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케티《21세기 자본》은 사이비 절충주의 소부르주아 경제학이다

2018년 11월 6일

마이클 샌더스의 《정의란 무엇인가?》에 이어서 최근 토마 피케티의《21세기 자본》 열풍이 일어나고 있다. 피케티 저작이 선풍처럼 인기를 끌면서 《만화로 읽는 피케티의 21세기 자본(만화 인문학 시리즈)》, 《피케티, 어떻게 읽을 것인가》, 《피케티의 21세기 자본 바로읽기》같은 유사 저작들도 쏟아져 나오고 있다.
피케티 자신이 직접 읽어보지는 못했다고 하지만 《21세기 자본》은 맑스의 《자본론》의 19세기에 빗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 피케티가 ‘2018 아시아미래포럼, 강연차 한국을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피케티는 “세계 상위 1%가 1980~2016년 성장의 과실을 약 27% 챙겨간 데 반해, 하위 50%는 겨우 12%를 차지하는 데 그쳤으며,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세계 상위 1%의 부 집중도는 2050년에는 약 39%로 높아질 것”(신영전 한양의대 교수·사회의학, [왜냐면] “평등한 것이 이득이다”, 2018-11-05)이라며 전 세계적인 불평등 현상을 고발했다.
실제 불평등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언론에서 소개하는 피케티 주장의 핵심은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소수 부유층에 자본이 집중, 불평등이 심화된다며 이의 대안으로 글로벌 자본세와 최고 80%에 이르는 누진세” 매기는 것이다. 그런데 피케티는 “왜 민주주의에도 불구하고 불평등은 심화되는가”라고 물은 뒤 “더 균등하고 역동적인 사회경제로 이행하려면 정치적 역할이 중요하다”며 ‘불평등에 맞서는 정치’를 요청했다.
“민주주의”에도 “불구하고” 왜 “불평등은 심화되는가?” 민주주의가 바로 자본과 부자를 위한 민주주의이고 자본의 착취와 지배에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러한 자본과 부자를 위한 민주주의가 아니라면 민주주의의 발전은 사회적 평등을 강화하고 빈곤을 없애고 자본을 제어하고 궁극적으로 자본의 착취를 철폐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피케티 열풍이 참으로 생경하게 느껴지는 것이 피케티 주장은 자본주의 역사에서 특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글로벌 자본세 주장은 피케티 열풍이 일어나기 40년 전에 이미 경제학자 제임스 토빈의 주장으로 토빈세와 유사하다. 그런데 자본에 막대한 세금을 매겨 자본을 통제하자는 주장이나 불평등을 해결하자는 주장은 수십 년 동안 자본주의에서 논의되고 있지만 여전히 주장되고 있다. 전혀 해결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누구도 자본을 통제하기는커녕 자본주의 어느 정치세력이나 누구나 자본에 의해 통제당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내에서 분배를 개선하여 빈곤과 불평등을 해결한다는 주장은 항상 처음부터 자본주의 착취체제를 철폐하는 사회주의 투쟁을 포기하고 노동자의 계급투쟁을 포기하는 대가로 제기되었다. 베른슈타인이 가장 대표적이다.
피케티는 불평등을 해결하는 전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불평등을 실제적으로 철폐하고 무상체제를 유지했던 쏘련 및 동유럽의 공산주의 체제에 대해 지극히 냉소적이다.
가령 “눈앞의 불평등에 분노하고 불평등을 줄이려는 노력이 부족한 현실에 비판적이면서도 미래를 낙관하는 근거가 뭔가 궁금하다.”는 질문에 대해 피케티는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글쎄… 2세기 전과 현재를 비교해봐라. 세상은 더 좋아졌다. 식민주의도, 노예제도도, 공산주의도 없지 않나. 드러난 문제를 고친다면 세상은 좀더 나은 방향으로 갈 수 있다. 난 이 얘기를 하고 싶을 뿐이다. 자유무역이나 자본 이동도 그 자체로선 나쁜 게 아니다. 재분배라는 보다 큰 시각에서 바라보자는 얘기다. 자유무역이나 자본 이동 하나에만 매달리는 건 문제다. 시각을 바꿔야 지속 가능하고 평등한 발전이 가능하다.”(피케티, “불평등에 눈감은 정치, 그 블랙박스 열고 싶어”, 최우성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한겨레, 2018-11-03)

