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사회주의 대혁명 이후 100년, 당대 공산주의자들을 위한 교훈(4)

러시아공산주의노동자당-쏘련공산당 중앙위원회 보고(RCWP-CPSU)

2018년 4월 18일

* 이 글은 러시아공산주의노동자당-쏘련공산당(RCWP-CPSU)의 강령적 글이다. 러시아공산주의노동자당-쏘련공산당은 구 쏘련 공산당 내에서 쏘련 사회주의 체제를 지키기 위해 투쟁했고 쏘련 해체 이후부터는 사회주의 복고를 위해 투쟁하고 있는 혁명적 공산주의 조직이다.

러시아 혁명과 쏘련 사회주의의 승리는 진보적 인류 전체의 승리였고, 쏘련 사회주의의 해체는 진보적 인류 전체의 패배였다. 러시아 내부에서 맑스-레닌주의의 기치를 내걸고 투쟁하고 있는 혁명적 공산주의자들이 직접적인 자신들의 역사를 어떻게 평가하고, 또 어떠한 전망을 가지고 투쟁하고 있는지 이 글을 통해 확인하게 될 것이다.

이 글은 몇 차례에 걸쳐 번역될 것이다.(편집자 주)


III. 장래 승리를 위해 패배로부터 얻은 교훈

3.1. 이론적인 문제들: 주요 맑스주의 기반으로부터의 후퇴


3.2. 경제적 실수들: 사회적 생산에서의 상품 요소들과 자본주의로의 급격한 후퇴

3.3. 사회주의 건설에서의 정치적 실수: 쏘비에트 권력 발전의 레닌주의 원칙으로부터의 이탈 및 당 강령의 일탈1. 현재 공산주의 진영과 문학. 반(反) 과학, 우리 시대의 가짜-공산주의 이념적 흐름

4.1. 유로 꼬뮤니즘은 공산주의가 아니다

4.2. 시장 사회주의는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가는 역주행이다. 고르바초프의 꿈: 적기(赤旗) 아래 자본주의를 향해 가는 것. 중국 공산당과 러시아연방공산당의 길

4.3. 21세기 사회주의: 라틴 아메리카 및 다른 국가에서 일종의 개량된 자본주의

1. 우리의 전망은 쏘비에트 권력과 사회주의 재생을 위한 투쟁이다

5.1. 공산주의 운동에 맞서 싸우는 부르주아지의 오늘날의 수단

5.2. 임박한 혁명에 반대하는 부르주아 투쟁 수법에 대한 레닌의 견해

5.3. 러시아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부르주아의 오늘날의 공격 수법

새로운 유형의 당을 향하여 – 레닌주의 길을 따라

III. 장래 승리를 위해 패배로부터 얻은 교훈

기념일을 축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해결되지 않은 문제에 집중하는 것이라고 레닌은 말했다. 그래서 현재와 미래 공산주의자 모두는 당과 인민이 저질렀던 이론적, 실천적 실수가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건설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도록 했고, 사회 발전의 이전 단계인 자본주의로 되돌아가게 했다는 것을 깨달아야한다.

쏘련에서 사회주의가 패배한 이유에 관해 개인적으로나 당적으로나 매우 다양한 의견들이 있다. 물론 사회주의의 적들이 인류에게 사회주의는 공상과 같은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이 10월 혁명의 실천과 쏘련의 경험으로 오류로 드러났기 때문에 우리는 사회주의 지지자들의 견해만을 고려할 것이다.

사회주의의 배신과 그 패배의 주요 원인을 당과 정부 지배 집단의 특정 인물에게서 찾는 논리는 상당히 대중적인 것이다. 고르바초프(Gorbachev), 옐친(Yeltsyn), 야코블레프(Yakovlev) 등 중앙위원회(CC)와 정부의 다른 많은 인물들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다. 서방 세계의 음모 또한 인기 있는 이야기이다.

