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1 국제여단은 ‘랜드 앤 프리덤’을 규탄한다

특집1

국제여단은 랜드 앤 프리덤을 규탄한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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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내전에 의용군으로 참전하기 전에 공업화학자로서 일했던 빌 알렉산더(Bill Alexander) 동지는 안티 – 탱크 배터리의 정치위원을 역임 한 후 영국 대대의 지휘관으로 일했다. 그는 1996년 1월 29일 인도공산당협회와 공산주의노동자협회가 공동으로 주최한, 런던의 회의에서 연설했다. 그의 연설은 영국에서 노동자계급의 현재 투쟁에 대하여 거대한 의미를 가졌고, 따라서 우리는 그가 아래에서 제기한 주요 핵심들을 상기한다.

 

빌은 스페인 내전이 종식된 지 무려 반세기 이상이 지난 오늘날, 왜 스페인 내전을 공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지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는 이 전쟁은 인종주의와 파시즘에 대한 투쟁과 관련하여 중요한 교훈들을 가지고 있다고 정확하게 지적했다. 이 교훈들은 자본주의 세계 경제위기 상황에서, 노동자계급이 전례 없는 곤경과 궁핍의 대상이 되는 만큼 어쩌면 노동자계급을 억누르는 유일한 방식으로써 부르주아 사상들이 점점 더 파시즘을 향해가고 있는 오늘날 특별히 중요하다. 그는 이 당시에 조지 오웰의 책이 몇 가지 새로운 버전으로 부르주아 계급에 의해 생산되는 것을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고 여겼다. 따라서 진보적, 반파시즘적이고 반인종주의적인 인민들이 역사를 올바르게 기록하기 위해 단호하게 행동하는 것이 중요했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공세는 아주 모호한 장소에서 켄 로치 감독이 ‘랜드 앤 프리덤’ 영화 제작을 할 수 있게끔, 그에게 2백50만 파운드를 지급해주었는지를 설명해 준다. 그런데 ‘랜드 앤 프리덤’은 스페인 내전 동안 반혁명적 방식으로 행동했던 특정 아나키스트 파벌을 매우 미화하고 그 전쟁의 진정한 영웅들 – 민주공화국을 위해 투쟁했던 스페인과 다른 나라 출신들의 공산주의자들 – 국제적 노동자계급 운동, 특히 쏘비에뜨, 그리고 여전히 더욱 중요하게, 부르주아들의 가장 치명적인 적인 스탈린 동지를 극도로 중상한다.

빌 동지는 국제여단의 영국 대대 생존자들이 켄 로치에게 도움을 주려 했었지만 그는 알기를 원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또한 채널4(영국의 민영방송)에서는 영국의 파시스트 지도자 오스왈드 모슬리(Oswald Mosely)를 심장은 오른 쪽에 있지만2) 약간의 ‘실수’를 한 사람으로 묘사한, 동정적 프로그램을 다음 가을에 만들 예정이다. 이것은 또한 현재 노동자계급에 대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공세의 방향을 보여준다.

스페인 내전의 배경으로, 빌 동지는 그 전쟁 상황이 1차 세계대전으로부터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식민지 통치를 둘러싸고 제국주의의 두 가지 주요 그룹 사이에 충돌이 있었다.

그것은 다른 제국주의 그룹에 대한 한 제국주의 그룹의 패배와 러시아에서 부르주아의 전복으로, 그리고 세계 최초의 노동자 계급의 국가인 쏘비에뜨 연합의 형성으로 끝났다. 이것은 국제 자본가 계급에게 매우 위험한 요인이었다.

이것이 전쟁이 끝난 후, 독일 제국주의자들이 산업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철저히 군사력을 강화하려 한 이유 중 하나다.

