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3] 경남 충청 경기 황해 서울 강원 전라지역의 1946년 10월 항쟁

김근성(경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3)

 

1. 경남

 

경남에서 가장 먼저 항쟁이 발생한 곳은 통영군(지금의 통영시)이었다. 10월 3일 오전 11시경 4,000~5,000여 명의 군중이 읍을 장악하고 경찰을 공격하였다. 오후 2시경 마산으로부터 경찰 40명이 응원을 하러 왔으나 실패하였고, 미전술군 2개 중대가 파견된 끝에야 진압되었다. 경찰은 1명이 사망하고 37명이 행방불명되었으며, 군중은 15명이 체포되었다.

창녕군에서는 10월 6일 군내 지서 4곳이 군중에 의해 점령당했다. 이후 경찰이 1곳은 회복하였으나 2명이 행방불명되었다. 읍내에서는 군중의 경찰서와 군청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이때의 충돌로 시위대 12명이 다쳤으며, 경찰은 1명 사망 2명 부상의 인명피해를 냈다. 이후 읍내는 미군의 원조로 인해 치안이 계속 유지되었다. 한편 10월 7일에는 남지(南旨)리에서 700여 명의 군중이 경찰서를 공격하자 경찰이 발포하여 2명이 목숨을 잃었다.

마산의 항쟁은 10월 6일과 7일에 걸쳐 발생했다. 6일 1,500여 명의 군중이 경찰서를 공격했으나 미군에 의해 저지되어 시위대 4명 사망 경찰 1명 부상의 인명피해를 냈다. 7일에는 6,000여 명이 시위를 벌였는데 경찰이 발포하여 학생 1명이 사망하였다. 이에 분노한 시위대는 경찰서와 지서로 향해 경찰을 무장해제시키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전날처럼 미군의 개입으로 역시 시위는 진압되었다. 미군 보고서에 따르면 군중 8명이 사망하고, 경찰 2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시위대 150여 명이 구속되었다.

진주에서는 10월 7일 창과 몽둥이로 무장한 군중이 몰려오자 경찰이 발포하여 2명이 죽었다. 이에 굴하지 않고 다시 결집하자 이번엔 미군이 발포하여 4명이 사망하고 다수의 부상자를 냈으며 100여 명이 검거되었다. 이날 시위에서 선동자들은 쌀을 무료로 배급한다는 소문을 이용해 군중을 모았다고 한다. 이후 10월 10일 파출소 1개가 군중에 의해 점령당했고, 14일에는 격렬한 충돌이 발생해 시위대 10명이 죽고 11명이 부상당했다. 진양(晋陽)에서는 대평(大坪)과 내동(奈洞) 두 지서가 7일과 8일에 각각 공격을 받았다. 훗날 이 항쟁에 의해 검거된 사람들을 조사해 보니 농민, 노동자, 상인들이었다.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들은 군정에 대하여 ‘특권층, 악질지주 및 모리배들’에게 도움을 주는 양곡 공출 제도를 폐지하라고 요구하면서, 올바른 길은 ‘남한을 북한화시키는 것(북한과 같이 토지 개혁을 포함한 제반 민주 개혁을 실시하는 것 – 필자 주)’라고 주장했다. 그들의 소책자들은 진주 경찰을 ‘일본의 충견들’이라고 비난했으며 경찰에게 “당신들은 한국인이 아니오? 같은 혈육이 아니오? 어째서 한인들에게 발포를 하는가?”라고 질문했다.”

하동군에서는 10월 8일 군내 한 지서가 군중 50명의 습격을 받아 경찰 1명과 우익인사 3명이 납치되고 무기도 일부 탈취되었다. 청암(靑岩)에서는 지서가 군중 100명의 습격으로 인해 소총 1정이 탈취되고, 시위대 16명이 검거되었다. 한편 이날 보고된 다른 공격에서는 200여 명의 농민이 죽창으로 무장해 경찰을 찔렀으며 발포로 인해 4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봉기에 참여한 농민들은 대부분이 농민조합과 인민위원회 관련 청년조직 소속이었다. 체포된 농민은 15명이었는데 이중 14명이 18~35세의 젊은이들이었다. 교사 이병구는 자신의 일기에서 이 공격이 목표에 ‘친일파 및 민족반역자들’의 제거에 있다고 적었다. 또한 농민들이 살포한 전단은 “혁명의 불꽃이 남한 전역에 퍼져 나갔다”라는 말로 시작했다. 그 전단의 뒷부분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경찰을 미워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략) 농민들에게 : 우리 자신의 손으로 독립된 국가를 건설하자. 모든 권력을 인민에게 넘기자. 토지를 인민에게 균등하게 나누어 주자. 모든 양곡의 공출을 반대하자.”

