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혐오의 정치적 기원4> 《군국주의자 아베 사망과 (신)식민 지배의 현재성》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한국사회에서 중국혐오의 역사는 뿌리가 깊고 넓으며 점점 더 깊어지고 있다. 주지하듯 이 혐오를 조장하는 데에도 역시 언론들이 앞장서고 있다. 심지어 최근 극우 군국주의자 아베의 충격적인 총격 사망 이후에도 어김없이 반중혐오를 조장하는 기사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아베 사망 경축… 3일간 음료 1+1” 현수막 건 中상점들“, 박선민 조선NS 인턴기자, 2022.07.11.)

“[월드리포트] 아베 피격 소식에 ‘좋아요’ 누르는 중국인들”(김지성 기자, SBS 뉴스, 2022.07.10.)

“아베 사망에 중국 네티즌은 ‘샴페인’ 터트렸다?”(한국일보, 2022.07.10.),

“‘아베 암살 축하’…중국 일부 상점, 할인 현수막 내걸고 파티”(JTBC, 2022. 7. 11.)

아베의 총격 사망은 중국 당국이 개입한 것도 아니고 중국인이 이 총격 사건을 일으킨 것도 아닌 중국과 전혀 무관한 사건이다. 그런데 언론들이 이 사건에서도 중국을 비난하고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논조를 사용해서 반중 보도를 하고 있다.

중국혐오를 조장하기 위한 기사였지만, 다음 기사에는 중국인들이 아베에 대해 어떠한 인식, 감정을 가지고 있고, 이 인식은 어떤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지 잘 나와 있다.

중국 온라인 뉴스 포털 ‘펑파이’의 일본 특파원인 쩡잉은 8일 아베 전총리 피격 사건을 보도하는 와중에 아베 전총리의 경력을 전하면서 울먹였다…이에 중국의 누리꾼들은 일본은 남경대학살을 일으켜 중국인 수십만 명을 학살했고, 아베 전총리는 A급 전범을 포함한 전사자를 기리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한 인물이라며 “기자가 일본인인 것 같다”고 저주를 퍼붓고 있다….다른 누리꾼은 “중국 침략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일본 우익을 대표하는 아베 전총리 사망에 중국 기자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니 황당하다”며 “역사 공부 좀 하라”고 질타했다.

또 다른 누리꾼은 “당신의 눈물을 보고 14억 중국인이 분노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고 꾸짖었다.(“아베 사망 보도하며 울먹인 中기자 결국 사과”, JDNet Korea, 2022/07/09)

“14억 중국인들이 분노의 눈물을 흘리”게 하는 일본의 “중국 침략의 역사” 중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난징(남경)대학살이 있다.

중일 전쟁 시 중국의 수도 난징에서 일본 군대가 중국인을 무차별 학살한 사건. 마쓰이 이와네 대장 휘하의 5만 여 일본군이 1937년 12월 중국인 포로와 일반시민을 대상으로 강간·학살·약탈을 자행했고 기관총에 의한 무차별 사격, 생매장, 휘발유를 뿌려 불태워 죽이는 등의 방법으로 학살했다. 극동국제재판 판결에 따르면, 비전투원 1만 2,000명, 패잔병 2만 명, 포로 3만 명이 시내에서 살해되었고, 근교에 피난가 있던 시민 5만 7,000명 등 총 12만 9,000명이 살해되었다. 이것은 기록에 남은 최소한의 숫자이며 실제로는 30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되었다.(다음 백과)

이처럼 난징 대학살은 일제의 중국 침략 와중에 벌어졌던 사건으로 역사상 가장 잔학무도한 학살사건이다. 아베는 일본군이 자행한 난징 대학살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 난징 대학살을 비롯해 일본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자행된 피맺힌 식민지배 경험을 기억하고 있는 중국 인민들이 “개헌 못해 단장(斷腸)의 심정”을 가지고 있다며 일본을 침략 전쟁으로 내몰려 했던 군국주의자 아베의 죽음에 대해 환영하는 것은 당연한 역사적 감정이다.

