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 국제공산당이 주는 교훈 오늘날 노동자들은 코민테른의 경험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2(최종) (하르팔 브라르 Harpal Brar)

하르팔 브라르(Harpal Brar)

2019년 10월 27일

맑스-레닌주의 영국공산당(CPGB-ML)

번역: 김규상(캐나다 교포)

* 이 글은 국제공산당(코민테른)의 맑스레닌주의적 혁명적 전통에 대한 극심한 편견과 왜곡, 심지어 국제공산주의 운동을 이끌고 있는 그리스공산당(KKE)조차도 분파주의적 관점으로 이러한 편견과 왜곡에 동참하고, 이를 무분별하게 번역 소개하는 상황에서 국제공산당의 혁명적 전통을 강력하게 옹호하는 글이다. 분량상 우리는 두 번에 걸쳐 나눠 실을 것이다.(편집자 주)

민주적제국주의국가들이 맡았던 역할

소위 ‘민주적’ 제국주의 국가들에 대해 말한다면, 그들은 독일이 <베르사유 평화조약>(역주: 1919년 6월 28일,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패전한 독일 제국과 연합국 사이에 맺어진 평화조약)의 족쇄로부터 벗어나 재무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리하여 히틀러가 볼셰비즘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요새로서 권력을 잡도록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습니다.

1935년에 체결한 <영국-독일간 해군협정>을 통해 영국은 <베르사유 평화조약>에서 정한 무장해제 조항을 점차적으로 무력화시켰습니다. 1936년 독일은 평화조약에서 금지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라인강유역의 핵심지역에서의 재무장을 허락받았습니다. 경제건설을 위해 막대한 액수의 돈이 미제국주의로부터 독일로 유입되어 투자되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한편으로는 나찌독일의 전쟁준비를 막기 위한 공동안보 문제에 대해서는 쏘연방과의 대화를 단호히 거부하면서도, 1938년 9월말 경 히틀러와 <뮌헨협정>(역주: 1938년 9월 30일 독일 뮌헨에서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가 체결한 협정으로, 이를 통해 히틀러는 독일인이 다수 거주한다는 명목으로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를 합병했다)을 체결했습니다. 그리하여 히틀러의 공격이 동쪽의 쏘련을 향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1939년 3월에 있었던 쏘련공산당 제18차 전체회의에서의 연설에서 스딸린은 <뮌헨협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올바르게 말했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일부 지역을 독일의 요구대로 이양케 함으로써 독일이 쏘련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도록 할 구상이었겠지만, 지금 독일은 언제 그랬냐는 듯 약속을 이행하기를 거부하고 있다.”

1, 2차 세계대전들 사이의 기간

두 차례의 세계대전들 사이의 기간들은 세 개의 기간들로 뚜렷이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종전 후 1922년까지 지속된 혁명적 고조기입니다. 그 다음엔 자본주의가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었던 기간이 찾아오는데, 1923년부터 1929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거대한 격변기로서 1929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까지의 기간입니다.

사회민주주자들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었던 두 번째 기간이 일시적이고 이행기적 이었다고 여기지 않고, 그 두 번째 기간이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자본주의가 갖는 주요 특징이라면서 자본주의의 영속성에 대해 대중들에게 환상을 심어주고자 했습니다. 저명한 사회민주주의 이론가들은 자본주의와 자본주의의 안정성을 요란스럽게 미화했습니다.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주요 이론가인 루돌프 힐퍼딩은 1927년 키엘(Kiel)에서의 사회민주당 전체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자유경쟁과 무분별한 시장법칙의 지배를 극복한 모습의 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경제가 자본주의적으로 조직화된 … 조직화된 경제를 바라보고 있다. 현실적으로 볼 때, 조직화된 자본주의란 원칙적으로 사회주의적 계획생산으로써 자유경쟁의 원리를 억누르는 것을 뜻한다.”