이처럼 피케티는 심지어는 “식민주의, 노예제도, 공산주의”를 악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런데 제국주의 식민지배의 청산은 러시아 혁명과 쏘련 사회주의, 식민지에서의 해방투쟁 덕분이다. 피케티는 동유럽과 쏘련 사회주의의 성공이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 자본주의 국가에서의 계급투쟁을 강화하고 그 투쟁으로 체제의 위기를 느낀 자본가들이 양보를 한 결과 빈곤과 불평들이 상당부분이라도 개선되었다는 실질적인 역사를 망각하고 있다.
공산주의가 없어졌기 때문에 세상이 더 좋아졌다는 피케티는 필시 새로운 세상을 염원하는 노동자민중의 투쟁을 반대할 것이며, 공산주의가 도래한다면 적개심을 가지고 그것을 막으려 할 것이다.
피케티는 또한 “자유무역이나 자본 이동도 그 자체로선 나쁜 게 아니다.”라고 하는데 이런 식이라면 자본주의 기계의 도입도, 자본의 혁신도, 자본의 독점화도 “그 자체로선 나쁜 게 아니다.”
왜냐하면 기계의 도입은 인간의 노동을 경감시켜 인간을 불편하고 위험한 노동으로 부터 해방시키고 노동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보수주의자가 아닌 바에야 과거의 낡은 생산방식을 고집하며 혁신을 반대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의 독점화는 자본규모의 거대화와 사회적 생산을 의미하는바 그것을 반대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계도입, 혁신, 독점은 “그 자체로” 진공 속에서 이루어지는 순수 현상이 아니다. 자본주의에서 자본의 착취구조 하에서 이윤추구 과정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그것들은 실업자들을 양산하고 노동자들의 임금과 노동조건을 악화시킨다.
자본이동이나 자유무역도 마찬가지다. 자본이동은 자본의 세계화, 국제화인바 부르주아적 착취관계를 전 세계로 확장시킨다. 이는 총포와 자본의 힘을 앞세워 제국주의를 불러온다. 자유무역은 진공 속의 자유무역이 아니라 자본주의 경쟁의 격화로 자본의 국가로 하여금 타국 자본에 비해 경쟁력 있는 자본영역은 개방을 앞세우고 경쟁력 없는 부분은 관세장벽 등 폐쇄를 내세운다. 이 과정에서 자국자본의 경쟁강화를 위해 규제완화와 비용절감을 통해 노동조건과 임금삭감과 복지후퇴를 강요한다. 해외에 대해서도 그렇다.
피케티는 이처럼 매사를 자본주의 착취구조를 외면하고 분배와 불평등의 개선을 외침으로써 자본주의 모순을 은폐할뿐만 아니라 이로써 분배와 불평등마저도 악화시키는데 일조한다.
그렇게 본다면 피케티는 결국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내에서, 자본주의 불평등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자본주의의 변호인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피케티에 대해 자본가 정치인들도 환호한다. 아시아미래포럼 피케티 강연에는 박용만 아시아미래포럼 공동조직위원장(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환영사를 하고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아시아미래포럼 조직위원) 등 자본가들도 참석했다. 자본가들은 그 동안 불평등 해소가 자본의 종합부동산세나 법인세 인상 등 구체적으로 자본이 부담해야할 몫의 증가로 나타난다면 목숨을 걸고 저항해 왔다.
이날 문재인이 축사를 보내고 이낙연 총리, 문희상 국회의장도 참여했는데, 이들 모두가 추상적인 정치적 구호를 외칠 때에는 불평등 해소를 말하는 자들이지만 구체적인 계급투쟁 영역에서는 근로기준법을 개악하고 최저임금법을 개악할 탄력근로제 도입을 합의하고 자본을 위한 규제완화로 불평등 심화에 앞장서고 있다.
반면 정작 불평등과 빈곤의 주체들은 참석하지 않았다.
이처럼 피케티의 불평등은 자본과 권력자들을 위무하는 사이비 선전구호로 전락해 있다. 피케티식 불평등 해소는 불평등의 실제 원인을 감추고 자본과 노동의 적대를 무마하는 구호다. 맑스의 《자본론》이 19세기에 써졌지만 여전히 진리의 등불이고 자본의 착취체제를 정조준하는 노동자의 혁명적 경제학인데 반해, 피케티《21세기 자본》은 21세기에 써졌지만 구태의연하고 사이비 절충주의 소부르주아 경제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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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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