국내 언론에서 이러한 역사를 외면하고 아베의 침략자적 행태에 대해서는 눈감으면서 중국인들을 ‘국수주의’라고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군국주의자와 아베와 아베를 추종하는 자들, 세력들, 나라들이야말로 배타적이고 침략적인 국수주의다. 반대로 아베와 군국주의자 아베에 대한 중국인들의 분노는 정당할 뿐만 아니라 진보적이고 역사의식이 깨어 있는 것이다. 이처럼 아베의 사망을 엉뚱하게도 중국 혐오를 조장하는 기회로 삼는 언론의 행태를 보더라도 중국혐오 배후에 바로 반공·친미·친일 숭배의식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보여주는 것이다.

 

군국주의자 아베와 아베의 현재성

 

아베는 자연인 아베가 아니다. 아베가(家) 역시 자연인들의 평범한 가족집단이 아니다. 아베는 2006년 9월 26일∼2007년 9월 26일까지 366일간 총리로 재임하다 사임했고, 2012년 12월 26일부터 2020년 9월 16일까지 7년 8개월 동안 3연임하여 최장기 총리로 일본을 통치한 인물이다. 그러나 아베는 일본 인민들의 광범위한 퇴진 압력을 받고, 건강이상에다가 모리모토학원과 가케학원에 국유지 헐값 매각 같은 사학 스캔들 등 부패 연루 혐의로 총리직에서 사임했다.

아베는 군국주의 화신으로서 ‘반(反)좌익’ ‘반(反)자유주의’를 선언하며 “아름다운 일본”을 건설하겠다는 모토를 내걸고 출발했다. 아베의 “아름다운 일본”은 바로 군사대국으로서 강한 일본을 의미한다. 아베는 고이즈미 총리 시절 당시 관방장관으로 있을 때 《아름다운 나라로》라는 책을 발표하였고, 2012년 12월 26일 치러진 중의원 선거에서 압승하며 총리가 된 뒤인 2013년 1월에는 약간의 보론을 추가해 《새로운 나라로—아름다운 나라로 완전판』을 출간했다. 이는 다음에 말하겠지만 천황제를 옹호하며 할복자살한 극우 작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의 정치 미학론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미시마 유키오는 일본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데 집요하게 매달렸는데, 그에게 있어서 궁극적인 아름다움은 일본을 미국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천황이 지배하는 부강한 나라로 만드는 것이었다. 1956년 발표된 그의 대표적인 소설 《금각사(金閣寺)》는 금각사 불상을 태워버리면서 천황의 재생을 희망하는 열망하는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아베는 “아름다운 일본” 건설을 위해 통치 기간 내내 일본의 식민지 지배 역사를 왜곡, 정당화 하고 태평양 전쟁 A급 전범들이 묻혀 있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로 일본 내뿐만 아니라 쓰라린 식민지 경험을 지니고 있었던 아시아 인민들을 분노케 했다. 아베는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함으로써 평화헌법을 개정하고 이를 통해 일본을 다시 전쟁하는 국가로 만들려 했다. 아베는 또한 장기침체에 빠진 일본 경제를 부활시키기 위해 ‘아베노믹스’를 도입하여 소비를 진작시킨다고 했으나, 이는 소비세를 인상하고 실제로는 일본 경제단체연합회(경단련) 같은 독점자본의 이익에 철저하게 봉사하는 것이었다. 아베의 군국주의 부활과 장기 불황에 빠진 일본 경제의 부활은 긴밀하게 연결된 문제이기도 했다.

