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사태’의 본질과 현상들 – 수십 개의 불공정 잣대로 하나의 계급모순을 은폐한다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임명을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이른바 ‘조국 사태’는 마치 대선을 방불케 할 만큼 수십만 건의 언론 기사가 쏟아지고 장장 11시간의 기자간담회까지 이뤄지는 진풍경을 연출하면서 한국 사회 모든 정치적 사안을 뒤덮고 있다.

이 ‘조국 대전’에는 내년 총선을 앞두고 저마다의 이해관계를 가진 각 부르주아 정치세력이 참여하였다. 민주당은 조국 임명이 실패하면 정치위기가 가속화 된다는 위기의식 하에 혼신의 힘을 다해 조국을 구하기 위해, 자유한국당은 조국 임명을 둘러싸고 극렬한 반대로 승기를 잡고 내년 총선에서 승리하기 위해, 정의당은 이도 저도 아닌 모습으로 대중적 여론과 당내 여론의 눈치를 보며 갈팡질팡 동요하며 각 정치세력은 ‘조국 사태’에 임하고 있다.

이른바 ‘조국 사태’의 본질은 기본적으로 민주당과 자한당을 중심으로 부르주아 정치세력이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를 관철시키기 위한 이전투구라고 정의내릴 수 있다. 조국이 얼마나 부패했는지 아닌지 문제는 이 정치적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기 위해 내세우는 표면적 이유에 불과하다.

보라! 지금까지 자한당이나 민주당이나 가릴 것 없이 고위 공직자 후보들이나 그것을 검증하는 대다수 국회의원들 중에서 조국 보다 덜 부패하고 타락하지 않은 자가 하나라도 있었는가? 너희 가운데 죄없는 자가 조국에게 돌을 던져라! 너희들 중에 누가 과연 조국에게 돌을 던질 수 있으랴! 부패와 타락, 기생성은 지배계급 기생충들의 속성이자 존재의 이유이다. 자본주의 지배계급 분자들이 청렴하고 양심적인 것은 낙타가 바늘 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

그런데 현재 부르주아 정치세력이 노동자 인민에게 절대적인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바, 조국의 법무부 장관 임명 문제를 둘러싸고 저마다의 입장을 표명하고 있는 대다수 노동자 인민도 기존 부르주아 정치세력의 영향을 강하게 받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조국의 법무부 장관 임명 여부에 대한 지지 여부는 단순하게 조국 개인을 지지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를 넘어서서 민주당과 문재인 정권을 지지하느냐 반대하느냐의 문제로 확장되었다.

본질은 다양하게 현상한다. 즉, 본질은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난다는 말이다. 조국 사태의 본질이 기본적으로 민주당과 자한당이 중심이 되는 부르주아 정치세력들 간의 공방이지만, 이 과정에서 자유한국당과 민주당으로 대표되는 부르주아 정치세력들의 계급적 속성과 처지도 드러나고 있다.

먼저 부르주아 이전투구는 한국사회 가장 추악하고 반동적이고 부패하며 오랫동안 권력을 독점했던 자산계급 정당인 자유한국당과 그 반동성과 부패성을 다투고 있는 상대적으로 신권력인 민주당의 상호 정치 공방이다. 조국은 중자산계급 출신으로 당시 자신의 계급 존재를 배반하고 사노맹 활동을 했다. 그러나 쏘련 해체 이후에는 청산주의에 빠져 운동을 포기했다. 조국은 안으로는 자산을 불리는 재테크에 열중하고 자신의 부와 지위를 상속시키기 위해 입시 비리 의혹과 특혜 의혹을 사가면서까지 자녀 교육에 열중하면서도 겉으로는 진보지식인으로 행세했다.

조국은 기자 간담회에서 “금수저는 보수여야 합니까?”라고 자신의 자산계급적 처지와 이에 반하는 ‘개혁적’ 발언의 모순에 대해 항변했다. 이 말은 문재인 정권이나 민주당의 대중기만처럼 위선적이다. 조국의 말은 자신의 금수저 자산계급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처지에 맞지 않게 진보적이라는 것이다. 금수저이면서 자기계급을 배반하기 위해서는 저 위대한 엥겔스처럼 철저한 혁명가이거나 최소한 혁명가로 살고자 노력하거나 이것도 아니면 지적 정직함이나 양심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조국이 과연 금수저이면서도 진보적인가? 조국의 계급배반적인 혁명적 지식인으로서의 면모는 수십 년 전 젊은 시절에 이미 끝나버렸다. 조국은 자신의 자산계급 출신으로 사고하고 행동했다.

