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에 운동이 없(었)다”! 그런데 그것을 채워나갈 운동을 부정하는가?

사진: 점좀빼

“촛불에 운동이 없(었)다”(한석호, 매일노동뉴스, 2017.02.06)는 필자의 문제의식에 동의한다. 그러나 항상 그렇지만 여기까지다. 올바른 전제 위에서 출발해서 완전히 상반되는 결론으로 미끄러져 내려간다. 그러고는 촛불에 채워져야할 운동의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고 무정부적 혼란에 빠져버린다.
한석호(필자)는 이렇게 주장한다.

“사회운동은 무기력했다. 퇴진행동을 만들어 광장 집회를 기획했으니까 사회운동도 죽을 쒔다, 고 말하기 쑥스러운 상황이다.”

한석호는 노동운동과 민중운동, 시민운동을 통칭해서 사회운동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촛불에서 부족한 운동성은 노동운동, 민중운동의 운동성인가? 사회운동의 운동성인가?

필자는 “나는 처음부터 내가 몸담고 있는 노동운동과 민중운동에 기대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시민운동과 풀뿌리운동은 다를 줄 알았다. 촛불로부터 일정하게 신뢰받으면서 사회운동이 촛불을 주도하도록 일조할 줄 알았다. 한데 아니었다.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도대체 왜? 사회운동은 이렇게 무기력할까? 원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라고 말한다.

한석호는 노동운동과 민중운동에 대해서는 애초에 기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민주노총 사회연대위원장이라는 중책이 말해주는 것처럼, 자신이 노동운동과 민중운동에 몸 담고 있으면 그 운동에 가치를 부여하고 그 운동을 통해서 박근혜 퇴진 투쟁 촛불을 포함한 전체 운동의 전망을 제시하는 것이 절실하다. 그러나 필자는 자신이 몸 담고 있는 노동운동과 민중운동에 대해서는 애당초 기대를 하지 않는다. 대놓고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 존재 의의를 회의적으로 보거나 폄하한다. 그렇다면 노동운동과 민중운동에 몸 담고 있을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왜 한석호는 노동운동과 민중운동을 저렇게 홀대하는 것인가?

“한국의 노동운동과 민중운동은 80년대 노선에 뿌리를 두고 있다. 혁명을 통한 권력 장악, 그것을 이루기 위한 총파업, 가투, 그것을 실행하는 전위 등으로 상징되는 노선이다. 한때 세상을 뒤집을 듯했다. 그러나 실패했고 실패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앞에 무기력하다.”

한석호가 노동운동과 민중운동에 대해 부정적인 것은 80년대 운동의 경험에서 비롯됐다. NLR(민족해방혁명)과 PDR(민중민주혁명) 노선에 대한 부정인 것이다. 한마디로 한석호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운동의 혁명성, 변혁성에 대한 청산주의 노선이다. 이것이 한석호에게는 해체된 쏘련 사회주의와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부정으로 나타나고 노동운동과 민중운동에 대한 회의와 폄하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80년대 혁명노선의 실패는 당시 혁명노선이 내걸었던 계급해방, 민중해방, 민족해방 노선의 문제인가? 그 혁명노선을 청산하고 권력과 자본에 투항하고 운동의 혁명적 목표를 상실한 청산주의자들의 문제인가.

실패가 80년대 혁명노선의 문제라면 80년대 제기했던 계급해방, 민중해방, 민족해방의 과제를 제기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이 새로운 것으로 변화했어야 한다. 그런데 자본주의 노자간의 적대적 현실, 재벌의 지배, 농민 파탄과 생존권의 위기, 자본의 독점과 소상공인의 파산, 미제국주의 군대의 진주, 한미일 동맹, 분단과 전쟁위기 등 우리사회의 현실이 80년대와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이 있는가? 군부독재 종식과 직선제가 시행(이조차도 부정선거로 파탄나고 있지만) 되고 있다는 변화 말고 다른 현실의 모순은 더 심화되고 있지 않나?

박근혜 퇴진 투쟁을 중심으로 촛불이 제기하는 적폐의 과제를 중심으로 우리 현실의 모순을 살펴보면 어떠한가?

이재용 구속과 재벌의 노동탄압 중단, 재벌 청부 노동악법 폐기, 노동3권 쟁취, 비정규직 철폐, 정리해고 철폐, 일본군 성노예(위안부) 합의 폐기, 국정교과서 중단, 한일군사정보협정 폐기, 사드 배치 중단, 종북몰이 청산과 통합진보당 해산 무효화, 국가보안법 철폐와 양심수 석방…

80년대 운동에도 이러한 종류의 요구들이 제기됐고, 이러한 요구들은 더욱 더 절실한 2017년의 과제가 되고 있다. 박근혜를 가장 철저한 노동자 민중의 방식으로 퇴진시켜야할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우리사회 구조적, 역사적 모순을 근본적으로 척결해야 하는 것이 노동운동, 민중운동의 과제가 되어야 한다.