2019년 10월 22일 나루히토(德仁) 일왕 즉위식에서 “천황 폐하 만세” 삼창을 하고 있는 아베 신조(安倍晋三)당시 일본 총리

아베에게 부여된 군국주의 망령은 아베 개인뿐만 아니라, 아베가(家)에게 부여된 ‘역사적’ 임무이기도 했다. 아베가, 특히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는 총리를 역임한 인물로 A급 전범으로 투옥됐다가 석방된 인물이다. 이 자가 총리로 있는 시절 일-미 신방위조약이 체결됐다. A급 전범이 투옥됐다가 일본의 총리를 역임하고 군국주의 행보를 가속화 한 것만 보더라도 일본의 정치가 얼마나 전반적으로 우경화 돼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아베는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가 못다 이룬 일본의 군국주의화라는 대망을 실현하는 유언 집행인이었다. 아베는 외조부의 정치이념을 따라 ‘아시아주의’를 배격하고 미·일 동맹을 강조해왔는데, 일본의 우경적 정치인들이 강한 일본을 구가하면서도 미국을 숭배하는 이유는 일본의 군국주의화 배후에 미국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 7월 8일 나라(奈良)에서 총격 피습 당시에도 자민당 지원 유세를 하면서 평화 헌법 개정과 적기지 공격 능력(반격 능력) 보유를 위한 ‘군비 증강’ 등의 내용으로 발언을 하는 중이었다.

아베는 군국주의자로 성장하고 군국주의자로 정치를 시작하고 군국주의자로 사망했다. 아베 피살 사건은 일본에서 일곱 번째 총리 피살 사건이고, 일본이 메이지 유신 이래 극단적 사무라이 파쇼사상으로 무장하고 침략전쟁에 나선 이후 조장되어온 일본의 군국주의 정치 파탄의 결과이다. 일본의 군국주의가 극우들의 총리 피살 사건을 낳았고 이 사건은 다시 극우적 군사주의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아베의 극우적 행보는 아베 사망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군국주의 아베 화신을 내세워 아베류들에게 전승되어 일본의 우경화를 한층 더 가속화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가진 일본 군국주의에 의해 희생당한 것은 수천만 일본 인민과 수억의 아시아 인민들이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일으킨 전쟁으로 2천만 아시아 인민들이 희생됐다. 이 제국주의 침략 전쟁은 식민지·반식민지 국가의 인민들뿐만 아니라, 일본 인민 역시도 3백십만 명 이상이 희생당했다. 독일 파시즘의 패배처럼, 일본의 패전 이후 들어선 전후 체제는 제국주의 파시즘 체제에 대한 역사적 반성에 기초에 들어선 체제로 다시는 일본이 이러한 침략전쟁에 나서지 못하도록 만드는 ‘평화체제’였다.

제9조 ① 일본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하는 국제 평화를 성실히 희구하며, 국제 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써 국권이 발동되는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영구히 포기한다.

② 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육해공군, 그 밖의 전력을 보유하지 아니한다. 국가 교전권은 인정하지 아니한다.

그러나 1946년 제정된 이 ‘평화헌법’과 여기에 기초한 ‘평화체제’는 불완전하고 모순적인 것이었다. 아시아 인민들과 일본 인민의 피가 서려 있는 평화헌법 제 9조에도 불구하고, 침략국가로 나아가려고 하는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책동은 집요하게 계속됐다.

미제국주의는 패전한 일본에 점령군으로 있으면서 평화협정 9조 제정 대가로 ‘평화국가’ 일본의 자위권을 대신 지켜주겠다는 보증을 했다. 오키나와 미군기지 건설은 이에 대한 군사적 담보물이었다. 이미 앞에서 살펴본 1951년 9월 8일 ‘한국전쟁’ 와중에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야말로 이남과 함께 반공주의 체제의 최후 보루이자 공산주의를 붕괴시킬 전초기지로서 일본을 재무장시키는 것이었다. 미국은 일본을 이러한 목표에 부합하게 만들기 위해 공산주의자들을 극렬하게 탄압하는 반면에 전쟁 범죄 원흉인 쇼와 일본 천황의 죄를 사면하고 천황제를 유지시켰다.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이후에 1960년 1월에 기시 내각을 내세워서 일-미 신안보조약을 체결하였다.

