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선언》 30주년, 그 국제적 의미

“사회주의 위업을 옹호하고 전진시키자”는 제목으로 발표된 《평양선언》에 대해 “20세기 공산당선언”이라고 그 역사적, 국제적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공산당선언》과 《평양선언》은 역사적, 국제적 의미가 크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1848년 2월 발표된 《공산당선언》과 1992년 4월 20일 발표된 《평양선언》은 그 의의는 각자가 크더라도 발표될 시점의 역사적 상황은 판이하게 다르다. 이 역사적 배경의 차이를 인식해야지만 《공산당선언》은 물론이고 《평양선언》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다.

 

《공산당선언》과《평양선언》

 

“하나의 유령이 지금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로부터 시작하여 “공산주의자는, 종래의 사회질서 전체를 강력한 힘에 의해 전복하지 않고는 그들의 목적이 달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공공연히 언명한다. 지배계급으로 하여금 공산주의혁명 앞에 전율케 하라! 프롤레타리아가 이 혁명으로 잃을 것은 쇠사슬뿐이며 얻을 것은 전 세계다”는 전투적 호소로 끝나는 《공산당선언》은 공산주의 운동의 여명기이자 상승기에 쓰여 졌다.

이 시점에 영국은 이미 18세기 산업혁명으로 일찌감치 산업자본주의 발전을 개시하여 약탈적 자본주의 종주국으로 떠올랐다. 선언이 발표될 바로 그 시점에 프랑스에서도 2월 혁명이 발발하여 마침내 부르주아가 권력을 장악했다. 물론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이 부르주아 혁명은 1789년 프랑스대혁명으로 출발했던 봉건 구체제와의 투쟁이 그랬던 것처럼, 루이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3세의 등장 같은 우여곡절을 거치게 될 상황이었다.

프랑스 노동자계급은 이 투쟁에 앞장섰지만, 아직 경제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성숙한 시점이 아니어서 자본가계급에게 혁명의 주도권을 넘겨야 했다. 그러나 2월 혁명으로 권력을 잡은 자본가 계급은 혁명에 앞장섰던 노동자계급을 배신했다. 노동자계급은 이 배신에 맞섰지만, 역사상 최초의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계급의 공개적인 전면 전투라고 하는 6월 봉기에서 처절하게 패배했다. 노동자계급은 봉기에 대한 앙갚음으로 자본가계급에게 대량 학살당했다. 맑스와 엥겔스는 프랑스에서 벌어질 상황을 예언이나 한 듯, 그리고 그 상황이 독일을 비롯한 모든 나라들에서도 필연적으로 벌어질 상황이라는 것을 경고라도 하듯이,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계급 사이의 적대적인 대립에 대해 항상 주목하며, 봉건계급이 몰락한 이후에 맞게 될 부르주아에 반대하는 투쟁에 돌입하라고 주문했다.

선언에서 표명한 것처럼, 독일은 부르주아 혁명의 전야에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 외에 유럽 다른 나라들에서는 아직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못한 상황에서, 프랑스 2월 혁명은 독일, 이탈리아를 포함해 유럽전역에 봉건제에 맞서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혁명적 열기를 불어넣었다. 프랑스 2월 혁명 직후에 빈과 베를린에서 봉기가 승리하고, 이것이 독일 다른 소국들에서 투쟁으로, 밀라노, 베네치아, 피에몬테, 로마로 봉기로 나타나며 삽시간에 혁명이 확산됐다. 이 “유럽혁명의 불꽃은 서쪽의 부르조아지와 귀족의 나라 영국과 동쪽의 농노의 나라 러시아로 더욱 가깝게 번져갔다.”(칼 마르크스 전기1, 소나무)

극소수의 발전한 자본주의 나라들, 이제 막 봉건제에 맞서 발전하기 시작하는 나라들이 혼재된 상황에서, 공산주의는 아직 ‘유령’이었다. 각종의 사회주의를 자처하는 세력들이 뒤엉켜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령의 실체를 만천하에 과학적인 강령으로 알려내야 했다. 《공산당선언》은 이제 막 출발하는, 이후 반동의 시기가 없지는 않았으나 상승기에 노동자계급이 어떻게 세계를 인식하고, 노동자계급 자신의 계급적 위치를 자각하고, 그 국제주의적 임무를 전 세계에 밝히는 장대한 선언문이었다.