이렇듯 ‘조직화된 자본주의’를 ‘사회주의적 계획경제’와 등치시킴으로써, 힐퍼딩은 맑스주의가 뭔가 불필요한 사족이라고 선언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독일조합주의 핵심이론가인 타모프(Tamov)는 브레슬라우(Breslau)에서 열린 독일노동조합연맹 전체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노동계급운동의 주요사상으로서 맑스주의는 시대에 뒤처졌다”라고 하면서, “맑스와 엥겔스는” 자본주의의 “첫 시대를 대변하는 인물들이었고,” 현대자본주의를 대변하는 인물은 포드(Ford)다”라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독일조합주의 이론가인 나프탈리(Naphtali)는 “맑스와 엥겔스가 경기변동을 두고 번영과 위기의 주기적 반복이라고 말한 것은 자본주의의 초창기에나 들어맞는다”고 했습니다.

또 다른 독일조합주의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노동계급이 자본주의체제의 일부이며, 따라서 이 체제를 무너뜨리면 자기 자신도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계급의 역사적 임무는 체제 내에서의 자기 위치를 통제함으로써, 전체 사회구조를 개선하는 것이며, 이는 곧 자기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는 것을 뜻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회민주주의가 제국주의적 부르주아계급 진영으로 도망가서 투항했다는 점에 비춰보면, 저 마지막 인용문의 깊숙이 자리 잡은 넋 빠진 변절행위가 그리 놀랄만한 일도 아닙니다.

위에 인용한 발언들에서 나타나는 자본주의의 영속성에 대한 애정 어린 믿음은 비단 독일사회민주주의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반동적인 환상은 대공황 직전의 안정기 동안의 제2 국제당 내 모든 정당들에게 나타난 일반적 모습이었습니다.

벨기에사회민주당 지도부였던 에밀 반더벨데(Emile Vandervelde)는 1926년 <은행가들의 선언>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금융자본과 사회민주주의는 개념적으로 통한다고 하면서, “금융가들의 국제조직이 쓰는 언어나 사회주의국제당이 쓰는 언어나 별반 다르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영국에서는 노동당과 노조지도부들이 맑스보다 포드가 더 우월하다고 선전하려고 갖은 짓을 다했습니다.

제2 국제당 내의 정당들이 그런 환상을 품었던 반면, 코민테른은 상대적 안정기의 이행기적이고 일시적인 성격을 분석, 증명해내고, 장차 새로운 시기, 즉, 세 번째 시기인 엄청난 격변기가 도래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생산력 발전과 시장 축소 간의 모순이 격화되는 이 세 번째 기간은 결국 새로운 제국주의전쟁을 촉발시킬 것이다 … 이후 안정적인 자본주의 안에서 지속적으로 발전하는 모순을 통해 또다시 안정적 자본주의가 찾아올 것이다. 허나 이는 향후 더욱 불안하고 심각한 자본주의의 일반적 위기의 격화로 이어지게 될 뿐이다….”

“결국 안정적으로 발전하는 자본주의 속에 자리 잡은 모순들에 의해서, 지금의 ‘안정기’ 역시 거대한 격변기로 발전해갈 것이다.”

(1931년까지 전 세계적으로 약5천만 명의 실업자를 양산하며 인류역사상 가장 끔찍한 세계경제위기로 이어졌던) 1929년 미국증권시장 폭락과 일본제국주의의 전쟁 선포로 드러났듯이, 코민테른의 예측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습니다. 오죽하면 당시 미상원의 조사위원회가 심각하기 자문하기를, 세계경제위기가 공산주의자들의 음모가 아니었던가, 라고 했겠습니까.

다시 말하면, 코민테른의 이 같은 분석은 과학으로서의 맑스레닌주의가 사이비 과학으로서의 자본주의와 사회민주주의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한 것입니다.

