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증법적 유물론을 반대하는 ‘진보’적 철학 사조의 정치적 실체

1. “서유럽 맑스주의”: “동유럽 맑스주의의 반대가 아닌 반혁명 사상

다음(daum) 사전을 검색해보면 유물론적 변증법[唯物論的辨證法](뒤에서 언급하겠지만 변증법적 유물론과 차이를 강조하는 이들도 있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철학] 자연과 사회의 발전을 물질의 변증법적 발전으로 설명한 이론. 헤겔의 관념론적 변증법을 유물론상에서 전개한 것으로,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의해 창시된 마르크스주의의 근본적인 철학 학설을 레닌과 스탈린 등이 교조(敎條)의 형식으로 정식화한 것이다.

유물론적 변증법이 레닌과 스탈린에 의해 ‘교조’화된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서는 레닌과 스탈린을 한 묶음으로 했지만, 가령 트로츠키주의처럼 논자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스탈린을 비난하면서 스탈린이 변증법적 유물론을 교조화 시켰다고 주장하기도 하며, 일부는 스탈린과 레닌과 엥겔스를 싸잡아 비난하기도 한다. 그런데 레닌과 스탈린이 유물론적 변증법을 교조화 시켰으면, 맑스와 엥겔스에 의해 창시된 교조화 되지 않은 유물론적 변증법을 제시해야할 텐데 이들 대부분은 유물론적 변증법 자체에 부정적이다.

가령 스탈린이 정식화한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에서 엥겔스의 “부정의 부정의 법칙”이 빠져 있다고 비난하는 이들이 그렇다고 엥겔스의 유물론적 변증법을 옹호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비난의 중심에는 항상 루카치가 있다. 루카치는 엥겔스가 《자연변증법》에서 변증법을 “자연, 인간사회 및 사고의 일반적인 운동과 발전법칙에 관한 과학”으로 확장하는 것에 대해 비난했다.

루카치는 변증법을 이와 전혀 다르게 규정한다. 그에 따르면 유물변증법은 마르크스주의의 요체인 실천을 충분히 고려할 때에만 올바르게 파악될 수 있다. 그는 실천을 유물변증법의 결정적인 출발점으로 삼는다.

왜냐하면 단지 여기에만 주체와 객체의 상호작용이 현존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루카치는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의 개념이 불충분한 것으로 비판한다. 그의 비판의 핵심은 엥겔스가 변증법적 방법을 자연에 확대하려한 것은 오해라는 데에 있다. 자연에는 변증법의 결정적 요건인 주체와 객체의 관계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이성백 서울시립대 교수 철학, 마르크스주의연구 제2권 제1호(통권 제3호), 특집 러시아 혁명과 마르크스주의, 스탈린주의 철학 비판, 2005.5)

그런데 루카치의 이러한 비판은 맑스와 엥겔스가 창안한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한 초보적인 이해가 부족해서 나온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변증법적 유물론은 인간사회뿐만 아니라 자연의 운동법칙까지 적용 대상으로 삼지만 인간의 실천과 의지가 작동하는 인간사와 자연을 똑같이 파악하지 않기 때문이다.

엥겔스는 이를 “그런데 사회의 발전사는 한 가지 점에서 자연의 발전사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자연 속에는 ―인간이 자연에 가하는 반작용을 고려하지 않는 한―정말로 무의식적, 맹목적 동인들이 있으며 이들이 서로 영향을 미치고 이들의 상호 작용에서 일반적 법칙의 효력이 발생한다 … 이에 반해 사회의 역사에서 행위자는 정말로 의식을 갖추고 있고 숙고 또는 정열에 따라 행위하고 일정한 목적을 위해 노력하는 인간이다.”(엥겔스,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 그리고 독일 고전 철학의 종말》, 박종철 출판사)라고 강조했다. 물론 인간의 역사에서도 역시 엥겔스는 “내적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는 강조를 잊지 않지만 말이다.

《자연변증법》에서도 엥겔스는 “자연을 개조하는 인간의 반작용, 즉 생산”을 이야기 하며, “인간은 의식을 갖고 자신의 역사를 더욱더 스스로 만들며, 예견하지 못한 작용들과 통제되지 않는 힘들이 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은 더욱더 적어지며, 역사적 결과는 이전에 확정된 목적에 더욱더 정확하게 일치하게 된다.”(《자연의 변증법》, 박종철 출판사)고 강조하고 있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다. 자연을 과학적으로 인식하고 변화시키는 것과 사회를 과학적으로 인식하고 변화시키는 것은 분리할 수 없다. 특히 무정부성과 무계획성이 지배하는 자본주의를 철폐하고 사회를 개조할 때 법칙과 인간 실천의 확고한 결합은 더욱더 필수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맑스와 엥겔스를 분리하는 것이 경박한 철학적 사조인데, 맑스 조차도 《자본론》 제1판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한 사회가 비록 자기 발전의 자연법칙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사실 현대사회의 경제적 운동법칙을 발견하는 것이 이 책의 최종 목적이다―자연적인 발전단계들을 뛰어넘을 수도 없으며 법령으로 폐지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이 사회는 그러한 발전의 진통을 단축시키고 경감시킬 수 있다 … 경제적 사회구성〔체〕의 발전을 자연사적 과정으로 보는 나의 입장에서는, 다른 입장과는 달리, 개인이 이러한 관계들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개인은 아무리 이러한 관계들을 초월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그것들의 산물이다.(자본론 Ⅰ상, 김수행 역, 비봉출판사)

