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민주주의ㅡ③] 3. 인민대표대회제도의 시련

김정호 북경대 박사/전 민주노총 정책연구원 자문위원

 

제1장 중국 ‘인민대표대회’의 역사
1. 인민대표대회의 전사(前史)
2. 인민대표대회제도의 확립 (지난 호)

 

3. 인민대표대회제도의 시련

 

인민대표대회제도가 확립된 후 1957년 말까지 3년간은 비교적 순탄한 발전을 하였다. 사회주의 개조의 전국적 열기 속에서, 제1기 전인대 2차 회의(1955년7월5일~30일)는 <고급농업합작사 시범규정>등 수많은 경제법규를 제정하여 사회주의 건설이 순조롭게 진행되도록 보장하였으며, 국민경제발전 제1차 5개년계획을 심의하고 통과시켰다.
또한 인사 임명권을 행사하여 1957년 말까지 전인대 상무위원회는 국무원 총리 주은래의 추천으로 2인의 부총리를 임명하고, 19인의 국무원 소속 부장급(한국의 장관급) 지도자의 임면(任免)을 결정하였다. 또 3인의 최고인민법원 부원장, 최고인민법원 각 청의 청장과 부청장, 4명의 최고인민검찰원 부검찰장 등을 임명하였으며, 중국인민해방군 총창모장과 총정치부 주임 등도 임명하였다.
이와 함께 전인대 및 상무위원회는 성립한 날부터 자신의 조직기구, 사업절차, 업무제도를 만드는 등 내실 강화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제1기 전인대 상무위원회 제16차 회의에서 판공실의 설치와 그 인원 구성을 확정하였다. 그리고 판공실에 법률실, 연구실, 비서실, 고문실, 민족실, 외사실(外事室), 인민접대실, 총무처를 설치하였다.
매회 대회 기간 중 전인대 및 지방 각급 인대는 인민 대표들의 많은 제안을 접수하였다. 제1기 전인대 1차 회의(1954년 9월)는 39건의 제안을 받았으며, 제2차 회의(1955년 7월) 214건, 제3차 회의(1956년 6월) 176건, 제4차 회의(1957년 6~7월) 243건 등 시간이 갈수록 대표들의 제안 건수도 늘어났다. 이것은 인민 대표들이 자신의 지위와 역할에 대해 날로 분명한 인식을 갖고, 또한 자신의 업무에 대해 익숙해지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 이 같은 현상은 전인대 뿐만이 아니라 지방 인대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났다. 예컨대 강서성 제1기 인대는 404명의 대표가 있었는데, 성 제1기 인대 제1차 회의(1954년 7월)때는 870건의 제안을 받았다. 제2차 회의(1955년 2월)는 605건, 제3차 회의(1955년 8월)는 367건, 제4차 회의(1956년 5월)는 558건, 제5차 회의(1956년 10월)는 1028건, 제6차 회의(1957년 3-4월)는 1048건의 제안을 받았다.

이리하여 1957년 말에 이르면 인민대표대회제도는 큰 발전을 이루어 점차 공고화되었다. 중국은 초보적으로 인민대표대회를 축으로 하는 정치생활 질서가 형성되었다고 말 할 수 있다.
하지만 무릇 사물의 발전이 그러하듯이 신생 인민대표대회제도의 발전 역시도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1958년 무렵부터 국내외 정세가 급변함에 따라 이 제도는 시련과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1) ‘대약진운동’ 시기의 시련