10월 9일에는 하동경찰서가 습격당하고 북천(北川)읍이 군중에 의해 점령되기까지 했으나, 11일 응원 경찰에 의해 점령되고 시위대 1명이 사망했다. 한편 11일에는 옥종(玉宗)의 경찰지서도 300여 명의 군중에 의해 파괴되었다.

의령군에서는 10월 7일 부림(富林) , 10월 9일 화정(華井)의 지서가 각각 습격당했다. 또한 궁류(宮柳), 지정(芝正), 봉수(鳳樹), 유곡(柳谷) 등의 지서도 군중의 공격을 받았다. 이렇게 10월 7일부터 10일까지의 10차례의 공격이 발생하여 경찰은 2명 사망 4명 납치 2명 부상의 인명피해를 입었다. 우익인사들의 집도 몇 채 파괴되었으며, 8정의 소총이 탈취되었다.

양산군(지금의 양산시)에서는 10월 8일 오후 1시 15분경 군중 600여 명이 경찰서에 집결했다. 경찰이 파견되었지만 군중의 구타로 인해 2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소총과 탄약이 탈취되었다. 경찰과 미군은 산으로 피신한 군중 300여 명을 포위하여 시위를 진압하였다.

동래군(지금의 부산광역시 일부 지역)에서는 10월 9일과 10일 사이의 밤 기장(機張), 철마(鐵馬)에서 봉기가 발생하여 미군과 경찰이 합동으로 진압작전을 펼쳤다. 동래읍에서는 10월 오전 5시 30분경에 읍 북쪽에 위치한 200명의 군중을 해산시키려 경찰 20명이 파견되면서 충돌이 발생했다. 이 충돌로 주민 1명이 사망하고 여러 명의 부상자와 40여 명의 검거자가 생겼다. 나머지 시위대는 도주하였다.

9월 총파업이 처음으로 시작된 부산에서는 9월 23일부터 10월 8일까지 모든 학교가 파업에 동참하였다. 하지만 대대적 봉기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미군과 경찰에 의해 도시는 점령된 상태였고 파업 주동자들이 검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나 10월 9일 봉기로 인한 유혈충돌이 발생하여 경찰과 군중을 모두 포함하여 24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이 일로 31정의 소총과 645발의 탄약이 탈취되었으며 부산시장이 습격을 당했다. 이후 미군의 투입으로 12일에 부산에서의 파업은 종료되었으나 13일에도 선박 9척에서 파업이 발생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외에도 10월 8일 밀양군(지금의 밀양시)에서는 밀양읍 읍내의 모직공장이 파업을 하였다. 같은 날 창원군(지금의 창원시) 웅천(熊川)에서는 미군 3명과 경찰 7명으로 구성된 순찰대에 400여 명의 군중이 달려들었다. 군중이 해산하지 않자 발포가 일어나 5명 사망 2명 부상 검거 24명의 인명피해를 냈다. 울산의 서생(西生)리에서는 10월 14일 군중 500여 명이 면사무소를 파괴하고 지서를 포위했다. 미군과 경찰이 투입되어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주민 1명이 사망했고, 일부 시위대는 작은 배를 타고 도주했다. 사천군(지금의 사천시) 삼천포(三千浦)에서는 10월 22일 15명의 주민이 경찰 1명을 구타하였다.

 

2. 충청

 

당진군에서는 10월 17일 합덕(合德)에서 300명으로 시작하여 1,000여 명으로 불어난 군중이 지서를 공격해 경찰 4명을 구타 및 구금하였다. 시위대는 우편국과 전기회사도 장악하였고 통신선을 절단했으며, 면천(沔川)과 합덕을 잇는 교량도 무너뜨렸다. 당시 주동자였던 농민조합 부의장 이수하는 이렇게 말했다.

