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2 스페인 내전의 역사

특집2

스페인 내전의 역사1)

스페인내전1

 

 

  1. 스페인은 파시즘에 대항하는 우리의 민족전쟁의 교훈으로부터 배워야 한다

 

스페인 내전은 스페인 인민의 혁명적 진군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과거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방식으로 더 이상 분류할 수 없는, 그것은 러시아 10월 혁명에 의한 시작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시대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것은 상상할 수 없는 수준으로 스페인 인민의 혁명 의식을 불러일으켰고 전 세계에 모범이 되었다.

스페인에서 파시즘의 승리는 한 동안 사회주의로의 진군에 걸림돌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일시적일 뿐이다. 따라서 레닌, 스탈린과 마오쩌둥이 제시한 혁명적 진로를 다시 한 번 배울 수 있도록, 당의 업적과 실패를 철저하게 연구해야 한다. 수정주의자들은 스페인 인민 대중의 패배와 당의 오류 원인에 대해 결코 비판적인 분석을 하지 않았다. 정반대로, 그들은 이 패배에 대한 자신들의 수많은 책임을 숨기고 당을 면책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그 당시에 분명하게 당의 규모나 영향력을 감안할 수 있기에, 당은 상당 부분의 책임을 져야만 한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을 하는 것이, 우리가 당의 위대한 업적을 손상시키려 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스페인 공산당은 “내전에 참가한 모든 정당들 중 가장 영웅적이고 희생적인 전쟁의 영웅”이었기 때문이다. 스페인 인민에 대한 당의 지도력과 지원이 없었다면 (내전은) 몇 주 내에 진압 당했을 것이고 파시스트에게 그렇게 막대한 손실을 입힐 수 없었을 것이다.

마오쩌둥은 객관적인 조건이 바로 자동적으로 승리를 보증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거기에 더해 필요한 것은 인간의 의식적인 행동 -즉, 어떻게 전쟁이 지도되고 수행되는 지이다. 파시즘에 맞서는 우리의 민족전쟁은 본래 정당한 전쟁이었다. 인민전선은 인민 대중의 압도적인 지지를 확보하고 있었다. 국제적 상황이 “불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유로도 그 정도로 연대가 발휘된 적은 결코 없었다. 그럼에도 그 전쟁은 승리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당의 의식적 활동이 지도의 오류, 즉 그 전쟁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올바른 방식을 인식하지 못했다는 타당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수정주의자들은 그 전쟁이 잊어야하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그 전쟁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묵살하기 때문에 올바르지 않은 해석이다. 왜 이렇게 단언할 수 있겠는가? 그 전쟁을 불러온 원인들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모순은 더 첨예해졌다. 외국 침략자들이 여전히 우리의 국토를 점령하고 있고 인민들이 여전히 파시즘의 멍에를 메고 있는데 수정주의자들이 그러는 것처럼, 어떻게 “평화와 국민적 화해”를 말할 수 있는가? 1939년에 프랑코는 나라를 파시즘에 팔아 넘겼다. 지금 스페인은 미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저당 잡혀 있다.

정말로, 수정주의자들이 말하는 스페인의 “자유화와”와 “민주화”는 착각이다. 옷은 새로울지 모르지만, 그 안의 몸은 여전히 같다. 더욱이, 국제적 힘의 관계가 변화했다는 사실은 프랑코와 파시즘이 평화적인 방식으로 물러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늘날 스페인 공산당의 과제는 프랑코에 맞서서 모든 스페인 인민 계급들을 단결시키고 프랑코와 제국주의 후원자에 맞서 무장 투쟁을 이끄는 것이다.

 

  1. 1931년에서 1936년까지 스페인 정치 상황

 

서유럽 대다수 다른 나라들과 달리, 스페인 부르주아 계급은 결코 부르주아 혁명을 완수하지 않았다. 스페인의 경제적, 사회적 생활의 주요 부문은 봉건 계급들의 통제 하에 남아 있었다. 그 결과 19세기 전체 내내 생산력 진보와 발전은 거의 다 봉쇄됐다. 이것이 1931년까지의 대략적인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해 4월 13일 왕정이 전복당하고 제2공화정이 선포되면서 금융과 토지 소유 올리가르히(독점체)와 인민 세력 사이에 화해할 수 없는 모순이 극도로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유약하고 우유부단한 부르주아 계급은 사회적 진보를 보장하는데 필요한 결정적인 조치들을 취하는데 실패했다.

