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항쟁은 사회해방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작년 2017년은 1987년 7, 8, 9노동자대투쟁 30주년의 해였다. 근로기준법 개악 기도에서 다시금 확인되듯, 과거 자유주의 부르주아에서 이제 권력을 다시 잡고 독점자본(재벌)의 확고한 대변자가 된 정치세력들은 6월 항쟁 전에 이 항쟁을 촉발시키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던 노동자들의 투쟁과 급기야 6월 항쟁 직후 대대적으로 터져 나왔던 노동자대투쟁을 역사에서 떨쳐내려 한다. 그리고는 민주당으로 대변되는 당시 부르주아 야당으로의 정권교체를 6월 항쟁의 마침표를 찍는 것으로 사고한다.

문 대통령은 “영화를 보면서 가장 마음에 울림이 컸던 대사가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나요’였다”며 “실제로 6월항쟁, 또 그 앞에 민주화 투쟁의 시기에 민주화 운동하는 사람들을 가장 힘들게 했던 말이 부모님들이나 주변 친지들이 ‘그런다고 세상이 달라지느냐’고 한 그런 말이었다”고 설명했다 …

문 대통령은 “오늘 이 영화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한 순간에 세상이 바뀌지는 않는다. 항쟁 한 번 했다고 세상이 확 달라지거나 하지는 않는다”라면서도 “그러나 이 영화 속 1987년 6월항쟁으로 우리가 ‘택시운전사’란 영화로 봤던 택시운전사의 세상, 그 세계를 6월항쟁으로 끝을 냈다”고 평가했다.

문 대통령은 “그리고 6월항쟁 이후에 정권교체를 하지 못해서 여한으로 남게 된 6월항쟁을 완성시켜준 게 촛불항쟁”이라며 “이렇게 역사는 금방금방은 아니지만, 긴 세월을 두면서 뚜벅뚜벅 발전해오고 있다. 우리가 노력하면 세상이 바뀌는 것”이라고 말했다(최경민 기자, 文대통령, 영화 ‘1987’ 보고 눈물..”노력하면 세상 바뀐다”, 2018.01.07.).

 이들에게도 역시 “한 순간에 세상이 바뀌지는 않는다.”는 고전적 명제는 유효한데, 저들은 그것을 한 번의 정권 장악으로 세상이 바뀌지 않고 계속되는 자신들의 집권으로 세상이 조금씩 조금씩 바뀐다고 사고하고 있는 것이다. 저들의 사고체계, 신념체계 속에는 6월 항쟁이 영화 ‘택시운전자’로 대변되는 광주의 학살자 전두환 정권을 끝장냈으나 “6월항쟁 이후에 정권교체를 하지 못해서 여한으로 남게 된 6월항쟁을 완성시켜준 게 촛불항쟁”인 것이다. 실제로는 자신들을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정권”으로 규정한 만큼, 이른바 “미완의 혁명”을 완성시켜준 게 민주당 문재인 정권의 권력장악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저들은 한 순간에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점진성, 비격변, 온건함으로 생산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혁하는 진짜 혁명을 호도하여 계속되는 권력연장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그런데 6월 항쟁이나 촛불투쟁이나 다 광범위한 민주주의 투쟁이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이러한 광범위한 민주주의 투쟁은 누가, 어떠한 방식으로 이 투쟁을 주도하느냐? 이 투쟁의 전망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에 따라서 그 성격이 판이하게 달라졌다.

프랑스대혁명에서 파리꼬뮌, 러시아 혁명, 반파시즘 투쟁까지

1789년 프랑스대혁명은 쌍퀼로드로 대변되는 민중이 투쟁의 맨 선두에 섰지만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부르주아 계급이 주도성을 발휘한 반봉건 혁명이었다. “자유, 평등, 박애”로 대변되는 프랑스대혁명의 이념은 봉건적 질곡에 눌려 있던 민중의 이해와도 부분적으로 일치했지만 근본적으로는 신생 부르주아 계급의 이해를 대변했다. 봉건제의 태내에서 부를 축적하기 시작한 부르주아가 상업과 생산의 자유를 위해 봉건 정치권력을 타도하고 새로운 정치권력의 주인이 되고자 한 것이다. 이 반봉건 부르주아 혁명의 전개 와중에 부르주아 혁명세력 내부도 봉건 구체제세력과 비타협적으로 투쟁하려고 했던 좌익 자코뱅과 온건하게 타협적으로 투쟁하려 했던 우익 지롱드로 분화되었다.