“전쟁후 우리는 독립을 기대했다. 그러나 1년이 지나도, 독립이 되지 않았고 미군정은 일본의 지배자와 같았다. 우리는 살기 위해서, 높은 생활비 때문에 군정직원들을 반대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생활조건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경찰서와 미군정하에 있는 다른 곳을 공격한다.”

하지만 다음날 미군의 개입으로 인해 시위를 진압당하고 말았다. 한편 면천에서도 17일 밤 인민위원장을 포함한 200여 명의 군중이 경찰지서에 나타나 경찰 5명을 끌어내어 구타하며 모든 서류와 곡물의 인계를 요구했다. 시위대는 소총과 탄약을 탈취한 후 경찰들을 봉기 중인 합덕에 보내어 구금하였다. 당진읍에서는 군청이 있었기에 그곳에서도 봉기가 발생했다. 시위대는 경찰서에 불을 지르려고 했으며, 경찰서장의 목숨을 노렸다. 하지만 천안의 응원경찰로 인해 진압당했다.

홍성군에서는 10월 18일 새벽 2시 갈산(葛山)과 구항(龜項)의 두 지서가 습격당했다. 갈산의 지서장이 용케 빠져나와 본부에 군중이 홍성경찰서도 노리고 있음을 보고하였다. 오전 6시에 홍성 동쪽에서 몽둥이를 든 군중들이 통신을 차단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위를 벌이며 다가왔다. 이들이 학교 근처에 이르렀을 때 경찰이 발포하여 군중 4명이 사망하고 시위대는 해산하였다. 한편 시위대가 지닌 전단에는 “조선 정부를 인민위원회에 넘겨라!”, “모든 형태의 정부는 인민위원회에 돌려주어야 한다” 등의 구호가 적혀 있었으며 남조선과도입법회의와 군정청의 폐지, 북한과 같은 노동법과 토지개혁의 실시 등을 주장하였다. 이외에도 토지의 균등분배, 쌀의 공정한 분배, 미소공동위원회의 조속한 재개 등의 요구 역시 담겨 있었다.

예산군에서는 10월 13일 덕산(德山)에서 300명의 군중이 경찰 한 명과 그의 딸을 살해하였다. 예산읍에서는 10월 19일 400명의 군중이 경찰서에 접근했으나 미군 4명의 도움으로 경찰이 이들을 해산시켰다. 군중은 교회에 집결하여 다시 시위를 도모하였으나 오후 3시경 미전술군이 추가되어 결국 257명이 검거되었다.

이렇게 충남에서는 북부의 몇 개 군을 중심적으로 항쟁이 발생하였다. 이외에도 서산과 천안에서 항쟁이 발생한 것으로 기록은 전한다. 대전에서는 10월 8일 경북에서의 항쟁의 여파로 인해 경관들의 숙소가 불에 타 10만원의 피해가 발생한 것이 전부라고 한다. 이때 체포된 31명을 조사해보니 농민 6명, 노동자 7명, 실업자 8명, 의사(한의사로 추측됨) 3명, 상인 2명 및 기타 4명이었으며, 연령은 25~63세까지 다양했으나 대부분이 20~30대였다. 미군 보고서는 대전에서 항쟁이 미미한 것은 경찰이 우익 세력과 긴밀히 협력했음을 지적하였다.

그에 반해 충북에서는 봉기가 거의 보고되지 않았다. 청주나 영동에서 봉기가 일어났다는 기록만 전할 뿐이다. 미군 보고서에서는 충북 역시 대전의 경우처럼 경찰과 우익 세력의 협조가 강했다고 분석했다. 그런가 하면 조선인민당을 포함한 온건한 성향의 좌익 세력이 세가 강했다는 것도 지적된다. 실제로 청주의 경우 그곳의 민청은 극단주의자로 분류된 11명을 축출했으며, 인민당의 한 전단은 “극단적인 공산주의자는 용납되지 못한다” 따위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3. 경기, 황해, 서울

 

경기도에서는 광주에서 항쟁이 발생했다. 10월 20일 2시 반경 수천 명의 시위대가 광주경찰서를 공격해 석유를 뿌려 방화하고 갇힌 죄수들을 석방시켰다. 이 일로 2명의 경찰이 죽고 소총 34정과 탄환 450갑이 탈취당했다. 경찰서장이었던 정규설은 무기 창고를 잠근 채 도망갔는데 훗날 직장을 이탈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었다. 한편 파주에서는 봉기가 계획되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42명이 체포되었다.

