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정치적 박해를 피해 한국에 들어온 ‘난민’입니다(나즈물)

나즈물

(이주난민 커뮤니티 활동가)

 

안녕하세요. 저는 이주난민 커뮤니티 활동가 나즈물 이라고 합니다.

저의 국적은 방글라데시예요. 저는 1999년부터 2006년까지 방글라데시 B.N.P당에서 국제 활동을 했습니다. 2006년 10월 30일 방글라데시에 있는 나비나글 지역에서 여당 아와미리그 학생사무총장은 테러리스트에 의해 사망했습니다. 여당 아와미리그 학생사무총장 사망에 대해 저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당 아와미리그와 활동가가 사망사건에 대해 나와, 같이 활동하는 5명을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여당 아와미리그 사람들은 내가 죽였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저에게 이야기했습니다. “너는 방글라데시에서 안전하게 살 수 없다. 그래서 너는 외국에 가서 살아라. 이 문제가 없어지면 방글라데시로 들어와라.” 그래서 2006년 11월 27일에 대한민국에 산업 연수생으로 왔습니다.

2011년도에 방글라데시 바르먼바리야 법원에서 ‘여당 아와미리그 사무총장을 나와 내 친구들이 같이 죽였다. 내가 방글라데시에 들어가면 감옥에 10년 살아야 된다.’는 판결이 나왔습니다.

2012년 12월 나는 한국에 난민 인정신청을 했습니다. 나는 한국에 난민 신청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처음 난민 신청을 했을 때 2년 동안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난민법에 따르면 난민 인정 신청자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나는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때부터 난민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전부터 나는 힘들게 살았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2014년에 서울 출입국사무소에서 나는 난민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15년 2월 나는 서울 행정법원에 난민인정 신청을 하였습니다. 1년 동안 그렇게 시간을 보냈습니다.

2016년 1월13일, 행정법원에서 판결을 내렸습니다. ‘나를 난민 인정하여 받아 줄 수 없다.’ 그래서 내가 지금 2심을 서울 고등법원에 신청을 했는데 신청비가 42만원에 나왔습니다. 나는 돈이 없어 다른 친구한테 빌려서 신청비를 보냈습니다. 내가 지금 한국에 살기가 힘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들어가면 죽습니다. 경찰이 나를 잡으려고 할 거예요. 감옥에서 10년을 살아 합니다!

저는 방글라데시에서 정치적 박해를 수차례 받았습니다. 방글라데시 법원에서 판결이 나온 것에 따르면 10년 동안 징역형과 한화로 20만원의 벌금을 내야 한다고 했습니다. 방글라데시에는 내 얼굴이 들어간 포스터가 배포되었습니다. 포스터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노비나걸 지역에서 아오밀릭정당의 무하마드 모르투스를 누가 죽였나? 첫번째로 노비나지역에 BNP 사트로돌(학생당) 리더 나즈물 후세인이다. 이 사람을 본 사람은 경찰서나 아오밀릭 정당에 이야기 하세요. 만든사람 : 노비나걸 지역 아오밀릭정당]

한국에 온지 3년 만인 2009년 10월 21일에 한국에서 방글라데시로 갔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여당인 아모밀릭 정당에서 정치적 문제에 관해 신청할 경우, 판단해서 잘못 판결이 내려진 것에 대해 사면해준다는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방글라데시에 돌아가 법무부에 사면 신청을 했는데 저는 BNP 정당 소속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했습니다. 만약 신청이 받아들여졌다면 한국에 다시 오지 않고 방글라데시에 남아있을 수 있었습니다.

아오밀릭 정당 사람들은 제가 방글라데시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고 저의 집에 찾아와서 벽돌과 돌, 갖은 무기로 집을 부수고 행패를 부렸습니다. 그 일로 저는 집을 두고 다시 도망갔지만 집에 남아있던 가족들이 많이 다쳤습니다. 아버지가 그 일을 노비나걸 경찰서에 신고를 하려 했지만 아오밀릭 정당 사람들의 반대로 담당 경찰관이 신고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도망 다니다가 한국에 2009년 12월 9일에 다시 입국했습니다.