그들은 신화적인 ‘덜레스(Dulles) 계획’(편집자 주: 미국 중앙정보국장 알렌 덜레스(Allen Dulles)의 이름을 따서 덜레스 계획이나 덜레스 독트린(Dulles Doctrine)이라고 불리는데, 미국이 냉전 기간 동안 쏘련을 붕괴시키기 위해 쏘련의 문화유산과 도덕적 가치를 타락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는 음모 이론)으로 시작하여 서방의 특별정보기관원의 영향력에 봉사하는 고위 공무원 모집 이론으로 끝나는 근거들을 제시한다. 그들은 쏘련에 대한 투쟁에 사용했던 수조 달러를 언급한다. 이 돈은 낭비된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이론에서 밝혀낸 사건들 중 일부는 흥미로울 뿐 아니라 실제로 일어났던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쏘련 사회주의가 일시적으로 패배하게 된 주된 이유가 우리 자신, 내적 문제, 수정주의, 그리고 당 최고 지도자들의 배반이라는 점을 강조해야한다.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자신의 실수만이 우리를 망칠 수 있다.”[36]

또한 다음과 같이 더 구체적으로 말했다.

“자만에 빠지면 당의 실패와 약화를 가져온다는 것을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37]

1991년 반혁명 쿠데타에 대다수 노동자들이 무관심했었는데도 왜 쏘비에트 권력과 쏘련공산당(CPSU)이 패배했는지에 대해 아주 간략한 답변을 한다면, 그 답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그 때의 권력은 더 이상 쏘비에트 권력이 아니었고 그 당시의 당은 공산당이 아니었다.

우리 자신의 실수

3.1. 이론적인 쟁점 : 주요 맑스주의 기본으로부터 후퇴

러시아공산주의노동자당(RCWP)은 다음과 같은 레닌의 주요 테제를 따른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라틴어의 과학적이고 역사적인 철학 용어를 단순한 언어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특정한 계급, 일반적으로 도시 노동자와 공장, 산업 노동자만이 자본의 지배를 떨쳐 버리는 투쟁, 그것을 실제로 수행하고, 승리를 유지하고 강화하는 투쟁, 새로운 사회주의 사회 시스템을 창조하는 사업 및 계급의 완전한 철폐를 위한 전체 투쟁에서 노동자와 착취당하는 인민 전체 대중을 이끌어 낼 수 있다.”(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유일한 과학적 구분은 전자가 자본주의에서 생기는 새로운 사회의 첫 번째 단계를 의미하는 반면 후자는 다음 단계와 더 높은 단계를 의미한다는 것을 덧붙여 말한다.)

‘베른’ 황색 인터내셔널이 저지른 실수는 그 지도자들이 계급투쟁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선도적인 역할을 말로만 받아들이고 논리적인 결론으로 생각하는 것을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부르주아를 두렵게 하고, 부르주아가 절대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필연적인 결론을 두려워한다.

그들은 또한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계급투쟁의 시기라는 것을 인정하기를 두려워하고 있다. 그것은 계급이 폐지되지 않는 한 피할 수 없는 것이며, 형식이 바뀌고, 자본의 전복 직후 특히 치열하고 특별하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정치권력을 장악한 후 계급투쟁을 중단하지 않고, 다른 상황, 다른 형태 그리고 다른 수단에 의하여 계급들이 철폐될 때까지 투쟁을 계속한다.”[38]

이에 레닌은 다음과 같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해 인식하는 것이 맑스주의의 주요 쟁점이라고 확신했다.

“오직 계급투쟁의 인식을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대한 인식으로 확장시키는 자만이 맑스주의자이다.”[39]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본질은 오직 강제력이나 혹은 주로 강제력을 행사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의 가장 큰 특징은 근로 인민의 진보적 대표와 그들의 전위이자 그들의 유일한 지도자인 프롤레타리아트의 조직과 규율이다. 그것의 목표는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사회를 계급으로 나누는 분할을 철폐하며, 사회 모든 구성원을 노동하는 인민으로 만들고, 인간에 의한 모든 인간의 착취의 기초를 제거하는 것이다.”[40]

계급투쟁은 사회주의 하에서 다른 형태로 진행되며 특히 계급 내부와 당 스스로 계속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얼마나 오래 시행해야 하는가? 코민테른 3차 대회, 러시아공산당(RKP) 전술에 관한 테제에서 레닌은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했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계급투쟁의 중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새로운 수단으로 계급투쟁을 지속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독재는 계급이 존재하고, 한 국가에서 전복된 부르주아 계급이 국제적으로 사회주의에 대한 공격을 10배로 강화하는 한 필수적이다.”

