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1] 1946년 10월 대구항쟁

김근성(경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3)
① 항쟁의 기원 
해방이 이 땅에 찾아온 지 고작 1년이 조금 지난 1946년 10월 1일. 그날 대구 시민들은 일제히 거리로 나섰다. 노동자들은 대구역 근처로 집결하였으며, 빈민들은 대구부청과 경북도청(지금의 경상감영공원)으로 향했다. 합쳐서 수 천에 달하는 군중들은 모두 분노에 차 거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소위 10월 항쟁이라 부르는 사건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러면 왜 시민들은 뛰쳐나온 것일까?
시민들이 대규모로 시위를 벌인 배경을 이해하려면 해방정국의 정치·사회·경제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해방이 되고 건국준비위원회(이후 인민위원회)가 세워지는 등 민중은 새 나라 건설에 앞장섰으나, 미군정이 들어오면서 이는 좌절되었다. 미군정은 인민위원회를 좌익이라며 눈엣가시로 여겼고, 각지에 주둔한 미군은 인민위원회를 해산시켰다. 미군정은 ‘pro-jab(친일)’이 아니라 ‘pro-job(전문직)’이랍시고 악랄한 친일관료들을 재등용했다. 특히 경찰은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제국주의에 부역한 자들로서 민중은 아직도 이들의 악랄한 만행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민중의 권력기관은 해산시키면서 지난날의 민족반역자들을 등용한다니, “이게 무슨 해방이냐”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경제 문제는 더욱 심각했다. 미국은 자본주의 국가였기에, 남쪽에 자유시장경제를 심으려 했다. 그 일환으로 자유곡가제를 실시하였다. 하지만 가격을 제 맘대로 매길 수 있게 되니 매점매석이 횡행했다. 비싼 값에 쌀을 팔아 이익을 보려는 모리배들이 득실대자, 곧 식량 부족 사태가 터졌다. 결국 미군정은 정책을 바꿔 쌀을 강제로 수집하여 배급하는 정책을 펼치는데 이를 ‘미곡수집령’이라고 한다. 하지만 당대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던 농민의 시각에서 볼 때, 미곡수집령은 일제 시절의 공출과 다를 바가 없었다. 심지어 제 값도 제대로 쳐주지 않았고, 춘궁기에도 예외 없이 쌀을 빼앗아갔다. 대량 아사가 곳곳에서 발생했으나, 미군정은 친일관료들을 동원하고 협박과 폭력까지 서슴지 않았다.
정치 구도에 있어서는 사회주의 세력의 지지가 높았다. 그도 그럴 것이 국내외에서 끊임없이 민족해방운동에 분투한 것은 대부분이 좌익 성향이었기 때문이었다. 민중은 이를 알고 있었으며, 새로운 세상 역시 사회주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미국의 입장에서 이는 자신에게 불리했다. 그리하여 미국은 좌익에 대해 점차 강한 탄압을 일삼는다.
이에 조선공산당은 ‘신전술’을 채택하여 단호히 맞서겠다고 천명하기에 이른다. 또한 사회적으로는 이북에서 실시된 제반 민주개혁의 영향을 받아, 남에서도 그러한 개혁을 실시해야 한다는 여론이 커졌다.
대구의 상황도 살펴보자. 대구는 ‘조선의 모스크바’라고 할 정도로 좌익의 세가 강한 진보적인 곳이었다. 또한 각 대중단체들의 활동도 활발하였다. 그리고 대구 역시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민중의 고통이 만만치 않았다. 증언에 따르면 전매청(담배를 생산하는 곳)의 노동자들이 배가 너무 고파 담뱃잎을 먹을 정도였다. 회사에서 이를 막고자 잉크를 발랐는데도 노동자들은 거리낌 없이 먹었다고 한다. 또한 배가 고픈 아낙들이 관청을 향해 몰려가 식량을 요구한 적도 많았다. 1946년 초부터 굶주리는 자들이 벌이는 소위 ‘기아 시위’가 끊임없었다. 여름에는 콜레라가 퍼져 미군정이 교통을 통제하는 바람에 경제적 어려움은 더욱 커졌다.
