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류큐)의 한(恨)과 눈물 – 안선생(필명)

오키나와에 있는 한국인 위령탑 사진. 깃대가 두 개다. 이 위령탑에서는 오키나와에서의 피학살의 비극과 함께 분단이라는 비극을 함께 볼 수 있다.(사진 제공: 안선생)

안선생(필명)

1. 아름다운 섬이 품고 있던 상처들

무더위가 한참이던 여름, 처음 가는 오키나와 여행에 많이 긴장했는지 평소보다 말을 많이 하면서 비행기를 타고 나하 국제공항으로 날아갔다. 듣던 대로 바다는 제주도의 바다만큼이나 청록색으로 아름다웠고 한국이 아닌 곳에 왔다는 실감이 나게 건물과 풍경도 한국과 많이 달랐다. 나는 일행과 함께 나하 국제공항에 착륙했다. 착륙한 뒤 수속을 밟을 때 심사관들을 제외한 직원들이 대부분 고령층 노인들이 많았다. 일본의 고령화가 수도권이 아닌 지역에서 더 심하게 나타난다는 것이야 풍문으로는 들었지만 연금을 받을 나이에도 일을 하고 있는 그분들을 보면서 그만큼 사람이 없는 지방의 현실과 연금만으로는 살 수 없는 일본 노인들의 현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오키나와에서 역사기행만 한 것이 아니다. 그러다보니 여행 전체가 아닌 여행 도중 맞닥뜨렸던 오키나와(류큐)의 눈물에 대해서 말하려고 한다.

3박4일 여행 중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에서의 이야기이다. 우리는 이틀째에 평화기념공원에 가기로 하였다. 오키나와는 교통 인프라가 낙후되어서 버스로 가기에는 매우 낙후되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우리는 택시를 이용하여 오키나와 기념공원에 가기로 하였다.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에 내려서 우리가 처음 들어간 장소는 평화기념당이었다. 이곳은 오키나와 출신 예술가인 야마다 신잔 화백(1885~1977)의 작품을 전시한 곳으로 신잔 화백은 오키나와의 평화를 염원하는 내용의 작품 활동을 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중 신잔 화백이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을 담은 ‘오키나와 기념상’이라는 대불상은 매우 아름다워서 감명 깊었다.(유일하게 사진 촬영이 가능한 작품이었다.)

(신잔 화백의 사진과 그의 작품 오키나와 기념상의 모습이다. 필자가 직접 사진 촬영.)

평화기념당을 나와서 우리는 한국인 위령탑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나아갔다. 중간에 길을 헷갈려 찾지 못하다가 기념당 옆에 펄럭이는 태극기를 발견하고 곧장 그곳으로 갔다. 위령탑이라는 말에 길쭉한 탑만 생각하였으나 위령탑의 모양은 둥근 무덤의 형태였다. 탑 앞에는 한국인 위령탑이라고 한자로 적혀 있었으며 이유는 모르겠으나 깃대는 두 개가 있었고 한 깃대에 태극기를 게양해 놓았다. 오키나와에서 재일교포들도 무자비하게 탄압당하고 학살당하였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희생자들을 생각하며 위령탑 앞에서 묵념하였다. 그곳에 적혀있는 설명에 따르면 오키나와에 살고 있는 재일한국인들이 성금을 모아 만들었다고 한다.

(사진은 필자가 직접 촬영한 것을 약간 편집하였다. 깃대가 왜 두 개인지는 독자들도 어느 정도 눈치 챘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와 일행들은 오키나와 평화기념자료관으로 들어갔다. 기념당이 예술로써 오키나와의 비극을 유화시켜 보여주는 곳이었다면 기념자료관은 직접적으로 오키나와의 비극을 보여주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이곳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미일 양국의 치열한 격전지가 되었던 오키나와에서 주민들이 어떻게 희생당하고 학살되었는지에 대한 당시 주민들의 증언록들을 데이터베이스화하여 직접 읽어볼 수 있게 해 놓았는데 그 내용이 매우 충격적이어서 중간에 꺼버릴 정도였다. 중국어와 한국어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 해당 증언록은 2층 상시 전시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뿐 만 아니라 전후 미군정 시대에 미군과의 갈등과 투쟁의 역사를 다룬 전시장도 존재하며 이 전시실도 역시 한국어 서비스가 지원된다. 내부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직접 찍지는 못하였다.