부르주아 혁명은 쟈코뱅의 공포정치라는 봉건 구체제 세력들의 반동복고세력들에게 공포를 주는 혁명적 폭력을 사용했다. 그러나 쟈코뱅 내부도 신흥 부르주아에 더 친화적인 로베스삐에르, 생쥐스트와 마라로 대변되는 좀 더 민중 친화적인 인물로 분화되는 긴장감이 생겨났다. 결국 쟈코뱅 혁명은 마침내 민중적 지지를 더 확고하게 강화시켜 나가지 못하고 주춤하는 사이에 테르미도르 반동이라는 부르주아 온건파들의 공세로 무너져 내렸다.

애초부터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던 지롱드 권력은 나폴레옹에 의해 무너지고 프랑스는 다시 황제체제로 복고했다. 이후 부르봉 왕조와 7월 혁명 뒤 오를레앙 왕조라는 입헌군주제가 들어섰지만 1848년 2월 혁명으로 다시 무너지는 역사적 우여곡절이 있었다. 그런데 2월 혁명으로 들어선 부르주아 권력은 쟈코뱅 시절의 부르주아적 급진성도 상실하고 6월 반노동자 조치에 저항해 봉기에 나섰던 노동자들 중 수천 명을 학살하는 반동적인 유혈진압을 했다.

영국의 반봉건 투쟁과 1649년 1월 30일 봉건왕 찰스1세의 처형, 반동복고와 이른바 명예혁명 이후 영국에서 입헌군주제 외피를 쓴 부르주아 체제에 맞서는 영국노동자들의 투쟁이 없지는 않았지만, 프랑스 1848년 6월 봉기와 유혈진압은 역사상 가장 선명하게 나타난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의 격렬한 계급투쟁이었다. 부르주아는 이때 가장 노골적으로 반동적인 성격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후 질서당으로 대변되는 왕조 봉건 복고파들의 권력장악 이후에 짝퉁 나폴레옹이라 할 수 있는 루이 보나빠르뜨 나폴레옹 3세가 수십 년간 권력을 잡았다. 그러나 부르주아도 질서당도 나폴레옹 3세라는 황제권력도 모두 그 외양은 달랐지만 점점 더 발전하는 부르주아 계급의 경제적 이해를 대변했다.

이후 1870-71년 나폴레옹 3세는 독일을 통일한 유럽의 신흥 강자 비스마르크와 전쟁을 치르고는 참패하여 권력이 붕괴됐다. 이후 다시 등장한 띠에르를 수반으로 하는 부르주아 권력은 외세에 항복하여 파리를 내줬다. 1871년 3월 28일부터 5월 28일까지 파리를 중심으로 한 노동자 민중이 봉기하여 만들어진 역사상 최초의 노동자 민중권력이 파리꼬뮌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 파리꼬뮌은 부르주아가 하지 못한 야간노동 제한, 아동노동 철폐, 관료봉급의 노동자평균 임금으로의 제한과 관료의 직접 선출 및 소환 같은 가장 민주적이고 대중적인 혁명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파리에서 베르사이유로 도망간 띠에르 부르주아 권력은 비스마르크 군대와 결탁해서 파리꼬뮌을 포위했다. 파리의 노동자 민중은 추위와 굶주림, 고립과 학살의 공포 속에서도 72일 동안 권력을 유지하다 무너져 내렸다.