황해도에서는 개풍, 연백, 장단에서 항쟁이 일어났다. 각 항쟁을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개풍군(지금의 개성시)에서는 10월 20일부터 봉기가 발생하여 개성경찰서장이 살해당했다. 또한 봉동(鳳東), 풍덕(豊德), 상도(上道), 대성(大聖), 임한(臨漢) 등의 지서가 21일까지 이틀에 걸쳐 군중의 습격을 받았다. 경찰은 봉기를 일으킨 자들이 일종의 게릴라전이라 평가하며 경찰과 군중을 포함하여 40여 명이 희생되었으며, 3,872명의 인원을 체포했다고 보고하였다. 연백군에서는 10월 20일 연안경찰서를 포함하여 온정(溫井), 호동(湖東), 백천(白川) 등의 지서들이 군중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이 봉기로 경찰 2명이 살해되고 4명은 행방불명되었다. 개성에서 온 경찰과 미군에 의해 당일로 진압되었는데, 많은 수의 군중이 38선 이북으로 도주하였다. 장단군에서는 파업 중인 천여 명의 노동자가 가천(佳川)의 지서를 습격하였다. 이곳 역시 항쟁의 주도 세력은 농민들이었는데, 이들의 요구 사항은 백천 지역에서 발견된 한 전단에 잘 나타나 있다.

“보아라! 남한 각 도의 인민이 총과 칼을 들고 일어섰다. (중략) 이제 우리 젊은 애국자들은 재식민화의 위험으로부터 조국을 지키고자 일어섰다! 우리의 목적은 우리 참된 애국자들을 탄압하는 악질 경찰관과, 지나치게 양곡을 수탈해 가는 악질 관료와, 그들 뒤에 있는 친일반역자들을 숙청하는 것이다.”

황해도와 경기도의 봉기는 불행히도 서울을 비롯한 중심부의 대대적인 봉기로 이어지지 못했다. 나라의 중심부인만큼 경찰과 미군이 가장 강력했으며, 서울의 9월 총파업이 공권력과 우익청년단체에 의해 잔혹하게 진압당한 탓도 있었다. 서울의 항쟁은 직접적이라기 보다는 지방에서의 항쟁을 지원하는 듯한 성격이 강했다. 10월 3일 정오경 1,200여 명의 군중이 시청 앞에서 적기가와 해방의 노래를 부르며 시위를 벌였다. 40~50명의 학생들이 대오에 동참한 이 시위에서 군중은 “쌀을 달라”, “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등의 구호를 외쳤다. 이날의 시위는 경찰의 공포탄 발사로 해산되었으나, 18일 후인 10월 21일 정오 다시 시위가 발생했다. 2,000여 명의 시위대는 종로네거리에 집결하여 동대문으로 행진하였다. 시위대가 기독교 청년회관에 이르렀을 때 경찰이 발포를 감행했다. 시위대의 피해는 없었으나 근처를 지나가던 권투선수 이상록이 유탄에 의해 피살되었다. 한편 종로 5가에서도 소규모의 시위가 보고되었으며, 서울철도역에서는 폭발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11월 2일 오후 3시경에도 200여 명의 학생이 남대문에서 집결해 조선은행 방면으로 행진했으나 경찰에 의해 저지당했다.

