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미국에 묻다》 서평: 미국은 왜 제주 4.3 학살에 막중한 책임이 있는가?

김남기(《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역사의 진실》 저자)

 

1948년 4월 3일 한라산을 중심으로 유격대의 봉화가 타올랐다. 4월 3일에 시작된 봉화는 1954년 9월 21일 제주경찰국장 신상묵의 명의로 포고문을 발표하며 한라산에 내려진 금족령이 해제되면서 공식적으로 끝났다.

1948년 4월 3일에 시작된 봉기는 결과적으로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진압됐고, 그 과정에서 무차별 민간인 학살이 동반됐다. 4.3 사건 당시 목숨을 잃은 사람은 대략 인구의 1/10인 30,000명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추산이다. 현재 북한에서도 30,000명 이상으로 추산하며, 제주 4.3사건 진상보고서도 대략 3만 명 정도로 보고 있다. 지금까지 진상조사로 확인된 사망자만 하더라도 최소 10,000명을 넘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숫자보다 더 높은 사망자 추산도 존재한다. 1949년 당시 제주지사가 미 정보국에 전달한 자료에 따르면, 제주도민의 사망자가 6만 명이라고 나와있다. 『한국전쟁의 기원』으로 유명한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는 2016년 제주4.3평화포럼에서, “보다 최근의 연구 자료에 따르면 제주 4.3으로 8만 명 정도가 사망했다는 추정치도 있다.”고 말했다. 이 두 가지 추산을 종합해보자면, 제주 4.3사건으로 억울하게 학살된 민간인의 숫자는 60,000~80,000명으로 제주도 인구의 1/5에서 1/4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제주도 인구의 4명 중 1명이 1948년과 1949년 사이에 있었던 무차별 학살로 목숨을 잃었다는 얘기다.

위에서 보는 것과 같이 제주 4.3사건은 명명백백하게 국가가 국민에게 무차별 적으로 행한 제노사이드에 해당한다. 호로위츠에 따르면, 제노사이드라는 개념은 “국가기구에 의해 무고한 사람들을 구조적이고 체계적으로 파괴하는 것”을 의미한다. 호로위츠가 규정한 정의를 고려해서 보자면, 제주 4.3사건 당시 발생한 무수히 많은 죽음들은 명명백백히 제노사이드(Genocide)라고 할 수 있다.

과거 전두환 정권 당시가 학창시절인 이들은 단체관람 했던 영화 중 킬링필드(Killing Field)라는 헐리우드 영화를 기억할 것이다. 이 영화는 1970년대 캄보디아의 폴포트 정권에서 일어난 제노사이드를 다룬 영화다. 영화를 보면, 캄보디아인 주인공 디스 프란은 크메르 루주가 세운 강제 수용소를 탈출한 이후 사람들의 시신과 해골로 이루어진 곳을 목격한다. 당시 전두환 정권이 이 영화를 국민들에게 단체 관람하도록 한 목적은 반공주의를 합리화하기 수단이었고, 실제로 이런 영화를 통해, 북한에 대한 대북적대의식을 강화할 수 있었다.

우리 사회는 박정희 시절 ‘똘이장군’이나 헐리우드 영화 ‘킬링필드’를 보며, 반공주의적 의식을 길렀지만, 정작 우리 현대사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지는 오랜 시간 동안 얘기를 하지 못했다. 우리 현대사의 크나큰 비극인 제주 4.3사건도 마찬가지였으며, 피해자들은 반공이라는 어두운 그늘 아래 침묵했다. 결과적으로 한국의 킬링필드라 불려도 손색이 없는 제주 4.3사건이 국민들 사이에서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한 것도, 87년 민주화를 쟁취한 이후이며 수많은 진상조사와 활동들을 통해 현재는 적잖은 국민들이 인식하는 비극의 사건으로 기억되는 자리까지 올랐다고 말 할 수 있다.