마치 갑오농민전쟁의 농민군들이 외세와 결탁한 봉건지배계급의 협공 하에 무너져 내리고 대량학살 당했듯, 파리꼬뮌도 똑같은 운명에 처해졌다. 어린이, 여성을 포함한 2만 5천여 명의 파리 노동자 민중이 잔인하게 학살당하고 4만 여명이 투옥 당했다. 부르주아는 이 극악무도한 학살극을 묻기 위해 파리꼬뮌을 다룬 기록물들과 저작을 다 태워버렸다.

1871년 파리꼬뮌은 패배로 끝났지만 1789년 프랑스대혁명의 진보적 성격을 끝까지 밀고가 탄생시킨 노동자 민중의 권력이었다. 반면 파리꼬뮌을 진압한 부르주아는 초기 프랑스 혁명에서의 급진 부르주아가 진보성을 상실하고 그 반동성을 극점으로 몰아간 반동배들로 전락했다.

파리에서 노동자 민중의 역사적 진출과 혁명성에 놀란 독일 부르주아는 애초부터 봉건배들과 협력해서 온건하고 반동적인 방식으로 권력을 잡아 나갔다. 독일에서 유일하게 진보적 계급은 노동자 계급이었다. 이후 맑스와 엥겔스의 혁명 사상으로 무장한 독일 노동자계급만이 참으로 혁명적이고 진보적이었다. 맑스와 엥겔스는 프랑스 등지에서 부르주아의 기회주의성과 반동성을 보고, 그리고 자본주의 발전과 함께 필연적으로 반노동자적이고 반민중적일 수밖에 없는 부르주아의 계급적 본질을 파악하고는 노동자계급이 심지어 부르주아와 일시적으로 손잡고 반봉건 투쟁을 할 때조차도 부르주아를 믿지 말고, 독립적으로 설 것이며, 더 나아가 봉건세력을 겨냥했던 무기를 언제든지 부르주아에게 돌릴 태세를 갖출 것을 호소했다.

짜르 황제 체제와 싸워 혁명을 추구했던 러시아사회민주노동자당 내부도 부르주아에 대한 태도를 어떻게 취할 것인지 언제, 어떻게 혁명을 할 것인지를 둘러싸고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로 당이 나눠졌다. 멘셰비키가 부르주아와 손잡자는 주장을 한 반면, 레닌과 볼셰비키는 부르주아의 반동성을 파악하고 농민과 손잡고 짜리즘을 타도하는 민주주의 혁명을 하고 중단 없는 혁명으로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아가자고 주장했다.

결국 러시아에서는 1917년 2월 혁명 이후에 들어선 부르주아 임시정부를 분쇄하고 10월 혁명으로 노동자 민중의 권력이 탄생했다.

부르주아는 물론이고 멘셰비키조차도 황제체제 복고파들, 제국주의 간섭세력들과 손잡고 반혁명 복고를 위한 내전에 참여했다. 1789년 프랑스대혁명의 정신은 1871년 파리꼬뮌으로 고조되고 이는 1917년 러시아혁명으로 최정점에 달했다.

이것이 바로 역사에서의 민주주의 투쟁의 분화발전이었다. 부르주아가 역사의 반동배로 전락했던 반면에 혁명적인 노동자 민중만이 역사진보의 기관차였다.

이는 1930년대, 1940년대를 거치면서 형성된 반파쇼 민주주의 투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부르주아, 특히 독점부르주아는 파시즘을 추동하여 전쟁을 일으키고 노동자 민중의 권력인 쏘비에트 연방을 분쇄하려 했다. 파시즘은 쏘비에트 인민뿐만 아니라 전 세계 민족을 분할 점령하고 수천만을 학살했다. 미영프 등 이른바 연합국도 앞에서는 파시즘과 싸우면서도 뒤로는 파시즘과 협조한 독점자본의 제국주의 국가들이었다.

추축국들의 중심이던 독일과 일본 제국주의는 피억압 민족들의 민족해방투쟁과 쏘련과의 전쟁패배 이후 처참하게 패배했다. 쏘련은 독일 히틀러 파시즘을 붕괴시킨 뒤 관동군을 괴멸시키고 일본 제국주의를 패배시켰다.