반면 《평양선언》이 발표된 시점은 전 세계적인 반동과 후퇴, 혼란의 시대였다. 주지하듯,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에 동유럽과 쏘련 사회주의가 해체됐다. 1991년 12월 25일은 쏘련 사회주의가 해체된 날이다. 1991년 크리스마스는 자본주의자들과 제국주의자들에는 역사상 가장 행복한, 신의 은총이 넘치는 축복의 ‘크리스마스’였다. 이 얼마나 메시아적인 영감을 주는 ‘승리’인가?

이 역사적 격변의 시기에 《역사의 종언: 이후의 시대 공산주의는 끝났다》는 책이 나오기도 했다. 이제 현실 사회주의 진영이 대대적으로 무너졌으니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역사발전은 틀렸고, 자본주의 이후의 체제는 있을 수 없으며, 자본주의는 인류 역사발전의 마지막 종착지라는 승리 선언이 나오게 된 것이다. 제국주의자들은 이제 ‘냉전’에서 승리했다는 승리감에 도취되었다. 자본주의, 제국주의는 영구적으로 번영할 것이라는 ‘영구번영론’이 제출되기도 했다.

쏘련 사회주의 해체라는 역사상 최대의 반동적인 격변사태가 벌어지고 나서 고작 4개월 만에 《평양선언》이 나왔다. 이 거대한 역사적 후퇴와 격변 앞에서 ‘사회주의 위업을 옹호하고 전진시키자’는 국제공산주의자들의 공동 서명이 담긴 국제선언문인 《평양선언》이 발표됐던 것이다. 《평양선언》은 “최근 년간 일부 나라들에서 사회주의가 좌절된 사태를 놓고 제국주의자들과 반동들은 마치도 사회주의가 《종말》을 고한듯이 떠들고 있다. 이것은 자본주의를 미화분식하고 낡은 질서를 비호하려는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고 일축했다.

그러나 《공산당선언》이 상승기의 장엄한 선언이었다면, 《평양선언》은 어찌 보면 보는 이로 하여금 반동과 혼란기에 비감한 선언문이라고 느낄 수도 있었다. 《공산당선언》에서 “부르주아지의 몰락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는 똑같이 불가피하다”고 확신에 차 역사발전의 필연성을 주장했다면, 《평양선언》은 그 후퇴와 혼란과 이탈과 변절이 판치는 반동의 시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는 오래전부터 인류가 그려온 리상이며 인류의 미래를 대표하는 사회이다”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역사발전은 탄탄대로의, 평탄한 일직선상의 발전이 아니며 지름길만 있는 것이 아니라 후퇴와 전진, 난관, 우회로를 거치면서 발전한다. 이 역사발전의 필연적 법칙에 대한 과학적 인식과 신념이 없는 자들은 동요하고 머뭇거리며 심지어 변절하기도 한다. 국내에서도 이 시기에 운동의 혁명적 원칙과 전망을 상실하고 투항과 변절, 청산주의가 대세가 되었다.

레닌이 세계사의 반동적 후퇴를 예감한 듯, “때로 큰 퇴보를 겪지 않는, 항상 순조롭고 규칙적으로 전진해 가는 세계사를 생각하는 것은 비변증법적이고 비과학적이며 이론적으로도 옳지 않다”(<유니우스 팜플렛에 대하여>)고 일갈했듯이, 《평양선언》에서는 목전에 닥친 격변 사태를 앞에 두고 “사회주의의 길은 전인미답의 길이며 따라서 전진도상에 난관과 시련이 없을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일부 나라들에서 사회주의가 좌절되고 자본주의가 복귀된 것은 사회주의 위업 실현에서 큰 손실로 되지만 그것이 결코 사회주의의 우월성과 자본주의의 반동성을 부정하는 것으로는 될 수 없다”고 불굴의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이러한 불굴의 선언에도 불구하고 기세등등한 제국주의자들의 공세와 속수무책 청산주의 흐름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조선 역시도 ‘고난의 행군’을, 쿠바는 ‘특별한 시기’라는 시련과 난관의 역사적 시험대를 통과해야 했다.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는 구호는 이 당시의 고난과 시련,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역사발전에 대한 충실한 믿음을 반영하였다.

 

쏘비에트 해체의 쓰라린 경험들

 

이 선언문에 서명한 국제 공산당 중에는 특히 위대한 러시아 혁명의 산물이자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모국’이기도 했던 쏘비에트 해체를 ‘망국’의 설움으로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느끼며 쏘비에트 복귀를 위해 투쟁하는 구 쏘련의 혁명적 당들이 있었다. 구 쏘련에서는 “전련맹볼쉐비크공산당, 로씨야공산주의로동자당, 로씨야사회주의근로자당, 로씨야《공산주의자동맹》”이 《평양선언》에 동참했다.