“이제까지 철학자들은 다양하게 세계를 해석해 왔을 뿐이다”면서 “문제는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라며 혁명적 실천을 강조하고, 전위에 의한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주장한 맑스 역시도 법칙을 강조하고 있다. 인간사 발전조차도 “자연사적 과정”으로까지 보는 맑스가 하물며 변증법 원리를 자연으로 확장하는 것을 부정할리가 있겠는가? 자연의 법칙을 부정한다는 것은 자연과학에 대한 부정이다. 자연과학을 승인하는 것이 사회과학을 부정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렇다면 자연의 법칙과 인간의 의식, 의지 및 실천은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실천은 진리의 판단 기준이다. 혁명적 인식과 혁명적 실천은 통일되어야 한다. 레닌의 말처럼 “혁명적 이론 없이 혁명적 실천은 있을 수 없다”

엥겔스는 변증법적 유물론은 자연과학의 발전에 열려진 태도를 취하며 부단히 인식을 확장해 나간다고 강조했다. 인간이 법칙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자연의 발전 법칙을 제대로 인식하고 그 법칙에 따라 제대로 실천할 때만이 그 실천은 진보적으로 사회를 개조해나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른바 “목적의식적” 실천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맑스의 말을 다시 옮기면, “자연적인 발전단계들을 뛰어넘을 수도 없으며 법령으로 폐지할 수도 없”지만, “이 사회는 그러한 발전의 진통을 단축시키고 경감시킬 수 있”는 것이다.

주지하듯 루카치는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마르쿠제, 하버마스 등 프랑크푸르트학파를 비롯해 “서유럽 맑스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서유럽 맑스주의”는 단순하게 지리적으로 “동유럽 맑스주의”의 반대에 위치한 사상이 아니다. “서유럽 맑스주의”는 네오 맑스주의, 즉 신 맑스주의, 신좌파로 분류되는데, 이들 철학적 사조들은 자본주의 국가분쇄 사상 및 프롤레타리아 독재 같은 혁명적 국가론과 계급론 등 맑스주의의 혁명적 사상의 진수를 부정하는 반맑스주의에 불과하다.

한국에서도 쏘련 사회주의가 해체된 뒤 루카치 열풍이 불었는데, 그때 이래로 루카치 사상이 노동자 계급과 인민의 계급투쟁에 사상적, 철학적 무기가 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직 맑스주의의 혁명적 사상을 버리고 여전히 “좌파”나 “진보파” 행세를 하는 사변적 지식인들의 강단 철학의 “무기”가 되었을 뿐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의 법칙을 실천과 대립시키며 실천을 강조했던 일단의 철학적 사조가 강단의 밥벌이 “무기”(수단)가 되고 노동계급의 혁명적 운동과 결별하여 사변적이고 비혁명적으로 변해버렸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결국 변증법적 유물론, 혹은 유물론적 변증법에 대한 이러저러한 비판은 철학적으로 교조주의를 비난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수정주의를 옹호하고 있는 것이다.

2. 수정주의자들의 교조주의낙인: 혁명적 맑스주의

이를 확인해보자!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술어를 마르크스는 전혀 사용한 바 없고, 1891년 프레하노프의 저서에서 처음으로 사용된 것이다. 그러나 이 교조의 체계화 과정에서 볼셰비키당의 세계관적 도그마로 공식화되고 이 공식화된 국정철학(國政哲學)이 곧 스탈린의 1936년 저작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이었다. 이 공식화로 스탈린에 의한 철학의 1인 독점이 이루어지고, 그 이후 소련 학계에서는 이 철학교조 이외의 모든 철학적 논의가 전면적으로 금지되고 대용종교(代用宗敎)의 도그마로서 스탈린 철학의 독점적 지배가 있을 뿐이었다. 따라서 ‘변증법적 유물론’은 결국 스탈린의 국정철학이요, 그 밖의 모든 철학사상의 연구의 토론을 불모화시킨 철학의 1인 독점체제가 된 것이다.(네이버 지식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작성에 영향을 미쳤을 법한 한국의 강단 철학자도 이와 똑같은 인식을 하여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한 노골적인 적개심을 표출한다.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사상의 경전화가 기초가 되고, 이제 그 위에 스탈린 지배체제를 이데올로기적으로 강화하는 ‘상층’이 얹혀 진다. 스탈린이 이제 이 창시자들의 유일한 계승자로 선언되고, 스탈린만이 이들의 사상을 해석하고 집행할 수 있는 독점권한을 갖는다.(이성백, 같은 글)

유럽에서는 일찍이 1950년대 중반 후르시초프의 집권 이래, 한국에서는 쏘련 사회주의 해체 이후에 정치적 청산주의 대열 속에서 “교조주의” 비판이라는 이름으로 각종 소부르주아 잡사상들이 판치게 되었다.