따라서 같은 코민테른 3차 대회 러시아공산당에 대한 보고에서 강조했던 바와 같이 “사회주의의 임무는 계급 체제를 파괴하는 것”으로서, 프롤레타리아 독재 기간은 공산주의의 첫 번째 단계, 즉 사회주의 전 기간으로 확장된다.

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의 두 번째 강령을 정교화하며 레닌은 적들의 전면적 공격의 영향 하에 전면적 후퇴의 일환으로 쏘비에트 형태에서의 후퇴가 가능하다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그것을 근로인민과 프롤레타리아트 민주주의 혹은 노동자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운동으로 간주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러시아공산당 7차 대회 당강령 결의문에서 레닌은 다음과 같이 썻다.

“우리 강령의 정치영역의 변화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형태로서 새로운 유형의 국가인 쏘비에트 공화국의 가장 정확하고 가능한 광범위한 정의에 있어야만 한다. 쏘비에트 공화국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한 형태이자 파리 코뮌(Paris Commune)이 개시했던 세계 노동자 계급혁명의 성과물의 연속이다. 이 강령은 투쟁 과정에서 혁명이 지나왔던 역사적 단계를 일시적으로 되돌리면 우리 당은 부르주아 의회조차도 활용하기를 거부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한다. 그러나 어떠한 상황에도 당은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최고 유형의 국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체제, 착취자들의 멍에를 폐지하고, 그들의 저항을 억압하는 한 형태로서 쏘비에트 공화국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 [42]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쏘비에트 공산주의자들의 주된 실수는, 즉 맑스주의의 주요 문제에 대한 거부가 첫 번째 실수였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거부는 맑스주의의 거부를 의미한다.

스탈린 사망 후 흐루쇼프가 당내 권력을 잡자 맑스주의의 주요 문제인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개념에 대한 전면적 공격이 있기 전, 그들은 쏘련공산당(CPSU) 10차 대회에서 일종의 “사전포격(preliminary bombardment)”을 실시했다.

흐루쇼프 수정주의 그룹은 스탈린의 지도력 하에 획득했던 성과를 모욕하기 위한 비방 캠페인을 펼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계급투쟁에서의 맑스주의 핵심 문제를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닌의 러시아공산당(볼) 강령은 여전히 ​​효력을 발휘했다. 그것이 흐루쇼프 추종자들이 맑스주의 본질을 강령에서 제거하기 위해 새로운 강령을 준비하기 시작했던 이유이다.

쏘련공산당 22차 당대회 중앙위원회 서기장인 흐루쇼프는 “쏘련공산당 강령에 관하여”라는 보고를 통해 쏘련에서의 사회주의의 최종 승리에 관한 테제를 제출했는데[43], 그 보고에서는 계급투쟁은 사회주의로의 이행기까지로 제한되어 있다고 주장되었다. 보고 전체에서 사회주의는 공산주의의 일부분이 아니라 분리된 형태로 해석했다. 따라서 사회주의의 주요 목표인 계급 없는 사회의 첫 단계에서 계급 체제의 완전한 파괴는 단지 계급 없는 사회를 창조하는 임무로 대체되는 한편 완전한 수정주의자와 반맑스주의자의 목표인 ‘프롤레타리아 독재에서 전인민의 국가로의 전환’이 선포되었다.[44]

그 보고서는 “쏘련 노동자 계급이 공산주의 건설 목표에 따라 주도적으로 노동계급의 독재 국가를 전인민의 국가로 변화시켰다 … 우리는 최초로 특정한 계급의 독재를 대표하지 않는 국가를 가지게 되었다 …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필요성이 사라졌다.”고 주장했다.[45] 당은 또한 노동자 계급만의 당이 아니라 전체 인민의 당으로 선포되었는데, 이는 당이 계급의 전위라고 주장했던 레닌의 당의 정의에 반대되는 것이다.