지배계급들의 경제적, 정치적 특권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군대의 핵심 지위는 반동 세력의 수중에 남아 있었다. 1932년에 단행됐던 농업 개혁은 지극히 소극적이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이 기간 동안에 노동자 계급은 사회 민주주의와 무정부주의 경향들 사이에 크게 분열되었다. 공산당은 그 당시에 노동운동의 지도력을 내세울 정도로 충분하게 강력하지 않았다.

1933년 “암흑의 2년”(Bienio Negro)라고 알려진 난폭한 억압과 테러 활동을 거침없이 자행하면서 반동 세력은 다시 권력을 잡았다. 1934년 10월 특히 아스투리아스(Asturias),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서 정부에 반대하는 대중적 봉기가 확산되었다. 이 시기에 강력한 공산주의자들의 지원과 참여로 인민전선이 형성되었다. 1936년 선거에서, 반동 세력은 압도적인 패배를 당했다. 그러나 노동자 계급 내부의 분열로 인해, 새 정부는 여전히 내용과 형식에서 기본적으로 부르주아 계급의 것이었다. 그리고 예상했던 것처럼, 그 정부는 유약하고 우유부단했다. 그러나 그 정부의 치명적 실수는 반동 세력들이 두 손 놓고 투표에서의 패배를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공산당의 거듭되는 경고를 묵살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프랑코가 1936년 7월 18일 공격을 감행했을 때, 민중들은 그 공격에 아무런 대응 태세를 갖추지 못했다.

 

 

III. 파시즘에 대항하는 전민 혁명전쟁과 동맹당의 정책

 

공화정부에 대한 공격으로, 스페인 내전의 성격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성격으로 변화했다. 그리고 인민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유일한 정당이 스페인 공산당(SPC)이었기 때문에 이 순간부터 공산당은 가장 중요한 정당이 되었다. 민중 저항 초기에 인민전선을 강화하는 당 노선은 기본적으로 정당했다. 그리고 이 올바른 노선 때문에, 당은 빠르게 명성과 힘을 얻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당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단결을 이루려고 노력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을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실패의 이유는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당의 주요한 오류는 다음과 같다.

 

 

  1. 공화정 합법주의에 대한 스스로의 족쇄와 대중들 사이에서 생겨나는 새로운 권력 형태를 이용하지 못함

전쟁 초기에, 공화국 권력의 엄청난 원자화가 있었다. 각 당은 각자의 권력기관을 가지고 있었고, 각 지방은 사실상 자치적이었다. 서류상으로는 모두 인민전선의 사법권 아래 있었다. 그러나 그 문제의 진실은 이들 정부가 거의 권위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당은 단일한 전선에 대한 필요성과 정부와 프랑코에게 저항하는 데 참가한 서로 다른 집단들과 계급들의 이해 사이의 모순을 해결할 수 없었다. 인민혁명위원회 같은, 새로운 대중권력 형태는 자발적으로 생겨났다.

당은 그 기구들의 발전을 추동시키고 당의 지도력 하에 그 기구들을 통일시키는 것을 추구해야 했다. 그렇지만 쁘띠-부르주아 계급의 “합법성” 위반의 두려움 때문에 당은 공화국의 낡은 기관에 속박되었다. 당은 인민전선을 통해 모든 것을 다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마오쩌둥이 통일전선 내부에서 독자성과 주도성의 문제를 지적한 것처럼, 당은 이동하기 전에 전선에 먼저 상의를 할 때가 있고 먼저 이동하고 나중에 전선에 알려야 할 때가 있다.