그런데 레닌도 《좌익 공산주의 소아병》에서 지도자와 대중을 대립시키는 “좌익” 유아적 경향을 신랄하게 비난했는데, 권력을 잡은 프롤레타리아 국가가 혁명적 사상과 전통을 전 사회의 지배적 인식으로 하려는 노력과 투쟁이 이들에게는 “국정화”이다. 이들 비주류 “좌파”들의 인식 속에는 맑스주의는 항상 권력을 잡지 못한 채로 남아 있는 비주류의 비판만을 위한 과학이어야 하는 것이다.

권력을 잡은 프롤레타리아 대중 국가의 지도자는 언제나 ‘관료’일 수밖에 없고 혁명적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과학과 진보가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쏘련 및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가져온 결과이다. 이것은 부르주아와 제국주의 프로파간다가 노동운동과 진보운동 내에 깊게 영향을 미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부르주아와 제국주의의 비호 아래 현실 사회주의의 해체와 그것을 혁명적으로 인식할 수 없는 혁명적 사상의 부재, 패배주의적이고 절망적 세계관의 반영으로 소부르주아 잡사상이 맑스주의를 “재구성”한다는 명목으로 활개를 치게 된 것이다.

트로츠키적 조류도 “급진적” 외양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본질은 마찬가지다.

소련 교과서 체계는 한국에 80년대에 그대로 수입되어 한 세대 전체에 영향을 끼쳤다. 소련 아카데미나 동독 아카데미에서 발행한 변증법적 유물론·역사적 유물론·정치경제학 교과서들은 대학가를 중심으로 널리 학습되었다. 초심자를 대상으로 한 <철학에세이>나 <철학의 기초이론> 같은 개설서들 역시 스탈린주의 교과서의 해설에 불과했다. 최근까지도 마르크스주의 개설서라고 나오는 몇몇 책들은 여전히 스탈린주의 교과서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런 현실은 사회주의라는 문제의식이 가진 여전한 유의미성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운동의 입지와 실천의 지평을 협소하게 만들고 있다.(이정인, “마르크스주의의 체계?”, 2018.5.11일 [다른세상을 향한 연대]에 재게재)

이러한 인식은 대동소이하게 반스탈린적, 반쏘적, 즉 반맑스-레닌주의적 철학 사조 내에 만연하고 있다. 이러한 철학적 비방은 그 구별 방식이 조금씩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현실 사회주의를 비난하고 맑스-레닌주의의 변증법적 유물론을 해체하는데 있다.

과연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술어를 마르크스는 전혀 사용한 바 없”는가? 이와 관련하여 제법 알려져 있는 자본론 제2판 후기에서 맑스는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나의 변증법적 방법은 그 근본에서 헤겔의 그것과 다를 뿐 아니라 정반대다. 헤겔에게는 [그가 이념(Idea)이라는 명칭 하에 자립적인 주체로까지 전환시키고 있는] 사고과정(思考過程: process of thinking)이 현실세계의 창조자이고, 현실세계는 이념의 외부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나에게는, 반대로, 관념적인 것은 물질적인 것이 인간의 두뇌에 반영되어 사고의 형태로 변형된 것이 지나지 않는다 … 변증법이 헤겔의 수중에서 신비화되기는 했지만, 변증법의 일반적 운동형태를 포괄적으로 또 알아볼 수 있게 서술한 최초의 사람은 헤겔이다. 헤겔에게는 변증법이 거꾸로 서 있다. 신비한 껍질 속에 들어 있는 합리적인 알맹이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그것을 바로 세워야 한다.

변증법은 그 신비로운 형태로 독일에서 유행했다. 왜냐하면, 변증법이 현존하는 것을 찬미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증법은 그 합리적인 형태에서는 부르주아지와 그 이론적 대변자들에게 분노와 공포를 줄 뿐이다. 왜냐하면, 변증법은 현존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이해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의 부정[즉, 그것의 불가피한 파멸]을 인정하기 때문이며, 또 변증법은 역사적으로 전개되는 모든 형태들을 유동상태・운동상태에 있다고 간주함으로써 그것들의 일시적 측면을 동시에 파악하기 때문이며, 또한 변증법은 본질상 비판적・혁명적이어서 어떤 것에 의해서도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자본론》, 김수행 역, Ⅰ상)

레닌은 “관념적인 것은 물질적인 것이 인간의 두뇌에 반영되어 사고의 형태로 변형된 것이 지나지 않는다”는 맑스의 철학적 인식을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서 ‘반영론’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누군가가 이에 대해 맑스는 “‘반영론’이라는 술어를 전혀 사용한 바 없”다고 한다면 얼마나 황당한 주장이 될 것인가? 그런데 이 황당한 주장은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술어를 마르크스는 전혀 사용한 바 없”다는 주장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왜냐하면, “현실세계는 이념의 외부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나에게는, 반대로, 관념적인 것은 물질적인 것이 인간의 두뇌에 반영되어 사고의 형태로 변형된 것이 지나지 않는다.”가 바로 유물론적 인식이기 때문이다. 또한 “헤겔에게는 변증법이 거꾸로 서 있다. 신비한 껍질 속에 들어 있는 합리적인 알맹이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그것을 바로 세워야 한다.”가 바로 헤겔 변증법의 합리적 핵심을 포착하되 관념론적으로 인식하지 말고 유물론적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말을 곧 “반영론”처럼 정식화한다면 곧 “변증법적 유물론”, 또는 “유물론적 변증법”이 되는 것이다. 변증법과 유물론의 결합, 혹은 유물론과 변증법의 결합이 되는 것이다.