반독재 민주주의 투쟁: 한국현대사를 관통하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간 계급투쟁

이러한 역사적 격변 속에 조선은 해방을 쟁취했다. 그러나 일제를 대신한 미제국주의가 한반도 이남에서 새로운 점령군으로 등장하여 노동자 민중의 해방열망을 짓밟고 대학살을 자행했다. 이후 분단이 되고 한국전쟁이 벌어졌다. 한국전쟁은 남북 간의 내전이자 미제를 중심으로 한 제국주의와 쏘련과 혁명 이후 중국이 참여한 국제적 계급전쟁이기도 했다.

한국전쟁 이후 이승만 괴뢰와 박정희 군사파쇼 정권은 반공주의를 국시로 파쇼 폭압 체제를 만들어 갔다. 이 체제 하에서 노동자 민중의 지난한 투쟁이 전개되었다. 한국에서의 파쇼 지배 체제는 미제국주의의 반쏘비에트, 반북 지배체제의 첨단기지로 한국을 무장시키고 그 가운데 한국에서 자본의 지배체제를 극단적으로 발전시키는 반동적 과정이었다.

이 파쇼지배 체제에 맞서는 현대사를 여기에서 다 언급할 수는 없다. 부마항쟁 등 노동자 민중의 투쟁이 박정희 체제 내부를 분열시키고 박정희 암살로 이 군사파쇼 지배체제는 끝장났다. 그러나 이 체제는 신군부 전두환 군사파쇼 도당으로 부활했다. 신군부에 맞서는 투쟁이 전국적으로 전개됐다. 결국 끝까지 저항했던 광주가 고립된 채 유혈진압을 당했다.

오월광주의 투쟁정신은 80년대 내내 끈질긴 저항을 만들어 냈다. 오월광주 신군부의 군사작전권을 가지고 광주학살을 배후에서 지령했던 미제국주의에 맞서는 학생들의 투쟁이 부산미문화원, 서울미문화원 방화 투쟁으로 터져 나왔다.

오월광주와 함께 1970년대 전태일 열사분신은 현대사 노동자 민중의 투쟁의 정신적 자양분이 되었다.

1970년대 여성 노동자들이 주도하는 민주노조 건설과 사수를 위한 끈질긴 투쟁부터 광주항쟁 직전 1980년 사북광산 노동자들의 항쟁, 1985년 구로동맹 파업, 농민투쟁 등 노동자 민중투쟁이 계속 되었다.

이 투쟁은 반독재 민주주의 투쟁으로 통칭되지만 여기에는 노동자 농민의 생존권 투쟁과 기본권 쟁취, 반외세 투쟁, 통일투쟁, 직선제 투쟁이 착종(錯綜)되어 있었다.

엥겔스는 일찍이 “영국노동자계급의 상태”에서 영국노동자들의 차티스트 운동의 성격과 정치적 분화발전을 날카롭게 분석한 바 있다. 이 투쟁은 소부르주아가 주도하는 보통선거권 쟁취 투쟁으로 출발했지만 나중에는 노동자들이 주도하는 제반 경제적, 정치적 권리를 위한 투쟁으로 발전해 나갔다. 엥겔스는 여기서 20만 명의 시위 군중 앞에서 진행된 차티스트 운동가의 연설을 소개한다.

동지 여러분! 차아티스트운동은 당신들이 선거권을 획득하는 것 따위가 중요하다는 식의 정치적인 문제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 운동은 일종의 나이프와 포크의 문제이고 그 헌장은 말하자면 좋은 집과 훌륭한 음식과 마실 것, 넉넉한 살림과 짧은 노동시간의 문제인 것입니다(엥겔스, 영국노동자 계급의 상태, 두리, 274쪽). 

다시 강조하건데, 한국에서 반독재 민주주의 투쟁 역시도 이처럼 직선제 쟁취투쟁일 뿐만 아니라 노조결성 투쟁과 노동3권 쟁취, 농민의 자주적 조직 결성과 생존권 요구 등 노동자 민중의 제반 요구와 미제국주의와 분단에 맞서는 투쟁, 학살자 처단 요구, 지식인들의 학문의 자유, 전위정당 건설 투쟁 등 계급투쟁 요구가 착종되어 나타났다.