파시즘의 급속한 확대

1930-32년 이후 독일파시즘이 급속도로 확대된 것은, 당시 세계경제위기로 인해 자본주의와 바이마르공화국을 지탱하던 기반 전체뿐만 아니라, 바이마르정권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사회민주당의 입지도 역시 흔들렸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경제위기, 그리고 브뤼닝(Brüning)정부가 펼친 과도한 긴축정책은, 자본주의 조건 하에서 모두를 위한 평화와 번영을 향한 민주적 진보에 대해 사회민주주의가 내놓은 그 모든 약속들과 동화 같은 얘기들이 전부 다 헛된 망상이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이 깨지자, 계급의식이 깬 노동자들은 공산주의 편으로 가고, 후진적인 노동자들은 파시즘 편으로 넘어갔습니다. 1930년에서 1932년 사이에, 사회민주주의는 1,338,000 표를 잃었고, 공산주의는 1,384,000 표를 획득했습니다. 사회민주주의가 퇴조하여 무력화되며 신뢰를 잃었고, 점점 더 세력이 커지는 공산주의에 더 이상 저항할 수 없게 되자, 그리고 그 결과 확연히 다른 두 개의 적대적 진영들로 사회가 양극화되자, 독일자본주의는 새로운 방법, 새로운 수단을 필요로 하게 되었습니다.

유례없는 경제위기에 부딪히자, 독일부르주아계급은 1918년 격동기에 쟁취됐던 임금, 노동시간, 사회적으로 입안한 법률들 등 당시의 사회적 성과물들, 즉, 사회민주주의가 프롤레타리아계급 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주된 기반을 제공해주던 성과물들을 모두 폐기시켜야만 하는 절박한 필요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혁명 초기에 쟁취한 이 모든 양보물들을 없애고, 노동자들을 경제적 고통에 빠뜨리기 위해 자본주의 세력들이 작정한 것입니다.

하지만, 노동계급 내에서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가지고 성장하던 강력한 공산당이 버티고 있었고, 사회민주주의 세력의 영향력은 퇴조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둔 독일자본주의 세력들은, 이제 새롭고도 노골적인 형태의 독재정치를 필요로 했습니다.

더 이상 아무런 우여곡절도 겪을 것 없이, 사회민주주의는 연방정부에서 추방되었고, 1930년 여름엔 의회도 없이 포고령과 예외조치로만 통치했던 브뤼닝 독재체제로 교체되었는데, 여기서도 사회민주당원들의 협조가 있었습니다.

압도적 다수의 독일 자본가와 지주들이, 이제까지는 부분적으로만 협조해오다가 폭압적 독재의 수단인 국가사회주의에 전면적으로 충성을 맹세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때부터였습니다.

만약 사회민주주의 세력이 공산주의들과 연합하여 브뤼닝 독재정권의 긴축정책공세에 맞서는 공동전선을 형성할 준비가 되어있었다면 자본주의세력의 공격을 물리쳤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지극히 온당한 일입니다. 하지만, ‘차악’의 정치라는 미명 아래 사회민주주의 세력들은 브뤼닝 독재정권의 긴축경제 포고령과 노동자 탄압을 지지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를 강화시켰고, 노동자들의 투쟁전선을 약화시켰으며, 프롤레타리아계급의 대오를 흐뜨려트려 파시즘의 노리개가 되도록 했습니다. 1930-32년의 결정적 시기에 긴축정책과 기초생활 악화로 생성된 투쟁의 불씨는 평소 같으면 프롤레타리아계급 진영을 강화시켰을 터인데, 프롤레타리아계급의 대오가 흐트러짐으로써 오히려 파시즘 진영을 강화시켰습니다.

공산주의자들과 협력하기를 끝끝내 거부한 사회민주주의자들 때문에 히틀러 세력을 물리칠 유일한 기회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노동계급 통일전선을 구축하는 일은 불가능해졌고, 이는 파시즘의 승리를 위한 길을 활짝 열었습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이런 태도를 취한 것은, 부르주아계급과의 계급협조노선, 그리고 부르주아계급 국가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이 같은 노선은, 그들이 ‘차악’이라고 부르던 힌덴부르크(Hindenburg), 브뤼닝, 폰 파펜(Von Pape)의 독재 치하에서조차도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형태의 독재체제는 파시즘의 완전한 승리를 위한, 그리고 노동계급의 저항을 차례로 분쇄하기 위한 토대를 준비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완료하자 그들은 국가권력을 히틀러 세력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지원을 받으며 힌덴부르크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1년도 못가서 그는 히틀러를 수상으로 지명했습니다. 심지어는 히틀러가 승리한 이후에도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나찌체제에 반대하기를 거부했습니다. 나찌는 ‘합법적’ 수단으로 권력을 잡았다. 그러므로 ‘불법적’ 나찌통치라기 보다는 ‘차악’이다!