10월 30일은 아오밀릭 정당의 모르투스의 기일입니다. 그 날 아오밀릭 학생당의 테러리스트사람들이 저희 집에 가서 우리 가족들에게 내가 어디 있는지 물어보면서 ‘나즈물 죽일꺼야 빨리 말해’라며 칼, 돌, 총을 가져와 우리 집 창문을 다 깨트렸습니다. 아버지는 또다시 경찰서에 가서 신고를 했는데 경찰서 사람들은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았습니다. 제 가족들은 안전하지 못한 상황이라 언제든지 아오밀릭 정당 사람들이 또다시 찾아와서 위협을 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방글라데시에 돌아가면 살해당할지도 모르는 협박을 받고 있기 때문에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제가 박해를 받게 된 것은 제가 BNP당원으로 다음과 같은 활동을 했었기 때문입니다.

「1999년도 BNP(방글라데시 내셔널 파티) 당 가입

2000년도 딘드 포루 유니아(작은마을) 지역 사트로돌(학생당)BNP 대표

2003년도 노비나걸 지역 BNP 학생 LEADER

1999~2006년 BNP 당 활동」

저는 어렸을 때부터 지아후로하만(BNP당) 대통령을 존경하여 1999년도에 BNP당에 가입을 했습니다. 2000년도에는 딘드포루유니아(작은마을)지역 사트로돌(학생당)BNP 대표를 했습니다.

딘드 포루 유니아 지역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봉사 활동을 하였습니다. 청년들을 모아서 빈민가에 가서 옷도 나눠주고 쌀도 가져다주면서 살기 좋은 방글라데시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2001년도에 BNP당에서 대통령이 선출되었습니다. 저는 계속 BNP활동을 했고 2003년도에 노비나걸 지역의 BNP 학생 대표로 선출되었습니다.

2004년도에 방글라데시에는 큰 홍수가 있었습니다. 그 홍수로 사람들이 먹고 살기 힘들었습니다. 저는 BNP 정당 학생대표자로 노비나걸 지역을 위해 사람들에게 쌀, 물 등을 조달했습니다. 조달한 비용은 BNP 정당에서 20퍼센트를 부담하고 나머지 80퍼센트는 노비나걸 지역의 돈이 많은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 명단을 만들어 보여주고 무엇이 필요한지 설명하면서 모금을 했습니다. 그 일 때문에 노비나걸 지역의 사람들에게 제 이미지가 많이 좋아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후 2018년, 2023년도 선거에 BNP당 소속으로 나갈 것을 생각했습니다. 주변의 사람들도 저의 이런 생각을 지지해줬습니다.

하지만 그 일 때문에 경쟁 상대였던 아오밀릭 정당 사람들은 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 2006년 10월 30일에 아오밀릭당의 학생당 리더인 모르투스가 테러리스트들에게 흉기로 살해되었는데 원래 저에 대해서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고 있던 아오밀릭 정당 사람들이 제 이름과 제 친구들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워서 고발을 했습니다. 이것은 분명한 정치적 문제(Political issues) 입니다.

2012년 1월 22일 방글라데시 법원에서 비바리아 대법원 재판이 열렸는데 증인으로 서리플이슬람, 코빌후세인, 미잔눌라하만, 가이살 아하메드, 파르베스 미아, 샤코랄 알리 등이 출석해 제가 모르투스를 죽였다고 거짓증언을 해서 저는 10년형의 징역선고와 벌금으로 한화 20만원 가량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재판 당시에 저는 방글라데시에 있지 않았고 한국에 있었기 때문에 재판에 출석할 수도 없었고 누명을 쓴 것에 대해서 충분히 증언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또한 이 문제가 제가 BNP당의 학생 대표로 있었다는 이유로 정치적 문제(Political issues)가 되어 살인자의 누명을 쓰게 된 것이기 때문에 재판 과정에서 충분히 검토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아오밀릭 정당의 증인들만 출석해서 그들의 주장으로 제가 살인자의 누명을 쓰게 되었고 흉기나 지문 같은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증거들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모르투스가 살해된 이후 저는 누가 어떻게 그를 살해했는지에 대해 전혀 몰랐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BNP 사트로돌(학생당) 대표이기 때문에 살해의 누명을 씌워져 억울하게 고발을 당했습니다. 아오밀릭당 군인들이 저를 “살인자”라고 하면서 언론에 떠들고 다녔습니다.