조국은 현재 민주당으로 대변되는 신권력으로서 자기계급의 이해에 철저하게 복무하고 있다. 이들 신권력은 김대중, 노무현처럼 권력을 잡고서는 재벌 같은 대부르주아와 미제국주의의 이해에 철저하게 복종하며 반노동자적이고 반민중적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문재인 정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들은 모순적이게 국내외 독점자본의 이해를 대변하면서도 지지세력은 소부르주아와 자유주의적 지식인, 상당수의 노동자계급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계급적 본성을 위장해야 한다.

문재인 정권이 노동존중, 소득주도 성장, 비정규직 제로 등을 내세우고 대중을 현혹·기만하면서 그것으로 자본의 이해를 일방적으로 관철시켜 왔던 것처럼, 이들은 자유한국당 무리들에 비해 과거 운동 경력을 적당하게 포장할 줄 알고, ‘개혁적’으로 위장하고 양심적 지식인으로 행세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또한 능력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위선의 가면은 청와대에 들어가자 벗겨졌다. 조국은 민정수석 시절 전교조의 법외노조 문제를 외면했으며 철저하게 조작된 알오사건과 내란공작, 통합진보당에 대한 불법적인 해체 공작 등 국정원을 비롯한 국가권력에 의해 자행된 폭압적인 탄압에 대해 원상회복 조치는커녕 단 한마디의 사과도 없었다. 심지어는 내란공작 조작사건으로 의원직을 박탈당한 이석기 의원에 대한 즉각적 석방은 고사하고 단 한명의 양심수도 석방하지 않았다. 조국은 법무부 장관 후보자로서 정책을 밝히는 자리에서도 “폭력을 수반한 집회·시위에 대한 불가피한 법집행” 운운하며 자본가들의 온갖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눈감으면서 노동자들의 집회에 대해서는 국가권력을 동원하여 때려잡겠다는 반동적인 의사를 표명하고, ‘정신장애인’을 범죄자로 인식하는 시대착오적인 면모를 과시했을 뿐이다. 조국은 기자 간담회에서 최근 국정원의 80년대식 프락치 공작과 사찰에 대해서도 국정원이 “민간인 사찰 문제 아니라 대공수사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라고 해명한 걸로 안다”며 국정원의 파쇼적 행태를 비호했다.

문재인 정권은 자신들의 반노동자적, 반민중적, 반민주적인 본질을 위선적인 언사와 이미지 조작, 거짓 이데올로기로 은폐하는 기만적인 면모를 보여줬다. 조국은 그러한 문재인 정권을 그대로 닮았다. 조국은 문재인 정권 그 자체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들은 조국을 운명공동체로 사고하고 결사옹호하고 있는 것이다.

계급모순을 은폐하는 불공정의 잣대

조국 사태에서 나타나는 현상 중 또 하나는 정의와 불공정, 특혜의 문제이다. 조국과 가족, 친척들이 ‘가족펀드’로 투자한 투자사의 관급공사 수주 의혹이 대표적인 것이지만 조국의 불법적인 자녀 특혜 문제가 가장 심각하게 부각되고 있다. 특히 학술 논문 제1저자 등재 같은 자녀 입시 부정 의혹 및 대학에서의 장학금, 표창장 특혜 의혹에 대해 청년들은 조국에 대한 깊은 실망감과 배신감, 분노를 표현하는 경우도 많다.

청년층에서 불공정성과 박탈감으로 인해 조국에 대한 분노를 표명하고 있다. 최근 청년들 사이에서는 공정사회에 대한 갈망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불공정한 사회,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 대해 사람들이 분노하기 때문이다. 언론에서도 이를 집중 부각시키고 있다. 그런데 공정사회의 문제를 집중 부각시키고 있는 언론에서는 정작 이 불공정, 부정의를 낳는 사회 불평등 문제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침묵한다. 심지어는 불공정을 그렇게 파고드는 언론들이 사회불평등을 낳는 최대 원인인 최저임금 인상에 대해서는 격렬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불공정하다, 불평등하다는 사실상 같은 의미를 가진 단어로 보인다. 그런데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사회 불평등의 문제는 보통 계급모순의 문제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하여 불공정의 문제를 집중 부각시키고 있는 정치권과 언론에서도 사회불평등에 대해서는 대개 침묵하고 있다.