생산수단의 사회주의적 개조의 기본적 완성에 따라, 1956년 이후 중국은 새로운 역사발전 단계에 진입하게 된다. 그런데 이 무렵 국내외 정세 모두에서 중대한 변화가 발생하였다.
우선, 국제적으로는 소련공산당 제20차 당 대회를 계기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제국주의세력이 반공•반사회주의 물결을 대대적으로 불러 일으켰다. 동구의 일부 국가들은 소련의 대국주의 오류를 묵인한 채, 소련의 경험을 그대로 베껴 고도로 집중화된 중앙집권 체제를 실행하였다. 이에 따라 산업적으로 지나치게 중공업에 치우침으로써 물자 부족과 화폐의 불안정 때문에 인민의 불만이 높아졌다. 거기에다 국내외 반동세력의 선동으로 소요가 발생하였다.
제국주의는 이런 기회를 틈타 전 세계적으로 반공•반사회주의 물결을 일으켰다. 유엔을 조종하여 헝가리 내정에 간섭하게 하는 한편, 사회주의국가를 공격하는 반동적 결의를 통과시켰다. 설상가상으로 각국 공산당 간에는 폴란드와 헝가리 사건의 성격과 원인 및 소련군의 출병 등에 대한 인식에 있어 불일치가 발생함으로써, 국제공산주의운동 내부에는 심각한 혼란이 출현하였다.
중국 국내적으로 보면, 사회주의 개조가 기본적으로 완성됨에 따라 중국에서는 사회주의제도가 초보적으로 수립되었다. 이에 따라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 간의 모순이 기본적으로 해결되고, 그 대신 ‘인민내부 모순’이 점차 돌출하게 되었다. 게다가 1956년 무렵부터 당이 사회주의 개조와 각 사업을 지도함에 있어 조급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부에선 엄중한 관료주의가 출현하였으며, 위의 폴란드•헝가리 사태의 영향을 받아 중국 국내에서도 일부 불안한 요소가 포착되었다.
1956년 7월부터 1957년 봄까지 전국 각지에서 모두 1만여 명의 노동자가 파업에 참여하였다. 11개 성 2개 시의 일만 여명 학생들은 동맹휴학을 하였으며, 또 일부 성과 자치구의 농민들은 농촌합작사를 탈퇴하겠다며 소란을 피웠다. 1957년 상반기에는 수도인 북경까지 올라와 상방(上访)*하고 고소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증가하였다.

* 상방(上访)이란 중국에서 민중이 자신들의 요구를 표현하는 한 방법이다. 공민, 법인 또는 기타 조직이 서신, 이메일, 팩스, 전화, 방문 등의 형식을 이용하여 각급 인민정부, 현급 이상 인민정부 업무부서에 상황을 반영하고 건의나 의견 또는 민원 요청을 제출할 수 있다. 관련 행정기관에선 법에 따라서 이를 처리해야 한다.

이에 대해 중국공산당이 1957년부터 반우파투쟁을 확대함에 따라 당 사업에 있어 엄중한 실책이 나타났다. 이로부터 사회주의 건설은 우여곡절의 발전과정을 밟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958년 시작된 ‘대약진’과 ‘인민공사운동’은 사회주의 경제건설에 심각한 부정적 결과를 가져왔다. 지나치게 높은 생산목표, 엉터리 지휘, 허풍과 ‘공산풍(共産風)’을 상징으로 하는 ‘좌경적’ 오류가 범람하였으며, 국민경제의 종합적 균형은 파괴되었다. 거기에 심각한 자연재해와 함께 소련 지도층과의 반목으로 경제원조 협약이 파기되는 일까지 겹쳐졌다. 이에 따라 1959년~1962년 기간 중국의 국민경제는 크게 후퇴하고, 사회주의 경제 건설은 중대한 좌절을 겪게 되었다.

▲ 대약진 운동

▲인민공사 식당에서 식사하는 모습

하지만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중국공산당은 사업 추진 과정에서 출현한 잘못에 대해 적시에 교정할 수 있는 자정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1961년 1월 당 제8기 9중 전원회의에서는 정식으로 국민경제에 대해 ‘조정, 공고, 충실, 제고’의 8자 방침이 채택되어 실행되었다. 이로써 국민경제는 1963년부터 1966년까지 빠르게 회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정치적으로 좌경적 분위기가 근본적으로 고쳐진 것은 아니었다. 1959년 ‘루산회의(庐山会议)’에서 원래 ‘좌경’ 오류를 교정하려던 계획은 전혀 예기치 않게 ‘반우파 투쟁’으로 180도 전환하였다. 이에 따라 팽덕회 등 일부 당의 과오를 직언한 동지들이 잘못된 방식으로 난폭한 ‘타격’을 받았다.
회의가 끝난 후 전국적 범위에서 대규모 ‘반우파’ 투쟁이 전개됨으로써 3백 수십만 명의 간부와 당원이 비판을 받거나 우경 기회주의분자로 몰렸다. 이 때문에 당내 민주주의는 중앙에서부터 지방까지 큰 손실을 입게 되었으며, 정치적으로도 엄중한 후과를 초래하였다. 당내의 개인숭배가 점차 발전하였으며, 모택동의 개인적 독단은 당내 민주집중제와 집단지도체제를 심각히 손상시켰다.