신 안보조약이 처음의 안보조약과 다른 점은 원래 안보조약이 패전국과 점령국 사이에 체결한 조약으로 일본 방위뿐만 아니라 일본 국내의 내란, 폭동 같은 사태도 미군이 관할하는 것이었다면, 신 안보조약은 이런 제약 조건을 없애고 미일 공동 방위를 명분화 하면서 일본 자체에 상대적 ‘독자성’을 부여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310만 여 명의 일본인들의 희생을 통해 침략전에 나섰던 일본을 다시 겨우 15년 만에 참혹한 전쟁국가로 만들려는 시도에 대해 일-미 방위조약 반대투쟁이 일본 전역에서 거세게 일어났다. ‘안보투쟁’은 일본 현대 역사에서 가장 격렬한 투쟁을 만들어 냈다. 일본인민들의 대대적인 반대투쟁으로 기시다 내각이 사퇴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방위조약은 법적 효력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이 점에서 한국에서 미군정이 공산주의자들과 자주적인 인민들의 결사체를 극렬 탄압하고 친일파를 다시 등용시켜서 반공주의 보루로 만들려고 했던 조치와 유사하다. 한미 방위조약과 일미 신안보조약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 조선은 식민지 국가였고, 일본은 패전했지만 제국주의 국가였다는 점이다. 미제국주의는 미국의 의도에 부합하고 미국의 통제 안에 있는 범위 내에서 일본을 전쟁하는 제국주의 국가로 삼으려 했다. 식민지에서 친일파였던 한국의 국우는 친미파로 변신하여 성조기를 들고 집회에 나서는 것처럼 철저하게 미국을 숭배하고 있고 미국의 보호령 하에 안주하려 한다. 반면 제국주의 침략 국가였던 일본의 극우는 패전 이후 미국의 비호를 받고 친미숭배를 하면서도 동시에 일본의 독자적 힘으로 무장을 꿈꾼다. 이것이 일본 극우들이 가지고 있는 끊임없는 딜레마다.

천황을 구심으로 “전승국(미국)이 만든 헌법”을 포기해야 한다는 ‘헌법포기’ 주장은 일본 극우들의 염원이다. 앞에서 잠시 언급했던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는 소설《우국(憂国)》에서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증명하기 위해 할복자살하는 일본군 중위와 부인의 모습을 그렸는데, 실제 그는 자신의 소설의 주인공들처럼 할복자살했다.

 할복 하기 전 자위대 총감방 발코니 위에서 연설하고 있는 미시마 유키오

그는 1970년 11월 25일 지금의 일본 방위성 본성인 자위대 이치가야 주둔소에서 자위대 총감을 볼모로 잡고는 자위대원 1천여 명을 모아 놓게 하고는 총감방 발코니 앞에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하고 할복자살했다.(다테노카이 사건)

“이 상황에서 내가 자위대에 이야기해서 유감스럽다. 그러나 나는 자위대라는 존재를, 자위대를 믿었다. 일본은 경제적 번영에 몰두하여 마침내 정신적 공황에 빠지고, 정치는 모략(謀略)과 기오심(欺傲心)이………. 이것이 일본이다. 자위대만이라도 일본의 정신을 유지해야 한다.”

“이제는 더 이상 헌법 개정 기회는 없다! 자위대가 국군이 되는 날은 사라졌다! 건군 본의는 없다! 그것이 가장 개탄스럽다. 자위대에게 건군 본의는 무엇인가? 일본을 지키는 일. 일본을 지킨다는 것은 무엇인가? 일본을 지킨다는 것은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역사와 문화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지금 일본인이 일어나지 않으면, 자위대가 일어나지 않으면 헌법 개정은 없다. 제군은 영원히 미국 군대가 되고 만다.”

“지금 헌법은 끝없는 정치적 모략을 통해 제군이 합헌(合憲)인 것처럼 위장했으나, 자위대는 위헌(違憲)이다. 자위대는 위헌(違憲)이다. 너희들도 위헌(違憲)이다. 마침내 자위대가 헌법을 지키는 군대가 되었다는 사실을 왜 인식하지 못하는가! 나는 제군이 그것을 부정하는 날을 오랫동안 기다렸다. 제군은 사소한 것에 눈이 어두워 진정 일본을 위해 들고일어날 때를 놓쳐버렸다.”