하지만 독일 산업을 최대한 발전시키고자 하는 열망 속에서, 산업의 왕국 루르(독일의 지역명)로 가는 길에 걸림돌이 있었다. 그 걸림돌은 독일 노동 계급이었다. 독일 노동자계급 운동은 그 당시 매우 강력했다. 독일 제국주의자들은 만약 그들의 팽창 야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노동자계급을 분쇄해야 한다면, 그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파시즘으로 돌아섰다. 이탈리아에서는 무쏠리니(Mussolini)가 같은 일을 했다. 영국과 프랑스 제국주의에 효과적으로 경쟁할 만큼 제국주의 힘을 강화하기 위해, 무쏠리니는 이탈리아에서 노동자계급과 다른 진보적인 조직들을 파괴했다.

그러고 나서, 파시스트의 목적은, 세계를 재분할하기 위한 전쟁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노동자계급의 일체의 저항을 분쇄하는 것이었다. 스페인 내전 초기에, 파시즘은 이미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에서 승리했다. 그들의 목표는 이제 스페인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었다.

당시 데일리 메일(Daily Mail)에 따르면, 파시즘은 스페인과 인민들의 생활수준이 낮았던 다른 후진국들에서 필연적이었다. 스페인은 가톨릭교회를 포함하여 대토지 소유자를 대표하는 군대에 의해 통치되었다. 스페인 군대는 기생적인 조직이었다. 스페인 군대에는 남자 세 명에 한 명 꼴로 장교가 있었다. 군대의 주요 관심사는 노동자계급을 통제 하에 두는 것이었기 때문에 군대 막사는 시내 중심부에 있었다.

군대의 다른 일은 스페인의 식민지 지배권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스페인 인민들은 기아 상태에 있었고 민주주의와 그들의 생활상태 개선을 열망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인민전선 정부를 형성했다. 누가 이 안에 있었는지를 기억하는 것 중요하다. 공화주의자들의 대부분은 ‘자유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사회주의자들이 아니었다.

인민전선 정부 안에 공산주의자는 겨우 소수였다. 아나키스트들 또한 지배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의 연합에 기초한 인민전선 정부는 1936년에 선출되었고 민주적 변화들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정치범들이 석방되었다. 교육 정책에서 진보적인 조치들이 도입되었다. 땅 없는 농민이 토지를 취득하는 것이 쉬워졌다. 이러한 변화들은 너무 많아서 위에서 언급한 지배그룹들이 용인할 수 없었다. 1936년에 프랑코는 인민전선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전념하는 한 그룹의 지도자로 부상했다. 프랑코는 히틀러와 무쏠리니가 했던 것처럼 쉽게 파시즘을 도입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스페인 인민들은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들은 파시즘이 그들이 맞서 싸워야만 하는 주된 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게오르기 디미트로프(Georgi Dimitrov)가 이끄는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이 국제적인 계급 역관계를 분석하고 모든 반파시스트 세력 통일전선을 촉진할 수 있었던 것이 그들의 이해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히틀러는 노동자계급 운동에 대한 통제를 강화시키는 것과 동시에, 영국, 프랑스와 미국 제국주의의 비용으로 독일 제국주의의 이익을 향상시키는 기회로 삼을 계획을 세웠다. 스페인은 히틀러가 전쟁 준비를 하기 위해 하늘이 준 기회였다.

영국 지배 계급의 반응은 (영국이 알려진 것처럼) ‘불신의 알비온(Perfidious Albion)’3)의 전형이었다. 영국은 가능한 모든 속임수를 동원했다. 그들은 전쟁에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제3자가 참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전쟁을 내전으로 선언했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전쟁 동안과 전쟁 이후에 프랑코 편이었던 독일과 이탈리아에 관해서는 자신들의 면전에서 벌어졌던 개입에 대해 눈을 감는 것으로 ‘불간섭’을 지지했다.4)