물론 혹자는 이를 분리해서 인식하기도 한다.

통념에 의하면, 마르크스의 사유방식은 “변증법적 유물론”(dialectical materialism)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는 잘못된 표현이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의 사유방식은 유물론“적”이기는 하나, “유물론”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며, 또한 그는 명백히 변증법자였기 때문이다.

첫째로, 유물론은 “세계는 물질적인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사고하는 철학사상”이다. 반면에 변증법은 존재와 무의 통일로 이해한다. 즉, 변증법의 사유를 유물론의 사고방식에 대비하면, 세계는 물질적인 것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과 물질적이지 않은 것(비물질적인 것)이 동시에 공존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변증법의 관점에서 볼 때 “유물론”은 근본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며, 거꾸로 유물론의 관점에서는 무의 측면을 사고하는 변증법이 근본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송태경의 블로그, 마르크스의 사유방식은? – “유물론적 변증법” vs “변증법적 유물론”)

이 주장은 참으로 비변증법적인데, 맑스는 “유물론은 세계는 물질적인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사고하는 철학사상”이라고 일면적으로 주장했다기보다는 물질적인 것이 선차적, 우선적이고, 인간의 인식, 관념 바깥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의식과 사고는 그것의 반영으로써 2차적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맑스주의 유물론은 물질과 정신의 통일을 주장하는 것이며, 물질 없이 정신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는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위 주장은 맑스주의 유물론을 “세계는 물질적인 것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이라고 일면적으로 왜곡시켜 놓고는 “물질적인 것과 물질적이지 않은 것(비물질적인 것)이 동시에 공존하는 것”을 변증법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헤겔이 주장한 존재와 무의 상호관계를 “물질적인 것과 물질적이지 않은 것(비물질적인 것)이 동시에 공존하는 것”으로 이해했다면 그것은 헤겔의 발생과 소멸의 변증법적 통일을 완전히 다른 의미에서 사용하는 것이다.

“세계는 물질적인 것으로(편집자: 아래 문단에서는 물질적인 것으로만) 구성되어 있다고 사고하는 철학사상”이라는 주장에는 이미 어떠한 한 주체가 물질세계와 물질세계를 인식하고 사고하는 관념이 전제되어 있다.

레닌은 물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렸다.

물질이란 인간의 감각을 통하여 지각되며 우리의 감각으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하면서 우리의 감각에 의하여 복사되고 촬영되고 반영되는 객관적 실재를 표시하기 위한 철학적 범주이다.(≪유물론과 경험비판론≫)

물론 맑스주의에서 물질은 인간 의식의 상대적 제한성과 유한성으로 인해 현재의 의식, 인식상태로서는 인식하지 못하는 부분까지도 포함되어 있는 “온갖 실체의 총체”(엥겔스, 《자연변증법》)이다.

결국 유물론적 변증법이나 변증법적 유물론은 유물론과 변증법 양자의 통일로 하나의 혁명적이고 전투적인 맑스주의 혁명적 철학이 되는 것인데, 이를 나누는 것은 사변적이고 비혁명적인 것으로 맑스주의 철학에 대한 철저한 왜곡이다.

송태경의 “마르크스의 사유방식은? – ‘유물론적 변증법’ vs ‘변증법적 유물론’” 주장은 위에서 예를 들었던 반스탈린적, 반쏘적, 즉 반맑스-레닌주의적, 반현실 사회주의적 철학 사조와 동일한 인식을 하고 있다.

셋째로, “변증법적 유물론”(dialectical materialism)이라는 표현은 마르크스의 것이 아니라 레닌의 것(이 표현은 플레하노프가 처음 사용했다!)이며, 스탈린이 자신의 저작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을 통해 공식화시킨 표현이다. 참고로, “사적 유물론” 또는 “역사적 유물론”도 마르크스의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이 스탈린에 의해 공식화된 표현이다.”

그밖에도 다음과 같은 왜곡을 저지른다.

※ 참조: 언뜻 볼 때, 단순한 표현의 차이에 불과한 듯하다.

그러나 “유물론적 변증법”(materialistic dialectic) 또는 “실재론적 변증법”(realistic dialectic)의 관점에서 세계(또는 우주나 극소세계)를 이해하는 경우와 “변증법적 유물론”(dialectical materialism)의 관점에서 세계를 이해하는 경우는 현격한 차이를 가져온다.

예를 들면, 일명 마르크스의 “토대-상부구조론”을 “유물론적 변증법”으로 사유할 때는 두 대립물(토대와 상부구조)의 상호작용에서 다만 토대를 규정적인 것으로 이해하게 되는 반면에, “변증법적 유물론”(dialectical materialism)에서는 상부구조에 대한 토대의 기계적인 결정론으로까지 사고방식이 고착화될 수 있다. 어쨌든 이 현격한 차이에 대한 풍부한 이해는 각자의 몫이다.