▲당내 좌경노선을 강화시킨 계기가 된 1959년 루산회의(庐山会议)

당내 민주주의가 손상됨에 따라, 인민민주주의 건설 역시도 큰 좌절을 겪게 되었다. 애초 1958년의 ‘대약진’과 ‘인민공사운동’은 전국인민대표대회 및 그 상무위원회의 토론과 결의를 거치지 않은 채 당 내부에서 결정된 후 경솔하게 발동되었다.* 헌법과 법률이 확정한 일련의 중요한 원칙들, 예컨대 공민은 모두 법 앞에 평등하고, 법원은 독립적으로 재판권을 행사하며, 검찰은 독립적으로 검찰권을 행사한다는 등의 내용이 모두 자본가계급의 것이라고 비판되고 부정되었다.

* 당내 결정이 전인대의 토론과 결의를 거쳐서 실행되는지 여부는 여러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선 하나의 정책이 ‘공개화’ 되는 과정에서 사회 각 집단의 의견이 반영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여기서 잘못된 부분은 사전에 걸러지고, 올바른 방향이라면 내용이 더욱 풍부해 질 수 있다. 또 결의가 통과된 이후에도 사회 전체적으로 더욱 공고한 공감대를 형성한 가운데 여기에 더해 합법적 절차에 따른 ‘권위성’까지 더해져서 강력한 추진력을 얻을 수 있다. 집행과정에서도 인민대표대회의 감시와 감독을 받게 되므로, 만약 잘못된 결정이었다면 그 오류는 적시에 발견되고 수정될 수 있다. 

특히 1959년 이후 ‘법률 허무주의’가 범람하였다. 이 때문에 국가생활에서 시급하게 필요한 일부 중요 법률 예컨대 형법, 형사소송법, 민법, 민사소송법의 초안 작성 작업이 중단되었다. 다른 한편 법이 있어도 의지하지 않게 되었으며, 말로 법을 대신하고 권력으로 법을 압박하는 현상이 날로 늘어나서 사회주의 ‘법제도 건설’은 큰 손실을 입게 되었다.
이 기간 모택동 개인의 독단적 작풍은 점차 당내 민주집중제 원칙의 근간을 뒤 흔들기 시작했다. 개인이 당 중앙위원회의 위에 군림하는 개인숭배 현상이 점차 발전하였다. 당시 국가주석인 유소기는 비교적 명확하게 당정 관계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면서, 각급 당 조직이 인민대표대회의 사업을 대체해선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하지만 이 같은 당정 관계를 바로잡고자 하는 노력은 중시 받지 못했다. 반대로 1958년부터 당이 정부를 대신하는 현상이 수시로 발생하였으며, 또 점차 강화되는 추세를 보였다. 이에 따라 인민대표대회가 적극적으로 자신의 직능을 수행하는데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국가의 많은 중대 사항은 전국인민대표대회와 그 상무위원회의 토론과 결정을 거치지 않은 채 곧 바로 당에 의해 결정되어 실행되는 것이 점차 관례화되었다.*