‘불간섭’ 슬로건은 그저 민주적으로 선출된 공화국 정부를 지원하는 것을 피하고 파시즘과 내정간섭 지지자들로부터 공화 정부가 자신을 방어하는데 필요한 무기 구매를 못하게 저지하기 위한 변명에 불과했다. 그래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북 아프리카에는 아프리카 군대가 주둔했다. 이 군대는 상당한 전쟁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장군들은 스페인에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과 군대 사이에는 지브롤터 해협(straits of Gibraltar)5)이 가로놓여 있었다. 스페인 해군은 공화국의 한쪽 편에 있었다. 프랑코는 바다 건너편의 자신의 군대를 얻을 필요가 있었다. 3일 이내에 독일 나찌 공군은 스페인 공화국 안으로 아프리카의 육군 수송에 필요한 모든 항공 운송을 제공했다. 만약에 ‘불간섭주의자들’이 파시스트들의 간섭을 방해했고, 공화국 정부에게 그것이 필요로 하는 군대들을 살 권리를 주었다면 그 결과였던 3년간의 긴 전쟁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프랑코는 세비야에서 수도인 마드리드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인민전선정부의 과업들은 무엇이었는가? 스페인 군대가 프랑코에게 가버렸기 때문에 인민전선정부는 군대가 없었다. 엄청난 용기와 신념이 있지만 군사훈련을 받지 못한 사람들만 있었다. 그래서 공화정은 나찌의 도움을 받았던 프랑코가 마드리드를 향해 남쪽으로부터 진군하고 있는 동안 동시에 군대를 훈련했다.

이 진군에 대항하기 위하여 필요했던 것은 (a) 조직, 그리고 (b) 무기였다. 프랑코는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하면서, 마드리드를 향해 전진하면서 부수적으로, 그의 후방을 확보했다. 그는 남부의 땅에 거주했던 모든 땅 없는 농민들을 죽였다. 이러한 방법으로 그는 그 뒤에 죽음과 파괴의 흔적을 남기면서 3개월 만에 스페인의 절반을 장악할 수 있었다.

만약 마드리드가 넘어갔다면 전쟁은 끝났고 또 다른 나라는 파시스트 진영으로 넘어갔을 것이다. 이것은 누구도 파시즘의 진군을 막을 수 없다는 생각을 깊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프랑코의 군대는 훈련받지 않고, 제대로 무장하지 못했던 스페인의 영웅적인 사람들에 의해 저지되었다. 마드리드의 인민들은 마드리드가 함락될 경우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운명을 알고 있었고, 이것은 파시즘을 저지하려는 그들의 결의를 높였다. 파시스트들에 대한 그들의 승리는 전쟁의 전환점이었다. 이 승리 때문에 1936년 10월 1일, 공화제 정부는 1939년 3월까지 싸울 수 있었다.

그 2년 반 동안의 시간은 세계의 민주주의적인 사람들에게 파시즘의 본질, 그것이 의미하는 것을 이해할, 그리고 1939년에 시작된 파시즘과의 투쟁을 준비하는 교훈을 배울 기회를 주었다.

 

국제여단

 

국제 여단은 누구였는가? 전 세계인들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가 총부리를 들이대는 권력에게 그저 내쫓기는 동안 수수방관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40-50개 나라와 세계 도처에서 온 인민들이 스페인을 지원하러 갔다. 그들은 스페인 인민들의 편을 들어 스페인에서 싸우기로 결정했다.

파시즘이 스페인에서 중단되지 않는다면, 자신의 나라에도 역시 전쟁과 파시즘이 도래할 수 있다는 깨달음이 그들을 스페인 전쟁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의용병들은 또한 자신의 가족과 미래, 평화와 자유에 관심을 가졌다.

영국에서 온 사람들에 대한 몇 마디 하겠다. 우리는 영국의 다른 지역들은 말할 것도 없고, 영연방에서 온 사람들을 포함하여 ‘버탈리언 잉글리스(battalion Ingles, 영국대대)’라고 불렸다. 마드리드 방어 전투에서 버탈리언 잉글리스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나중에, 1937년 2월 12-14일 사이에, 자라마(Jarama)6)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 독일인들과 이탈리아인들과 거대한 무장 군대를 저지 -저지하는 일을 했다. 4일간 전투가 벌어졌다. 우리의 16%는 사망했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부상했다. 그러나 적군은 통과하지 못했다. 그들은 통과하지 못했다. 우리가 싸운 최초의 전투이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그 날을 떠올린다. 우리는 스페인 공화국의 나머지 지역으로부터 마드리드를 에워싸고 봉쇄하려는 프랑코의 시도를 중단시켰다. 나는 국제여단의 이탈리아 대대, 가리발디 대대를 여기서 언급하고 싶다. – 그들은 무쏠리니 군대를 두들겨 부셔버렸다!