(오키나와 평화기념자료관 건물과 전시실 사진. 출처는 평화기념공원 홈페이지)

시간문제로 직접 들르지는 못했으나 평화의 초석이라는 곳이 있다. 이곳은 기념자료관 옆에 있는데 오키나와 전투로 희생된 모든 이들의 이름을 새겨 넣은 곳이다. 국적에 상관없이 적혀있다.

(평화의 초석 사진 출처는 평화기념공원 홈페이지 http://kouen.heiwa-irei-okinawa.jp/)

6월 23일은 위령의 날로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날이다. 그리고 그 추모행사는 바로 이 곳 기념공원에서 이뤄진다. 우리는 비록 날짜가 달라 보지 못했지만 독자들 중 관심 있는 분들은 날짜에 맞춰가 오키나와(류큐)인들과 연대해주시길 바란다.

2. 전후(戰後) 오키나와(류큐)의 간략한 역사와 현 정세

왜 이러한 시절이 존재하는지 왜 이러한 인식이 무의식적으로 퍼져있는지 오키나와(류큐) 역사를 알아야 한다. 오키나와(류큐) 근현대사는 19세기의 강제병합 이후부터 지금까지 매우 뼈아픈 역사이다. 오키나와 문화는 일본과 비교했을 때 매우 이질적인 문화였으며 중국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그러나 일본은 오키나와를 식민화한 뒤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거의 말살에 가까울 정도로 제거해나갔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군의 총알받이로 끌려 나가 희생당한 주민부터 폭격으로 인해 죽은 주민, 공포로 인해 자살하거나 일가족을 죽이고 자살한 주민까지 오키나와에서는 전쟁에 의한 공포와 광기를 몸소 느꼈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그들은 전쟁 공포에 몸살을 앓았는데 전후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그 관할이 미국에게 넘어간 이후1) 오키나와는 철저하게 미국의 군사기지로 변모하였다. 처음에 주민들은 미군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이 있었다. 그러나 미군은 군사기지를 계속 건설하기 위해 강제적 토지수용을 점차 늘려가고 중국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하자 더욱 군사기지화를 가속시켰으며 미군의 정책에 반발한 오키나와 의회를 해산시켜버렸다. 그러면서 미군이 주석을 임명하는 방식으로 기본권을 제한하였고(입법원이라는 자치기구를 신설하였으나 영향력은 이전 의회와 비교되지 않는다.), 노동3권도 제한하면서 1953년에 토지수용령을 공포하고 55년에 토지 강제 수용을 개시하며 주민들의 생활 터전을 빼앗아 갔다.2) 또한 미야모리 소학교 미군기 추락사고3) 등 전투기 추락이나 핵 저장고, 여러 화학실험, 미군병사에 의한 사건사고와 범죄로 인해 인명피해가 속출하였는데 그럼에도 사고보상이나 가해자 처벌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주민들은 생존권과 평화를 요구하며 미군에 대한 투쟁을 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표적인 저항운동으로 “섬 전체 운동”이 있다.

오키나와 주민들과 운동단체들은 일본으로의 복귀를 주장하였는데 그 이유는 일본으로 복귀하면 일본의 평화헌법에 의해 미군기지 주둔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국제정세가 일본에서는 안보투쟁이 격렬하게 진행되고 있었고 세계적으로도 민족해방운동이 구 식민지 지역에서 전개되었으며 일본 법원에서도 미군 주둔은 위헌4)이라는 취지로 판결하여 그런 분위기가 더욱 고조되고 있었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난다. 그 동안 오키나와의 복귀에 매우 부정적이었던 일본이 입장을 바꿔 복귀를 지지하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베트남 전쟁의 실패로 큰 타격을 입은 미국은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일본에게 군사적 비용을 분담시키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69년 미일은 복귀를 합의하였으며 미군에 더해 자위대가 오키나와에 주둔하게 되었다. 운동세력들은 조건 없는 전면 반환과 자위대 배치 반대, 안보조약 철폐와 기지 철수 등을 외쳤지만 결국 운동은 실패하였다.