결론적으로, 노동계급의 단호한 저항을 약화시킨 것은 파시즘이 아니라, 사회민주주의의 작품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쟁을 향한 질주

1929년의 대공황과 그 이후의 경기침체로 인하여 그 어느 때보다도 분명해진 것은 제국주의국가들이 무서운 대결국면으로 몰리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자본주의의 상대적 안정기가 끝나고 거대한 격변기에 자리를 내준 것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자본주의 국가들 간의 그 어떤 모순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식민지를 통한 시장개척에 실패한 독일은 막대한 전쟁보상금에 허덕였고, 다른 제국주의 경쟁국들에 대한 복수심을 채워줄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제국주의 열강들은 사회주의 쏘련에 대한 증오로 똘똘 뭉쳐있었습니다.

독일에서 파시즘이 부상하자, 전 세계는 매우 복잡하게 전개되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쏘련은 제국주의열강들이 자신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뭉치지 못하도록 노력했고, 소위 ‘민주적’ 제국주의열강들은 독일의 공격이 쏘련을 향하도록 만들기 위해 가능한 모든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런 정책 하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그리고 다소 완화된 모습이지만 미국도 역시 당시 임박했던 나찌의 공격을 공동으로 방위하기 위한 쏘련의 노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를 거부했습니다. 1938년 영국, 프랑스, 이태리, 독일 간에 체결된 <뮌헨협정>은 제국주의적 민주국가들이 나찌독일이 쏘련을 공격하도록 하기 위해 갖은 짓을 다하리라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같은 계획에 맞대응하여 쏘련은 1939년 <독쏘불가침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상황을 완전히 뒤집어엎게 되는데, 당시 프랑스와 영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나라였던 폴란드를 독일이 공격할 수 있게 되었고, 이에 따라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선전포고를 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쏘련이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맺은 것은 자국의 방위력을 증강시키기 위한 충분한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습니다. 한편, 독일이 조약을 체결한 이유는, 쏘련이 그리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걸 그들이 간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나라들을 달래는 한편, 이미 침략한 국가들의 희생을 발판으로 확보한 물자들을, 적당한 때가 되면, 쏘련을 침공하기 위해 쓰려고 비축하고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로부터 시작해서 나찌세력은 서유럽 전체를 정복하기 위해 전진해갔습니다. 1940년 봄 프랑스가 불과 5주 만에 함락되고, 프랑스 덩케르크(Dunkirk)에서 영국군이 쫓겨남으로써 히틀러의 독일은 유럽의 주인이 되었고, 이제 쏘련을 침략할 준비를 갖췄습니다.

1941년 6월 22일 마침내 공격이 현실화되었습니다. 서유럽에서 승승장구한 것에 고무된 히틀러 세력들은 파시스트군대에 대한 쏘련의 저항을 6주 이내로 격파할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오산이었다는 걸 그들은 뼈저리게 느껴야했습니다.

독일에서 히틀러 세력이 권력을 잡고 있었고, 쏘련을 상대로 독일과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서방의 반동적 세력들이 공공연하게 떠들 무렵인 1934년 스딸린은 이미 쏘련공산당 제17차 전체회의에서, 그런 전쟁이 초래할 후과가 어떨지에 대해서 부르주아계급에게 분명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충고한 바 있습니다.

“만일 그들(역주: 독일이나 일본)이 전 세계 노동계급의 조국을 상대로 범죄적 전쟁을 도발하는 경우, 유럽과 아시아에 있는 수많은 쏘비에트 노동계급의 친구들이 침략자들의 후방을 타격하기 위해 가능한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음을 부르주아계급은 알아야한다. 만일, 지금은 ‘신의 은총으로’ 행복하게 권력을 잡고 있는 몇몇 나라들이, 그 전쟁이 끝날 무렵에 가면 사라져 없어질지도 모를 텐데, 그때 가서 우리를 탓해서는 안 될 것이다….”