나는 제주 4.3사건이 일어난 지 70주년이 되는 2018년에 제주도를 방문했고, 첫날에 제주 4.3 박물관을 가족이랑 함께 들렸다. 당시 제주 4.3에 대해 단편적으로나마 알고 있었지만, 학살의 과정과 잔혹성에 진심으로 분노하고 경악했다. 제주도에서 벌어진 학살의 피해자들 중에는 도저히 남로당 게릴라라고 판단될 수 없는 여성과 노인, 어린이, 심지어 갓난아기까지 있었다. 도저히, 남로당측의 봉기군이라 판단할 수 없는 무고한 민간인들이 제주 4.3의 희생자였다는 점에서 분노를 금할 수 없었다.

학살을 주도한 세력은 미군정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던 대통령 이승만과 초대 경무부장인 조병옥 그리고 미군정과 우익들이 파견한 친일경찰과 서북청년단 대원들이었고, 이들이 바로 제주도 대학살을 주도했다. 제주 4.3사건 당시 파견된 경찰과 우익 청년단 그리고 군대는 말 그대로 제주도라는 섬에서 광란의 학살극을 자행했고, 학살의 피해자는 순전히 제주 민간인들이었다. 심지어 학살 피해자의 80~90%는 이들이 저지른 것이었다.

그러나 제주 4.3사건에는 또 다른 책임자가 존재했다. 『국부론』을 집필한 애덤 스미스의 표현을 빌려 얘기하자면, 제주 4.3사건에는 ‘보이지 않는 손’이 존재했다. 그것은 바로 미국(the United States)이었다. 1948년 제주에서 일어난 대학살에는 소위 미국이라는 존재가 아주 깊숙이 개입해있었다. 허호준의 표현을 빌려 얘기하자면, 제주 4.3사건 관련한 영상물에서는 “상공을 날아다니는 미군 연락기, 미군 함정이 내뿜는 해안의 검은 연기, 낯선 이방인이 산야를 누비며 작전을 진두지휘하는 모습, 그 옆에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두려운 눈빛의 제주사람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말은 미국이라는 존재가 제주 4.3사건에 얼마나 깊이 개입했는지 알 수 있는 근거일 것이다.

1948년 4월 말에서 5월 초 진압군을 지휘한 김익렬과 유격대를 지휘한 김달삼 사이에서 잠시나마 휴전 및 총성을 멈추기 위한 평화협상이 있었다. 물론, 글쓴이는 이 협상이 지켜질 것이었다고 보지는 않지만, 일단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고 했다는 점에선 큰 의의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적 노력을 단번에 산산조각을 내버린 존재가 바로 하지가 이끄는 미군정이었다. 하지 사령관이 제주도에 보낸 브라운 대령은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나의 사명은 오직 진압 뿐이다.”라는 태도로 토벌작전에 임했다. 양측의 협상이 깨진 것도 바로 브라운 소령의 이러한 태도 때문이었다.

제주 4.3을 대하는 미군정과 미국의 태도는 항상 일정했다. “공산주의자들을 뿌리 뽑아야하고, 제주 4.3은 스탈린과 소련 그리고 북한의 사주를 받은 공산주의자들의 적화와 테러를 막기 위한 것”이다. 트루먼 행정부가 창조해낸 냉전이라는 이분법적인 반공주의 사고방식이 결국 제주도를 양민의 시체와 피로 뒤덮인 피바다로 만들어 버렸다. 미국의 이런 반공주의 정책은 제주도 사태를 강경진압을 추진한 이승만이나 우익세력들과 항상 같은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반공주의 국가에 불만을 제기하거나 적응하지 못한 이들을 미국이 어떻게 처리했는지를 아주 명확히 보여준 사건이 바로 제주 4.3사건이었다.

미국은 제주 4.3사건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다. 당시 대통령이던 해리 트루먼은 주한미군사령부와 주한미대사관 등이 본국에 보낸 각종 정보와 보고서를 통해, 제주도에서 어떠한 일이 벌어지는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미 국무부는 제주도에서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하고 있었으며, “제주도에서 일어난 공산반란으로 최소 15,000명 이상이 공산주의자들이 살육되었다.”고 알고 있었다. 트루먼을 포함한 미국 지도부들에게 있어 제주도에서 희생된 사람들은 그저 공산주의자들이었고, 인권이 유린되든 말든 무조건 죽여 마땅한 존재였다.