이러한 수정주의적 구상은 대회에서 어떠한 반발도 부딪히지 않았고, 만장일치로 본질적으로 반레닌, 반맑스적 수정주의 강령이 채택되었다. 이 강령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역사적 사명을 완수했고, 쏘련 내부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로서 활기찼던 국가는 현 단계에서 전 인민의 국가로 바뀌었다 … 국가가 사멸하기 전에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필요하지 않게 된다는 테제로부터 당은 나아갔다.”고 규정했다.[46]

물론 20차 당대회 대표들 모두가 사회주의 대의에 대한 배신자들과 반역자들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수백만 당 대다수의 이론 수준이 상당히 낮았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들은 지도부의 권위에 의지하면서 대부분의 강령과 이론적 개념을 당연시했다. 그들은 최근의 나치즘에 대한 승리에 도취된 데다가 사기가 오른 상황으로 이른바 계급 없는, 전 인민의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기 위한 당시 지도부의 요청을 너무 쉽게 받아들였다.

그들은 쏘련에서 드디어 착취 계급이 진압되었고 부활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믿었으며, 비적대적 계급들의 단결로 새로이 부상하는 쏘련 인민과 사회주의의 승리는 완성되었고 종결되었다는 것을 당연시했다. 일반 공산주의자들은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 것인 반면 당 이론가들과 지도자들의 입장에서 이것은 틀림없이 수정주의 행위이고 변절 행위였다. 이를 보다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 레닌의 저서를 살펴보도록 하자.

주요 저작 <국가와 혁명>에서 레닌은 모든 국가의 계급적 성격을 강조했는데, 낡은 국가 기구를 파괴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국가 기구를 만들어 내야 하기에 그 때까지는 국가가 존재한다고 했다.

그는 노동계급의 정치적 지배를 보장하기 위한 도구로서 국가가 스스로 노동자 계급을 지배하기 위한 힘으로 전환되는 것을 막기 위한 많은 조건을 정교화 했다. 이 저작뿐만 아니라 국가에 대한 맑스주의’에서도 레닌은 절대적으로 명확하고 분명한 것은 국가는 계급의 완전한 파괴에 의해서만 소멸되며, 계급이 남아있는 한 정치적으로 지배적 계급의 도구를 나타내는 국가가 남아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는 엥겔스의 사상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정교화 하였다.

“마침내 사회 전체의 진정한 대표자가 될 때, 국가는 스스로 불필요하게 된다.”[47]

레닌이 다음과 같이 강조했던 바와 같이, 모든 의문점을 다시 확인해보자.

“계급투쟁의 인식을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인식으로까지 확장시키는 사람만이 맑스주의자이다. 이것이 바로 맑스주의자와 (대부르주아 뿐만 아니라) 평범한 소부르주아를 가장 제대로 구분하는 것이다. 이것은 맑스주의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인식이 확인되는 시금석이다.”[48]

그의 저작 <국가에 대하여>(1919년 7월 11일 스베르들로브스크(Sverdlovsk) 대학 강의)에서 레닌은 정확하게 “자본주의 국가는 전체 인민의 의지를 표명하고 그것이 계급 국가라는 것을 부인하는 슬로건으로서 전 인민을 위한 자유를 선언한다.”고 지적했다.[49]

반대로 사회주의 국가는 항상 계급적 성격을 강조한다. 따라서 수정주의 흐루쇼프 그룹은 프롤레타리아 독재 없이 사회주의를 완전한 공산주의로 바꿀 수 있다며 프롤레타리아 독재 문제에 관해 당과 인민을 오도하였고, 실제로 속였다. 다음으로 그들은 또한 생산과 사회 운동의 목표를 바꿨다. 이 부분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역사의 본질과 사회 진보는 각 사회 구성원들의 완전한 복지와 광범위한 발전을 위한 운동에 달려 있다.