대중적 권력 형태에 대한 이러한 무시의 사례는 마드리드 방어위원회(the Junta de Defensa de Madrid)의 경우이다. 그 위원회는 파시스트들로부터 마드리드를 방어할 급박한 필요 때문에 만들어졌다. 위원회의 행동의 정확성에 대해 동맹세력들과의 상의하지 않고, 당은 신속하게 파시스트들을 물리칠 수 있는 강력한 대중 권력을 사용했다. 당에 의해 행해진 이러한 움직임 없었다면 마드리드에서의 저항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당은 대중권력의 이러한 최고의 발현으로부터 올바른 교훈을 이끌어낼 수 없었다.

문서상 표현으로는, “그들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우리에게 허용되어야만 하고 실천적인 생활과 당 지도력 하의 대중적인 혁명 대중들이 창조해낸 것으로부터 끌어낸 미래의 정치 구조의 핵심을 위원회로부터 보지 않고, 고립된 사건으로써 그것을 간주했다. 이러한 사례를 포착하는 대신에, 스페인 전역의 당을 통해 이러한 경험을 확장하는 대신, 쁘띠-부르주아 계급 권력의 두려움 때문에, 당은 전례가 없었던 진정한 대중 권력 형태를 인민들에게 박탈함으로써 그 위원회를 소멸될 정도까지 방치했다.” 였다.

 

 

  1. 인민전선 내에서의 독립성의 상실

단결의 기관으로서의 통일전선이라는 당의 사상은 당의 과업인 혁명을 지도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정확하다. 그러나 이러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인민전선이 되려면, 당은 노동자 계급에 의해 지도되어야만 하고 인민전선은 주로 쁘띠-부르주아 계급 세력들의 혼합물이었기 때문에 노동자 계급이 지도하는 공산당은 그것을 통해 모든 일을 수행할 의무가 없었다. 공산당은 자신의 역할을 명확하게 인식하지 않았다. 이것은 부르주아 민주주의라기보다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진정한 본질을 이해하기 위한 당의 역할에 대한 실패로써 설명되어질 수 있을 뿐이다. 호세 디아즈2)와 진정한 맑스-레닌주의 분자들은 이해했지만, 불행하게도, 그들은 이바루리(Ibarruri)와 까릴로(Carrillo)가 이끄는 우익 분자들과의 당내 투쟁에서 패배했다.

 

 

  1. 노동자 계급의 단결을 달성하고 통일 프롤레타리아 당을 건설하는데 실패

위의 두 가지 지점으로부터 노동자 계급의 단결의 부족이 혁명 세력들의 패배의 주요한 원인들 중 하나라고 결론을 끌어낼 수 있다. 전쟁 초기 국면에서 달성됐던 일시적인 단결은 상반된 이해관계의 압력 하에 곧바로 해체됐다. 노동자 계급이 사회 민주주의와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세력인 아나키스트의 사상 같은 많은 비프롤레타리아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진실이었다.

스페인 공산당의 엄청난 신망과 권위에도 불구하고, 당은 결코 성공적으로 이들 세력들의 수중으로부터 노동운동에 대한 통제를 빼앗아 오지 못했다. 또 다시 동맹 세력들에 대한 잘못된 노선 때문에 이것이 실패했다. 내용 보다는 형식적인 단결을 유지하기 위하여, 스페인노동총동맹(UGT)과 전국노동자연맹(CNT, anarchist Confederación Nacional del Trabajo)3) 같은 두 개의 커다란 노동조합 연맹에 대해 무원칙한 양보를 했다. 단결은 경쟁하는 정당들의 상급 지도자들 사이에서 보다는 투쟁과 이데올로기 논쟁을 통해 단결의 기초를 쌓아야만 한다. 그러나 이바루리의 저서인 <오직 한 길(El Unico Camino)>에서 그녀는 공산주의자들이 금지된 그것(편집자: 내부 투쟁과 이데올로기 논쟁)을 하기 보다는 차라리 (편집자: 공산주의 사상을) 전파시키는데 관여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모든 공산주의자들의 임무가 되어야만 했다는 원칙을 주장했다.