이 선언에 초안이 나왔을 때, 전연맹볼셰비키공산당 서기장 니나 안드레예바, 러시아공산주의노동자당 지도자 빅토르 튤킨 등 저명한 러시아의 공산주의 운동 지도자들이 평양에 머물면서 이 초안을 직접 검토하고 서명했다.

니나 안드레예바(2020년 7월 24일 사망)는 1988년 3월 13일 <나는 아직도 원칙을 포기할 수 없다>는 유명한 글로, 쏘련을 제국주의자들에게 넘긴 국제 노동자계급의 배반자이자 제국주의의 충실한 벗인 고르바초프에 맞서 투쟁했던 인물이다. 물론 당시로서는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 즉 페레스트로이카(쇄신)와 글라스노스트(공개성)의 반혁명적 본질에 대해 어렴풋하게 인식하기 시작했던 시점이었다.

이 글은 고르바초프가 내세우는 ‘신사고’가 쇄신과 공개성이라는 미명 하에 반공산주의를 전파하는 것이 아닌가 반신반의하며 의혹을 품고 있는 쏘련공산당 내부와 쏘련 인민들에게 엄청난 파급을 미쳤다. 심지어 세계 전역에도 쏘련 내부의 정치적 논란이 알려졌다.

당시 이 글은 쏘비에트 공화국, 지역, 시군 신문 937개에 연이어 실렸다. 공장과 군대 신문에도 수없이 실렸다. 이 글은 쏘련 사회를 두 부분으로 나누게 했다. 이 글과 관련해서 수천 통의 편지가 ‘프라우다’ 신문과 ‘쏘비에트 러시아’ 신문에 실렸는데 그 중 80%는 이 글을 지지하는 것이었고 20%는 반대하는 것이었다. 쏘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에서는 2 주 동안 이 주제만 가지고 격렬한 토론을 했다. 고르바초프는 마침내 중앙위원회 정치국에서 “당신은 고르바초프 편이냐 아니면 니나 안드레예바의 편이냐”는 식으로 편지에 대한 입장표명을 요구하였다. 고르바초프는 안드레예바를 당에서 축출하고 ‘쏘비에트 러시아’ 신문을 압수수색하며 탄압했다.

이 글에서 안드레예바는 당시의 혼란상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사회적 냉담과 지적 기생상태 이후 오늘날, 학생들은, 점점 더 혁명적 변화의 열기에 휩싸이고 있다. 자연스럽게, 페레스트로이카와 그것의 경제와 이데올로기적 측면의 방식에 대한 토론이 벌어지고 있다. 글라스노스트, 개방성, 비판이 금기시 되는 성역의 소멸,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 일어나는 대중의식의 감정적인 열기는 또한 서방 라디오 방송에 의해 여러 가지 수단으로 또는 사회주의의 본질을 확실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 동포 자신에 의해 ‘즉흥적인’ 문제들을 자주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보인다. 모든 주제가 다뤄지고 있지 않은가! 대화는 다당제, 종교적 선전의 자유, 조국을 떠나 해외로 이주하는 문제, 출판에서 성적인 문제들의 광범위한 토론의 권리, 문화의 분권화된 리더십 필요, 의무적 군대 복무의 폐지 등등에 대해 이뤄지고 있다. 특히 학생들 사이에는 조국의 과거에 대해 많은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혁명적 변화의 열기”는 사회주의 지도자, 특히 스탈린에 대한 일방적인 ‘악선전’과 자신들의 역사에 대해 회의하고 부정하며, 비사회주의적 ‘다원주의’라는 서방 ‘민주주의’를 동경하는 서방 제국주의의 프로파간다와 부르주아 문화에 상당부분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요제프 스탈린에 대한 태도 문제를 살펴보자. 내 견해로는, 현재 활기찬 노동,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활기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쏘련 인민들의 전 세대에 걸쳐 전례가 없는 공적과 관련되어 있는 시기, 가장 복잡한 이행의 시기의 매우 역사적인 인물에 대해라기보다는 주로 비판적인 공격에 대한 모든 강박관념이 스탈린 개인의 이름과 관련이 있다. 우리나라를 위대한 권력의 반열에 들게 한 산업화, 집산화, 그리고 문화혁명은 “개인숭배”에 대한 억지 공식으로 가득 차 있다. 이들 모두는 불신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이 ‘스탈린주의자’들을 참회하도록 집요하게 요구할 지경에 이르렀다. 만일, 그러고자 한다면 누구든지 ‘스탈린주의’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 “폭풍과 맹공격”의 시대가 “인민의 비극”으로써 묘사되어 린치를 가하는 소설들과 영화들에 대한 칭찬들이 쏟아지고 있다.

