인 원인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 분명한데, 각각의 사연들은 보면 조금만 신경을 썼어도 발생하지 않았을 사고들도 연속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위험 공정에 대해 안전교육이 미실시 된 게 다반사고, 작업지휘자 없이 단독 작업이 이루어지거나 추락방지설비가 없고, 심지어는 얼마 되지도 않는 마스크나 내열성 앞치마 같은 특수보호구나 안전 로프 비용을 아끼려고 마모되거나 훼손된 로프나 고리나 발판을 사용하여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내몰기도 했다. 비용을 아끼지 않고, 생산 보다 목숨을 우선으로 생각하고, 사고를 막기 위해 주의 깊게 노력했다면 모두 죽지 않았을 고귀한 생명들이다.

2016년부터 최근 몇 년 만 보더라도 산재 사망자 숫자는 매년 2000명을 넘고 있다. 산재사망을 반으로 줄이겠다고 공약한 문재인 정권 하에서도 사망자 수는 줄어들지 않고 있다. 2018년 12월 11일 새벽 3시 심야노동을 하다 청년 김용균이 참혹하게 죽고, “더 이상 제2, 제3의 김용균은 없다”며 싸워 왔는데, 그 이후에도 수천의 김용균의 참혹한 죽음이 있고, 수만의 김용균 가족들의 참담한 고통이 있다. 이처럼 여전히 참담한 죽음의 행렬이 계속되고 있고, 그 죽음마다 애통하고 분통 터지는 사례들이 넘쳐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김용균의 죽음 이후에 산업안전보건법이 개정됐지만 여전히 근본적으로 바뀐 것은 없다.

오늘,(4일) 김용균 씨가 일했던 석탄화력발전소 노동자들이 달라진 것 없는 노동환경에 대해 첫 공개증언을 했습니다.

이들이 공개한 발전소 내부 영상을 보면 지금 당장 사고가 나도 이상할 게 없어 보입니다.

… 한 화력발전소의 작업장 문을 여니 온통 암흑입니다.

천장에 전등 하나 없이 손바닥만 한 손전등 불빛에 의지해 집채만 한 기계를 다뤄야 합니다.

[신대원/영흥화력발전소 노동자 : “8여 년 일을 하고 있는데 처음부터 조명에 심각한 문제가 있어서 전체 구간이 사실상 깜깜이였습니다.”](“제 2의 김용균 나올 수밖에”…발전소 노동자 첫 공개 증언, KBS NEWS, 2019.12.04)

‘고 김용균 사망사고 진상규명과 재발 방지를 위한 석탄화력발전소 특별노동안전조사위원회’(특조위)가 사고 이후에 내놓은 22개 권고안은 대부분 시행되지 않고 있다. 원청 서부발전 사장을 포함해 김용균의 죽음으로 제대로 처벌당한 자본가들도 없다.

산재사망 역시 계급투쟁의 문제다

이쯤 되면 전쟁이다. 자본가와 노동자 간 계급전쟁이다. 적대하는 계급 상호 간 전쟁이 아니라 하나의 계급에 의한 다른 계급에 대한 조직적 학살이다. 자본이라는 계급이 자행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대량학살이다.

김용균 사망 1주기를 맞아 추모대회가 열렸다. 오늘(12월 10일)에는 고인이 일하던 현장에서 추모제가 열렸다. 고 김용균 1주기에 그의 어머니 김미숙 씨는 “엄마는 이 곳에서 할 일이 많다. 너를 비록 살릴 순 없지만 다른 사람들이 우리처럼 삶이 파괴되는 걸 막고 싶다”며 “엄마는 이제, 우리와 같은 처지에 놓은 많은 사람 살리는 길을 위해 걸어갈 것이다. 많은 사람들과 손잡고, 밝은 빛이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김용균의 어머니에서 전 사회 노동자들의 삶이 파괴되는 걸 막기 위해 살겠다는 김미숙 씨의 발언은 고귀하다. 자식의 죽음이라는 비통과 절망 속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 발언에서 주목해야 할 또 다른 것은 노동자들의 삶이 파괴되는 것은 바로 파괴자들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본가들은 사망한 노동자들의 생명을 파괴하고 가족들의 삶을 파괴한 직접적 가해자들이다. 산업재해는 자본주의 초기부터 오로지 이윤추구가 목적인 자본주의 착취사회에서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자행된 학살극이다. 그런데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로 구조적 문제니 자본가 개개인들이 면피를 받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자본가들은 비용절감을 위해 끈질기게 안전시설 마련을 해태하고, 인력을 감축하고, 과중한 노동, 위험한 작업장으로 노동자들을 쉼 없이 내몰았다.