그러나 엥겔스는 사적 유물론 테제를 속류화 하는 이들을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비난했다.

 […]유물론의 역사 파악에 따르면, 역사에서 종국적인 결정적 계기는 현실적 생활의 생산과 재생산입니다. 맑스도 나도 결코 이 이상의 것을 주장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명제를 경제적 계기가 유일한 결정적 계기라고 왜곡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 명제를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추상적이고 허무맹랑한 공문구로 바꾸어 버리는 것입니다.(“엥겔스가 쾨니히스베르크의 요제프 블로흐에게”, 1890년 9월 21일)

엥겔스는 그러면서 “상부 구조의 다양한 계기들 ― 계급투쟁의 정치적 형태와 계급투쟁의 결과들 ― 전투가 끝난 후 승리한 계급이 확립한 헌법 등등 ― 법 형태, 그리고 또 이 모든 현실적 투쟁이 거기에 참가한 사람들의 머리에 반영된 것으로서의 정치적, 법률적, 철학적 이론, 종교적 견해와 이 견해의 교의 체계로의 가일층의 발전 등도 역사적 투쟁의 진행 과정에 영향을 주며 많은 경우에 주로 이 투쟁의 형태를 결정합니다.”(같은 글)라고 주장했다.

레닌 역시 경제적 토대를 근간으로 해서 상부구조가 들어섰다는 사적 유물론의 테제를 확고하게 주장하면서도 “정치는 경제의 집중적 표현”이라고 주장하면서 정치투쟁의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마오쩌둥 역시 “물론 생산력, 실천, 경제적 토대가 일반적으로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자는 유물론자가 아니다. 그러나 또 생산관계, 이론, 상부구조 등의 일정한 조건하에서는 반대로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이것도 역시 인정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생산관계를 변경하지 않고서는 생산력이 발전할 수 없을 때에는 생산관계의 변경이 주요한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레닌이 말한 바와 같이 ‘혁명적 이론이 없이는 혁명적 운동도 있을 수 없다.’ 그런 때에는 혁명적 이론의 창시와 제창이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모순론》)고 주장했다.

이것이 이른바 ‘교조주의’라고 악의적으로 비난받고 왜곡을 당하는 혁명적인 맑스주의 철학의 진수다.

3. 변증법적 유물론 부정자들의 종착지: 무정부주의

그런데 “관념적인 것은 물질적인 것이 인간의 두뇌에 반영되어 사고의 형태로 변형된 것이 지나지 않는다”는 맑스의 철학적 인식을 “반영론”이라고 하는 것을 부당하다고 주장하면 황당할 것이라고 위에서 주장했는데 이러한 일이 실제 벌어지고 있다.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단어 역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말이다. 그들이 즐겨 사용하던 말 중에 가장 비슷한 것은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파악’ 이라는 말이었다. 마르크스가 죽은 뒤 말년의 엥겔스도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이 말을 만들어서 먼저 쓰기 시작한 것은 독일 사민당의 창립 멤버 중 한 사람으로 역사학에 관심이 많았던 프란츠 메링일 가능성이 높다. 아마도 메링이 사용해서 유행시킨 말을 엥겔스가 따라 쓴 것이 아닐까 한다.(이정인, 마르크스주의의 체계?, 2018.5.11일 [다른세상을 향한 연대]에 재게재)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파악”, 이것이 사적유물론 또는 역사적 유물론 아닌가? 송태경 역시 앞에서 “’사적 유물론’ 또는 ‘역사적 유물론’도 마르크스의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이 스탈린에 의해 공식화된 표현이다.”라고 주장했는데, 엥겔스를 스탈린으로 바꿔치기 한 것을 제외하면 두 주장의 반맑스주의적 철학적 인식은 동일하다.

결국 이러한 철학적 인식은 어디로 귀결되는가?

1990년대 소련과 동유럽이 붕괴하고 그 실상이 드러나면서 소련이 사회주의가 아닌 것 같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 이로부터 마르크스주의를 살리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등장했다. 1992년 이진경이 「마르크스주의의 새로운 출발?」이라는 논문에서 지적한 대로 이런 논의는 주로 죽은 마르크스와 산 마르크스를 가리는 문제, 즉 “마르크스→엥겔스→레닌→스탈린”으로 이어지는 소위 마르크스주의 정통의 계보를 어디까지 살리고 어디까지 죽여야 하느냐에 집중되었다.

레닌을 살리기 위해 스탈린을 죽였더니 레닌과 스탈린의 연관성을 부정하기 어려워 레닌까지 죽이게 되었다. 레닌과 스탈린 모두 제 2 인터내셔널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인식이 생겨났으며 그럼 제 2 인터내셔널에 영향 끼친 사람은 엥겔스니 엥겔스까지 죽이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마르크스라도 살리자고 했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연관성을 도저히 부정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마르크스까지 죽이고 나아가 사회주의 이론 전체를 부정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이정인, 마르크스주의의 체계?, 2018.5.11일 [다른 세상을 향한 연대]에 재게재)

반스탈린, 반레닌, 반엥겔스로 귀착되고 결국은 맑스조차도 전기 맑스와 후기 맑스로 나누어 맑스주의의 합리적 핵심과 혁명적 핵심을 모두 해체 또는 제거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사회주의와 현실에 존재하는 사회주의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와 실천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반 맑스레닌주의 철학 사상이 의도하는 바이다.