인천에서는 10월 4일 오전 10시경 인천부두노조 소속 노동자 3,000여 명이 총파업을 벌였다. 노동자들은 임금인상, 식량배급, 구타 및 무조건 해고 절대 반대, 사고 사망자의 부조금 지급 등의 요구 조건을 내걸었다. 10월 5일 신원 미상 단체(우익청년단체로 추측됨) 소속의 30여 명이 시위를 방해할 목적으로 인민위원회, 민전 인천사무실, 인민당 인천지부, 부녀동맹, 인천신문사 등을 공격해 파괴하여 7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19일에는 전평 인천사무소가 테러를 당했는데, 이에 인천의 파업투쟁위원회는 20일 오후 2대의 트럭을 타고 송현동의 산업도로를 2차례 가로지르면서 전단을 살포했다. 전단에는 “쌀과 민주독립을 얻기 위하여 일어서자”, “북조선과 같은 민주정책을 실시하자”, “인민의 원수 악질경찰을 소탕하자”라고 적혀 있었다. 이후 10월 24일 인천경찰서를 습격하려는 밀회 현장이 경찰에 의해 급습을 당해 7명이 체포되었며, 26일에는 인천경찰서에 폭탄이 투척되기도 했다. 정확하게 확인된 바는 아니나 이 폭발로 경찰과 2명과 독촉(대한독립촉성국민회) 소속 청년단원 32명이 죽었다고 전해진다.

 

4. 강원

 

강원도에서는 인민위원회의 세가 강했던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항쟁이 발발하였다. 가장 먼저 항쟁이 발생한 곳은 횡성군이었다. 10월 18일 오후 수천 명의 군중이 경찰서과 도내 여러 지서를 습격하였다.

강릉군(현재의 강릉시) 묵호(墨湖)에서는 10월 29일 주민들이 시위하며 행진하자 우익 200여 명의 지원을 받은 경찰이 이들을 해산시켰다. 30일에는 전날의 시위를 조사하던 경찰이 도망가려던 주민 1명에게 발포해 사살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한 주민들이 묵호 근처의 지서를 포위하고 경찰과 충돌하여 숫자 미상의 사망자를 냈다. 충돌 이후 1,000여 명의 군중이 묵호항에 집결했으나 경찰과 해안경비대에 의해 저지당했다. 31일 경찰은 묵호 안팎에서 죽창 70개, 철창 10개, 곤봉 30개를 압수하였다. 연곡(連谷)에서는 11월 3일 오전 2시 100여 명의 군중이 몇 시간 동안 경찰과 충돌했는데 발포로 인해 진압당하여 주민 1명 사망 경찰 2명 부상의 인명피해를 냈다. 주문진(注文津)에서도 경찰과 시위대의 충돌로 시위대에서는 1명 사망 1명 부상, 경찰에서는 2명 부상을 냈다.

평창군에서는 11월 3일 도암(道岩)에서 10여 명의 군중이 보초를 서던 순경의 소총을 탈취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리고 20정의 권총, 30정의 소총, 7정의 기관총으로 무장한 120명이 인근의 산을 이용하고 있다는 정보가 접수되었다. 8일에는 180여 명의 군중이 오대(五臺)에 위치한 지서를 습격하려고 시도했지만 평창경찰서를 포함한 인근 지역 경찰들의 공격에 직면하였다. 한편 삼척군(지금의 삼척시)에서는 11월 첫번째 주에 전역에 걸쳐 봉기가 발생하였다. 미군방첩대의 보고에 따르면 이곳의 봉기는 좌익 성향을 가진 사람을 광산에 일할 수 없도록 하였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한다.

 

5. 전라

 

10월 말이 되자 항쟁은 전남으로 파급되었다. 10월 30일 화순군의 광부들이 일으킨 봉기가 시작이었다. 이날 오후 4시경 화순탄광의 노동자 2~3,000여 명이 광주를 향하여 식량을 요구하며 행진하였다. 이들이 이렇게 시위를 벌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1946년 8월 15일로 시계를 돌려야 한다. 해방 1주년을 맞아 광부 1,140명이 기념식에 참석하고자 새벽 3시부터 출발하였다. 미군은 이를 막으려 했고, 광부들이 저항하자 무차별적인 발포를 자행하였다. 이 일로 사망자 1명, 중경상자 수백여 명, 행방불명자 7명, 연행자 15명 등의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그런 학살에 더불어 광부들의 비참했던 노동 환경까지 더해져 광부들이 마침내 봉기한 것이다. 30일의 행진은 미군 고위 장교들의 설득으로 해산되었고, 다음날 광부 3,000여 명이 다시 행진을 감행했으나 이때도 미군에 의해 저지되었다.