사회주의 주요 법칙이 볼셰비키당 강령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에 대한 역사를 추적하는 것은 흥미롭다. 러시아사회민주주의노동자당 2차 대회 특별위원회가 준비한 당 강령 초안에서 “사회주의 생산 목표는 그 구성원의 필요뿐만 아니라 전체 사회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사회화된 생산 과정의 계획된 조직으로 결정된다.

레닌은 이 정의에 다음과 같이 반대했다.

“정확하지 않다. 그러한 ‘충족’은 자본주의에서도 ‘주어졌지만’,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니며 동등한 정도가 아니다.”[50]

결국 레닌은 러시아사회민주주의노동자당 2차 대회에서 채택된 당 강령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생산수단의 사적 사유를 사회적 소유로 바꾸고, 사회 모든 구성원의 복지와 포괄적 발전을 위한 계획적이고 사회화된 생산 과정을 도입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트 사회 혁명은 계급으로 분열된 사회를 붕괴시킬 것이며, 그리하여 억압받는 인류를 해방시킬 것이다.”[51]

이 과학적으로 올바른, 즉 공산주의 사회의 창조주인 노동자 계급에게 놓인 공산주의 생산의 실제 목표는 당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수행하는 노동자 계급의 당으로 남아 있을 때까지 당 강령에 남아 있었다. 쏘련공산당 22차 대회에서 채택된 수정주의 제3차 강령에서 이러한 목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인민 복지나 발전, 아주 광범위한 발전이 공산주의 생산의 실제 목표에서 제한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한데도, 그것은 수정주의 강령에서 “점점 커지는 필요의 충족”으로 대체되었다. 필요의 충족 자체만으로 사회 불평등을 제거하거나 계급 체제를 파괴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그것은 공산주의 하에서 “전체 인민 경제의 계획기구 수준이 최고에 도달했고, 사회 구성원의 증대하는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물질적 부와 노동 자원의 가장 효과적이고 합리적인 활용이 보장되고 있다.”라고 세 번째 강령에 쓰여 있다.[52]

그 자체로 목표였던 사회의 노동자 성원들의 발전은 만인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하여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이 아니라, 나중에 올리가르히(편집자: 신흥 재벌, 즉 독점자본가)로 변하게 된 특정한 선택된 사회 구성원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노동 자원”으로 변화하였다. 사회 모든 구성원의 발전을 생산 목표에서 삭제하는 것은 사회주의의 진정한 목표의 실질적 폐기를 은폐하도록 이 조항을 바꿔 놓았다. 수정주의적 세 번째 강령은 “사회주의의 목표는 사람들의 물질적, 문화적 필요의 증가에 대한 완전한 충족”[53]이라 하고 있다.

처음 이것은 아름다운 목표처럼 보였지만, 과학적 공산주의 창시자가 주장했던 사회주의 목표는 계급 체제의 파괴였기 때문에 이는 근본적이고 중대한 착오였다. 물론 계급 체제를 파괴한다는 것 또한 필요의 충족을 가정하지만, 특정 구성원의 필요의 충족이나 (편집자 주: 계급의 적들을 포함하는) 모든 구성원의 필요의 충족을 가정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는 무엇보다도 모든 사회 구성원의 완전한 복지와 자유롭고 광범위한 발전, 불평등을 해소하는 그러한 필요를 충족시키는 의미가 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사회주의 목표를 포기하는 것은 국가의 계급적 본질을 변화시킨다. 국가는 노동자 계급의 이해를 위한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는데, 그 이해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기간 동안 사회의 이익과 같은 것이었다.

1961년 가을 쏘련공산당 22차 대회에서 전 인민의 당이라는 수정주의 강령을 채택하였던 한편 1962년 6월 로스토프 지역 노보로체르카스크(Novocherkassk)에서 치솟는 물가, 임금 하락 및 관료들의 학정에 대한 노동자들의 항의에 무력을 행사했던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시위대는 총에 맞았다. 이렇듯 노동자 수십 명이 희생되는 것이 바로 흐루쇼프가 만들고자 하는 이른바 전 인민의 당을 보여주는 첫 번째 모습이었던 것이다. 국유자산은 점차 사회화된 자산형태이기를 중단하였으며 80년대 말까지 실질적인 지배력을 가진 사람들, 즉 당 및 정부 고위 관료들이 특별한 형태로 사유 재산을 획득하는 특징을 보여주었다.