* 1958년 ‘대약진’ 운동이 그 전형적인 실례이다. 이 운동은 필히 국민경제 발전계획과 국가 재정예산의 조정과 큰 변화를 수반하였지만, 그것은 전국인민대표대회와 그 상무위원회의 토론이나 결의를 전혀 거치지 않은 채, 당 지도부가 북대하(北戴河) 회의에서 결정한 후 전국적 범위에서 신속하게 전개되었다. ‘인민공사운동’ 역시 그러하였다. 인민공사 이전의 향은 ‘1954년 헌법’이 새로 확정한 1급 기층행정단위이자 독자적인 경제조직이었다. 인민공사는 노동‧농업‧군대‧학교‧상공업을 한데 결합한 제도로서, 정치‧경제‧문화‧군사의 통일체라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1954년 헌법’이 규정한 농촌 기층정권의 조직체계를 변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1957년 제1차 5개년계획을 초과 완성한 후, 1958년에 국가의 제2차 5개년계획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계획은 느적대면서 전국인민대표대회에 보고하여 심사와 비준을 받지 않았다. 제2기 전인대 상무위원회 제99차 회의 때가 되어서야 국무원부총리 겸 국가계획위원회 주임인 이부춘(李富春)이 수행한 제2차 5개년계획 후의 2년간의 조정계획과 계획집행 상황에 관한 보고를 들을 수 있었다. 이렇듯 당-정이 엄격히 분리되지 않은 채 당이 정부를 대신하는 추세가 강화되었다. 개인독단과 개인숭배가 발전함에 따라 전인대 및 그 상무위원회의 국가 중대 사업에 대한 결정권은 날로 취약해졌다. 전국인민대표대회 회의에서 국민경제계획과 재정예산에 관한 심의는 대부분 형식에 치우쳐졌다.

지방 각급 인민대표대회의 활동 역시 큰 영향을 받았다. 헌법과 지방조직법이 부여한 직권을 충분히 행사할 수 없었으며, 많은 중대 사항이 단지 지방 당위원회 혹은 인민위원회(지방정부)의 결정만으로 수행되고 지방 인대의 비준을 받을 필요가 없어졌다. 가끔씩 지방 인대에 건네져 심의와 표결에 부치긴 하였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형식에 불과하였다.
이런 와중에서 인민대표대회제도 자신에 대한 건설 노력 역시 약화되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전인대 상무위원회가 제출했던 전인대 내에 정법(政法), 재경(財經), 중공업, 경공업, 농업, 교육, 외교 등 8개 상설위원회와 국무원 소속 각부 위원회에 대응하는 상설위원회를 설립하고자 하는 방안은 1957년 반우파투쟁에 막혀 방치되었다. 1959년 이후 전국적 범위에서 기구 간소화가 실시되었는데, 전인대 및 그 상무위원회 산하 기구는 몇 차례 철폐 및 합병을 거치면서 인원이 간소화되어 가장 적을 때는 겨우 100명 정도 남게 되었다.
이처럼 자신의 조직과 제도가 쇠약해지는 것과 함께 전인대 및 각급 인대의 회기가 비정상적이 되면서 의사일정은 시간이 갈수록 파괴되었다. ‘1954년 헌법’에 따르면 전국인민대표대회 매기 임기는 4년이고, 매년 한 차례씩 회의를 개최하도록 되어 있다. 임기 만기 2달 전에는 전인대 상무위원회가 반드시 차기 전인대 대표의 선거를 완성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제1기 전인대가 1958년 2월 1일 제5차 회의를 개최함에 따라, 그 임기는 4년 7개월에 달하였다.
1961년 한 해 동안 전국인민대표대회가 개최되지 못했다. 제2기 전인대 3차 회의(1962년 3월~4월)는 두 번이나 연기된 후 개최되었으며, 이에 따라 제2차 회의와의 시간 격차가 2년이나 되었다. 제2기 전인대 4차 회의(1963년 11월~12월)가 한 차례 연기되어 제3차 회의와의 시간차는 근 19개월이 되었다. 이 때문에 제2기 전인대의 임기 역시 5년 8개월에 이르렀다.