“쏘연방을 상대로 그런 전쟁을 일으킨다면 침략자들은 완전히 패배할 것이며, 유럽과 아시아 여러 나라들에서는 혁명이 일어나서 그곳의 부르주아와 지주들의 정부를 무너뜨리고 말 것이다.”

이런 천재적인 예언은, 동유럽과 중앙유럽에서의 인민민주주의의 출현에 의해, 그리고 중국, 조선, 베트남 등 극동지역에서의 혁명 성공에 의해 현실화되었고, 전 세계 영토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전 세계 인구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강력한 사회주의국가블록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나찌를 상대로 한 <위대한 애국전쟁>에서 쏘련이 승리한 것은 운이 좋아서가 아니었습니다. 오랜 기간 동안 준비한 것이었습니다. 1931년 2월 제1차 쏘비에트산업 간부총회에서의 연설에서 스딸린은 왜 쏘련의 산업화 속도를 늦출 수 없는가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속도를 낮춘다는 것은 뒤처진다는 것을 의미하고, 뒤처지는 자는 패배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패배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아니, 우리는 패배하기를 거부합니다!”

“옛 러시아 역사에 나타나는 한 가지 특징은 러시아가 그 후진성 때문에 끊임없이 패배했다는 것입니다. 몽골의 칸들에게 패배하고, 터키의 지역관리들에게 패배하고, 스웨덴의 봉건군주들에 패배하고,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토지소유귀족들에 패배하고, 영국과 프랑스의 자본가들에 패배하고, 일본의 영주들에게 패배했습니다.”

“그들 모두에게 러시아가 패배한 이유는, 후진성 때문입니다. 군사적, 문화적, 정치적 후진성, 농업과 공업에서의 후진성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러시아를 패배시킨 것은, 그렇게 하는 게 이윤이 남았고, 그렇게 해도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후진적이고 자, 그리고 약자를 두들겨 패는 것, 그것이 바로 착취자들의 법이고, 자본주의의 정글 법칙입니다. 넌 후진적이고, 그래서 약자다. 그러므로 너는 옳지 않다. 그러므로 넌 두들겨 맞고, 노예가 되어야 한다. 반대로, 넌 강하다. 그러므로 너는 옳고, 그러므로 우리는 널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50년, 또는 약 100년 정도 선진국들보다 뒤처져있습니다. 우리는 10년 이내에 이런 격차를 없애야 합니다. 그렇게 하든가, 아니면 패배를 맛보든가, 둘 중에 하나입니다.”

맑스주의와 레닌주의 영광스런 깃발 아래, 그리고 전설적인 스딸린이 이끄는 볼셰비키당의 지도 아래, 쏘련은 선진 자본주의국가들과의 격차를 메우기 위해 10년 동안 매진했습니다. 이런 영웅적 행동들에 힘입었기에 쏘련 인민들은 나찌독일을 실질적으로 혼자서 패퇴시킬 만큼의 비상한 행동을 보여줄 수 있었습니다.

나찌와 ‘민주적’ 제국주의자들이 다 같이 바라던 바와는 반대로, 함락되기는커녕, 쏘련은 나찌 공격 초기의 역경을 극복하고, 4년 만에 전세를 완전히 뒤집고 그들을 베를린으로 몰아냈습니다. 독재자 히틀러가 자살하던 바로 그 때, 의사당 건물 지붕 위에선 쏘비에트 군대가 게양하는 붉은 기가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모스끄바, 스딸린그라드, 꾸르스끄, 레닌그라드, 베를린에서의 전투들은 쏘련 병사들과 시민들의 영웅적 행동을 장엄하게 증언하는 기록들로 영원히 남게 될 것입니다. 사실상 혼자서의 힘으로 나찌를 남김없이 소탕함으로써 붉은 군대와 쏘비에트 인민들은 나찌즘의 잔혹함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했습니다.