제주 4.3사건 당시, 미국은 이 사건에 개입하여 진압하는 데에도 아주 열정적이었다. 미국은 제주도에 파견된 경찰과 군대에게 물자와 장비를 지원했다. 심지어 제주도에서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던 극우 테러단체 서북청년단을 경찰과 군대에 편입시키는 것에도 매우 적극적이었다. 또한 유격대를 진압하기 위해 만든 군대 안에도 장교 출신의 미군고문단들이 적잖게 배치됐고, 실제로 이들은 군사작전을 지휘했으며, 진압군이 민간인들을 체포하고 사살하도록 적극적으로 도왔다.

무엇보다, 제주도에 투입된 미군들과 그 미군들을 지휘하는 미군정 및 주한미군사령부 등은 진압군의 무자비한 학살과 진압으로 무고한 민간인들이 죽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강경진압을 막는 그 어떠한 행동에도 착수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러한 학살을 군사작전 상에서 적극 지원하고 도왔다. 그들에게 있어 진압군이 죽이고 체포하는 대상은 공산주의자들일 뿐이며, 이 공산주의자들은 소련과 북한의 지령을 받고 자유민주주의 진영을 파괴하려는 존재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트루먼식 반공의 논리는 공산주의자 민간인은 대량으로 죽여도 된다는 인식을 미군들에게 심어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948년 당시 미군정이 제주 4.3사건을 어떻게 대응했는지, 책에 있는 내용을 보자.

“5.10 선거가 가까워지면서 제주도 사태는 미군정 수뇌부의 직접 개입뿐 아니라 외신을 통해 보도되면서 국제문제로 비화되고 있었다. 딘과 워드의 제주도 동시 방문과 군정 수뇌부의 제주도 현지회의 뒤 미군정은 제주도 사태를 ‘전면적인 유격전(full-scale guerrilla warfare)’으로 보고 진압을 강화했다.”(《4.3, 미국에 묻다》 4.3, 미국에 묻다, 163쪽)

아래는 진압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공공연히 말하던 미군정의 브라운 대령에 대한 책의 내용이다.

“미군정 주도 하에서 전개된 토벌작전의 절정은 제6사단 제20연대장 브라운 대령의 제주도 파견이다. 5.10 선거 실패 이후 경찰의 증강에도 불구하고 무장대의 공세가 수그러들지 않자 미군정은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아시아 대륙을 누볐던 야전군 출신 브라운 대령을 ‘제주도 최고 지휘관’으로 임명해 제주도 작전을 총지휘하도록 했다. 그는 고문관은 물론 제주도 주둔 경비대와 경찰의 작전을 지휘ㆍ통솔하는 명실상부한 제주도 총사령관이었다.”같은 책, 180쪽

2003년에 나온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이승만의 발언도 나온다. 아래 인용된 책의 내용을 보자.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는 “미군도 진압작전에 나섰다. 미군이 어느 정도 작전에 참여했는지는 불확실하나 ‘미 해군이 기항하여 호결과를 냈다’는 이승만의 발언을 통해 미군의 역할을 일부 엿볼 수 있다”라고 분석했다.”(같은 책, 235쪽)

위의 세 가지 인용문만 보더라도 제주 4.3사건에서의 학살에 미군정과 미군 그리고 미국 정부가 크나큰 책임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놀랍게도 미국의 이러한 개입은 1949년에도 지속됐고, 1950년에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미국은 제주 4.3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여순사건을 진압하는 데에도 열정적이었다. 전라남도에 위치한 여수와 순천에서, 진보적 성향의 군인들이 이승만 정부의 무차별 폭력과 제주 4.3학살에 반대해 봉기를 일으켰는데, 미국은 이승만 정부와 더불어, 진압에 아주 열정적이었다. 여순사건은 군사고문단이 채택한 시스템에 대한 하나의 ‘시험무대’였는데, 한국군이라는 파트너에게 적절히 충고와 자문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줬다. 즉, 미국은 이 여순사건에 아주 깊숙이 개입했다.