스탈린과 레닌을 죽이고 엥겔스와 맑스를 분리시키고 맑스를 초기 맑스와 후기 맑스로 나누어 종국에는 “마르크스까지 죽이고 나아가 사회주의 이론 전체를 부정하”게 되는 이들에게 어떠한 진보성이 더 남아 있을 수 있는가?

또 송태경의 경우는 어떠한가?

소비에트 유형의 사회주의가 마르크스 이론과 사상체계의 결과라는 다수 대중의 허구적인 믿음은 이상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레닌을 필두로 하는 자칭 마르크스주의자들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마르크스의 유일한 원죄는 스스로 부정한 [공산당 선언]의 국유화론을 역사적 문헌이 되었다는 핑계로 본문에서 수정하거나 삭제하지 않고 방치하는 오류를 범했다는 것이며, 따라서 위대한 천재의 사소한 실수가 세계사적 비극의 씨앗이 되었다는 것 정도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던 마르크스의 이론과 사상체계의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들만큼은 분명히 확인해 둘 필요가 있다.(송태경의 블로그, “우리가 다시 마르크스를 읽어야 하는 이유”, 2018. 7. 21)

송태경은 맑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박종철 출판사)에서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이론을 단 하나의 표현으로 집약할 수 있다며 가장 중요한 공산주의 원리라고 강조했던 “사적소유 철폐”와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국유화, 즉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정치적 지배를 이용하여 부르주아지로부터 모든 자본을 차례차례 빼앗고, 모든 생산 도구들을 국가의 수중에, 즉 지배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에 집중시키며, 가능한 한 신속히 생산력들의 양을 증대시키게 될 것이다.”를 극렬 반대한다. 심지어 “국유화론과 관련된 오류”가 “엥겔스의 주장을 살펴보면 이는 마르크스의 것이 아니라 엥겔스의 것이 분명하”다며 엥겔스의 책임으로 돌리고 있다. 그리고 “마르크스의 유일한 원죄는 스스로 부정한 [공산당 선언]의 국유화론을 역사적 문헌이 되었다는 핑계로 본문에서 수정하거나 삭제하지 않고 방치하는 오류를 범했다는 것이며, 따라서 위대한 천재의 사소한 실수가 세계사적 비극의 씨앗이 되었다는 것 정도다.”라고까지 주장한다.

현실 사회주의를 부정하고 이를 위해 스탈린과 레닌의 변증법적 유물론을 비난하고 이에 대한 책임을 엥겔스에게 물었던 송태경은 맑스 역시 “세계사적 비극의 씨앗”을 낳은 원죄자라고 비난하고 있다.

송태경에게 현실 사회주의의 가장 큰 오류는 맑스가 자본론에서 “기분 전환을 위해” 언급했던 “자유인들의 연합체”, 즉 “연합된 노동의 생산양식에 기초한 사회”가 되지 못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국유화 체제로 전락한 것이다.

송태경은 “자본주의가 사적 소유 자본주의 시대에서 주주자본주의(shareholder Capitalism) 시대로 이행”하여 “연합된 노동의 생산양식에 기초한 사회”로 이행할 조건이 구비되었다고 주장한다.

현대 자본주의의 기본적인 전제이자 출발점인 자본가에 의한 소유와 경영의 독점상태가 근본적으로 변화되고 있으며, 이 변화가 예고하는 이행의 방향성은 결국 자유롭게 생산과정에 결합한 노동자들이 기업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경영하는 사회경제체제라는 것이다.(같은 글)

맑스는 《자본론》에서 주식회사에 대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그것의 한계 안에서 사적 소유로서의 자본을 철폐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이는 “사적 소유로서의 자본을 철폐”하는 첫 번째 부정인데, 그럼에도 주식회사는 여전히 “자본주의 생산양식 그것의 한계 안에” 갇혀 있기 때문에 이 첫 번째 부정의 고차원적인 부정으로 남아 있는 모순을 척결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사회주의 혁명이고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집단적 소유로의 전환이다. 그런데 “부정의 부정의 법칙”의 옹호자들은 현실에서는 맑스주의의 혁명적 변증법을 전면 부정할 뿐이다.

송태경은 주식회사에서 “자본가에 의한 소유와 경영의 독점상태가 근본적으로 변화되고 있”다고 하는데, 주식회사가 지배하는 자본주의 실제 현실은 어떠한가? 주식회사 발전으로 기업의 형식적으로는 주식회사라는 사회적 소유 형태가 되었다. 그런데 재벌 같은 자본가들은 여전히 기업의 지배자로 남아 있다. 자본가들은 몇 퍼센트 남짓한 주식 소유로 계열사 전체를 지배하고 이 기업지배를 자본가 자식들한테 영구적으로 세습하고 있다.