2) 문혁시기의 고난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잠시 억제되었던 당내 좌경적 경향은 문화혁명으로 그 전면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문혁기간 전인대 및 그 상무위원회는 마비 혹은 반 마비상태에 빠졌으며, 겨우 이름만 보존하였을 뿐 최고국가권력 기관으로서의 기능은 완전히 상실하였다. 지방 각급 인대 및 인민위원회 또한 당•정•군, 법원•검찰 등의 권력을 한 몸에 집결시킨 ‘혁명위원회’에 의해 대체되었다. 이에 따라 1954년 헌법에 의해 확립된 국가 정치제도에 커다란 변형이 발생하였다.
문화대혁명은 1966년 5월부터 1976년 10월까지 10년간 지속되었다. 그 정식 명칭은 ‘무산자계급 문화대혁명’인데, 그 발전 과정을 3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제1단계ㅡ 이 시기는 1966년 5월부터 1969년 4월 중국공산당 제9차 당 대회 개최까지이다. 1966년 5월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와 같은 해 8월 8기 11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의 개최는 문화대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이다.
이 두 차례 회의에서 <5·16 통지>와 <무산자계급 문화대혁명에 관한 결정>이 통과되었다. 이 무렵 이른바 팽진, 나서경, 육정일, 양상곤이 관련된 ‘반당그룹’과 소위 ‘유소기, 등소평 사령부’에 대한 잘못된 비판이 가해졌다. <5.16통지>에 따라서 5월 28일 중공 중앙위원회는 진백달을 조장으로 하고, 강생(康生) 등을 고문, 강청과 장춘교 등을 부조장으로 하는 ‘중앙문혁소조’를 설치하였다. 이후 문혁소조는 점차 중앙정치국과 중앙서기처를 대체하여 ‘문화대혁명’의 실질적인 지도부가 되었다. 이 단계의 중심 임무는 ‘자본가계급 사령부’를 파괴하고 자본주의의 길을 가는 당권파에게서 권력을 탈취하는 것이다.

▲문화대혁명 때 대자보를 부치는 모습

▪제2단계ㅡ 1969년 4월 중공 제9차 당 대회 개최부터 1973년 8월 제10차 당 대회 개최까지이다. 이 단계의 주요 사건은 임표 반혁명 집단이 최고 권력을 탈취하기 위한 반혁명 쿠데타를 책동하였는데, 이 음모를 분쇄한 것이다.
이 사건은 문화대혁명의 객관적 실패를 선고한 의미를 지녔다. 이후 주은래 총리가 중앙의 일상 업무를 주재하면서 각 사업에 있어 일정한 전기가 마련되었다.
▪제3단계ㅡ 1973년 8월 중국 공산당 제10차 당 대회 개최 이후 1976년 10월 ‘4인방’이 분쇄될 때까지이다. 제10차 당 대회는 제9차 때의 ‘좌편향’ 노선을 여전히 답습했다. 왕홍문이 당 중앙부주석이 됐는데 강청, 장춘교, 요문원, 왕홍문은 중앙정치국 내에서 공공연히 ‘4인방’을 결성하여 자파 세력을 강화시켜 나갔다. 이 때문에 이 단계에서의 주요 투쟁은 강청 등 ‘4인방’과의 투쟁이다.
1976년 9월 9일 모택동이 사망하자 ‘4인방’은 반혁명 행보를 가속화했다. 왕홍문이 당 중앙의 지도를 대체하려고 기도했으며, 상해에서는 실제로 민병들에게 무기를 나누어 주며 무장 반란을 준비하였다. 다행히도 화국봉, 엽검영, 이선념 등이 주축이 된 중앙정치국이 강청 반혁명 집단을 결정적 순간에 분쇄하였다. 이로써 당을 살려냈으며, 10년에 걸친 ‘문화대혁명’의 재앙을 종식시킬 수 있었다. 1977년 8월 중국 공산당 제11차 당 대회는 문화대혁명의 종식을 공식 선언하였다.

▲4인방 분쇄를 축하하는 군중들

문화대혁명의 오류에 대해 몇 가지를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중국사회의 주요모순에 대한 그릇된 판단이다.
‘문화대혁명’은 맹목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닌 나름의 이론에 의해 지도된 운동이다. 따라서 문혁의 오류는 근본적으로 그것을 지도한 이론상의 오류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문혁을 지도한 이론은 다름 아닌 ‘프롤레타리아독재 하의 영속혁명’ 이론이었다. 이 이론은 1957년 이후 당내에서 날로 성장하는 ‘좌경적’ 오류가 발전한 것으로서 이후 점차 체계화되었다.
맑스주의는 일찍이 혁명의 근본문제는 국가권력의 문제라고 강조하였다. 레닌은 “혁명이라는 개념의 엄격한 과학적 의의에서 말하든 혹은 실제 정치적 의의에서 말하든, 국가권력이 한 계급의 손에서 다른 계급의 손으로 옮겨지는 것은 모두 혁명의 첫 번째 기본적인 표식이다.”*고 하였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계급혁명의 근본임무는 자본가계급의 국가기구를 분쇄하고, 노동자계급이 중심이 된 새로운 국가권력을 세우는 일이 된다. 이 임무를 해결하지 못하면 착취제도를 철저하게 근절할 수 없으며, 사회주의제도 역시 건설할 수 없다.