10월의 행진은 비록 비폭력적으로 종결되었으나 본격적인 저항은 11월부터 터졌다. 미군과 경찰이 행진의 주도자를 체포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11월 4일 체포가 실제로 이뤄지자 화순 주민들은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이때의 항쟁을 미군 보고서는 이렇게 묘사했다.

“새벽 4시에 화순에 도착하여 6명을 체포하여 광주로 출발하였다. 돌아오던 한 지점에서 1,000~2,000명의 군중이 집결하여 도로와 다리를 봉쇄하고 포위하였다. 이 체포단이 지프차 안으로 피신하자 군중들은 한 지프차의 창문에 통나무를 밀어넣어 전복시켰다. 뒤에 오던 차도 앞차에 부딪쳐 전복하였다. 차 2대를 포기하고 나머지 차에 분승하였다. 한 지점에서는 돌이 날아왔고, 다른 지점에서는 탄환이 창문을 관통하였다. 세 번째 지점에서는 차량이 군중 속으로 돌진하였다. 여기에서 군중 3명이 사망하고 33명이 부상하였고 미군도 2명이 부상하였다.”

이 일로 군정지사는 탄광을 폐쇄하였고, 경찰은 탄광과 시내를 점령하였다. 6일에는 경찰과 국방경비대가 추가로 투입되고 미군 6사단 군인들이 도로를 관리하였다. 군중은 50~75명이 검거되었다. 하지만 11월 9일 군중은 다시금 봉기를 일으켜 1,000여 명이 지서를 공격하였다. 경찰의 발포로 인해 군중 3명이 죽고 1명이 부상당했다.

무안군에서는 10월 30일 산향(三鄕), 일로(一老), 이로(二老)의 3개 지서가 각각 50여 명의 청년(민청과 관련된 것으로 추측됨)에 의해 습격당해 산향의 경우 한동안 군중에게 장악되었다. 11월 3일에도 봉기가 발생하여 군중 7명 사망 7명 부상 23명 검거의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4일에는 안성(安城)에서 200명의 군중이 철도역을 공격했는데, 목포에서 온 5명의 경찰이 철도경찰과 협력하여 시위를 해산시켰다. 이 날의 충돌로 경찰 4명이 심하게 구타당하고, 숫자 미상의 군중들도 부상을 입었다.

목포에서는 10월 31일 항쟁이 시작되었다. 오전 6시 반 군중은 남교동 파출소를 습격 및 방화했으며, 7시경에 다른 지서 한 곳도 공격당했다. 9시가 되자 학생과 노동자들이 각각 수백 명씩 모여 시위를 벌였으며, 오후 10시경에는 2,000여 명의 학생들이 경찰서를 공격했다. 광주에서 파견된 50여 명의 경찰과 미군이 시위를 진압했는데, 이 일로 경찰은 2명 사망 10명 부상의 피해를 입었으며, 군중의 피해는 확인되지 않았다. 11월 3일 목포를 비롯한 무안군 일대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는데, 그 내용은 야간통행금지를 위반하면 총살한다는 살벌한 것이었다.

광주에서는 10월 31일 2,000여 명이 파업노동자들이 시위를 벌였는데 도청 대표자들과 만나 협상한 결과 해산하였다. 11월 3일이 되자 광주학생항일운동 기념일을 맞이하여 1,500여 명의 학생들이 교외에 집결하여 시위를 도모하였다.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여러 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어떤 학교는 휴교당하기까지 하였다. 4일에는 200여 명이 남가동의 지서를 습격해 불을 지르고 경관 2명을 납치했으며, 광산군에서도 봉기가 보고되었다. 송정리(松汀理)에서는 11월 3일 200여 명이 지서를 공격했으나 경찰의 발포로 5명이 죽고 7명이 부상당했다. 이날 송정리에서 한 사람이 미군 트럭에 탄 미군과 대화를 나눴는데, 미군이 떠나자 인근에 있던 20여 명의 사람들이 미군을 위해 일한다면서 그를 폭행했다고 한다. 당시 주민들의 민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한편 지산(芝山)에서는 3일 일단의 시위대가 지서를 습격해 불을 질렀는데, 경찰의 발포로 군중에서 사망자 1명과 부상자 1명을 내었다. 서창리(西倉里)에서도 100여 명이 지서를 점령해 경찰을 무장해제시키고, 380여 명의 군중은 신한공사의 창고를 습격해 곡물을 탈취하였다.