현대 자본주의에서 주식회사 발전은 주가 조작, 내부자 거래, 투기 등 주식거래와 관련한 온갖 사기와 술수 협잡, 편법 및 불법을 통한 상속 등 더 고도의 사기체제와 더 완고한 자본가 지배체제를 만들어냈을 뿐이다. 자본가들은 전문경영인들을 내세워 실제 기업운영에 개입하지 않더라도 거대한 이윤과 여기에 기인하는 주식 배당을 통해 천문학적 부를 누리는 기생충 집단을 만들어 냈을 뿐이다. 자본주의는 주식회사를 통해 형식적으로는 기업을 주식 소유자들이 소유하는 형태를 만들어냈지만 실제적으로는 자본가들이 소유함으로써 사적소유를 더 강화했을 따름이다.

주식 소유의 민주화니, 경제민주화니, 경영참가니 하는 “시민사회” 운동은 자본의 지배와 노동자에 대한 착취와 억압, 자영업자들에 대한 재벌의 수탈을 전혀 해결하지 못하고 부의 집중과 양극화를 전혀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 양진호 같은 자본가 놈들의 엽기적 폭력과 횡포가 일련의 “재벌 갑질”로 벌어지고 있는데, 과연 송태경이 말하는 “자유로운 공동체로의 이행”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자신의 정치적 지배를 이용하여 부르주아지로부터 모든 자본을 차례차례 빼앗”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아니고서 자본가들의 지배체제, 착취체제가 철폐될 수 있을 것인가? 자본가들의 수중에 집중된 사회적인 “모든 생산 도구들을 국가의 수중에, 즉 지배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에 집중”시키지 않고 어떻게 “자유로운 공동체”로의 이행이 가능한 수 있을 것인가?

맑스는 사적소유 철폐와 노동자 계급에 의한 생산수단의 집중으로 “가능한 한 신속히 생산력들의 양을 증대시키게 될 것이다.”라고 했는데, 1848년 맑스가 선언을 발표할 당시에 비해 이미 자본주의 생산력은 발전할만큼 발전했다. 이제는 자본가들의 이윤과 사적 탐욕과 지배가 목표가 아니라 전체 민중의 정신적, 물질적 발전과 행복에 생산력 발전을 사용해야만 한다.

맑스는 상품생산 사회와 대비하여 “공동소유의 생산수단으로 일하며 또 각종의 개인적 노동력을 사회적 노동력으로 의식적으로 지출하는”(자본론) 사회를 염두에 두고 “자유인들의 연합체”라는 표현을 썼다. 그리고 이 사회에서도 총생산물 중 일부는 새로운 생산수단으로 남고 다른 일부는 연합체 구성원들에게 생활수단으로 소비되는데, 그 나머지 생활수단의 분배 몫을 각자가 노동시간에 따라 분배받는다고 하고 있다. 여기서는 개별 생산자들이 노동이나 노동생산물과 관련해 맺는 사회적 관계가 투명하고 단순하다고 말한다.

맑스는 《고타강령 비판》에서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과도기에 프롤레타리아 독재(낮은 수준의 공산주의, 즉 사회주의) 체제가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여전히 국가가 소멸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회화의 주요한 형태는 “국유화”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착취가 사라지는 프롤레타리아 국가에서도 한 계급의 다른 계급에 대한 억압을 본질로 하는 국가의 본질적 성격은 그대로 남아 있다. 과거 착취자들의 복고를 위한 시도와 제국주의 체제가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때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인민대중이 주인이 되는 국가이고 인민대중의 정치사상을 끊임없이 교양시키며, 특권과 특혜를 없애고 정신노동과 육체노동과의 차이를 부단히 좁혀 전 인민이 인텔리가 되고 인텔리가 노동자계급이 되는 것으로 관료주의를 제거해 나가는 한편 반혁명 분자들과 투쟁하고 제국주의와 투쟁하는 진보적 국가의 성격이다. 그런데 “자유인들의 연합체”가 국가가 사라진 상태라면 이러한 성격으로서의 국가조차도 존재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사라진다는 것이지 계획 경제와 행정의 기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맑스주의는 공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맑스와 엥겔스는 이를 공동체라 부르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자본주의의 착취 체제를 철폐하는 혁명 없이, 자본주의의 무정부적 생산을 철폐하고 전 사회적 계획체제를 가동하지 않고 “자유인들의 연합체”의 도래를 예고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공상주의이자 무정부주의이다.

트로츠키자들을 비롯한 일단의 세력들이 쏘련 사회주의나 현실사회주의 경제를 중앙집중화된 “지령경제”라 비난하며 “민주적 계획”을 강조하는데 이는 분산적이고 개별적인 시장사회로의 후퇴를 의미할 뿐이다. 유고에서 시작한 민주적, 자치적 시장 사회주의 시도는 자본주의 복고를 낳은 재앙적 실험이었을 뿐이다.

이는 쏘련과 동유럽 사회주의의 패배 원인을 과학적 원리로 해명하지 못하고 도리어 사회주의 해체 원인을 대안으로 사고하는 비과학적이고 반혁명적 무정부주의의 일종이다. 그에 따라 노동자 인민의 혁명적 전망을 부정하는 반동적 사상이기도 하다.

이것이 변증법적 유물론을 부정하고 현실 사회주의를 부정한 송태경을 비롯한 각종 좌우익 기회주의자들이 도달한 반혁명적 무정부주의의 종착지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을 부정한 각종 사이비 맑스주의자들에게는 소극적으로는 역사와 현실에 대한 회의주의와 패배주의, 체념과 동요와 청산 적극적으로는 역사와 현실에 대한 반동적 인식과 실천밖에 남는 것이 없게 된다.