* 레닌, “전술론”, <레닌선집>제3권, 인민출판사 1995년 판, p25.

하지만 노동자계급과 근로인민이 단결하여 일단 국가권력을 탈취하고 통치계급으로 변신한 뒤에는, 특히 생산수단 사유제에 대한 사회주의 개조를 완성한 이후에는 사회주의제도가 기본적으로 건설됨으로써 계급으로서의 착취계급은 일단 소멸하게 된다. 이 때문에 사회의 주요모순은 기왕의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의 노자간의 모순에서, 인민의 날로 성장하는 물질 및 문화에 대한 욕구와 낙후된 사회생산력 간의 모순으로 전화한다. 이 같은 사회 주요모순의 변화는 당연히 정권을 장악한 노동자계급과 그 정당의 주요 임무 또한 변화시킨다. 이때부터는 사업의 중점은 정권을 이용하여 사회생산력을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옮겨져야 한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독재 하의 영속혁명’ 이론은 생산수단 사유제에 대한 사회주의 개조를 완성한 후 이미 기본적으로 해결된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의 모순을 여전히 중국사회의 주요모순으로 간주하였으며, 일정 범위에만 존재하던 계급투쟁을 전면적으로 확대하고 절대화시키는 오류를 범했다. 사회 일부에만 존재하는 계급투쟁을 직접적으로 당내로 끌어들여 계급투쟁의 모순을 당의 상층부로까지 향하게 만들었다.*

* 물론 맑스주의 또한 문화혁명의 중요성을 언급하지만, 맑스레닌주의의 본래 의미상의 문화혁명은 노동자계급이 정권을 장악한 이후 교육•문화•과학 사업을 발전시키고, 문맹•미신•우매와 낙후된 현상을 제거함으로써 인민대중의 소질과 국가의 민주적 관리 수준을 높이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과학‧문화 등 방면에서 유례없는 파괴와 후퇴를 가져온 ‘문화대혁명’과는 전혀 의미가 다른 것이었다.

둘째, ‘프롤레타리아독재 하의 영속혁명’ 이론에 입각한 혁명 대상과 혁명 성격 모두 잘못되었다. 실제 문혁에서 혁명대상에 대한 명확한 판단기준은 없었으며, 혁명전쟁의 오랜 시련을 겪어온 많은 지도급 간부들이 ‘주자파(走资派)’로 내몰렸다. 학문적 소양이 있는 지식분자들은 ‘반동학술의 권위자’로 내몰려 소위 ‘프롤레타리아독재’의 대상이 되었다. 이는 성격이 다른 적대적 모순과 인민 내부의 모순을 완전히 혼동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셋째, 문화대혁명의 방식과 방법 또한 잘못되었다. 그것은 엄중하게 헌법을 짓밟고 법과 제도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1966년 8월 중공 제8기 11차 중앙위원회에서 통과된 <무산자계급 문화대혁명에 관한 결정>은 ‘문화혁명소조’, ‘문화혁명위원회’가 “위대한 역사적 의의가 있는 새로운 사물”이며, “프롤레타리아 문화혁명의 권력기구”라고 명시하였다.
문화대혁명은 이처럼 시작부터 국가와 지방 각급 권력기관인 인민대표대회를 무력화하고 헌법을 위반하였으며, 대자보•대변론 등으로 인민의 민주적 권리를 대체하였다. 그리하여 문혁이 제창한 ‘권력쟁탈’ 투쟁은 “일체를 타도한다!”는 전면적 내란과 무정부주의의 광란을 불러일으켜 유례없는 재난을 가져왔다. 이 같은 정세 하에서 인민대표대회제도가 전면적으로 짓밟히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인민대표대회 및 그 상무위원회의 활동이 장기간 중단되었다. 제3기 전인대 상무위원회 제33차 회의(1966년7월7일)가 전인대 상무위원회의 마지막 회의가 되었다. 이 회의 이후 1975년 1월 제4기 전인대 1차 회의가 개최되기까지 무려 8년 반이나 걸렸다.
제반 국가기관 역시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마자 조반파(造反派)는 각급 공안, 검찰, 법률 기관을 첫 번째 공격목표로 삼았다. 이것들이 선후로 차례로 부서지면서 사회주의 법제 역시 파괴되었다. 강청은 “공안부, 검찰원, 최고인민법원 모두 자본주의 국가로부터 옮겨온 것이고, 당 위에 건설된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관료기구이며, 근래 줄곧 모 주석과 대항하였다.”고 선동하면서 국가 제 기관에 대한 파괴를 선동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무고한 박해를 당했다. 나중에 임표, 강청 두 반혁명집단의 <기소장> 중에 기록된 통계에 따르면, 문화대혁명 기간 중 당과 국가 지도자 중 무고를 당한 사람들은 모두 38명이다. 기타 중앙 당‧정‧군 지도급 간부, 각계 저명인사 가운데서 무고를 당한 사람은 382명, 잔인한 박해를 받은 간부와 군중은 70여만 명, 실제 박해를 받아 죽은 사람은 3만4천여 명이나 되었다. 억울한 사건으로 모함을 받고 연좌를 당한 사람도 1억 명 이상에 달했다.*