사회 불평등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부와 권력을 지배하는 자본가 계급과 그 일파들,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하고 빈곤에 허덕이는 절대 다수 노동자 인민의 모순을 드러내는 말이다. 기업 같은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 계급은 보통 토지와 주식자산 전반을 보유하며 압도적인 부를 누리고 이를 대대손손 대물림한다. 이 생산수단이 자본가들한테 독점되면서 분배의 불공정 문제도 나타난다. 오늘날 분배 문제를 개선하려는 시도가 번번이 실패하는 것은 분배의 양극화를 낳는 원인인 생산수단의 독점적 소유는 내버려두고 결과만 뜯어고치려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회 각 영역에서의 불공정의 원천이기도 하다. 특히 교육, 보육, 의료, 주택에서의 불공평은 사회문제의 핵심들이다. 그런데 이 사회불평등을 낳은 계급모순을 인식하지 못하면 자본가 계급의 이데올로기에 포섭되고 만다.

계급모순은 생산수단 소유라는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잣대와 근거를 가지고 있다. 이 근거를 바탕으로 사회적 모순, 부의 집중과 불평등, 불공평, 부정의의 문제를 다룬다. 계급문제에서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의 모순이 중심적 모순이지만 이 사이에 위치한 중간계급의 문제도 있다. 지식인들은 단일한 계급이라기보다는 보통은 어느 한 계급의 이해에 복무한다. 특히 계급지배 사회에서 대다수 지식분자들, 전문가들은 재벌들의 이해에 철저하게 복무한다. 이들이 자본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들의 계급적 처지를 떨쳐버리고 인민대중에게 복무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계급의식과 용기와 지적양심과 투철한 인간애 등을 필요로 한다. 반면 사회주의에서 지식인들은 인민대중의 이해에 철저하게 복무한다. 이것이 사회주의 계급적 조건이고 도덕이고 양심이고 행복이다.

그런데 불공정은 계급의 중심 잣대로 사물을 인식하지 않는다. 무수한 불공정의 잣대가 있다. 이 무수한 불공정 잣대로 하나의 계급적 불평등을 은폐한다.

공정사회가 무엇인가에 대해 딱 부러지는 답은 없습니다. 그 이유는 ‘공정사회’의 의미가 시대와 사회, 그 사회 구성원이 처한 위치(경제적 소득이나 지위)에 따라 ‘공정사회’의 의미를 다르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부가 추진하는 공정사회의 의미는 2010년 8.15 대통령 경축사에 나타나 있습니다. “출발은 물론 경쟁 과정을 공평하게 함으로써 경쟁자들이 그 결과에 대해 공감하고, 스스로 책임지는 사회”이며, 부패가 없고, 균등한 기회가 보장되며, 약자를 배려해 그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사회입니다.

공정사회를 구성하는 주요 가치는 “자유와 창의 존중”, “균등한 기회와 공정경쟁”, “약자에 대한 배려” 입니다.

“자유와 창의 존중”은 우리나라의 건국 이념인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원칙’에 따라 기여한 만큼 공정하게 보상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균등한 기회와 공정경쟁”은 출발과 과정에서 모든 개인에게 기회와 경쟁을 공평하게 보장하며, 결과에 대해 스스로 승복하고 책임을 인정하는 사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약자에 대한 배려”는 사회, 경제적 약자들이 기본적인 삶을 누릴 수 있도록 국가와 시민사회, 기업 등 사회 공동체가 책임 의식을 갖고 노력하여 패자부활이 가능한 열린 사회를 말합니다.

2012년 공정사회를 부르짖는 정부에 대한 질문에 대해 국무총리실이 한 답변이다. “출발은 물론 경쟁 과정을 공평하게 함으로써 경쟁자들이 그 결과에 대해 공감하고, 스스로 책임지는 사회”라는 주장처럼, 문재인 정권의 모토였던 “기회는 평등할 것이고, 과정은 공정할 것이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과 같은 말이다.