 

 

  1. 적절한 시기에 인민위원회를 강력하게 요청하지 못함

 

당은 대중들이 스스로의 주도성을 발전시키게 하고 자신들 이해의 진정한 대행자를 정부 내에서 인식하게끔 하기 위하여 민주주의 중앙집중제 원칙이 지속되도록 했어야 했다. 그러나 전쟁 내내 “권력 기구는 파시스트 반란에 앞서 인민전선에 존재하는 권력관계에 기반을 두고 있었었는데, 그 권력관계는 그 사이에 격심한 변화를 겪었다. 인민 대중들은 정부에서 인민을 올바르게 대변하고 권력 기구와 일체화 되고 더 밀접하게 관계를 맺기 위하여 위원회를 가졌어야 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이 상태는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전쟁 내내, 대다수 스페인 의회(Cortes) 의원들은 1936년 2월에 선출되었던 의원들 그대로였다.

 

 

  1. 쁘띠 부르주아 계급 뒤를 따라감

 

전쟁 동안 당 활동을 살펴보면, 당은 결코 투쟁의 선두에 서게 될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필요성을 사실상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은 쁘띠-부르주아 계급과 중간 부르주아 계급의 진보적 부위와 나란히 있으려고 노력했을 뿐이다. 그리하여 당이 그저 뒤를 따라가는 동안 이러한 모든 비 프롤레타리아 부위들이 실제로 당을 이끌었던 일이 벌어졌다.

이러한 정책을 보여주는 다음의 사례들을 들 수 있다.

공화정에 참여하는 것에 대한 당의 주저. 결국은 받아들였지만 -교육과 농업부 장관 같은 두 장관직의 중요성에 대한 부족. 군대 내에서 지도적 지위를 떠맡게 되는 것을 주저. 프리에토(Prieto)4)에 의한 인민전선 군대의 정치적 색채를 없애는 것의 수용. 그리고 마침내 투쟁의 마지막 시기에 전체 권력을 잡는 것을 주저.

이 점을 압축적으로 정리하는 데에, 다음 문서가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특정하게 존경할만하고 칭찬해야할 사람이 있다는 예외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말해, ‘진보적부르주아 계급은 프롤레타리아에게 지도력을 넘기기 보다는 차라리 파시즘의 위협에 직면할 때에 타협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준다. 파시스트 침공과 대학살 직후에 파시즘과 싸우는 이들 계급들의 일부가 그랬다. 그리고 나중에 그들은 프롤레타리아 대중을 배신하고 제국주의에 항복했다. 이것은 우리가 잊을 수 없는 풍부한 내용을 가지고 있는 역사의 교훈이다.”

 

 

  1. 후위를 버리다, 그러나 동시에 인민의 군대를 통제하지 못하고 당의 통제 하에 무장력을 배치하지 못함

 

인민전선 군대 내에서 공산당의 역할은 지대했다. – 군대 내의 거의 절반이 공산주의자들과 동조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공산당은 후위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당에 의해 유지되는 후위 없이는 인민전선이 지탱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많은 수의 공산주의자들이 인민전선 군대 내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군은 항상 확실히 동요하는 부르주아 계급의 수중에 있었다. 그리하여 당은 후위를 없애고 군 통제력을 확보하지 못하는 이중의 오류를 저질렀다. 그리고 더 심각한 것은, 공산주의자들이 조직하고 주로 공산주의자들로 구성되어 있는 제5연대가 공화국 군대의 지도하에 무조건적으로 놓여 있었다는 것이었다.

 

 

  1. 이른바 서구 민주주의자들에 의존

국제적 동맹에 대한 공화정 정책은 우유부단했다. 한편으로는 국제적 연대를 추구하고 쏘련과 긴밀한 연계를 가지는 올바른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원조를 제공하지 않으려 했을 뿐만 아니라 냉소적이고 프랑코에게 위선적으로 원조를 제공하는 국가들한테도 원조를 구걸했다. 또한 공화정과 당이 “불개입” 정책을 비난하는 동안, 그들은 서구 “민주주의국가들”, 특히 프랑스에 의존하는 어리석은 행위를 하는 인민 대중에게 주의를 환기시키지 못했다.