스페인 인민들의 영웅적 행동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가 없었다. 철도 차량이 아주 부족해서 마드리드에서 온 투사들은 전선에 가기 위해 전차를 이용하고는 했다. 압도적인 적에 그렇게 오랫동안 버텼던 그들의 역량은 정의로운 대의를 위한 투쟁을 위해 단결했을 때 인민의 힘에 대한 소중한 교훈을 준다.

 

로치의 영화

 

켄 로치의 영화로 되돌아가기 위해, 그의 영화에 대해서 내가 당시에 가장 중요한 전선에서의 사건들은 아마 마드리드 전선에서 발생했다고 말했던 모든 것은 분명하다.

그는 왜 그것에 대한 영화를 만들지 않았을까? 그는 왜 독일 포탄들이 그들 주변에 떨어질 때 마드리드 인민의 특별한 영웅주의를 묘사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만들 가치가 있는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대신에 켄 로치 감독은 결정적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아라곤7)에 있는 먼 마을로 갔다. 스페인의 일부 지역에서의 사건들은 바르셀로나 주위에서 벌어졌다. 바르셀로나에서, 파시스트 장군들이 공화국에 맞서는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인민들은 막사를 부수고 도시를 장악했다. 거점을 확보했기 때문에 그들은 프랑코 진격군과 싸우는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바르셀로나에서 나가야 했다. 그러나 아나키스트와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POUM)8) 영향력 때문에 그들은 이것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전혀 싸우지 않았다. 로치는 사실상, 중단된 전선에서 무엇이 있었는지를 영화로 만들기로 결정했다. 바르셀로나를 점령했을 때의 사건들이 영화에서 묘사되는 동안, 프랑코는 마드리드를 점령하기 위해 북쪽으로 행진하고 있었고, 나찌는 2차 세계대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찌는 일반 주민들에 대한 대량 폭격의 효과를 측정해볼 요량으로 게르니카9)를 폭격하고 있었다. 당신은 이 영화를 보는 것을 통해서는 그것을 결코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맥락에서 영화에서 묘사된 사건들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무자비한 전투가 다른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동안, 바르셀로나에서 그들은 싸움을 중단하고 집산화를 개시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규율 바른 군대를 조직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우선적인 필요성을 이해하지 않았다. 솔직히 집산화에 관하여 논쟁이 진행되는 장면은 진군 초기에 프랑코가 없애 버렸던 스페인 남부의 집산화된 소작농들의 운명을 기억할 때 아주 비통하다. 그 장소에 어울리는 것은 프랑코를 저지시키기 위한 것이었고, 만약 그를 저지하지 못한다면 집산화에 관하여 진행되었던 모든 논쟁이 헛된 것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켄 로치는 그의 아이디어를 어디에서 얻었는가?

 

국제여단에서 싸우기 위해 2,400여 명이 영국에서 스페인으로 갔다. 불간섭 협정 때문에 싸우러 스페인에 가는 것은 그 당시에 불법이었다. 스페인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여권 없이 파리로 가서 거기에서 스페인으로 가는 것이었다. 이것이 불법이었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영국인들이 스페인으로 싸우러 갔는지를 아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대략의 수는 2,400이다. 이들 중 526명이 사망했다. 이들은 누구인가? 초기에 그들은 주로 히틀러가 책들을 불태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파시즘이 문화에 위협이라는 것을 깨달은 작가들과 예술가들이었다. 이 사람들은 또한 영국에서 나오고 스페인에 도착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나중에 광부, 항만 노동자들, 그리고 일반적으로 영국 산업 노동자의 핵심층이 스페인으로 나갔다. 그들은 영국 제국주의와 싸웠던 사람들과 합류했다. – 키프로스 출신 27명 중 거의 절반과 아일랜드 공화국 출신 120명이 사망했다. 간호사와 의사들은 스페인 인민이 원하는 정부 종류에 관해 결심할 수 있도록 하기 전에 먼저 파시즘을 먼저 물리쳐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스페인에 갔다. 사회주의 혁명은 그 순간에 그들의 의제가 아니었다.10) 따라서, 켄 로치는 이 문제를 혼동했고, 그의 영화는 현실과는 관계가 없다. 이것이 왜 진정한 영화를 상영해야만 하는지 이유다.