이미 페레스트로이카 과정에서 드러났던 가장 심각한 이데올로기적 경향은, 이른바 계급 계층으로부터 자유로운 가장 실제적이고 가장 “순수한” 휴머니즘의 대변자로서 지성적 좌파 자유주의 사회주의를 가장하는 것이다. 이 경향은 프롤레타리아 집산주의에 반대하여 문화영역에서 현대화를 추구하고, 신을 찾는 경향, 기술적인 우상, 현대 자본주의의 “민주적인” 매력의 추구, 그리고 그 경향의 실제적 아부와 거짓 업적과 함께 – “개인의 자기가치”의 지지자들이다.

쏘비에트 해체 직전의, 기존 맑스레닌주의 혁명적 원칙의 후퇴, 쏘련공산당 지도부들에 의해 강요되는 쏘비에트 역사와 지도자들에 대한 전면 부정, 서방 제국주의에 대한 동경, 제국주의 문화로부터 사회주의 문화의 심각한 오염 같은 혼란과 난관의 시기에 안드레예바는 그럼에도 “우리는 이러한 원칙에 서 있고, 앞으로도 서 있을 것이다. 원칙은 우리에게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 조국의 역사의 혹독한 전환점을 엄청난 고통을 겪으며 지켜 왔던 것이다”라고 낙관적 태도를 견지한다. 그러나 쏘련 공산당과 인민들 내부에서 역사의 후퇴를 막기 위한 투쟁을 전개했음에도 불구하고 쏘련 해체는 피할 수 없었다.

비사회주의적 ‘다원주의’는 공산당의 약화된 프롤레타리아 독재(인민독재)를 무너뜨리고 다당제를 수용하게 하고, 집단적, 사회적 소유는 올리가르히라는 자본가들의 사적소유로 무너졌다. 무상복지 체제 역시 무너졌다. 1991년 3월 국민투표에서는 쏘련 해체에 대해 77.3%의 인민들이 반대했는데도 불구하고 옐친은 불법적으로 쏘비에트 해체 시도를 가속화 하여 마침내 1991년 12월 24일 최종적으로 쏘련 해체를 선포했다.

1993년 9월 21일 최고인민회의(쏘비에트 의회)를 해산하고 상하양원제의 새로운 헌법구성을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는 옐친 발표에 대해 모스크바에서만 최대 10만 여명의 인민들이 저항에 참여했다. 이에 대해 옐친 도당은 무차별적 학살만행을 자행하여 공식통계로만 187명이 사망하고 437명이 부상당하는 ‘모스크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공식 발표와 다르게 이 사건에서 2천명 이상의 사망자와 실종자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쏘련 공산당이 쏘비에트 해체를 반대하는 인민들의 열망을 대변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기 때문에 이 투쟁은 유혈사태라는 비극을 맞으며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우애와 평등, 자결권에 기초한 쏘비에트 체제는 민족갈등과 분열이 고조되면서 분열되었는데, 오늘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은 역사적으로 이때 잉태된 것이었다. 서방 제국주의의 동진은 쏘비에트가 폐허가 된 틈을 비집고 약탈적인 공격을 가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자주성과 국제주의의 통일적 원칙

 

쏘련은 물론이고 국제공산주의자들이 동유럽과 쏘비에트의 해체에도 불구하고 “원칙을 사수해야 한다”는 다짐을 하고는 있으나 아직 이 역사적 후퇴의 근본원인에 대해 규명하지 못하고 혼란에 빠져 있을 때《평양선언》은 그로부터 다음 교훈을 도출해 냈다.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당들과 진보적 인류는 실로 귀중한 교훈을 찾았다.

사회주의 위업을 옹호하고 전진시키기 위하여서는 매개 당들이 자주성을 확고히 견지하고 자체의 력량을 튼튼히 꾸려야 한다.

사회주의운동은 자주적 운동이다. 사회주의는 나라와 민족, 국가 단위로 개척되고 건설된다. 매개 나라에서의 사회주의 위업은 그 나라 당과 인민이 책임지고 수행하여야 한다.