쏘련의 전과가 어떠했는가는 1942년 11월 현재 독일군 256개 사단들 중에서 179개가 쏘련과의 전선에서 싸우고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가늠할 수 있습니다. 나머지 사단들은 이미 점령한 유럽을 방어하는데 주로 동원됐고, 북아프리카에 있던 영국군은 독일군 4개 사단과 이태리군 11개 사단을 상대했을 뿐이었습니다.

영국과 미국은, 거듭된 약속에도 불구하고, 1944년 6월이 되어서야 독일과의 전선을 다시 구축하기 시작합니다만, 그때는 이미 쏘련 단독으로 독일군을 패퇴시킬 것이 확실해지고 있었습니다.

디데이(D-Day) 상륙작전은, 나찌즘에 대한 공격이라기보다는, 서유럽을 해방시키던 붉은군대를 막으려는 측면이 더 강했습니다. 사람들이 제국주의자들이 떠드는 헛소문에 귀를 기울인다면 영미 제국주의가 나찌군대를 패배시켰다고 생각하겠지만, 진실을 말한다면, 나찌를 패배시키는 데 가장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은 붉은 군대와 쏘련인민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승리를 위해 쏘련이 치른 값은 엄청났습니다. 750만 명의 병사들을 포함해서 2,700만 명의 쏘련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에 비해 미국은 30만 명, 영연방은 224,723명의 영국인 희생을 포함해서 353,652명에 불과했습니다.

더욱이 쏘련 영토와 경제적 자원의 3분의 1이 초토화되었습니다. 1,710개의 읍면과 70,000개의 마을들이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6,000,000채의 집과 건물들이 무너졌고, 31,800개의 산업단지들이 초토화되었습니다. 98,000개의 집단농장과 국영농장이 파괴되었고, 64,000,000마리의 가축들을 독일군들이 훔치거나 죽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회민주주의, 특히 1918년 혁명을 압살하고, 부르주아계급을 권좌에 복귀시키고 나찌즘이 출현하도록 한 독일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저지른 배신으로 인해서 쏘련과 그 인민들이 치러야했던 대가였습니다. 그 배신이 만들어낸 끔찍한 괴물이 쏘련과의 대결 끝에 마침내 패배한 것이었습니다.

나찌를 쳐부수고 끝장내자마자 쏘련은 또 다른 전쟁, 즉 미 제국주의에 의한 냉전을 치러야했습니다. 쏘련과 사회주의 진영의 나라들을 상대로 한 싸움에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또다시 열광적으로 제국주의자들을 지지하며 그들과 합세했습니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들

위에서 간략히 살펴본 세 국제당의 역사에 따르면, 맑스레닌주의와 프롤레타리아계급의 국제주의 원칙들에 충실하면 우리의 운동이 비약적으로 발전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또한 그런 원칙들로부터 이탈하면 심각한 손실을 입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1934년 1월의 제17차 당전체회의에서 스딸린은, “우리당의 우월성은 어디에서 힘입은 것인가?”라고 묻고는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그것은 우리당이 맑스주의정당이고 레닌주의정당이란 사실에 있습니다. 당사업을 맑스, 엥겔스, 레닌의 가르침에 의거하여 수행해왔기 때문입니다. 이들 가르침에 충실히 따르는 한, 그것을 나침반처럼 지니는 한,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동지들, 우리가 승리한 것은, 맑스, 엥겔스, 레닌의 깃발 아래에서 싸워왔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따라서…. 결론은, 우리는 맑스, 엥겔스, 레닌의 깃발을 충실히 따라야만 합니다.”

제1, 제3 국제당이 성공했고, 제2 국제당이 몰락한 것은, 제1, 제3 국제당이 맑스주의의 깃발을 끝까지 틀어쥐었던 반면, 제2 국제당은 맑스주의를 멀리하고 계급협조에 매수되어 모든 신뢰를 잃어버린 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는 교훈은, 맑스주의, 레닌주의의 깃발, 그리고 맑스, 엥겔스, 레닌, 스딸린의 가르침에 충실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한다는 것입니다.