“이제 제군이 헌법 개정을 위해 들고 일어나지 않겠다는 것을 충분히 알겠다. 이것으로 자위대에게 품은 내 꿈은 사라졌다. 여기서 천황 폐하만세를 부르겠다.”

“천황 폐하 만세! 천황 폐하 만세! 천황 폐하 만세!”(나무 위키, “미시마 사건”)

패전 이후 맥아더의 연합국사령부(GHQ)에 의해 허수아비가 되어 버린 천황이 아니라 천황이 중심이 되는 국체(國體)를 되살려 일본이 다시 부흥하는 것이 군국주의 작가의 극우적 열망이었던 것이다.

헌법 9조 평화헌법과 일-미 방위조약은 상호대립적, 모순적이면서도 교묘하게 공존하게 되었다. 헌법 9조의 무력행사 포기와 군대 보유 금지에도 불구하고 말 그대로 자기 방어를 명목으로 하는 자위대가 창설됐다. 이러한 모순 속에서 일본의 평화주의와 군국주의 반대 흐름은 헌법 9조를 유지하려 했고, 군국주의 세력들은 헌법 9조를 없애려 했다. 이 가운데 안보투쟁 이후 1968년부터 1969년 사이 “요원의 불길”처럼 타올랐던 일본의 전학공투회의(全学共闘会議, 전공투)와 미시마 유키오의 할복 사례 같은 양극단의 극한투쟁이 있었다.

전공투 학생들이 무장하고 있다. 헬멧에는 낫과 망치가 그려져 있다.

자유민주당과 아베는 헌법 9조 폐기가 가져올 전 인민적인 저항을 우려하여 곧바로 평화헌법을 개정하지 못하고 ‘집단 자위권을 보유하고 있지만 행사할 수는 없다’는 기존 헌법 해석을 각의(국무회의) 의결만으로 변경하는 해석개헌(解釋改憲)을 통해 일본이 외국으로부터 공격을 당했을 때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함으로써 전쟁하는 국가로 만들려 했다.

미국 역시 미국의 패권이 유지되는 전제 하에서 일본이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서 아시아에서 미국을 대리하여 전쟁을 치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이러한 흐름을 지원했다. 미국이 패권을 구사하는 명분과 마찬가지로 일본이 전쟁하는 나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외부의 적’이 필요했다. 일본에게 외부의 적은 조선과 중국과 러시아였다. 미제국주의의 핵독점전략에 대한 자위권의 일환으로 북에서 핵시험을 하고 미사일 발사 시험을 할 때마다 일본 내에서 반북주의와 반북혐오를 끝없이 조장되었다. 아베는 일본 사회 내에서 반중, 반북 혐오에 앞장서면서 이러한 감정이 만연하도록 조장했다. 조선인 고등학교들을 무상교육에서 제외시키고 조선인들에 대한 인권침해를 조장하는 것 역시 이러한 상황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미국이 중국에 대한 제국주의 패권을 행사하며 대립할 때마다 일본 역시 중국과의 대립을 조장하고 혐오를 조장했다.

중국과 일본과의 영토분쟁, 러시아와의 영토분쟁도 일본이 제국주의 국가로서 전쟁하는 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수단으로 제기됐다. 최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은 일본이 전쟁하는 국가로 나아가기 위해 정당화 하는 호재로 작용했다. 일본 공안지청은 아조프 부대는 국제 테러리즘 규정에서 삭제하고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 등으로 국제적 침략전에 떨쳐나서고 있다. 아베를 동경하고 아베를 추모하는 자들, 나라들은 아베와 같은 세계관을 가지고 아베와 정치적 이해를 같이 하고 있다.

 

대만과 한국은 미일동맹의 전쟁 실험실

 

아베 사망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중국과 대만의 입장 차, 이에 대한 국제적 수준에서의 논란도 이 문제가 여전히 과거로부터 출발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역사적 문제임을 알 수 있게 한다.

타이완 총통부 청사에 조기가 게양됩니다.

아베 전 총리를 애도하기 위한 것으로, 다른 공공기관과 학교에도 모두 내걸렸습니다.