미국은 진압작전을 수행중인 송요찬의 부대가 “해안선에서 5km 이외의 내륙지역을 적성지역으로 간주에 모든 것을 죽이고 불태우고 약탈하는 작전”을 벌이고 있었던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학살극을 막으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 심지어 이 작전은 중일전쟁 당시 만주에서 일본군이 모택동의 홍군을 토벌하기 위해 사용한 작전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었다. 미국은 대통령 이승만이 1948년 11월 17일 이른바 계엄령을 선포하여, 제주도민에 대한 무차별 민간인 학살을 정당화 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만들었음에도 이를 막으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런 학살극에 책임이 있는 이들을 반공국가의 수장으로 치켜세웠고, 민간인 학살을 동반한 진압작전을 수행한 군인들에게 훈장 및 상을 줬다.

제주 4.3사건 당시 악랄하기 짝이 없는 서북청년단을 비호한 것도 바로 미국이었다. 사실 이 서북청년단 대원들을 경찰과 군인에 편입시키도록 적극적으로 노력을 보인 주체가 바로 미국이었으며, 이들의 작전으로 적의 사살자 숫자와 무기의 숫자가 불균형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차별 민간인 학살을 중단시키기는커녕 이들의 토벌을 고무 및 장려했다. 심지어 미군들은 수차례에 걸친 제주도 정찰비행을 통해, 유격대의 집결지와 사령부 그리고 정부군과 반군간의 전투상황을 속속히 알려줌으로써, 학살극을 아주 적극적으로 도왔다. 아래에 있는 책 인용문을 보자.

“미군 수뇌부의 제주도 사태에 대한 인식은 군에 의한 무차별 학살을 합리화했을 뿐 아니라 조장했다.”(같은 책, 222쪽)

이처럼 미국은 제주 4.3사건에 깊이 개입했고, 학살과 진압작전을 도왔으며, 군사적인 측면에서 진압군을 적극 지원했다. 종합적으로 보았을 때, 제주 4.3학살은 미국의 학살로 봐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이러한 학살을 지휘하고 돕고 지원한 주체가 바로 미국이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읽은 허호준의 《4.3, 미국에 묻다》는 코비드-19가 한참이던 2021년 초에 출간됐다. 따라서, 기존에 제주 4.3사건 관련 자료에서 찾지 못했던 미국의 개입 관련 최신 자료들도 제법 보여주고 있으며, 한국 현대사를 공부하는 나에게 훌륭한 자료를 제공해주고, 많은 공부를 할 수 있게 만들어준 책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 책이 제주 4.3사건 당시 미국의 역할을 제대로 규명하고, 상당히 의미있는 자료들을 통해서 사태의 본질을 추론했지만, 저자의 말대로 이를 직접적으로 명확히 입증할 수 있는 몇몇 자료를 확보하지 못했다. 책의 저자인 허호준은 김익렬과 김달삼 간 평화협상과 그 이후 사태 전개에 대한 주한미군사령부와 미군정의 지시 내용, 미 국무부와 군부의 제주도 사건 관련 지시 여부 등에 대한 새로운 사료가 더 발굴되야한다고 역설한다. 즉, 이 말은 제주 4.3사건 당시 미국의 책임을 묻기 위해선 앞으로도 발굴되고 연구되어야할 자료와 사건들이 많이 남아있다는 얘기다.