지난 11월 6일에도 한국경영자총협회를 비롯한 부르주아 경제5단체는 ‘주요 경제관련법의 조속입법화를 촉구하는 경제계 입장’을 발표하였는데, 여기에서 자본가들은 주52시간 근무제에 대한 중소기업 시행 유예, 탄력적 근로시간제 단위 기간 6개월로 확대, 선택적 근로시간제 정산 기간 확대 및 요건 완화, 한시적 인가 연장근로 제도 허용범위 확대 등을 요청했다. 심지어는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화평법),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 등에 대한 규제를 완화할 것을 요구했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죽음을 재촉하는 법률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는 자본가 언론에서도 “죽음의 외주화”를 떠들어대고 있는데, 저들은 죽음의 외주화가 바로 비정규직 제도로 인해 발생한 문제임을 은폐하고 있다. 죽음의 외주화를 운운하면서도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을 한사코 반대하고 있다.

그런데 자본주의 이윤체제에서 노동자들의 중대재해 사망은 필연적이지만, 이토록 막대한 숫자가 대량으로, 지속적으로 죽어나가는 것은 필연적이지는 않다.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다.

부르주아 착취 경제학은 비용에 민감하다. 기회비용은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선택을 포기할 수밖에 없고 그에 따르는 비용이다. 자본가들은 노동자에 대한 안전설비 설치비용 보다는 차라리 중대재해 책임 비용을 부담하려고 한다.

SBS 뉴스, 2019.11.03.)SBS 이슈취재팀이 김용균 씨가 숨진 지난해 12월부터 최근까지 11개월간 내려진 재해 사망 사건 판결을 207건을 분석했습니다. 책임이 인정된 피고인 295명 가운데 단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벌금 또는 집행유예 선고를 받았습니다. 안전한 작업 환경을 마련하지 못한 기업도 대부분 5백만 원 이하의 벌금형에 그쳤고 가장 많은 벌금도 2천만 원을 넘지 않았습니다. 솜방망이 처벌이 이뤄지다 보니 재범률도 높습니다. 산안법 위반 재범률은 2013년 66.8%에서 2017년 76%까지 올랐습니다.(정혜경 기자, ‘죽음의 악순환’ 못 막는 대책들…해외 ‘기업 살인법’ 보니)

사람이 죽든 말든 오로지 이해타산만 따지는 냉혹한 자본가들에게 인간애가 있을 리는 만무하고 이러한 상황에서 어느 자본가가 비용이 더 드는 안전시설에 비용을 들이려 하겠는가?

산업재해가 “자본이라는 계급이 자행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대량학살”이라면 이는 역시 계급투쟁의 문제다. 산업재해의 문제는 노동자들이 죽고 사는 가장 격렬한 계급투쟁의 문제다. 무권리 상태에 빠진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생명을 보호할 요구를 내세우고 여타의 안전장치를 가지고 있을 리 만무하다.

오늘날 대다수 언론들, 심지어 조중동조차도 김용균에 대해 동정적 보도를 하고 있다. 그런데 김용균과 같은 노동자들의 죽음을 막을 구체적이고 실질적 조치들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자본의 실제적 이해관계 앞에서는 자본가 정치인, 자본의 이데올로기 나팔수들인 언론과 방송들은 혼신의 보도를 하며 노동자들의 상태를 후퇴시키는 노동법 개악을 위해 사활을 건다. 노동자들의 권리인 파업에 대해서 언론들은 마치 사회악을 대하는 듯 경멸에 차서 보도하고 있다.

자본가들은 한사코 반대하고 있지만, 노동자들은 중대 사망을 막기 위해 기업살인법 제정 요구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은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도입하려면 현행 한국 형법체계와의 정합성 문제를 한번 따져봐야 한다. 또 외국에서 어떻게 하는지도 들여다봐야 할 것 같다. 한번 연구용역을 발주해 효과적인 방안을 찾아볼 생각이다.”(경향신문, 이재갑 “산재 사망 양형기준 낮아…법원에 의견 낼 것” 인터뷰, 2019.12.08.)라며 “정합성” 운운하고, “연구용역” 운운하며 피해가고 있다.