함평군에서는 11월 1일 아침 2,000여 명의 군중이 함평경찰서를 습격했다. 이 날의 시위로 경찰과 군중 모두에서 각각 1명의 사망자와 다수의 부상자가 생겼다. 이외에도 학교(鶴橋), 대동(大洞), 나산(羅山), 주포(酒浦), 해보(海保), 월야(月也) 등의 지서들도 군중의 습격을 받았다. 주포의 경우에는 경찰 1명이 사망하였다. 미군정의 보고에 따르면 경찰서를 습격한 군중은 영광이나 영산포 등지에서 왔다고 한다.

영광군에서는 11월 3일 600~800여 명의 군중이 경찰서를 습격하려고 했으나 경찰서에 가지도 못하고 실패하였다. 경찰의 진압으로 인해 군중은 사망자 4명과 중상자 4명을 냈으나 경찰의 피해는 없었다. 같은 날 포천(浦川)에서는 1,000여 명의 군중의 지서를 습격하려 했으나 역시 경찰의 발포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사망자 4명과 부상자 5명을 내고 해산하였다. 홍농(弘農)에서는 300여 명의 군중이 지서를 공격해 서류와 문서를 탈취했으며, 지서를 전소시키고 지서장을 심하게 폭행했다. 11월 4일에는 수참리에서 농기구와 몽둥이, 돌 등으로 무장한 60명이 군중이 지서를 공격했으나 경찰의 발포로 2명이 부상당하고 19명이 검거되었다.

나주군(지금의 나주시)에서는 인근에서 대규모의 군중이 모이는 방식으로 항쟁이 진행되어 화순과 더불어 전남에서 가장 대대적인 항쟁이 발생하였다. 10월 31일 오후 2시 30분 5,000여 명으로 추산되는 군중이 나주로 향했으나 경찰과 미군에 의해 해산하였다. 1시간 후에는 발포하는 경찰에 군중이 달려들어 시위대 10여 명이 목숨을 잃고 50여 명이 검거되었다. 나주 인근의 지서 여러 곳도 습격을 받았는데, 이 일로 군중에서 사망자 1명과 부상자 1명이 발생하였다. 10월 31일과 11월 1일 사이의 밤에는 북소리를 신호로 수십 명이 모였다가 합치며 수천의 시위대를 형성하였다. 각각 최소 1,000여 명이 넘는 3개의 집단이 나주로 행진했는데, 미군 1개 소대와 경찰 250명, 국방경비대원 80명이 이들을 막았다. 이때 미군 소속의 비행기들이 낮게 날며 시위대를 위협하자 분노한 군중이 비행기를 향해 돌팔매질을 하기도 하였다.