‘전 인민’ 국가의 합법적인 틀 내에서 이 모든 것들이 합법화되는 동안, 이런 방식으로 당과 정부의 노멘클라투라(관료계층)는 필연적으로 사회적 자산의 이득을 얻을 권리와 그것을 전유하고 사유화하기 위해 분산된 개인에게 분배하기 위한 조건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이것은 고르바초프에 의해 시작되었고 옐친 시대에 발생하게 되었다. 처음 그것은 “시장으로 나아가기”라는 수정주의적 슬로건으로 시작되어 나중에는 공공연한 반공주의적 슬로건인 “사유화를 시작하자”로 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전인민의 국가”라는 악명 높은 수정주의적 개념을 포함하고 신성시한 “발전된 사회주의” 라는 수정주의 개념의 도입을 동반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문제, 사회주의 생산 목표 및 사회주의 목표와 같은 맑스주의 주요 원칙을 쏘련공산당이 포기했던 것은 결국 소수 공산주의자의 적극적인 저항에도 불구하고 친 사적 소유의 정서를 성장할 수밖에 없도록 했고 마침내 당, 정부, 국가를 파괴하도록 했다. 앞서 언급했듯 이러한 맑스주의 원칙의 거부는 쏘련공산당 내 배신적 지도부만의 잘못은 아니었다. 맑스-레닌주의를 연구하고 이해하는 대신 인용이나 슬로건만을 연습했으며 수정주의 지도부의 말을 당연시했던 당원들도 비난받아야 한다.

이것이 결과적으로 공산주의 세력이 기회주의, 수정주의자 및 사회주의 반역자를 물리칠 수수 없었던 이유이다. 이것은 옛 쏘련과 현재 러시아 공산주의자에 대한 교훈일 뿐만 아닌 전체 국제 노동자와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교훈이다.

[36] 레닌 전집, 42권, 249쪽, 러시아판, 5판, 1967년.

[37] 레닌 전집, 40권, 327쪽.

[38] 레닌 전집, 39권, 14-15쪽.

[39] 레닌 전집, 33권, 34쪽.

[40] 레닌 전집, 38권, 385쪽.

[41] 레닌 전집, 44권, 10쪽.

[42] 레닌 전집, 36권, 58쪽.

[43] 쏘련 공산당 22차 당대회, 1961년 10월 17일-31일, – 속기록 -, 모스크바: 고스폴리티즈다트(Gospolitizdat) 출판사, 1962년, I권 151, 44 같은 책, 166쪽.

[44] 같은 책, 209쪽.

[45] 같은 책, 210-211쪽, 212쪽.

[46] 쏘련 공산당 22차 당대회, 1961년 10월 17일-31일, – 속기록 -, 모스크바: 고스폴리티즈다트(Gospolitizdat) 출판사, 1962년, III권, 303쪽.

[47] 레닌 전집, 33권, 16쪽.

[48] 레닌 전집, 33권, 34쪽.

[49] 레닌 전집, 39권, 78쪽.

[50] 레닌 전집, 6권, 248쪽.

[51] 러시아사회민주주의노동자당 2차 대회에서 채택된 강령, 1903년 7월-8월, 모스크바. 1959년, 419쪽.

[52] 쏘련 공산당 22차 대회, 1961년 10월 17일-31일, – 속기록 – 모스크바: 고스폴리티즈다트(Gospolitizdat) 출판사, 1962년. III권, 274쪽.

[53] 쏘련 공산당 22차 대회, 1961년 10월 17일-31일, – 속기록 – 모스크바: 고스폴리티즈다트(Gospolitizdat) 출판사, 1962년. III권, 238쪽.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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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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