차이잉원 총통이 타이완에 마련된 아베 전 총리 분향소를 찾은 데 이어, 라이칭더 부총통은 조문을 위해 직접 일본을 방문했습니다.

지난 1972년 일본이 중국과 수교하면서 타이완과 단교한 이후 50년 만에 타이완 최고위급의 방일입니다.

… 아베 전 총리는 중국의 압박에 맞서 타이완을 공개적으로 지지해왔는데, 퇴임 이후에는 “타이완의 비상사태는 일본의 비상사태”라며 중국의 타이완 침공 시 일본의 군사 개입을 시사한 바 있습니다….

중국은 거칠게 반발했습니다.

[왕원빈/중국 외교부 대변인 (지난해 12월) : 감히 군국주의 낡은 길로 돌아가 중국 인민의 마지노선에 도전한다면 반드시 머리가 깨지고 피가 흐를 것입니다.]

이번 조기 게양을 놓고도 중국 관영매체는 현지법 위반에 해당할 수 있다고 지적하고 나섰습니다.

타이완 법률상 현직 국가 원수나 특별한 공헌을 한 사람에게만 조기를 게양할 수 있는데, 아베 전 총리는 해당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타이완 문제 등을 둘러싼 중국과 미국, 일본의 갈등이 아베 전 총리 사망을 놓고도 이어지는 모양새입니다.(김지성 기자, ‘아베 애도’ 조기 게양한 타이완에 중국 ‘발끈’, SBS 뉴스, 2022.07.12.)

보다시피 대만에서도 반중 혐오에 대비하여 친미· 친일 감정이 높아지고 있다. 아베는 중국과 대만 양안문제에서 대만을 공개 지지해 왔다. 심지어 타이완의 비상사태에 대해 일본이 군사개입을 하겠노라고 천명하기도 했다. 앞의 글에서 쓴 것처럼, 현 대만의 역사는 본토에서 축출당한 국민당 장개석 군의 식민지배로부터 출발했다. 그런데 장개석 군대가 중국 공산당에 비해 월등한 군대와 군사력을 가지고도 패배하고 본토에서 축출당한 것은 장개석 국민당군은 일본 군대에 대해서는 타협적인 태도를 취하면서도 반일 항쟁에 나섰던 중국 공산당을 도리어 주적으로 돌리고 중국 인민들을 배신했기 때문이다. 여전히 대만당국은 자신의 반인민적 역사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군국주의자 아베를 찬양하고 심지어 일본 자위대의 군사개입마저도 지지하는 반동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지난 11일 중국 외교부 왕원빈 대변인은 일본의 참의원 선거 결과가 나온 뒤 “일본의 개헌 문제는 역사적인 원인으로 국제사회와 아시아 이웃 국가들로부터 크게 주목을 받고 있다.”면서 일본은 역사의 교훈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라고 충고했습니다.

하지만 현지시각 11일 워싱턴포스트지 사설이 나오자 반응이 달려졌습니다. ‘미국은 일본의 군대 합법화 움직임을 지지해야 한다’는 제목의 사설입니다.

사설은 “제안된 개헌안은 이미 일본에 현실로 존재하는 것(육·해·공군)만을 합법화할 것”이라면서 “이는 전쟁 포기를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타이완 방위를 포함한 집단 안보에 대한 일본의 도움을 수월하게 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여기서 집단 안보는 “중국의 부상과 타이완에 대한 가능한 위협 그리고 북한의 핵 잠재력”에 대항하기 위한 미국과 일본, 호주 등의 안보 협력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중국과 북한에 맞서 미국과 일본 등이 방위 협력을 공고히 하는데 일본 자위대 합법화가 도움이 될 것이라는 진단입니다….

미국이 일본의 자위대 합법화를 지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 상황에서, 이번에는 타이완까지 ‘눈에 띄는’ 움직임을 보였는데요.