매개 당은 자기 나라의 실정과 자기 인민의 요구에 맞는 로선과 정책을 세우고 그것을 인민대중에 의거하여 관철해나가야 한다.

매개 당은 언제 어떤 환경 속에서도 혁명적 원칙을 버리지 말아야 하며 사회주의 기치를 높이 들고 나가야 한다.

“매개 당들이 자주성을 확고히 견지하고 자체의 력량을 튼튼히 꾸려야 한다”는 자주성의 원칙은 자본주의 내에서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지켜야할 원칙이기도 하지만, 사회주의 건설에서, 사회주의 국가 간에도 지켜야할 원칙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주의는 나라와 민족, 국가 단위로 개척되고 건설”되는 것이고, “매개 나라에서의 사회주의 위업은 그 나라 당과 인민이 책임지고 수행하여야”하는 것이 원칙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실제 이미 1920년대 중반에도 종파주의적 트로츠키자들은 일국에서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원칙과 국제주의를 대립적으로 사고하여 ‘민족주의’니 ‘일국사회주의’니 히며 비난한 적이 있었다. 항일 무장 항쟁의 시기에도 쏘비에트 노선을 무차별적으로 추종하며 반일항쟁이라는 특수한 조건에서의 ‘인민혁명정부’와 필수적인 통일전선을 부정하는 흐름들이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더욱이 식민지 조선에서 인민대중 속에 깊게 뿌리 내린 통일단결된 당의 기초를 형성하려는 지난한 노력 대신에 심각한 분파주의에 휩싸여 국제당에 눈도장을 찍으러 다니려고 하는 사대주의 흐름도 횡행했다. 코민테른 내에서도 각 나라의 역사적 및 주체적 조건을 무시하고 ‘내리먹이기’ 식으로 지침을 관철하려는 관료주의적 흐름도 존재하고 있었다.

당시 국제당은 국제공산주의 운동과 민족해방운동에 거대한 기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내부적 문제들이 남아 있었다. ‘디미트로프 테제’로 잘 알려진 반파쇼 인민전선 방침이 발표된 1935년 제7차 국제당 대회에서는 그 동안의 이러한 흐름에 대해 평가하고 각 나라의 자주성을 존중할 것을 결의하기도 했다. 이후 쏘련이 히틀러 파쇼의 무력침공을 당한 1943년에 코민테른이 해체됐는데, 이에 대해 일각에서 ‘국제주의’를 부정하는 혁명의 배신이라는 평가가 그때나 지금이나 제출되기도 하는데, 사실 맑스, 엥겔스 시절에도 국제노동자협회를 해산하기도 했고, 이때에도 코민테른 참가 국가들의 만장일치로 해산 선언이 나왔다. 독일 파시즘과의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과 이미 각 나라의 공산주의 운동이 성장한 시기에 국제당은 자기 역할을 다했다는 평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당시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하는 조선의 공산주의자들도 코민테른 해산 선언에 대해 적극 환영했다.

스탈린 사후 후르시초프 시절에 사회주의 국가 간의 상호존중과 호혜평등이라는 원칙이 무너지고 ‘대국주의’가 심각해졌다. 후르시초프는 1956년 쏘련공산당 20차 당대회에서 스탈린 ‘개인숭배’와 ‘중공업 우선정책’을 비난하며 이른바 ‘스탈린 격하운동’을 전개했다. 후르시초프는 국제공산주의 진영에도 이러한 자신들의 방침을 강요함으로써 이에 반대하는 중국공산당과 심각하게 대립하였다. 이로써 국제주의 원칙이 심각하게 손상되고 국제공산주의 운동이 분열되는 중대한 문제를 초래했다. 뿐만 아니라 조선에도 ‘개인숭배’와 ‘중공업 우선 정책’을 폐기하도록 압력을 넣는가하면, 내부에서 쿠데타를 종용함으로써 1956년 8월 ‘종파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중공업 우선 정책’이라는 것에 대해서 스탈린은 <쏘련 사회주의에서의 경제적 제 문제>에서 이는 생산수단 생산과 소비수단 생산을 어떻게 조화시킬지의 문제이지 소비와 생산을 분리시키는 문제가 아니라고 신랄하게 비판한 적이 있었다. 비료와 트랙터의 생산, 기계화가 곡물과 빵, 의복 같은 소비품 생산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도 후르시초프의 일방적 공세에 대해 “중공업을 우선적으로 발전시키면서 경공업과 농업을 동시에 발전시키는” 자립적인 사회주의 경제건설 원칙을 고수하였다. 조선은 자신들이 현대화된 공업과 이에 힘입어 집산화된 농촌경리가 동시에 발전하는 나라로 성장시키려 했다. 후르시초프가 내세우는 사회주의 분업은 조선을 후진적인 농업국가로 남게 할 것이며, 이것이 결국은 사회주의 국가 상호 간에 평등과 우애 원칙을 훼손시키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자주적 방침에 대해 후르시초프는 조선에 대한 원조를 전후 복구 기간 때보다 절반이나 삭감하며 대국주의적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사회주의 자립경제(자력갱생) 원칙은 동유럽과 쏘련 사회주의가 속절없이 해체되는 상황에서 북이 사회주의를 고수하고 생존하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이 원칙은 쏘비에트 해체 이후 더욱 가속화된 제국주의자들의 경제제재와 고립말살책에 맞서 조선을 생존, 번영하게 하는 힘의 원천이 되었다. 또한 스탈린 격하운동은 선대 지도자들에 대한 전면부정으로 쏘련과 국제공산주의 운동 진영을 대혼란으로 몰아갔는데, 이는 조선 내에서 ‘일심단결’, ‘혁명의 계승’이라는 문제를 전면적으로 부각시키게 만들었다.