저는 아오밀릭 정당 사람들이 무기를 가지고 저의 가족을 위협하고 저를 포함한 다섯 사람을 죽이려고 찾아다니는 것 때문에 위협감과 공포심을 느껴서 도망을 쳤습니다. 이후 저는 산업연수생 비자를 받고 한 달도 되지 않아 비행기 티켓과 비자를 준비해 한국에 입국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BNP 청년당 대표로 있었던 사람이 여권이나 비행기 티켓에 관해서 제 아버지와 이야기를 하면서 문제를 해결해줬습니다. 2006년 11월 25일 밤에 제 여권으로 비행기 티켓을 받았습니다. 11월 26일 밤 비행기로 한국에 갔습니다. 저랑 같이 26명의 방글라데시 사람들이 한국에 같이 들어왔는데 서로 다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아오밀릭 대표자 모루투스가 살해된 시각에 저는 BNP당에서 주최한 다른 회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 회의는 BNP당이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 각 부문 대표들을 모아놓은 자리였고 노비나걸 사트로돌 대표로 제가 참석을 했습니다. MAHASHIN, SANY 등 여러 학생 대표자들이 같이 참석을 했습니다. 저는 BNP 노비나걸 당 사무실에서 회의에 참석했고 모루투스는 멀리 떨어져있는 아오밀릭 노비나걸 당 사무실에 회의를 참석했다가 살해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던 저를 포함한 5명에 대해서 살해 누명을 씌운 것은 위에도 이야기했지만 당시 우리가 노비나걸 지역에서 홍수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같이 도와주고 모금 활동을 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제가 학생대표자로 교수들을 찾아다니면서 돈 없는 학생들에게 제가 보증을 서고 학교기금으로부터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활동을 하였기 때문에 아오밀릭 정당 사람들은 저의 BNP 사트로돌 대표 활동에 대해서 좋게 생각하지 않았고 뭔가 문제가 생기면 저에게 누명을 씌우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모르투스가 죽고 난 이후에 저는 친구로부터 그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는 어떤 상황인지 잘 모르겠지만 모르투스 장례식에 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때 경찰서에 전화가 와서 제가 모르투스를 죽였다고 신고가 들어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장례식장에 가지 못하고 도망을 다녔습니다. 그 당시에 경찰서, RAB, 군대 사람들과 아오밀릭 정당 사람들이 저희 집에 찾아와서 저를 포함한 5사람을 죽이려고 찾아다녔습니다. 당시는 잠정 정부 (Caretaker government: 차기 내각이 성립 전까지 선거관리)가 원래 3개월이었다가 2년 넘게 지속되면서 정치적으로 많이 혼란스러운 시기였습니다.

오느부이야와 티프라는 친구 2명은 보석으로 풀려났습니다. 그들은 재판 결과가 나오기 전에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변호사가 친구 2명에 대해서 몸이 안 좋기 때문에 보석으로 풀어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2개월에서 3개월 정도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진단서가 나와서 보석으로 풀려났습니다. 그 이후 그 사람들은 인도로 갔습니다. 하지만 저는 함께 고소된 5명중에서 가장 첫번째로 고소된 사람이기 때문에 보석으로 풀려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미 대법원 재판결과가 나왔기 때문에 그 결과가 바뀌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한국은 난민 인정을 받기가 너무도 어려운 국가입니다. 저는 저의 난민 지위를 받기위해 노력하고 있을 뿐 아니라 많이 이주노동자와 난민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가 난민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많은 지지와 관심이 필요합니다.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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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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