노동자들의 산재사망 얘기가 나오면 영국 사례가 빈번하게 언급된다. 영국은 2007년 ‘기업과실치사 및 기업살인법’을 제정하여 2008년 4월 6일부터 시행 중에 있다. 영국에서는 이 법에 의해 기업이 안전주의 의무에 대한 중대한 위반으로 사망자가 발생했을 때 해당 기업을 기업살인죄로 처벌하고 상한 없는 벌금을 물리도록 정하고 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건설업에서 노동자 사망이 제일 많다. 앞에서 언급했듯 2018년 1월부터 2019년 9월까지 836명인데 반해 영국에서는 건설업 산재 사망이 1년 40명 정도이다.

산재 1위는 농업, 2위가 어업, 3위가 건설(이다). 농업과 어업은 엎치락뒤치락 하는데 건설은 순위가 꾸준하다. 세 번째긴 하지만 건설의 경우에 산재보다는 여기엔 그런 건 없다. 은폐는 별로 없어서 실제로 피라미드처럼 분포가 되어 있다. 사고가 일어나거나 경미한 사고의 경우에도 신고를 하고 보호하는 쪽으로 하기 때문이다. 건설에서 문제가 생기는 것은 근골(격계)나 질병, 석면, 먼지 등을 통한 질병 쪽이 더 큰 이슈다. 자살 같은 것도 이쪽의 문제가 된다. 산재는 최대한 줄이는 편이다. 2012년 런던 올림픽의 경우에 한 명도 안 죽은 최초의 올림픽 공사였다. 그 이후에 영국에서 건설공사에 대한 안전기준에 대해 확실히 기준치가 높아진 측면이 있다 …

영국 산업안정보건청은 회사에서 사고가 나면 여기 와서 조사를 하고 조사가 철저하게 이루어진다. 조사를 나오면 현장 공기가 완전히 멈춘다. 회사에서도 그러느니 차라리 안전하게 일하겠다는 편이고, 이 현장의 경우에는 오히려 사전에 와서 조사를 시켰다. 뭐가 잘못됐는지 봐서 문제되는 게 있으면 얘기를 해주라는 식으로 산업안정보건청에 사전 감사를 요청했다. 그런 면에서는 영국의 일반적인 현장과도 다르게 잘 된 현장이다.(2018년 10월 15-19일, 한국 건설노조의 영국 방문 중 영국 건설노조와 간담회 자료)

자선가들이 아닌 영국의 자본가들은 이 때문에 손해를 막기 위해 안전한 작업장을 만들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심지어 우리에게는 작업중지권이 실효성이 없는 반면에 영국에서는 조사가 나오면 “현장 공기가 완전히 멈춘다”. 영국이 “신사의 나라”라서 그런 것이 아님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부르주아 신사의 나라, 영국이라고 냉혹한 부르주아의 본성이 다를 리 없다.

이 간담회 자료에 의하면 영국에서도 최근 반노조 정책인 파업권 개악과 단협개악 기도, 긴축정책 등 노동자 공격이 호시탐탐 진행되고 있다.

지금 영국에서 새롭게 단결이라는 무기를 활용해야하는데 영국 건설노조 조직화 역사를 보면 조직화에 대해서 국가가 개입을 해서 많은 탄압을 했던 것이 사실이다.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고용을 못하게 한다거나 1970년대에 활동가들이 조직화를 했다는 혐의로 구속돼서 잘못된 사법판단으로 오랫동안 수감생활을 하기도 했다. 경찰이 신분을 숨기고 프락치가 되어 활동가인척 활동해서 일망타진하는 수법도 있었다.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지금도 반복되고 있고 건설노동자 조직화가 피해도 많았고 어려운 과업이다.(같은 간담회 자료)

영국에서도 이처럼 한국사회 못지않게 건설노조 조직화 역사에서 극렬한 탄압이 자행됐던 것이다. 그러한 영국의 건설노동자들은 이러한 자본과 권력의 탄압을 물리치고 전국적으로 단협을 맺는 등 권리를 쟁취하고 있다.