위 답변처럼 공정사회가 무엇인가는 “딱 부러지는 답은 없”는데, “그 이유는 ‘공정사회’의 의미가 시대와 사회, 그 사회 구성원이 처한 위치(경제적 소득이나 지위)에 따라 ‘공정사회’의 의미를 다르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정사회가 “시대와 사회”, “그 사회 구성원이 처한 위치(경제적 소득이나 지위”, 즉 계급적 처지에 따라 저마다 다르게 공정성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자본의 처지에서의 공정성이 따로 있고, 노동자 인민의 처지에서 공정성이 따로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한 계급의 공정성, 또는 한 부문이나 개인의 공정성이 다른 계급, 다른 부문, 타인에게는 불공정성으로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신분상 자유로운 노동력 판매와 구매도 시민적 계약으로 ‘공정’하게 이루어진다. 그러나 맑스가 말한 것처럼, 이때 노동자들의 ‘자유’는 이 ‘공정’한 자본과의 계약에 나서지 않을 때 역설적으로 굶어죽을 수밖에 없는 그러한 의미에서의 ‘자유’다. 노동자들은 먹고 살기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에 판매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러한 계약이 형식상, 법적으로 자유롭다 하더라도 기업을 소유한 자본과의 관계에서 ‘공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더욱이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력 시장에서 노동력 매매는 자유계약에 의해 성사되나 자본은 그 이후 노동력에 대한 일방적인 처분권을 가지고 노동자들을 마음 놓고 착취하려 한다.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어 단결하고 싸울 때라야 그나마 형식적이고 명목적인 자유는 ‘공정’에 가까워질 수 있고 자본의 무한한 착취욕을 부분적으로 제한할 수 있다.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착취사회를 철폐할 때만이 궁극적으로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이 기업과 사회의 주인이 될 수 있다. 그럴 때라야 진정으로 ‘공정사회’에 대해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이해관계가 서로 첨예하게 적대적인 계급사회에서 공정성은 권력과 재산, 기업과 금융, 부동산을 많이 소유한 힘과 권세를 지닌 자들의 배타적으로 누리는 일방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법적권리 역시 “유전무죄 무전유죄”처럼 배타적 권리자와 무권리자에게 서로 다르게 적용될 수밖에 없다.

“약자에 대한 배려” 운운하지만 “‘자유와 창의 존중’은 우리나라의 건국 이념인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원칙’에 따라 기여한 만큼 공정하게 보상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원칙”에 따라 자본가들은 자신들이 절욕이든 기업관리든 창의성이든 자본의 성장에 기여했다고 하고 있으며 그 대가로 자본을 소유하며 착취와 부를 독점한 것을 정당화하고 있다. 그런데 자본가들이 말하는 자본에 대한 자신들의 권리, 소유권은 사실 자본가들의 것이 아니라 과거 노동자들의 집단적 노동의 결과물에 불과하다. 역사적으로 자본의 형성은 노예노동, 농민에 대한 수탈,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로 형성되어 왔다. 대자본의 경우 자본가 개인이 최초에 자신의 노동으로 땀 흘려 시초자본을 마련했다면 그 부분만큼은 자신의 것이라 하더라도 그 이후 거대자본은 모두 노동자들의 집단적 노동의 결과물이다. 게다가 과학기술 성과라는 노동자들의 사회적 노동, 진보의 성과물들 역시 자본가 개인의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공동으로 누려야할 공동의 자산이다. 무엇으로도 자본가는 자본의 소유자가 될 수 없다.

“자유민주주의”는 바로 자본가들의 시장에서의 자유로운 노동력 매매와 자유로운 착취와 억압과 탄압을 보장하는 착취제도에 불과하다. “약자에 대한 배려”는 이 착취사회의 본질을 은폐하는 수사에 불과하다. 따라서 공정성과 공정사회는 정의와 마찬가지로 주관적이고 상대적이고 상호 배타적인 구호에 불과하다.