이런 배경 아래 쌓여가던 민중의 분노는 9월 총파업으로 마침내 분출하였다.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의 지도에 따라 노동자들은 9월 23일 부산부터 일손을 놨다. 철도 노동자들의 파업을 시작으로 금속, 화학, 출판 등 각계 산업에서 노동조합들이 파업을 선포했다. 대구에서도 부산과 동시에 철도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였다. 파업은 9월 26일 모든 산업으로 확대되었고, 9월 28일 우편국 노동자들의 연대파업, 9월 30일 관공서 파업 등으로 이어졌다. 대구역 근처의 전평 경북도평의회 건물은 대구시투쟁위원회(대구시투)로 쓰였다. 그리고 10월 1일 대대적인 가두시위가 진행되면서 마침내 항쟁의 막이 올랐다.
② 대구 10월 항쟁
1946년 10월 1일 오전 10시 여성과 어린이들을 중심으로 1천여 명의 시민들이 대구부청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공포탄을 쏜 경찰을 구타하고는 10분 거리에 있는 경북도청으로 향했다. 대구역 근처에서는 윤장현, 서혁수, 염필수, 이동희 등이 이끄는 대구시투의 지도로 수천 명의 파업 노동자들이 “쌀을 배급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고 <해방의 노래>를 부르며 경찰과 대치하였다. 이때 경찰은 ‘남조선총파업 대구시투쟁위원회’라는 간판을 뗄 것과 거리에서 물러갈 것을 요구하면서 시위대의 빈축을 샀다. 오후 5시에는 대구역 앞 광장에서 대구시투 주도의 ‘전매국 노조 쟁의 지원 시민궐기대회’가 열렸다. 이 집회에 노동자 500여 명을 포함하여 5~6천여 명이 참여했고 손기채, 최문식, 이선장, 황태성, 윤장혁 등이 연설을 하였다. 경찰은 이 집회도 무허가 집회라며 강제로 해산시켰다.
오후 7시 경 집회가 해산되고 있을 때 금정(지금의 태평로) 부근에서 경찰이 발포를 자행했다. 이 발포로 인해 노동자 김용태와 이상익이 총에 맞았다. 미군 보고서에 따르면 김용태는 즉사하였고, 이상익은 병원에 실려갔으나 이틀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일부 자료에서는 대팔연탄에서 일하던 노동자 황말용이 죽었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자료들을 교차로 검증하였을 때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경찰의 발포는 우발적이 아니라 지휘 계통을 거친 것으로 자정까지 계속되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검거되어 경찰서 유치장에 갇혔다. 대구역 앞 광장이 지난날에도 대중 집회가 자주 열리던 곳이었으며, 오후 집회에 시민들이 많이 참여했음을 고려할 때 경찰의 발포는 민중의 역량에 대한 두려움의 결과물인 셈이다.
경찰의 발포는 노동자와 시민들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경찰에 대해 누적된 분노는 발포를 기점으로 터졌다. 10월 1~2일 사이, 북성로에서는 조선공산당 대구시당, 총파업대구시위원회,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등을 포함한 제반 대중 단체들이 모여 회합을 가졌다. 각지의 공장과 학교에서도 노동조합원과 학생들이 회의를 열었다. 이들은 10월 2일 대대적인 투쟁을 결의하였다. 한편 파업 지도부와는 별도로 최무학을 중심으로 한 대구의대 학생자치회 간부들은 별도로 시위를 조직하였다. 이때 김용태의 시신을 수습하였던 철도병원 의사들과 면밀한 협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날인 10월 2일 오전 9시 대구의대 학생과 교원으로 구성된 150여 명의 시위대는 전날 죽은 노동자 김용태의 시신을 메고 ‘시체 데모’를 벌였다. 시위 대열은 대구의대(지금의 경북대학교병원) 교문을 출발해 서편 네거리(지금의 한국은행 대구지점 앞)에서 왼쪽으로 꺾어서 행진하였다. 행진 도중에 대구농대와 대구사범대 학생들이 합류하였고, 각 중학교에서도 학생들이 쏟아져 나왔다. 시체를 본 시민들 역시 충격과 분노에 사로잡혀 시위 대열에 속속 모여들었다.