결국 74년 이후 일본으로 다시 재편입 된 이후 주민들이 원했던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키나와는 지금까지도 미군기지 반대운동이 지속되고 있다. 주일미군 70%가 오키나와에 있고 가장 많은 미군기지도 오키나와에 있다. 현재는 미일 양국 정부가 후텐마 비행장을 나고시 헤노코 지역으로 이전하는 것을 반대하는 투쟁이 이뤄지고 있다. 올해 2월 21일에는 현의회가 “오키나와는 미국의 식민지가 아니다”라는 결의문까지 내놓았다.5) 2014년에는 교과서 문제로 아베정권과 대립한 역사도 있다.6)

최근 전 현지사의 사망으로 이뤄진 오키나와 현지사(한국으로 치면 도지사) 선거에서 반(反) 자민당, 반(反) 기지건설 성향의 다마키 데니 후보가 당선되었는데 그는 미국인과 일본인의 혼혈이다. 이 선거 당선자 인물 자체도 많은 걸 생각하게 한다. 어떤 것인지는 독자들이 더 잘 알거라고 믿고 넘어가겠다. 또한 오키나와의 도시인 나고 시의 시의회에서도 반 아베파가 승리하였다. 이는 오키나와의 민심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이 민심을 이해하려면 위의 역사를 꼭 알아야 한다.

3. 동아시아 국제연대를 꿈꾸며 “이 세상에 남 일은 없다.”

어떤 사람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자기나라 사람만 해방시키는 운동은 가짜 진보다. 물론 자기나라 국민 때려죽이는 놈보다는 낫겠지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이제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이 구절만큼은 단 한 번도 잊힌 적이 없다. 오키나와를 방문하겠다고 계획하게 된 것도 한 번은 오키나와 역사와 주민의 인식을 조금이라도 보고 듣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평화기념공원에 직접 가서 본 결과 이들의 고통이 매우 크고 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특히 한국인 위령탑을 보면서 이 세상에 과연 남의 일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걸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실제로 일부 오키나와 사람들은 제주의 4.3을 같이 추모하기 위해 매년 제주도를 방문하기도 한다고 한다. 자신들의 역사와 비슷해서 공감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막상 한국인들은 오키나와의 이러한 고통어린 역사에 관심이 없다. 심지어 운동하는 사람들도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을 뿐 오키나와 사람들과 연대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거의 찾기 힘들다.

우리의 운동은 우리만을 위한 운동이 되어선 안 된다. 모두를 위한 세계의 모든 민중을 위한 운동이 되어야 한다.

후주

1) 정도원 기자, 「[MT교육 오늘의 역사] 1972년 오늘 오키나와 일본에 ‘반환’되어 ‘본토 복귀’」, 중앙일보, 2013.05.15.

2) 임경화,「’오키나와’ 분단과 복귀 국제연대 운동과 한반도 ①」, 레디앙, 2014.04.25.

3) 말 그대로 미군의 전투기가 일본 소학교로 추락하였던 사건이다. 17명이 사망하고 200여명이 부상당했으며 지금은 학교에 추모하는 평화자료실과 역사민속자료관이 존재한다. 2013년에 관련 영화도 개봉하였다.

4) 임경화,「’오키나와’ 분단과 복귀 국제연대 운동과 한반도 ①」, 레디앙, 2014.04.25. 다만 이 판결은 대법원에서 파기되어 주둔문제는 합헌 결정이 났다. 해당 판결에 대해 설명하는 기사로 레디앙, 「일본 ‘스나가와 사건’ 전 피고인들 재심 청구」, 레디앙, 2014.06.18가 있다.

5) 서승욱 기자, 「초등학교에 헬기 창문 추락…미군 잇단 사고에도 참는 日, 왜」, 중앙일보, 2018.02.21.

6) 현의회는 이미 2년 전에 주일미군의 철수를 요구하였다. 최이락, 「日오키나와현 의회, 주일미군 철수요구 결의안 채택」, 연합뉴스, 2016.05.26.

7) 송승준, 「日 오키나와 마을, 정권압력에도 “극우 교과서 못써”」, SBS, 2014.03.13.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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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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