반맑스주의자들이 맑스의 혁명적 사상을 청산하고 현실 사회주의를 부정하기 위하여 항상 집중포화하는 스탈린은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해 뭐라고 했는가?

맑스주의는 사회주의의 이론일 뿐만 아니라 전일한 세계관이며 철학 체계이다. 맑스의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는 이 체계에서 흘러나온다. 이 철학 체계는 변증법적 유물론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맑스주의를 서술한다는 것은 변증법적 유물론도 서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 이 체계를 변증법적 유물론이라고 하는가?

그것은 이 방법이 변증법적이며 그 이론이 유물론적인 까닭이다 … 생활은 그 어떤 불변한, 굳어버린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생활은 결코 한 수준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것은 영원한 운동, 파괴와 창조의 영원한 과정 속에 있다. 그런 까닭에 생활에는 항상 새 것과 낡은 것, 자라나는 것과 죽어 가는 것, 혁명적인 것과 반혁명적인 것이 있다 … 그리하여 노동 계급은 끊임없이 자라나고 강해지며 사회생활을 앞으로 추진시키고 자기 주위에 모든 혁명적 요소를 집결시키는 유일한 계급인 것만큼 우리의 임무는 현재의 운동에서 노동 계급을 주력으로 인정하고 그 대열에 들어서며 그의 선진적 지향을 자기의 지향으로 삼는 것이다 … 어쨌든 무정부주의자들이 헤겔의 형이상학적 체계를 그의 변증법적 방법과 혼동하고 있다는 것만은 의심할 바 없다.

불변의 이념에 의거하고 있는 헤겔의 철학 체계가 일관하여 형이상학적이라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온갖 불변의 이념을 부인하는 헤겔의 변증법적 방법이 일관하여 과학적이고 혁명적이라는 것도 역시 명백하다 … 유물론적 이론은 이원론이나 관념론을 다 같이 근본적으로 부인한다.

물론 세계에는 관념적 현상과 물질적 현상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이 서로 부정한다는 것으로는 결코 되지 않는다. 반대로 관념적 측면과 물질적 측면은 동일한 자연이나 사회의 서로 다른 두 형태인 것만큼 그것들을 서로 분리시켜 생각할 수는 없다. 그것들은 함께 존재하며 함께 발전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그것들이 서로 부정한다고 생각할 아무런 근거도 없다.

이와 같이 소위 이원론이라 부당한 것이다.

물질적 형태와 관념적 형태의 서로 다른 두 형태로 표현되는 유일한, 서로 나눌 수 없는 자연, 물질적 형태와 관념적 형태의 서로 다른 두 형태도 표현되는 유일한, 서로 나눌 수 없는 사회 생활―우리는 이렇게 자연과 사회생활의 발전을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동시에 유물론적 이론은 관념론도 부인한다.

관념적 측면, 일반적으로 의식이 자기 발전에서 물질적 측면의 발전보다 앞선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아직 생물이 없었을 때에도 이른바 “생명 없는” 외부 자연은 벌써 존재하였다 … 결국 물질적 측면의 발전, 외적 조건의 발전이 관념적 측면의 발전, 의식의 발전에 앞서게 된다. 다시 말하면 먼저 외적 조건이 변하고 먼저 물질적 측면이 변하며 다음에 이에 따라 의식, 관념적 측면이 변하는 것이다. 이리 하여 자연의 발전사는 소위 관념론을 근본적으로 뒤집어엎고 있다. 인류 사회의 발전사에 대해서도 역시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스탈린, 《무정부주의냐, 사회주의냐?》)

변증법과 유물론, 변증법적 유물론의 핵심이 이러하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자연의 원리에도 적용(자연의 변증법)되고 인간사의 원리에도 적용(사적 유물론)된다. 스탈린이 무정부주의자들을 비판하며 맑스와 엥겔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을 옹호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누가 더 맑스와 엥겔스의 철학에 충실한지, 그리하여 누가 더 현실의 삶을 더 생생하고 과학적으로 포착하고 있는지, 누가 더 혁명적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스탈린의 글 제목대로 변증법적 유물론의 확고한 옹호자인 사회주의자가 아니면 나머지는 무정부주의자일 수밖에 없다. 변증법적 유물론을 부정하는 현대의 각종 소부르주아 잡사상의 대변자들, 정치세력들은 대개 넓게 보아 다 무정부주의자들이거나 무정부주의적이다. 쏘련 사회주의와 현실 사회주의를 전면 부정하고 무용하게 부정한다는 점에서 비변증법적이고, 혁명의 현실성과 구체적인 전개과정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전부 다 범무정부주의다.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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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변증법적 유물론을 반대하는 ‘진보’적 철학 사조의 정치적 실체”의 1개의 생각

  • 2018년 11월 3일 9:3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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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입으로는 변혁을 구사하지만 다른 입으로는 반변혁을 구사하는 이들의 실체이지요… 무엇보다 이러한 소 시민적 사상, 주의들을 구제(驅除)할 존재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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