군중은 11월 1일에만 최소 9곳의 지서를 공격했다. 각 지서의 상황을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다시(多侍)에서는 약 200명의 군중이 습격했는데 15명의 경찰과 충돌하여 군중 1명이 사망하였다. 고막원(古幕院)에서는 700명이 군중이 습격하여 2명의 사망자를 냈다. 반남(潘南)에서는 경찰 1명이 사망하고 2명은 행방불명되었으며, 세지(細枝)와 동강(洞江)에서는 1,000여 명의 군중의 습격으로 경찰이 급히 대피하였다. 공산(公山)에서는 군중의 습격으로 경관들이 감금되었으나 응원경찰의 도움으로 구출되었으며, 영산포(榮山浦)에서는 오후 3시경 4,500여 명의 군중과 경찰이 충돌하여 군중에서 사망자 9명과 중상자 26명을 냈다. 왕곡(旺谷)에서는 700여 명의 군중이 습격을 가했으며, 금천(金川)에서는 오후 5시경 3,000여 명의 군중이 경찰과 충돌하여 4명의 사망자와 다수의 부상자를 냈다. 한편 11월 3일에도 3곳의 지서가 습격당했었는데 이때는 경찰의 피해가 없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11월 4일부터 11월 7일에 전남에서는 대규모 항쟁이 없었다. 미군정은 러시아 혁명 기념일인 11월 7일에 봉기가 있지 않을까 염려했으나 이날에는 보성군 군내의 2곳에서 봉기가 발생했을 뿐이다. 득량(得粮)에서는 오전 2시경 50~100여 명의 군중이 면장과 구장을 비롯한 지역 유지들을 공격해 중상을 입혔다. 또한 지서를 습격하여 경찰을 지원하던 독촉 소속 청년단체원 11명 중 2명을 죽이고 1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이들은 독촉 간부의 집까지 습격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해산하였다. 미력(彌力)에서는 같은 날 오전에 20여 명의 군중이 봉기를 일으킨 바 있다. 이후 11월 9일 보성군 조성(鳥城)에서 20명의 경찰이 몽둥이와 죽창으로 무장한 400여 명의 군중을 해산시키려다 충돌하였다. 이 충돌로 경찰의 피해는 없었으나 군중은 6명의 사망자를 냈다. 12월 3일에는 율어(栗於)에서 200명의 군중이 지서를 습격하였다.

장흥군에서는 11월 9일 관산(冠山)에서 1,000여 명 정도의 군중이 지서를 공격했는데 경찰의 발포로 사망자 3명과 중상자 1명을 냈다. 해남군에서는 11월 11일과 13일 사이에 북평(北平), 황산(黃山), 산이(山二), 현산(縣山), 송지(松旨), 계곡(溪谷), 화산(花山), 옥천(玉泉) 등 지서 대부분이 군중의 습격을 당했다. 해남군 전역의 이 봉기로 경찰에서는 지서장 1명과 순경 3명이 사망했고, 군중의 경우 정확한 숫자는 미상이나 다수의 사망자를 냈다고 한다. 강진군에서는 11월 16일 대구(大口)에서 200명의 군중이 지서를 습격했으나 교전 끝에 해산했으며, 17일에는 수동리(水洞里)에서 전날과 비슷한 수가 지서를 습격하여 군중에서 사망자 1명과 검거자 60명을 냈다. 이 밖에도 장성군과 담양군에서도 항쟁이 발생했다는 기록이 존재하며, 영암군의 경우 10월 14일 민청 소속 2명을 주동으로 하는 1,000여 명의 시위대가 경찰서를 습격하기로 했으나 경찰의 피신으로 더 이상의 피해가 없었다. 한편 행정구역상 전남 소속이었다가 항쟁 몇 달 전에 도(道)로 승격된 제주도는 항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전남과 달리 전북은 이 지역의 좌익이 박헌영과 그의 반대파 사이의 갈등으로 지리멸렬한 상태인지라 광범위한 항쟁이 일어나지 않고 남원과 순창 2개 군에만 그쳤다. 하지만 11월 11일 ‘정치적 문제’로 수감되어 있던 418명의 죄수가 전주에 위치한 감옥을 탈출하여 비상이 일었었다. 12월 18일에는 전주에서 민청이 당국의 허가 아래 평화적인 집회를 벌였는데, 집회 종료 시간을 그만 넘기고 말았다. 이에 경찰이 신경질적으로 대응하며 군중을 한데 모으고 발포하여 학생 3명과 성인 3명이 사망하였다. 이 사건이 10월 항쟁의 마지막이었다.

추신1) 전남 화순에서 발생한 광부들의 영웅적 투쟁에 대해서는 2019년 전남MBC에서 방영된 <화순 칸데라 1946>이 있습니다. 유튜브에 있으므로 한번쯤 검색하여 보시길 추천합니다.

추신2) 사진에는 각 학자들의 10월 항쟁 지도가 그려져 있습니다. 한번들 비교해보십시오.

* 이 글은 연구자 정해구의 『10월 인민항쟁 연구』(열음사, 1988)과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1986, 일월서각)을 기반으로 작성하였습니다.

** 대표사진은 1946년 화순탄광사건을 소재로 한 뮤지컬 ‘1946 화순'(작/연출 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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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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