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상에서 과학으로》(엥겔스) 3장 “필연의 나라로부터 자유의 왕국으로”

일시: 2022년 6월 14일(화) 19시

장소: 노정협 사무실(서울시 용산구 갈월동 93-45 4층)
온오프 병행

* 세미나는 격주 화요일에 합니다.
* 직접 참여하기 어려운 동지들을 위해 영상으로도 세미나를 같이 합니다. 영상으로 참여하실 분들은 안내 전화로 참여 의사를 밝히면 초대하도록 하겠습니다.
* 지속적 참여가 어려운 분들은 부분 참여도 환영합니다.
* 지방에 계신 분들은 2인 이상의 팀을 구성하면 직접 방문해서 세미나를 같이 진행합니다.

참가 문의: 010-3398-0248

엥겔스의 《공상에서 과학으로》는 세 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장은 공상적 사회주의, 2장은 변증법, 3장은 사적 유물론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서문, 특히 1892년 영문판 서문은 그 자체로 독자적 의의를 가지는 부분으로 철학사의 발전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공상에서 과학으로》의 마지막 장인 사적유물론(역사적 유물론, 유물사관)에 대해 공부하려고 합니다.
이미 청년 시절에 맑스와 엥겔스는 처음으로 《독일이데올로기》에서 사적유물론에 대해 다룬 적이 있지만, 여기서는 엥겔스의 성숙한 시절의 저작이기 때문에 더 노련하고 대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역)사적유물론, 즉 유물사관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변증법적 유물론의 입장에서 사회와 역사발전의 구조와 법칙, 그 원동력을 밝히는 사회역사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엥겔스는 이에 대해 “유물사관은 생산이, 그리고 생산에 뒤따르는 생산물의 교환이 모든 사회제도의 기초라는 것과 역사상에 나타나는 어떤 사회에서도 생산물의 분배는, 이와 함께 계급이나 신분으로의 사회의 분열은 무엇이 어떻게 생산되며 또 생산물이 어떻게 교환되는가에 의하여 규정된다는 명제로부터 출발한다. 이것에 따르면 모든 사회적 변화와 정치적 변화의 궁극적 원인인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영원한 진리나 정의에 대한 그들의 심화되는 인식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생산 및 교환의 양식의 변화에서 찾아야 하며 이를 철학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경제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엥겔스는 이러한 사적유물론의 인식을 단순하고 기계적으로 해석하는 사고나, 이를 통해 맑스주의 사적유물론을 ‘경제환원론’으로 비난하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은 우려와 경고를 한 바가 있습니다.

[…]유물론의 역사 파악에 따르면, 역사에서 종국적인 결정적 계기는 현실적 생활의 생산과 재생산입니다. 맑스도 나도 결코 이 이상의 것을 주장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명제를 경제적 계기가 유일한 결정적 계기라고 왜곡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 명제를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추상적이고 허무맹랑한 공문구로 바꾸어 버리는 것입니다. 경제적 처지는 토대입니다. 그러나 상부 구조의 다양한 계기들 ― 계급투쟁의 정치적 형태와 계급투쟁의 결과들 ― 전투가 끝난 후 승리한 계급이 확립한 헌법 등등 ― 법 형태, 그리고 또 이 모든 현실적 투쟁이 거기에 참가한 사람들의 머리에 반영된 것으로서의 정치적, 법률적, 철학적 이론, 종교적 견해와 이 견해의 교의 체계로의 가일층의 발전 등도 역사적 투쟁의 진행 과정에 영향을 주며 많은 경우에 주로 이 투쟁의 형태를 결정합니다.(엥겔스가 쾨니히스베르크의 요제프 블로흐에게, 1890년 9월 21일, 박종철출판사)