“촛불에 운동이 없(었)다”면 “혁명을 통한 권력 장악, 그것을 이루기 위한 총파업, 가투, 그것을 실행하는 전위 등으로 상징되는 노선이다. 한때 세상을 뒤집을 듯했”던 80년대 식 혁명적인 노동운동, 민중운동이 없었던 것이 가장 큰 한계 아닌가?

1천만이 넘는 집회 참가자들은 있었지만, 비폭력 평화시위라는 지배계급과 지배계급 언론의 프레임에 갇혀 가장 온건한 방식으로 투쟁이 진행되고 있다. 그리하여 급기야는 오늘날 황교안이 대통령 행세를 하고, 노동자 민중의 요구는 아직 제대로 쟁취된 것이 없으며, 박근혜 탄핵 기각 예상과 반동들의 반격이 조직되고 있다. 국정원이 콘트롤 타워가 되고 있다. 자본언론은 그 나팔수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그럼에도 조기대선이라는 명목 하에 자본가 정치인들이 그 성과를 독차지하려 하고 있고, 노동운동의 대중적 지도자들과 활동가들은 민주당 문재인, 이재명 지지 선언에 나서며 노동운동과 민중운동을 통째로 가져다 바치려 하고 있다.

박근혜 퇴진 촛불투쟁에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이 투쟁을 노동자 계급이 주도하는 것이다. 민중운동이 주도성을 발휘하는 것이다. 총파업이 조직되어야 하는 것이다. 답보상태에 빠진 거리행진 대신에 격렬한 가두 투쟁이 전개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박근혜 일당과 그 체제를 떠받치고 있었던 시스템들을 박살내고 노동해방, 민중해방의 기초를 확고하게 다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석호는 “촛불에 운동이 없(었)다”면서도 그것을 채워나갈 운동을 “실패했고 실패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앞에 무기력하다.”며 부정하거나 홀대하고 있다.

노동운동과 민중운동의 혁명성과 총파업과 가두투쟁의 조직화 과제 대신에 한석호에게 남은 전망은 무엇이었나?

“새로운 방식으로 출발한 것이 시민운동이었다. 참여·시민·환경·인권·평화·여성 등 다양하게 영역을 넓히며 전문적으로 운동했다. 각자 영역을 잘하면 된다고 했다. 한때는 각광받으며 세상을 변화시킬 것 같았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와 퇴진 촛불 앞에서 무기력하다.”

한석호가 기대한 시민운동도 실패했다. 이제 한석호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대안은 무얼까? 극복 방안은 무얼까?
사회포럼에 참가해서 고민을 듣고 나눌 생각이다. 노동운동과 민중운동과 시민운동과 풀뿌리운동 너 잘났다 나 잘났다 할 처지가 아니다. 모든 운동을 아우르는 집단 지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전망의 부재다. 혼란과 동요와 무정부적 인식이다.

“모든 운동을 아우르는” 부처님 손바닥 같은 운동은 아무 운동도 아니다. 사회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노동운동과 민중운동을 시민운동과 부문운동으로 뒤섞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계급운동이 강화돼야 한다. 그 계급운동의 중심에 (선진) 노동자, 민중이 서야 한다.

“죽 써서 개주지 말자”는 우려들을 제기하고 있는데, 그것은 운동이 독자적으로 조직되어 자본가 정치인들에게 그 투쟁의 성과를 갖다 바쳐서는 안 된다는 우려 아닌가? 그런데 우리는 제대로 죽을 쓰고 있는 것인가? 박근혜가 민중적 방식으로 퇴진했는가? 박근혜가 아직 퇴진하지도 않았고, 박근혜 체제의 시스템들이 그대로 유지되어 새로운 예비권력자에게 그대로 넘어가려 하는데, 노동운동, 민중운동은 대중투쟁 보다는 선거일정, 조기대선에 온통 관심을 두지 않았나?

“죽 써서 개주지 말자”는 다짐은 1980년대 민중항쟁에 대한 폄하도 있다. 그러나 거기서 놓치고 가는 가장 중요한 지점이 있다. 87년 투쟁의 거대한 전진이다.

1980년대 6월 항쟁과 7.8.9노동자 대투쟁 전후로 혁명적 노동운동, 민중운동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운동진영 내부의 정치노선 차이와 분열에도 불구하고 이 운동을 주도했던 것은 혁명노선이었다. 이 측면에서 87년 투쟁은 계승되고 발전되어야 한다.

“촛불에 운동이 없(었)다” 그러면 그 운동성을 채워 넣어야 한다. 그 운동적 전망을 가로막는 청산주의는 청산되어야 한다.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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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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