* 중공중앙문헌연구실, <‘건국 이래 약간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 주해석본>(수정판), 인민출판사, 1985년, p392.
인민이 선출한 수많은 중앙과 지방의 지도급 간부들이 타도되었다. 위로는 국가주석, 전인대상무위원회위원장, 부위원장, 위원, 국무원부총리, 각부 부장에서, 밑으로는 지방 인대 대표, 기층간부, 일반대중에 이르기까지 공개 비판을 받거나 감옥에 갇혔으며, 심지어는 박해를 받아 죽기까지 하였다. *(계속)

* 기록에 따르면 1968년 8월 강생(康生)은 제3기 전인대 상무위원회 위원들을 무고하는 명단을 만들었다. 당시 115명의 전인대 상무위원회 위원 중 60명이 ‘배반자’, 특무‘, ’특무혐의‘, ’반혁명 수정주의분자‘, ’주자파‘, ’3반분자(三反分子)‘ 혹은 ‘엄중한 문제가 있음’ 등으로 무고되었다. 이들은 젼후로 모두 박해를 받았는데, 전인대상무위원회 위원장 주덕(朱德), 부위원장 팽진(彭真), 이정천(李井泉), 임풍(林枫), 유영일(刘宁一), 장치중(张治中) 등이 모두 재난을 피하지 못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유소기가 불법적으로 격리되어 비판받고 옥에 갇히어 한을 품은 채 세상을 떠난 것은 문화대혁명 중 가장 큰 억울한 사건에 속한다. 국가주석이자 당중앙 부주석이 당규약이 규정한 충분한 토론도 없이, 국가의 아무런 법률적 절차에 따른 기소와 심판도 없이, 더더욱 전국인민대표대회의 토론과 결정을 거치지 않은 채 또 본인의 어떠한 변명도 허락되지 않은 채, 단지 위증자료(날조한)에 의거해 직위해제를 당하고 타도되었다. 이는 문화대혁명 기간 중화인민공화국 헌법과 법률이 어느 정도까지 짓밟혀졌는지, 문화대혁명 기간에 중국 사회주의 민주주의와 법제가 얼마나 파괴되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유소기는 비밀리에 허난성 개봉에 압송되어 구류되었다. 1969년 11월 12일 지병이 있던 그는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한을 안고 세상을 떠났다. 국가주석이 이렇듯 재난을 면하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일반 서민들이 어떤 안전함을 느낄 수 있었겠는가? 최고인민법원의 1980년 9월 이전 통계에 따르면, 유소기사건에 연류 되어 반혁명죄의 판결을 받은 것만 해도 2만6천여 건에 인원수는 2만8천여 명에 달했다. 이상, [중]尹世洪 朱开杨 공저, 2002년,<인민대표대회제도 발전사>, 강서인민출판사, pp170-174 참조.

▲법정에 들어서는 강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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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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