오전부터 시·도청 앞에서 부녀동맹 중심으로 시위를 벌이던 빈민 시위대도 동참했다. 그렇게 불어난 시위대는 오전 10시경 대구경찰서(지금의 대구중부경찰서)에 모여 건물을 포위하였다. 오전 11~12시에 이르자 학생, 노동자, 시민들을 포함하여 1만 5천의 군중이 근처 도로를 꽉 메웠다. 시위대는 가져온 시신을 경찰 앞 계단에 놓고 묵념을 올렸으며, “경찰은 발포를 중지하라”, “살인 경찰은 무장을 해제하라”, “애국자를 석방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대구역에서는 오전 10시경 어제와 마찬가지로 수천 명의 파업 노동자들이 집결하여 200여 명의 경찰과 대치하였다. 이날 노동자들과 대치한 경찰들은 제5관구경찰청 소속 특경대였는데, 이들은 시위 진압을 목적으로 하는 특수 목적의 부대로서 훗날 이승만 정권 시절 치안국장(지금의 경찰청장)을 맡게 되는 이강학의 지휘 아래 있었다. 대치가 고조되던 오전 11시~12시경, 경찰은 노동자 시위대를 향해 발포를 자행했다. 발포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논란이 있지만, 노동운동가 이일재의 증언에 따르면 시위대가 무장 해제를 요구하자 일부가 이에 따랐는데 흥분한 군중이 돌을 던져 경찰이 발포를 시작했다고 한다. 경찰이 총을 쏘자 사람들이 쓰러졌고, 대열은 순식간에 흩어졌다.
대구경찰서에서는 시위대가 계속 경찰서장을 향해 무장 해제를 요구했다. 대구사대 교수 이종하, 백갑룡, 대륜중학교 교사 정희준 등 5명의 시위대 대표단은 대구경찰서에 들어가 서장과 미군정 경찰 고문을 만났다. 10시 반이 되자 손기채, 장적우, 최문식, 이재복 등 민전 대구시위원회 요인들도 도착했다. 대표단과 민전으로 구성된 협상단은 항쟁 지도부의 성격까지 가진 것은 아니었으나 협상을 통해 경찰의 무장 해제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제5관구경찰청장과 대구경찰서장은 협상단의 설득과 몇몇 경관들의 시위대 참여 등으로 인해 총을 무기고에 넣기로 약속했다. 협상 결과를 협상단이 보고하자 군중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하였다. 이윽고 유치장 열쇠까지 시위대에 넘어와 전날 잡혀갔던 구속자 100여 명도 석방되었다.
대구역 앞 발포와 대구경찰서 점령 소식까지 전해지자 상황은 이제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갔다. 시내 곳곳에서 빈민들을 주축으로 한 기층 민중은 총이나 칼 혹은 몽둥이를 들고 봉기했다. 이들은 떼를 지어서 경찰서나 파출소를 파괴하고 경관들을 공격했다. 경관들은 폭행당하거나 심지어는 참혹하게 살해당하기도 하였다. 이들이 공격받은 이유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경찰에 대한 민중의 분노가 어마어마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고관대작들과 부자들의 집이 습격당했는데 반월당 약전골목 근처의 진골목이 그러하였다. 실제로 이들은 시민들이 식량난으로 굶고 있을 적에도 부를 누리고 있던 자들이었다. 전매청장 자택의 경우에는 비단은 물론이고 깨와 꿀단지까지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어쩌면 이날의 폭력은 피해당사자들한테는 분명 비극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끊임없이 쌓여왔던 민중의 분노가 터졌을 때 얼마나 무시무시한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기층 민중의 봉기가 자연발생적이고 미조직적이었음을 것을 지적할 필요가 있겠다.
저물녘 민중들은 탈취한 쌀과 광목 등의 물건들을 달성공원에서 빈민들에게 배급하였다. 청년들은 완장을 찬 상태로 배급을 돕거나 시내의 교통을 정리하였다. 시내를 중심으로 대부분 가게와 문화시설들은 시위를 지지한다는 의미로 가게 문을 닫아걸었다. 상인들은 시위에 참여한 학생과 노동자들에게 신발과 막걸리를 공짜로 나눠줬으며, 은행원들과  시·도청 직원들도 시위 장소로 몰려가 동참하였다. 오후 2~3시경 시위가 절정에 달했을 때는 경북도청의 부장급 이상 고위 간부들도 총사직을 토의하기도 했으며, 과장급들은 「시민에게 사과함」이란 성명을 발표하고 총사직을 결의하였다. 대구의사회는 경찰이 시민에 대한 발포를 중단하지 않으면 다친 경관들을 치료하지 않겠다고 경고문을 발표하였다. 실제로 의사들과 간호사들은 경찰들을 병원에 들여보내지 않기도 하였다. 이렇게 10월 2일의 시위는 대구 시민 대다수가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민중항쟁이었다.