책을 읽으면서, 많은 공부가 되었지만 유난히 흥미롭게 다가온 사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제주 4.3사건 전후로 미국 및 서방권 언론들이, 자신들의 경쟁자인 소련 및 사회주의권을 악마화하기 위해, 근거 없이 퍼뜨렸던 가짜뉴스들이다. 당시 미국과 서방의 반공주의자들에 의해 각색되어 보도된 내용만 따진다면, 제주 4.3사건은 소련이나 북한에 의해 조작되어 만들어진 사건으로 판단할 수 있을 정도다. 물론 이러한 기사들은 제대로 된 근거를 밝히지 못했으며, 당연히 가짜뉴스였다. 아니 오히려 제주 4.3사건 관련해서는 소련의 보고가 더 정확했다. 1950년 당시 소련은 “제주 4.3사건 당시 미군 고문관들의 명령에 의해 남한 정부가 3만 5,000여 명의 주민들을 죽이고 1만여 채의 집을 파괴했다.”고 보고했다.

거기다, 1945년 이후부터 미국이 제주도에서 했던 정책들을 보면, 미국이 제주도민의 불만을 자극시킬만한 일들을 벌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946년부터는 제주도에다가 과거 일본에 협력했던 친일경찰들을 임명했고, 1947년 3.1사건에서 시민 6명 이상을 죽인 책임이 있는 당사자들을 제대로 처벌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오히려 극우성향의 인사들을 임명함으로써, 제주도민의 불만을 자극했다. 더 나아가, 경제 문제에서도 민생을 파탄에 빠뜨리는 정책을 추진했고, 가뜩이나 먹을 게 없어서 굶주리던 제주도민들의 생활을 더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당연히 민생은 제주 4.3을 거치면서 더 악화됐다. 1950년 4월 기준으로 대략 10만 명이나 되는 제주도민들이 심각한 기아에 빠져 풀을 뜯어먹고 연명하는 수준이었다. 미국의 제주도 정책이 얼마나 반민중적임을 보여주는 또 다른 근거다.

저자 허호준은 그리스 내전과 제주 4.3사건을 비교한 박사학위논문을 쓴 인물이다. 그는 1946년부터 1949년까지 미국이 개입했던 그리스 내전과 제주 4.3사건을 비교했다. 나는 제주 4.3사건이 과거에는 그리스 내전 그리고 미래에는 베트남 전쟁으로 이어졌다고 본다. 그리스 내전 당시에도 미국의 트루먼 행정부는 그리스 민간인들이 좌파 게릴라를 지지하지 못하도록, 민간인에게 테러를 가하는 정책을 사용했다. 이 과정에서 민간인들의 대량 강제이주, 노조파괴, 체포, 구금, 네이팜탄 투하가 동원된 폭격 그리고 대량의 민간인 학살이 발생했다.

제주 4.3사건 이후에 벌어진 베트남 전쟁 또한 마찬가지다. 베트남 전쟁 초기 남베트남 군인들이 베트콩 가족을 살해한 데 대해 미군들은 “그들은 게릴라의 친척이었고, 의심의 여지없이 베트콩에 동조적이었으며, 그들을 지원했다. 그들은 비전투원의 신분이 아니다”라는 태도로 전투에 임했다. 이것은 초기 미군사고문단 개입시절에 있던 일이었다. 무엇보다 베트남 전쟁 초기 미국과 남베트남의 평정작전 이론은 농민들을 베트콩을 지지하지 못하도록 테러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점에서 제주 4.3사건 당시 미국과 이승만 정부가 자행한 양민학살과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이제 2022년이 끝나가고, 2023년이 다가오고 있다. 이번 학기에 대학원 생활을 시작하면서 많이 바빴다. 그래서 예전보다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읽을 기회가 많이 줄어들었다. 영화 및 다큐멘터리 감상도 그러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시간을 내어 허호준의 저서 『4.3, 미국에 묻다』를 읽은 것은 여러모로 많은 지적 호기심을 제공하고, 공부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무엇보다, 반공주의가 사회 전체를 맴돌고 있는 상황에서도 미국이 자행한 폭력과 학살에 대해 이렇게 용기 있는 책을 써준 점에 대해 저자에 대해 깊이 감사한다.

많은 이들이 이 책을 끝까지 완독했으면 좋겠다. 이를 통해, 우리 현대사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역사를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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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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