코민테른은 각국에서의 공산당의 성숙과, 점점 더 복잡해져가던 국제정세와, 각 나라마다의 투쟁상황에 비추어 봤을 때, 그 역사적 사명과 임무를 달성했기 때문에, 1943년 6월에 해체되었습니다. 반파시즘 전선을 전 세계적 차원에서 유지해야할 필요성이 코민테른을 해체하기로 결정하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것은 전혀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쏘련을 수호하는 일은 쏘련 인민들뿐 아니라 인류 전체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지극히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그리고 특히 30년간의 흐루시쵸프식 수정주의적 배신 때문에 1991년 쏘련이 패망한 것에 비추어 볼 때, 코민테른 최고위원회 제7차 확대전원회의에서 쏘련공산당 내의 반혁명적 ‘좌파’ 트로츠키 반대세력과의 논쟁 중에, 스딸린이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을 되새겨봐야 합니다.

“자본이 쏘련을 짓부수는 데 성공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모든 자본주의 국가들, 그리고 식민지 국가들에서, 암흑 속의 반동의 시대가 시작될 것입니다. 노동계급과 피억압 인민들은 명줄을 붙잡힌 채 꼼짝 못할 것이고, 국제적 차원의 공산주의의 입지는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이제 쏘련이 사라진 상태에서, 암흑 속의 반동기가 시작되었고, 노동계급과 피억압 인민들이 사실상 명줄을 붙잡힌 상태이며, 제국주의가 피억압 국가들을 재식민지화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구쏘련 인민들과 동유럽의 인민들이 기아와 가난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서방 제국주의국가의 노동계급들은 끊임없는 공격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영미 제국주의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인민들을 상대로 히틀러식의 약탈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만약에, ‘민주적’ 제국주의국가들과 히틀러 파시스트 세력 간의 협력의 결과 쏘련이 1940년대에 무너졌다면, 이런 암흑 속의 반동기는 60년 더 빨리 시작되었을 것이고 전 세계 인민들에게 헤아릴 수 없는 참혹한 결과를 가져왔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우리는 코민테른 해체를 승인한 쏘련의 지도부를 피상적으로 비난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기억해야할 중요한 것은, 국제공산주의운동에서 가장 권위 있는 당이었던 (볼셰비키)쏘련공산당 지도부가, 스딸린 생존 시에는 물론이요, 줄곧 혁명적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국 공산당 간의 관계는 프롤레타리아계급 국제주의의 올바른 원칙들에 의해서 정립되었다는 것, 그런 공산주의운동을 통해 하나의 목소리를 냈다는 것, 그리고 제국주의에 반대하여 싸웠던 것이 힘 있는 세계적 운동으로서의 충분한 역량을 갖춘 상태에서였다는 것입니다.

다만, 쏘련공산당 지도부와 쏘비에트국가 내부로 흐루시쵸프식 수정주의가 들어오면서부터 비로소 동지애적 연대와 프롤레타리아계급적 국제주의 원칙들로부터 이탈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프롤레타리아계급과 전 세계 인민들에게 크나큰 불행과 파멸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야만 합니다. 바로 지금, 아니면 가까운 장래에, 제3국제당 노선을 따르는 민주집중제 원칙에 의거한 새로운 공산주의 국제당을 건설하는 것이 가능할까, 하고 말입니다.

이에 대한 우리 당의 입장은 현재로서는 그런 조직을 만들 만한 여건이 조성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 당은 혁명적 세력들이 정기적으로 만나면서 경험을 주고받으며, 전쟁과 평화의 문제라든가 제국주의를 혁명적으로 무너뜨리는 문제 등 중요한 의제들에 관하여 긴밀하게 협력할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동지애적 연대를 실천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전 세계 모든 노동자들 속에 생명을 불어넣는 원칙을 굳게 다진다”면 말입니다. 노/정/협

이 기사를 총 397번 보았습니다.

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