 

스페인 사람들은 왜 패배했는가?

 

가장 큰 이유는 ‘불간섭’의 정책을 강제하는 사람들이었다. 스페인을 구하라&평화를 구하라는 우리의 슬로건은 옳았다. 만약 영국 정부가 스페인 공화국을 도왔다면, 만약 운동이 파시스트들을 격퇴시킬 만큼 강했다면 2차 대전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로치의 또 다른 중상모략은 쏘련의 역할과 같은 것이다. 쏘련은 평화를 원했다. 그러므로, 잠시 동안, 그들은 ‘불간섭’의 실제를 볼 때까지 ‘불간섭’을 따랐고, 그 결과 그들은 스페인의 평화 애호 인민, 민주주의에 대하여 책임감을 가지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무기와 식량의 형태로 도움을 주었고, 스페인 인민들에게 가능한 모든 도움을 주었다.

스페인에 갔던 쏘련 인민의 역할은 무엇이었는가? 켄 로치는 그들이 스딸린의 지시에 따라 행동하는 살인자들이었다고 말한다. 글쎄, 나는 쏘련의 대전차포를 지급받았다. 쏘련 교관은 그것으로 무엇을 할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우리는 쏘련 소총을 받았고 그는 그 사용법을 우리에게 가르쳤다. 프랑코를 지원하는데 참여하고 있는 독일 비행기들을 독일 비행사들이 조종하는 동안, 쏘련 강사는 공군으로서 스페인 청년들을 가르쳤다. 다른 사람들은 탱크 운전하는 것을 배웠다.

또한 쏘련은 스페인을 도운 후 큰 손실을 입었다. 쏘련의 배들은 이탈리아 비행기에게 폭격 당했고 독일 잠수함에 의해 침몰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실제로 쏘련이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를 깨닫지 않고, 쏘련이 더 많은 일을 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쏘련이 보냈던 많은 것들은 독일과 이탈리아 파시스트들뿐만 아니라 프랑스 같은 ‘불간섭’ 활동, 프랑스 영토를 건너 스페인으로 향하는 지원물품들을 방해하는 사람들 때문에 그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했다. 내 의견으로는 쏘련은 그 당시 특정한 조건에서 인력으로 가능했던 모든 것을 했다.

왜 로치는 그런 영화를 만들기 위해 상당히 많은 돈을 받아왔는가? 왜 오웰은 훌륭한 작가인 것처럼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가? 그것은 오직 제국주의 국가의 지배 그룹이 파시즘에 대한 인민들의 경계를 더 낮추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만약 여러분들이 파시즘과 싸우게 된다면 여러분들이 그때 싸우는 것이 파시즘이라는 것을 깨달아야만 한다. 만약에 그것이 피할 수 있는 것이라면 여러분들은 동시에 여러 전투를 하지 않아도 된다.

스페인 내전의 두 번째 교훈은 여러분들이 패배할 가능성이 있는 경우에도 싸워야만 한다는 것이다. 여러분들은 패배할 수 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파시즘의 초기 징후에 맞서 투쟁하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은 확실히 패배하게 될 것이다.

 

편집자 주

 

1) http://www.mltranslations.org/

Lalkar, 맑스레닌주의영국공산당(CPGB-ML), 1996년 3월/4월[Lalkar는 런던에 본부를 둔 격월 정치잡지이다. ‘lalkar’라는 단어는 펀자브어(인도 북서부에서 파키스탄 북부에 걸친 지역)로 ‘도전’을 의미하고 ‘lal kar’ 표현은 ‘붉은 노동’을 의미한다. 예전의 인도 노동 연맹의 공식 매체, 그것은 지금 (맑스 – 레닌주의) 영국 공산당 의장인 하르팔 브라르(Harpal Brar)에 의해 발행되는 독립적인 맑스-레닌주의 잡지이다.]