맑스도 그렇지만, 엥겔스가 이처럼 사적유물론의 정의에 대한 단순하고 기계적 해석에 대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생산과 교환 같은 경제적 토대를 강조했던 것은 바로 “모든 사회적 변화와 정치적 변화의 궁극적 원인인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영원한 진리나 정의에 대한 그들의 심화되는 인식”으로부터 찾으려 하는 관념론자들이 주된 흐름으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맑스와 엥겔스가 비판한 관념론자들의 전도된 역사인식은 역사발전의 근원적인 동력을 노동자계급을 비롯한 생산대중으로부터 찾는 것이 아니라 소수 지식인들이나 영웅들, 왕이나 귀족, 지주들로부터 찾는 엘리트주의, 영웅사관들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적유물론은 착취와 억압, 수탈하는 위치에 있는 자들이 역사의 주인이고 역사발전의 원동력이라는 지배계급의 역사관, 세계관, 철학적 인식을 부정하고 인민대중이 역사의 주인이라는 것을 밝히는 철학사상의 승리일 뿐만 아니라 민중의 승리를 선언하는 역사적 쾌거였습니다.
지금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화물연대 파업이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화물연대 노동자들이 화주들(외주화의 정점에 있는 거대 자본가들)에 맞서 물류를 멈추자,  “의왕ICD·평택항 물동량 바닥세”, “국내최대 물동량 처리 부산항 마비 현실화 되나”, “화물연대 파업에 포스코 포항제철소 일부 공장 가동 중단”, “화물연대 파업 시멘트·철강 등 위기 전방위 확산..주요 물류거점 물동량 바닥”이라면서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어디에 있는지 역설적으로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이는 아직 최종적인 승리는 아니지만, 당장은 노동자성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화물연대 노동자들의 승리이고 힘이자, 철학적으로는 “모든 사회적 변화와 정치적 변화의 궁극적 원인”이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영원한 진리나 정의에 대한 그들의 심화되는 인식”으로부터가 아니라 노동자들과 생산자 대중들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보여주는 유물사관의 승리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역사를 움직이고 사회를 발전시키는 주역들인 노동자들이 권리를 보장 받으며 존엄한 대우를 받아야 하는 것이 응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권리와 정신적, 물질적 행복을 독차지 하는 것은 땀 흘려 일하는 생산대중들이 아니라 착취와 수탈을 하고 있는 지배계급과 그들의 일가, 족속들입니다.
엥겔스는 “현존 사회들이 비이성적이고 불공장하며 ‘이성이 무의미한 것으로 되고 선행이 고통으로 되었다’는 인식이 점점 더 퍼져가고 있는 사실은 생산방법과 교환형태에 어느덧 변화가 일어나 종전의 경제조건에 맞게 만들어졌던 사회제도가 이미 이러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징조에 불과하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유물론적 인식을 바탕으로 엥겔스는 이 사회의 각종 모순들, 부조리들, 폐해들을 제거해야 하는데, 이것을 “머리 속에서 고안해 낼 것이 아니라 머리를 써서 현존하는 생산의 물질적 사실들에서 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현존하는 생산의 물질적 사실”, 바로 부르주아 착취사회, 부르주아 착취적 생산양식을 철폐해야지만, 부의 극단적 불평등, 다수 생산자들의 빈곤, 실업, 소외 등 이로부터 나오는 갖가지 사회문제들을 근원적으로 제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변죽을 울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엥겔스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대규모의 사회화된 생산수단을 더욱더 국유화하지 않을 수 없게 함으로써 그 자체가 이 변혁을 수행할 방도를 제시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횡행하는 (범, 유사)무정부주의자들은 화들짝 놀라겠지만, “변혁을 수행할 방도”는 바로 “프롤레타리아트는 국가권력을 장악하여 우선 생산수단을 국유화한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국가 일반, 심지어 프롤레타리아 국가까지 부정적인 (범, 유사)무정부주의자들은 국유화와 중앙집중주의를 위로부터 사회주의, 관료주의적 사회주의라고 비난하며 이를 대신하여 “아래로부터 사회주의”, “노동자통제”, “분산적 계획”을 주장합니다. 이들에게는 위와 아래, 지도자와 대중, 중앙집중과 대중참여가 하나로 통일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전면 부정하려 합니다. 일국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문제와 국제주의를 분리해서 사고하는 형이상학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낮은 수준의 공산주의, 즉 사회주의 사회에서 국유화는 사회적 소유의 가장 높은 형태입니다. 사회주의의 협동조합도 국유화로 발전하는 도상에 있는 과도적 기업 형태입니다.
“필연의 나라로부터 자유의 왕국으로의 인류의 비약”이라는 유명한 문장으로 공황과 무정부성, 무계획성이 지배하는 자본주의를 척결하여 자유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창합니다.

사회가 생산수단을 장악하면 상품생산이 제거될 것이며 그와 함께 생산자에 대한 생산물의 지배도 제거될 것이다. 사회적 생산 내부의 무정부성은 계획적 의식적 조직으로 교체된다. 개체 생존투쟁은 종속된다. 그리하여 인간은 비로소 -어떤 의미에서는 종국적으로-동물계를 벗어나 야수적인 생존조건으로부터 참으로 인간적인 생존조건으로 이행해 간다. 인간을 둘러싸고 지금까지 그들을 지배하여 온 생활조건이 이제는 인간의 지배와 통제 밑에 들어오며 인간은 처음으로 자연에 대한 참다운 의식적인 지배자가 된다…인간은 이때로부터 비로소 완전히 의식적으로 자신이 자기의 역사를 창조하기 시작할 것이며 이때에야 비로소 인간이 작용시키는 사회적 원인들을 주로, 그리고 점점 더 그들이 원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왕국”이라는 표현이 거슬리기는 하지만, 표현에 모든 비난을 다 쏟아 붓고, 표현을 바꿈으로써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하는 소부르주아 세태에 휩쓸리지 않고, 유물론적으로 통찰할 때, 비로소 우리는 자본주의를 넘어 비로소 “자유의 왕국”을 꿈꾸고 실제 건설할 수 있습니다. 자유를 자주라고 바꿔 불러도 무방할 것입니다.

 

《민족과 계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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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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