 

 

  1. 정부 참여

 

공화정 내에서 당의 역할은 확실히 긍정적이었다. 예를 들어, 농업장관인 비센테 우리베(Vicente Uribe)는 토지 개혁 같은 공화정의 가장 혁명적인 활동 중의 하나를 지도했다. 게다가, 에르난데스(Hernandez) 하에서 교육장관은 문맹 퇴치 운동 같은 중요한 교육 계획과 개혁을 실시했다.

그러나 라르고 카바예로(Largo Caballer)5)의 강력한 요청이 있고 나서야 공산당은 마침내 정부 참여를 동의했을 뿐이다. 그리고 전쟁 내내 당은 하위 중 하나의 역할을 수행했다. 오늘날 수정주의자들은 “공명정대”와 “숭고한 시야”의 증거라고 하면서 이러한 머뭇거림을 미덕으로 만들려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그것은 실제로는 “이러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시대에 당의 역할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무지”였다. 전쟁에서 자신들의 역할에 대한 평가에서 수정주의자들은 그들이 기꺼이 다시 같은 일을 할 것이라고 현재 스페인 부르주아 계급에게 말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유감스럽게도, 새로운 (맑스-레닌주의) 스페인 공산당과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앞으로는 당이 오직 지도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지금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1937년 봄 바르셀로나에서 아나키스트-트로츠키주의자들(anarchist-Trotskyite)의 반란은 동맹세력들에게 누가 되지 않고 공화정에서 당의 참여를 강화하는 최고의 기회를 당에게 제공했다. 그러나 카바예로 정부가 실각했을 때조차도, 당은 부차적인 역할을 중단하고 그림자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에도 불구하고 당은 대중들을 동원하고 반혁명을 패퇴시키는데 충분하게 강력한 유일한 당이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카탈루냐(Catalonia)6) 지방의 붕괴 직후, 호세 디아즈가 거듭 주장했듯이, 당은 전체 정부 기구를 장악할 수 있었고 끝까지 저항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민전선의 공식적 단결을 위해, 당은 항복에 동의했다. 그러는 동안, 당은 “단결의 목적은 파시즘과 외국 침략자들에 맞서 투쟁하는 것이고 항복하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을 망각했다. 그 순간에 당은 쓸모없고 지금은 낡은 동맹 세력들을 변화시켰어야했고, 모든 동요하는 분자들을 없애고 가장 전투적이고 신뢰받고 있는 투사들에게 의존하는 것으로, 인민 대중들 사이에서 당의 드높은 신망에 맞게 지배적인 역할을 떠맡았어야 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했으면 당은 반파시스트 세력들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았을 것이고 그것을 강화시켰을 것이다.

 

 

  1. 전략, 전술, 무장 병력에의 참여

 

객관적 견지에서 말하면, 군사적 승리를 위한 조건은 좋았다. 그러므로 패배의 원인은 다음과 같이 분석된 특정한 주체적 오류들에서 찾아야만 한다.

 

 

  1. 전쟁과 당 전략의 성격

 

전쟁에서 싸우는데 있어서 정확한 전략은 조성된 객관적인 조건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이 없이 결정될 수 없다. 당은 이것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당은 고전적이고 진지전 같이 적들에게 유리한 전쟁 유형을 선택했다. 반대로, 인민전쟁은 운동에 기반을 두고 적들의 후위에서 게릴라전과 결합한 섬멸전과 같은 통상적으로 하위의 기술을 조화하는 전략을 채택해야 한다. 당은 1808년 스페인에서 나폴레옹에 맞서는 인민 전쟁의 풍부한 경험 그 자체를 유용하지 않았다.

군대로부터 이에 대한 승인은 결코 준비되지 않았다. 항복 이후에, 대다수 무장력들은 서둘러서 프랑스로 갔다. 이점에서, 게릴라 저항은 조직되지 않았다. 군대는 남중부 지역으로 일종의 전략적 후퇴를 시도할 수 있었다. 어쨌든, 프랑스로의 퇴각은 혁명적인 전망이 없는 이동이었고 인민 내에서 신념의 부족을 보여주었다.