차이잉원(蔡英文) 타이완 총통은 11일 직접 타이베이 주재 일본 연락사무소를 찾아 조문했습니다. 권력 서열 2위인 라이칭더(賴淸德) 부총통은 아예 도쿄로 날아가 장례식 쓰야(通夜·밤샘)에 조문 사절로 참석했습니다. 정부 차원 방문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지만 1972년 타이완과 일본이 단교한 이래 일본을 찾은 타이완 최고위급 관료입니다.

중국으로서는 가뜩이나 미국과 타이완의 관계가 신경 쓰이는데, 타이완까지 이번 방문으로 일본과 밀착할 계기를 만드는 것은 아닌지 불안감이 커지는 상황입니다.(이랑 기자, [특파원 리포트] 중국 “군사력 키우자”…이게 아베 전 총리 때문이라고?, KBS NESW, 2022.07.14)

아베의 피습 사망과 참의원 선거에서 일본 자민당 등 극우주의자들의 승리로 일본의 군국주의 책동은 한층 더 가속화 될 수밖에 없다. 워싱턴포스트지 사설은 이런 국제 정세 속에 이미 물밑에서 진행되고 있는 미국의 역할을 공개적으로 천명한 것이다. 중국에 맞서 타이완 집단 방위, 대북 집단 방위에 미국은 군국주의화된 일본이 한 축으로 그 역할을 담당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미제와 나토가 반러를 기치로 우크라이나를 졸로 내세워 전쟁을 하고 있다면, 아시아에서는 대만을 내세워 중국과 전쟁을 획책하고 있으며, 동북아에서는 이남을 내세워 이북에 대한 전쟁을 획책하고 있다. 중국과 일본의 영토분쟁은 일본 극우들이 중국과 대립하면서 부각하는 영토 분쟁이다.

일본의 대표적인 ‘우익’정치인인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일본 도쿄도(東京都) 지사는 미국 워싱턴 헤리티지 재단 주최 행사에 참석, 연설을 했다.

“일본주권하의 섬을 외국이 공격할 경우, 동맹관계인 미국은 곧바로 일본을 지원하도록 명문화돼 있다. 그러나 일본자위대는 외국군에 대해 제한적 수준에서만 대응할 수 있다. 무력(武力)행사를 영원히 포기한다고 규정한 헌법 9조 때문이다. 자기 나라가 공격을 당해도 맞서 싸우지 못하고 동맹국에 의존하는 나라가 세상에 어디 있는가?”

이시하라가 외국군의 일본 공격의 예(例)로 내세운 것은 센카쿠(尖閣) 열도였다. 센카쿠 열도는 중국이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지역이다. 이시하라는 일본정부가 센카쿠 열도 문제를 소홀히 한다고 비난하다가, 갑자기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잠시 숨을 죽였다가 한마디 던졌다.(유민호 퍼시픽21 소장 “일본의 ‘左’와 ‘右’ ‘右’와 ‘右翼’, ‘左’와 ‘左翼’은 다르다”, 월간조선, 2012년 9월)

이 영토분쟁은 1895년 청일전쟁으로 일본에게 패한 중국이 시모노세키조약으로 일본에게 할양한 섬의 영유권을 두고 벌어지고 있는 역사적 문제이다. 중국은 일본의 패전으로 이 섬이 다시 중국으로 귀속되어야 한다는 입장이고 일본은 1969년 미국이 오키나와 반환협정으로 이 섬을 일본에 할양하기로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만은 대만대로 이 땅이 자신의 땅이라고 주장하고 있고, 중국은 대만을 통일될 나라로 보고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 영토분쟁에도 미국, 일본, 중국, 대만이 각축전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오야붕(おやぶん) 미국이 큰 형님 일본에게 완장을 채우고 한국과 대만 두 꼬붕(こぶん)을 내세워 피비린내 나는 싸움판에 끌고 다니려 하는 것이 작금의 동북아시아에서 펼쳐지고 있는 형세이다. 대만과 한국은 미일 제국주의의 위험천만한 전쟁 실험실이다. 이러한 형세는 역사적인 형성물이다. 한국과 일본과 대만의 청산하지 못한 반동의 역사가 오늘날까지 전쟁을 부추기고 수십억 인민들에게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고 있는 것이다.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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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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