그 사이 경찰서에 있었던 청년, 학생 시위대는 시내의 상황을 전혀 모른 채 연좌시위를 이어갔다. 오후 3시경 미군은 장갑차를 이끌고 나타났고, 이때부터 놀란 시위대는 점차 해산하였다. 중학생들은 귀가했고, 대학생들은 대구사대에 모여 정리 집회를 열었다. 노동자들은 노동조합 사무실이나 직장으로 향했다. 이렇게 대구에서의 시위는 일단락되는 듯했으나 여전히 민중의 봉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항쟁 첫날부터 상황을 바라보던 미군정은 범시민적 봉기에 매우 놀랐다. 그리하여 오후 4시 협상단 인사들과 접촉했으나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오후 5시, 미군정은 마침내 계엄령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당시 계엄사령관 포츠 대령의 이름으로 나온 포고 제1호의 내용은 이랬다.
① 계엄령을 포고한다.
② 경찰이 치안을 유지할 것이다. 최후수단으로 군대가 사용될 것이다. 시민은 절대로 경찰에 복종하여야 한다.
③ 10명 이상의 집회와 회의를 금지한다.
④ 오후 7시부터 다음 날 아침 6시까지의 야간통행을 금지한다.
⑤ 화물자동차 등 제 운수기관의 사용은 식량 배급에만 허가한다. 그 이외 사람의 승용은 절대로 허가 아니한다. 만약 대구지역에서 이 포고에 위반하면 자동차를 몰수할 것이다.
오후 늦게는 충북에서 응원경찰이 내려왔으며, 오후 7시부터 통금이 실시되어 시위 참여 여부를 막론하고 큰길에 다니던 시민들이 체포되었다. 이 때문에 집회를 마치고 직장에 돌아와 있던 노동자들의 경우 잡히지 않도록 3~4명이 짝을 지어 몰래 도주하여 귀가해야 했다. 다음 날에도 검거 선풍은 이어져서 시위에 참여했거나, 혹은 참여했다고 의심되거나, 혹은 대중단체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 붙잡혔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10월 3일 관공서에서는 파업이 일어났다. 전날 간부들의 결의에 따라 과장급 이하의 경북도청 직원들이 총사직을 하겠다며 나선 것이었다. 대구부청, 금융기관, 일반회사들도 일손을 놓았다. 대구에서의 항쟁은 10월 8일 파업 노동자들이 복귀함으로써 종료되었다. 하지만 항쟁의 불씨는 대구 근처의 지역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대구의 청년들이 항쟁의 소식을 전하러 농촌으로 향헀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대구의 항쟁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을까? 박헌영의 기록에 의하면 경찰 4명과 민간인 18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더 많이 희생된 것으로 보인다. 미군정이 희생자들의 시신을 촬영한 사진을 보면 숫자를 표기한 종이를 붙인 게 보이는데, 24가 나와 있는 사진이 있어 최소 24명 정도가 죽은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 숫자가 민간인 희생자만의 것인지 아니면 경찰 사망자를 포함한 것인지는 미지수다. 1946년 11월 14일 『대구시보』는 대구부청 후생과의 발표에 따라 민간인 23명과 경찰 및 관리 11명이 사망했음을 밝히고 그 명단을 보도했다. 이중 민간인 희생자 23명의 명단을 여기 올리며 글을 마친다. 이름 뒤에는 괄호로 나이와 직업을 함께 적었으며, 확실하지 않은 단어는 □로 표기하였다.
정순이(71, 무직)
김득성(63, 무직)
김학도(55, 상업)
홍명수(47, 기자)
이상익(46, 노동)
심낙원(45, 무직)
김용준(42, 식량배급소)
추홍엽(40, 노동)
장용현(38, 노동)
변익진(37, 기재 착오)
권인택(32, 철공)
이성윤(29, 철공)
김용태(27, 역수)
신일봉(26, 목공업)
박영호(24, 조해 직원)
박돈생(24, 운수 서기)
□태석(24, 노동)
문석출(23, 조해 인부)
박도문(23, 부서기)
박성호(22, □회 간사)
이철연(20, 행상업)
황팔봉(19, 양복업)
서철군(17, 역기관구원)
(이후 계속)
* 이 글은 언론인 정영진의 『폭풍의 10월―대구 10·1 사건을 일으킨 사람들과 그 이데올로기』(한길사, 1990), 소설가 안재성의 이일재 선생 전기 『이일재, 최후의 코뮤니스트』(인문서원, 2016),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 김상숙의 『10월 항쟁―1946년 10월 대구, 봉인된 시간 속으로』(돌베개, 2016)를 기반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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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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