2) 정치적으로 우익임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3) ‘배신 잘하는 영국’, ‘못 믿을 영국’ 같은 의미다. 고대 그리스 당시로부터 시작해서 프랑스 등 대륙에서 현재 영국을 경멸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특히 국제관계에서 외교적 술책과 이중적인 모호함을 보이는 태도를 일컫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4) 영국은 스페인 전쟁에 대한 ‘불간섭’ 입장을 취했으나, 이는 중립적인 입장이 아니라 독일, 이탈리아 파시스트 국가가 프랑코 파시스트를 지원하기 위해 스페인 내전에 개입하는 것을 용인하는 위선적이고 이중적인 ‘불간섭’이었다.

5) 스페인 남단의 항구 도시

6) 자라마는 스페인 한 가운데에 있는 강이다.

7) 스페인 북동부의 프랑스와의 국경 지방.

8) 트로츠키주의 정치세력이다.

9) 스페인 내전이 발발한 이듬해인 1937년 4월 26일 오후 4시 30분경, 히틀러는 바스크 지방의 한 작은 마을인 게르니카에 엄청난 양의 폭탄을 무차별 투하했다. 이틀에 걸친 무차별적인 폭탄 투하로 게르니카는 마을 전체가 잿더미가 되었고 1,500명 이상이 사망하고 인구의 3분의 2가 사망하거나 부상당했다. 히틀러가 게르니카를 무차별 폭격했던 것은 직접적으로 군사적 전투 목적이 아니라 신형 비행기 성능을 시험해보기 위해서였다. 파블로 피카소는 <게르니카>(1937년)라는 그림을 그려 나찌의 만행을 고발했다.

10) 스페인 내전에서 노동자와 인민들의 당면한 과제는 프랑코 파시스트 독재와 맞서 싸우는 것이었다. 게다가 일부 대토지 소유자들의 몰수 토지를 국유화하는 것을 제외하면 대다수 스페인 자영농들에게는 토지 집산화가 아니라, 토지 분배가 우선적으로 취해져야할 조치였다. 쏘련에서도 대대적인 토지 집산화는 혁명 이후 10여 년이 지나서야 가능했다. 항상 그러했지만, 트로츠키주의자들은 혁명의 발전 단계를 건너 띄려 했다. 이것이 역사에서 트로츠키주의자들의 모험주의와 기회주의의 숱한 오류를 범하는 주요한 이유 중 하나다. 켄 로치는 트로츠키주의자 조지 오웰의 소설 <카탈로니아 찬가>를 바탕으로, 트로츠키주의자의 눈으로 스페인 내전을 왜곡해서 바라보는 영화를 만들었던 것이고, 한국사회에서도 이 책과 영화과 스페인 내전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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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특집1 국제여단은 ‘랜드 앤 프리덤’을 규탄한다”의 1개의 생각

  • 2016년 10월 14일 12:25 오전
    Permalink

    네? 제국주의요? 바르셀로나 5월 사건을 일으킨 공산주의가 할 말이 아닐텐데 그리고 오히려 제국주의와 가까웠던건 공산주의이죠 레닌은 의회를 페지시키고 투표가 농민들은 마음을 대변시키지 않는다면서 말도 안되는 논리로 독재를 정당화 했고 스탈린? 그 숙청의 대왕? 무슨말이 필요할까요? 그리고 스탈린 깐다고 무조건 부르주아편? 개소리 마시죠 그것은 아주 저질스론 논리인 흑백논리입니다 오히려 아나키즘은 사회주의를 지지했습니다 자본주의가 아니라 근데 사회주의에다가 반권위주의가 추가된것이죠 그래서 스탈린을 깐 것이고요 그리고 아나키즘에 대해 잘모르시는 군요 아나키즘은 제국주의와 상관이 없 아니 그 반대입니다.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의 개념만 알아도 이런 개소리는 나오지 않을텐데 말이죠 왜냐구요? 그 개념이 아나키즘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서로 돕는다 이것이 아나키즘의 제1조입니다. 제국주의처럼 침략과 수탈이 아니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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