더욱이, 만일 전쟁 동안에 인민군대의 군사 활동을 분석해보면, 당은 전쟁 초 두 달 동안을 제외하면 결코 주도성을 잡으려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이른바 대부분의 공세적 시기에도 강력한 적들의 압력에 대해서만 대응을 했다. 당은 인민군대가 공격의 시기뿐만 아니라 심지어 후퇴의 시기에도 항상 주도성을 유지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과달라하라(Guadalajara)7)에서는 방어적인 전술과 진지전은 폐기되었고 유연한 운동 전술이 적용되었을 때, 인민군대는 적들을 놀라게 하고 패퇴시켰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충분한 예비병력이 승리하는데 전적인 우위를 제공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그 순간에 올바르게 전술을 적용했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인 전략에서 어떠한 변화도 가져오지 않는다.

수정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반대로, 에브로 강(Ebro) 전투는 승리가 아니었다. 그 전투는 “몰락의 시작”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당할 지도 모른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먼저, 인민군대는 전투 초기에 사실상 주도성을 상실했고 지속적으로 세력권을 방어했다. 두 번째, 당의 모든 주요한 세력들은 한 번은 전멸되었고 저항선은 붕괴됐던 이 전투에 집중했다. 발렌시아(Valencia)8)는 잠시 구했지만, 인민군대의 정예부대는 파괴됐다. 객관적으로 적 군대의 가능한 최대 병력이 파괴되어야 했고, 그 전투 후에 적들은 퇴각했어야 했다.

 

 

  1. 군대와 관련한 정책

 

인민군대를 만들어내는 정책은 정확했다. 이것은 항상 당의 위대한 업적 중의 하나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리고 당의 강조와 사전 정부 승인 없이 만들어졌던 제5연대는 이 군대의 중핵이 되었다. 그러나 이 군대를 만들어내기 위한 열망은 당이 무원칙한 양보를 하도록 했다. 제5연대는 절대적으로 공화정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더욱이, 당은 인민군대에서의 전사들의 절반 이상이 공산주의자들이거나 통일사회주의청년(United Socialist Youth) 성원이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핵심 군대 요직에서 공산주의자들을 배제하는 정부 정책에 저항하지 못했다.

전쟁장관으로서 인달레시오 프리에토(Indalecio Prieto)는 인민군대의 혁명적 정신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일을 했고 당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많은 반공산주의 조치를 시행했다. 그는 대중행동에 군대의 참가를 금지시켰고 정치인민위원을 관료화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심지어 적의 노선 전체에 대한 정치 선전(propaganda)의 보급을 금지시켰다.

 

요약하면, 군대와 관련한 당의 주요한 오류들은 다음과 같다.

 

전쟁 유형에 대한 잘못된 개념과 그에 따른 잘못된 전략 및 전술의 적용.

 

인민 혁명전쟁에서 게릴라전의 전략적 중요성에 대한 이해 부족.

 

군대에서 반역 활동과 요소들에 직면하여 동요.

 

군대에서 주요한 지위를 통제하는 것의 실패와 부르주아 계급에게 당 자신의 권력을 인계.

 

카탈루냐의 붕괴 이후 인민 무장투쟁을 조직하는 데에 실패.

 

프랑스로 가는 피레네 산맥(Pyrenees)으로 퇴각하도록 하는 거대한 인민군대의 계획의 승인.

 

편집자 주

 

1) http://www.mltranslations.org/Spain/civilwar.htm

이 기사는 맑스-레닌주의 스페인 공산당, 노동자 전위(Vanguardia Obrera), 1969, 마드리드 판(版)(Ediciones)에 의한 “1936-1969년, 파시즘에 대항하는 우리의 전민적 혁명전쟁으로부터의 교훈”의 번역이다.

2) 스페인 내전 당시의 스페인 공산당 서기장

3) 각각 사회당과 아나키스트 영향 하에 있는 두 대중조직

4) 아나키즘 경향의 스페인사회주의노동자당(PSOE) 지도자로 1936년 내전 초기에 해군공군 장관이었다.

5) 스페인 사회주의노동자당 지도자이자 1936년-1937년까지 공화정 수상

6) 스페인 북동쪽 끝과 프랑스·지중해에 인접한 지방

7) 스페인 중동부의 주

8) 스페인 동부의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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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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