그런데 러시아와 다르게 한국전쟁 이후 조성된 극우백색테러 정치적 상황 속에서 후진적이고 미분화된 한국의 반독재 민주주의 투쟁은 혁명세력과 노동자들이 주도하지 못했다.

양김으로 대변되는 야당세력들, 재야라는 미분화된 외형 속에 숨겨진 자유주의 세력들이 정치적 주도자가 되어 그 성과를 정치적으로 수렴해 나갔다. 이들 자유주의 부르주아 세력은 직선제라는 형식적 민주주의 쟁취로 투쟁을 종료하고 정권교체로 투쟁을 협소화, 제도화, 온건화, 보수화시켰다.

반면 기층 노동자 농민 혁명적 학생 지식인들은 한국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혁하려는 투쟁을 계속했다. 6월 항쟁과 노태우의 6.29선언 이후에 7, 8, 9노동자대투쟁은 자유주의 부르주아가 멈춰버린 곳에서 폭발한 노동자계급의 거대한 투쟁이었다.

1987년 7·8·9 노동자대투쟁 기간 동안 새롭게 결성된 노동조합은 자그만치 1,060개, 이는 지난 1980년-86년 동안의 그것을 훨씬 능가하는 수치였다. 아울러 대투쟁 기간 동안 발생한 노동쟁의 건수는 3,458건으로써 하루 평균 40건씩 터져 나온 셈이다. 이는 1986년 하루 평균 0.76건에 비해 무려 50배 정도나 증가한 것이었다. 가히 봇물 터지는 듯한 기세였다고 할 수 있다(박세길,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3). 

거대한 노동자 투쟁의 촉발 이후 1990년 1월 22일 전노협 건설과 민주노조운동은 한국사회 노동자들의 기본권을 크게 신장시켰다.

한편 부르주아 세력 내부에서는 양김씨 분열과 노태우 정권의 탄생과 3당 야합과 민주자유당 창립,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거치면서 군부정권이 종식되고 이른바 ‘민주정권’이 권력을 잡았다.

그런데 김영삼은 초기의 역사 바로 세우기, 민족우선 정책의 남북교류 다짐, 하나회 청산, 전두환, 노태우 구속조치, 이인제 노동부장관을 내세운 무노동 부분임금제 언급 등 혁신적 조치와 발언을 하기도 했으나 결국은 남북적대와 노동계급 적대정책을 강화해 갔다. 1996년 노동법 날치기 공세와 민주노총 총파업 투쟁은 김영삼 정권의 본질을 드러내고 파산을 선고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김영삼의 계급적 본질은 3당 야합과 민자당, 한나라당으로 이어지는 군부독재의 잔재쯤으로 여겨지며 명실공히 ‘민주정권’인 김대중 정권이 탄생했다.

김대중 정권은 김영삼 정권 말 폭발한 1997년 한국공황을 해결하고 한국 독점자본의 위기를 구출할 ‘민주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김대중은 자본의 위기를 노동자들한테 전가해서 위기를 헤쳐 나가려 했다. 노사정협의체를 통해 정리해고제, 근로자파견제를 합의하도록 강제한 것이다. 김대중 정권은 2002년 대우자동차 대량 정리해고 자행 이후 부평에 계엄령을 방불케 하는 폭압적 탄압을 자행했다.

김대중 정권 이후 2003년 인권변호사 출신 노무현이 권력을 잡았다. 그러나 국가보안법 구속자를 용감하게 변호하던 인권변호사 노무현은 국가보안법을 온존시켰을 뿐만 아니라 재벌의 변호인, 미제국주의의 변호인이 되어 파업권을 봉쇄하는 노동악법을 도입하고 한미FTA와 파병 등 반노동자적이고 반민중적 조치를 강화했다.