조국의 자녀에 대한 특혜와 특권 의혹을 내걸고 불공정과 박탈감을 호소하는 절대다수의 인민의 자식들에게 이것은 부정의고 불공정이지만 조국에게 그것을 강요하는 것은 불공정이고 부정의가 될 수 있다. 조국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부와 지위와 권력만큼 자신들의 권리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법적 시비를 빠져나가고자 “입시 제도의 문제” “당시의 구조적 문제”로 자신들의 특혜와 특권, 그것의 대물림을 은폐하는 것 역시 그들의 정의이고 권리이다.

이처럼 공정성의 잣대는 주관적이고 수많은 서로 다른 잣대를 가지고 있다. 공정성은 자본가와 노동자, 가진 자와 가난한 자, 권력자와 피권력자 간의 계급모순과 사회불평등을 철저하게 은폐하고 피착취 계급 내부의 인자들이 서로를 질시하고 물어뜯게 함으로써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야기한다. 이로써 자산계급, 착취계급에 대한 인민들의 저항은 표적을 잃고 무마된다.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간 모순을 인민 내부의 모순으로 돌려서 지배계급의 피지배계급 분열통치전략에 철저하게 이용될 수도 있다.

일례로 노동자 계급 내부에서 제기된 ‘불공정’ 문제는 ‘노동자 내전’으로 표현될 만큼 노동자 내부의 심각한 분열과 갈등으로 나타났다.

지난 23일 ‘인천공항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방안 공청회’에서 정규직 노동자들이 가장 많이 언급한 단어 중 하나는 ‘공정성’이었다. 한 신입사원은 마이크를 들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힘든 취준생(취업준비생) 시절을 거쳐 수백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이 자리에 서 있다. 그런데 왜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은 비정규직들이 너무 쉽게 정규직이 되려고 하느냐. 오늘은 수능날이다. 힘들게 수험생활을 한 후배들에게 공정한 사회를 물려주고 싶다.” 그들은 “무임승차! 웬말이냐! 공정사회! 공개채용!”이라는 피켓도 들었다.[정유진의 사이시옷]“공정함에 집착하는 불공정 사회”, 경향신문, 2017.11.28.)

이러한 분열 사태는 인천공항뿐만 아니라 강사·기간제 교사 무기계약직·정규직화 반대, 서울교통공사에서의 업무직 정규직 전환 반대 서명, 철도에서의 신입 조합원들의 외주 노동자들의 정규직 전환 반대 성명 등 상당수 사업장에서 벌어졌다.

피 말리는 입시 경쟁, 수십 대, 수백 대의 치열한 입사 경쟁을 뚫고 기업에 들어온 노동자들이 제기하는 ‘공정성’ 논리와 상대적 박탈감은 한편으로는 공감할 여지가 있다. 그러나 경쟁과 시험을 통해 정규직으로 들어온 노동자들이 설령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을 막았다 하더라도 그들에게 안정적인 일자리가 항상적으로 보장되고 노동조건이 향상되고 권리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자본은 언제든지 구조조정으로 정규직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송두리째 강탈해 왔으며 노동자들의 임금과 복지를 빼앗기 위해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정규직 노동자들이 제기하는 ‘상대적 박탈감’의 시정 조치는 노동자들 내부의 ‘공정성’의 문제가 아니라 그보다 수백, 수천 배 극심한 자본가와 노동자 간의 계급불평등, 사회불평등을 극복하려는 투쟁으로 나타나야 한다.

노동자들이 구속과 해고, 손배가압류 등 탄압을 뚫고 단결과 투쟁을 통해 쟁취하는 정당하고 자랑스러운 권리는 항상 개인의 권리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권리로 확대되었고 진보적 사회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따라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자본에 대한 투쟁의 성과를 ‘무임승차’라고 부정하며 거기에 ‘공정성’의 잣대를 들이미는 것은 자본의 노림수이고 분열전략의 소산일 수 있다.

‘공정성’에 민감하고 특혜와 반칙에 분노하고 정의를 갈망하는 청년들이 정작 거대한 재벌의 착취와 권력의 탄압에 눈 감고 사회적 약자들의 호소를 외면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공동체와 집단성을 외면하는 것은 결국 만인에 대한 만인의 자해적인 투쟁을 불러와 사회 전체에 만연한 불공정과 부정의와 반칙과 특혜와 특권을 고착화 한다. 이로써 결국 개인의 권리도 야만적인 사회의 희생물로 전락하게 된다.