저희가 가지고 있는 전국적으로 맺은 주요 단협은 3가지가 있다. 첫 번째가 전국 엔지니어링협약이 있고 블루북이라고 불린다. 인프라 공사에 관련된 것은 JIC라고 있다. 건설이 아니라 전기공사와 관련된 단협까지 해서 전국단협으로 3개가 있다 …

전국단협이 문서는 있지만 적용되지 않으면 쓸모가 없어서 어떻게 적용시킬까를 고민한다. 효과적인 게 발주자 기관 모델이다. 발주자와 협약을 맺어서 발전소를 발주하거나 인프라를 발주할 때 발주자와 협약을 맺어서 발주자가 내는 입찰 문서를 통해서 노조가 고용과 단협을 지키게 하는 모델이 저희가 지금까지 시도한 것 중에 가장 성공적이었다. 예를 들면 프랑스 회사에서 발주한 발전소 공사가 있다. 프랑스 회사 발주처와는 얘기가 잘돼서 영국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전부 단협을 적용받는다.(같은 간담회 자료)

“기업살인법”은 산재사망이 노동자 탓이 아니라 자본가 때문이라는 것을 직접적으로 인정하는 법이다. 자본가들이 이것을 인정하고 법제화할 수 있었던 것은 사회적 압력, 즉 노동자들의 투쟁의 결과다.

영국에서는 안전 관련해서는 누구나 자유롭게 작업을 중단시킬 수 있다. 심지어 하청업체가 작업을 계속하면 노조가 개입해 작업을 중단시킬 수 있다.

영국의 사례는 노동자들의 투쟁만이 노동자들의 생명과 안녕을 보호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죽음의 공포 속에서 위험천만한 노동을 하는 노동자들의 작업장 통제 문제는 노동자가 안전하게 노동하기 위해 실질적이고 사활이 걸린 문제다. 작업중지권은 그 통제권의 일부다.

고 김용균과 같은 화력발전소 노동자들이 생산에 대한 권리가 전혀 없는 이 적나라한 현실, 구조적 모순을 명백하게 증언하고 있다.

[신대원/영흥화력발전소 노동자 : (모든 설비는) 반드시 정지를 해야 하고… 그런데 그런 요건이 안 되기 때문에, 왜냐. 저희(하청업체 소속 노동자)는 설비에 대한 권한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주인이 아닙니다.](유덕기 기자, 어두컴컴, 발암물질 가득…사람이 죽어도 변한 게 없다, SBS 뉴스, 2019.12.04.)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는 생산의 결과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된다. 생산의 결과물로부터 소외되는 노동자들이 생산통제로부터 배제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위험한 노동에 직접 종사하며 자신의 목숨을 신경 써야 하는 노동자들이 생산의 주인이 아니다. 죽음의 노동, 죽음의 공포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는 자본가들과 그 주구들이 제도, 정책, 기계를 전면 운영하는 반면,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 있는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위험으로부터 방어할 힘이 없다. 이로써 자본가들에 의한 살인은 구조적이 된다. 반복적이 된다. 노동자들의 생명과 건강은 안중에도 없이 오로지 이윤에 혈안이 된 자본가가 생산을 통제하는 절대권력자라는 사실로부터 노동자들의 대량 살해는 종식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하청노동자들에게 하도급 제도의 맨상층에 위한 원청은 관리책임에서 벗어남으로써 구조적 위험은 더 배가될 수밖에 없다.

노동자들의 중대재해의 사연을 접하고 그 가족들의 피울음을 연일 듣고, 보면서, 그 울부짖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계속되는 죽음의 행렬을 보노라면 노동자들이 이 잔혹하고 비열한 착취체제를 타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정치적 결론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이 착취체제를 분쇄하지 않는다면 중대재해로 노동자들의 생명이 산산조각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엥겔스는 《영국노동자 계급의 상태》를 다음과 같은 경고로 끝내고 있다.

과거처럼 음성적으로 구석에서 진행되던 부자들에 대한 빈자들의 전쟁은 직접적이고 보편적인 것이 될 것이다. 평화적인 해결이 이루어지기에는 너무 늦었다. 더욱더 날카롭게 분열되고, 적대심은 강화되고 있으며, 게릴라적인 작은 요소는 더 큰 주요한 격전으로 집결되고 있으며 얼마 안가서 조금만 자극을 줘도 거대한 눈사태를 일으키기에 충분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저택에 전쟁을, 오두막에 평화를’이라는 전쟁구호가 이 산하에 울려펴지게 될 것이며, 그때는 이미 부자들이 주의해도 때가 늦게 된다.(같은 책, 350쪽)

과연 이 노동자 살해체제에서 “평화적 해결”이라는 것이 가능한가! 그러한 정치적 진실을 온전하게 마주할 때가 왔다.

* 사진은 점좀빼(사진 활동가)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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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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