결국 인권변호인 노무현에 대한 대중적 기대는 재벌변호인 노무현에 대한 실망과 환멸로 변해버렸다. 이것이 샐러리맨 신화를 일군 자본의 화신 사기꾼 이명박에 대한 압도적 지지를 낳았고 이명박, 박근혜 정권, 대대적인 촛불투쟁과 박근혜 퇴진과 구속, 문재인 정권교체까지 오늘날 정치상황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너희들이 멈춘 곳에서 우리는 전진한다

광범위한 반독재 민주주의 투쟁은 필연적으로 정치적 분화 발전을 만들어 낸다. 광범위한 6월 항쟁 이후 노동자대투쟁으로 노자 간 대립이 선명하게 부각됐듯이, 대대적인 촛불항쟁 이후 정치적 분화가 이루어졌다. 이 분화는 문재인 정권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느냐를 기준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물론 문재인 정권이 노동존중과 비정규직 제로 정책을 공언하고 있고 아직 임기 초라 그 본질이 다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정치적 분화가 선명하지도 않고 그러기에 분화가 정치적 발전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문재인 정권은 촛불의 요구였던 적폐청산을 하겠다고 하지만 재벌적폐, 노동악법 적폐, 분단적폐, 언론적폐, 국정원과 국가보안법 적폐, 검경적폐라는 구조적 적폐를 청산하지 않고 적폐를 청산한다고 한다. 그러기에 그 적폐청산은 미적지근하거나 동요하고 부실하다. 심지어는 신적폐의 중심으로 문재인 정권은 나아가고 있다.

사드 발사대 4기 추가 배치, 근로기준법 개악 기도가 바로 그것이다. 국정원 해체는커녕, 개혁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정권에 유리하고 권력을 강화하는 선에서만 이뤄지고 있다. 양심수는 단 한 명도 석방되지 못하고 있다.

전교조, 공무원노조는 여전히 법외노조로 내몰려 있다. 최저임금의 알량한 인상은 자본의 사보타주로 무력화 되고 저임금 체제는 계속되고 있다. 일자리 창출은커녕 4차 산업혁명에서 보듯 자동화 기계화 정보화 합리화로 고용이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청년실업, 노인실업, 빈곤은 계속되고 있다. 정리해고자들은 복직되지 못하고, 비정규직은 우선 정리해고 되고 있다. 조선업종에 불었던 구조조정 광풍은 금융산업으로 번지고 있다.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평화와 남북대화 기대가 높아지지만 한미일 3국 전쟁 동맹은 언제든지 전쟁과 대결을 고취시키게 될 것이다.

한국사회의 가장 반동적이고 파렴치한 지배계급 분파인 자유한국당 무리들은 말할 것도 없고 국내외 독점자본의 변호인이 된 민주당으로 대변되는 구 자유주의 세력들은 더 이상 진보나 민주주의의 담당자가 될 수 없을 뿐더러 필연적으로 반노동자적, 반민중적으로 될 수밖에 없다. 이는 전 세계 부르주아 역사와 한국 자유주의파의 역사로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자본에 제약되고 심지어는 자본을 대변하는 정치세력의 필연적 모습이다.

이제 계급투쟁의 일환인 민주주의 투쟁의 실질적인 담지자는 억압받는 노동자들과 민중 중에서 이 억압과 질곡을 뚫고 나오려고 투쟁하고 저항하는 노동자 민중 밖에 없다. 이들이 다수가 되고 정치적으로 분화되고 발전될 때만이 역사가 진보적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다.

역사발전을 추동하는 정치적 독립과 정치적 성숙을 이끌고 그 전망을 제시하는 혁명적이고 과학적 사상의 기치를 분명하게 세워야 한다.

6월 항쟁이 미완이라면 그 미완의 완성은 정권교체라는 미완의 심화가 아니라 사회해방이라는 진정한 완성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1987년 너희들이 직선제로 멈춘 곳에서 우리는 해방으로 진군했다. 2017년 너희들이 정권교체로 멈춘 곳에서 우리는 해방을 향해 계속 진군한다. 2018년, 2019년, 2020년…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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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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