취업 준비의 고통과 피 말리는 시험경쟁과 일자리 획득 노력 역시 자본주의의 실업사회로 인해 생겨나고 있으며 만인에 대한 만인의 경쟁을 부추기는 자본이 조장한 원리에 의해 가중되고 있다. 정글의 가혹하고 야만적인 경쟁 대신 불평등에 맞서 싸워야 한다. 진정으로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자본의 지배를 타파하고 노동자가 권리를 누리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만인의 경쟁을 야기하는 공정성보다는 사회불평등에 맞서 싸우자!

높은 담장 안쪽에 ‘그들만의 성채’가 솟아 있음을 짐작 못한 이는 거의 없다. 하지만 소문만 무성할 뿐, 실체를 목격한 이는 많지 않았다. 조 후보자로 인해 다수 시민이 담장 안쪽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게 되었다. 영화 <기생충>은 ‘냄새’를 통해 계급 문제를 은유했다. ‘조국 사태’는 은유를 넘어섰다. 조 후보자는 ‘계급’이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활짝 열어젖혔다.(“조국, ‘계급’이라는 판도라 상자 열다”(김민아 토요판팀 선임기자, 경향신문, 2019.08.26.)

이 칼럼에서는 이른바 조국이 “‘계급’이라는 판도라 상자 열다”라고 했지만 정작 그 열려진 판도라 상자에는 계급문제의 본질도, 이를 근원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아무런 전망도, 구체적인 대책도 없었다. 그저 “외고·국제고·자사고 체제를 뜯어고치고, 일반고에 대한 획기적 지원책을 강구해야 한다. 대학입시에서 지역균형선발·기회균형선발을 확대하고, 저소득층 학생들에게 더 많은 장학금을 줘야 한다. 국공립대 공동학위제와 공영형 사립대 도입을 추진하고, 출신학교 차별금지도 법제화할 필요가 있다.”며 수십 년 동안 제기돼 왔던 문제를 되풀이 할 뿐이다. 이 칼럼에서는 “문제는 계급이다.”라고 했지만 “해답은 정치적 상상력이다.”라며 의례적이고 구체성 없는 무정부주의적 대안만을 제시할 뿐이다.

자본주의 착취사회에서는 노동자들에 대한 무한대의 착취뿐만 아니라 교육불평등도 심화되고 있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속담은 현실을 호도하는 옛말이 되고 있다. 조국 자식이 조국이 누리는 ‘금수저’의 특권과 특혜를 대물림하는 것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재벌들의 자식들은 이 보다 수천 배나 더한 편법불법으로 이 사회 전체의 공동소유가 되어야할 거대 기업을 2세, 3세로 영구적으로 대물림하고 있다. 한쪽에서는 주체할 수 없는 부와 풍요, 권리와 특혜와 특권과 차고 넘치는 행복이, 다른 한 쪽에서는 감당할 수 없는 빈곤과 절망과 무권리와 죽음이 공존하고 있다. 이 공존은 화해할 수 없는 적대적 공존이다. 이 적대적 공존을 분쇄해야 한다.

청년들이여! 노동자들이여!

역사적, 과학적 인식을 위해 학습하자!

사회불평등에 맞서 싸우자!

노동3권을 쟁취하자!

죽음의 노동, 죽음의 외주화에 맞서 싸우자!

최저임금의 대폭적 인상을 위해 싸우자!

불평등의 기원인 계급지배 착취사회에 맞서 싸우자!

기생적인 불로소득자들을 척결하자!

실업과 자본의 세습사회에 맞서 싸우자!

무상의료, 무상교육, 무상보육, 무상주택을 위해 싸우자!

민중억압 도구인 국가정보원을 박살내자!

국가보안법을 철폐시키자!

계급지배 착취사회를 만든 역사적 문제들, 분단과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자!

이것이 이른바 ‘조국사태’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정치적 과제들이다. 조국이 법무부 장관에 임명되든 안 되든, 총선에서 민주당이 승리하든 자유한국당이 승리하든 저들 자산계급들의 추악한 이전투구의 장에 무기력하게 동원되어서는 안 된다. 저들 사기꾼들의 가증스러운 ‘개혁’ 놀음과 거짓 이데올로기들을 분쇄하고 우리 앞에 놓인 당면 정치 과제들을 인식하고 싸워 나가야 한다.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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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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