이로써 북의 사회체제를 만든 철학의 근본정신인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이라는 원리는 사상에서 ‘주체’, 정치에서 ‘자주’, 경제에서 ‘자립’, 국방에서 ‘자위’라는 원칙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레닌은 혁명발전의 일반적 원칙을 강조하면서도, “순수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고대하는 사람은 평생 혁명을 볼 수 없을 것이다”라는 주장을 했는데, 이는 각 나라의 혁명의 특수성을 말하는 것이다. 사회주의 건설에 있어서도 “매개 당은 언제 어떤 환경 속에서도 혁명적 원칙을 버리지 말아야 하며 사회주의 기치를 높이 들고 나가야” 하면서도 동시에 “자기 나라의 실정과 자기 인민의 요구에 맞는 로선과 정책을 세우고 그것을 인민대중에 의거하여 관철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자기 나라의 실정”이 혁명의 구체적 조건을 인식하는 것이라면, “인민의 요구에 맞는 로선과 정책”은 그 지향점을 말하는 것이고, “인민대중에 의거”하여는 그것의 실현 주체를 분명하게 하는 것이다. 물론 “인민대중에 의거”하는 것은 당의 정치적 지도와 연결될 때만이 빛을 발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매개 나라에서의 사회주의 위업은 그 나라 당과 인민이 책임지고 수행하여야 한다”는 원칙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는 것이다. ‘국제주의’라는 명목으로 다른 나라에 의존해서는 사회주의 건설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은 국제주의 원칙과 대립되지 않는다. 《평양선언》은 자주성과 국제주의의 통일된 원칙을 이렇게 표명하고 있다.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에서 국제적 단결은 필수적이다.

국제적으로 제국주의자들과 반동들이 련합하여 사회주의와 인민들을 공격하고 있는 조건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당들과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당들은 국제적 판도에서 사회주의를 옹호하고 전진시키며 또한 제국주의 지배와 자본의 예속, 신식민주의를 반대하고 사회적 정의와 민주주의, 생존권과 평화를 위한 투쟁에서 호상 지지와 련대성을 강화해나가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사회주의를 위한 모든 당들과 진보적 력량 앞에 나서고 있는 국제적 의무인 동시에 자기 자신의 위업을 위한 일이다.

이처럼 《평양선언》은 이 자주성의 원칙을 자기 경험 속에서,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약화와 패배라는 쓰라린 경험 속에서 중대한 교훈으로 이끌어 내게 된 것이다. 새롭게 국제당을 조직하자는 제안을 거부하고 ‘선언문’ 형태로 작성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이에 대해 국제공산주의자들이 전적으로 찬동하고 자기 혁명 패배의 원인을 찾고 혁명적 기준으로 삼게 된 것이다.

 

사회주의는 과학이다

 

《공산당선언》을 발표할 시점의 공산당은 곧 ‘공산주의자동맹’으로 조직된 극소수 선진분자들의 당이었지만, 《평양선언》에는 최초 70개국 공산당 및 노동자당이 공동으로 서명했다. 《공산당선언》이 진리의 등불로 말미암아 생활력을 발휘하여 1864년에는 이미 서유럽 대부분의 나라들의 노동자계급이 결집하여 국제노동자협회를 결성하여 국제적으로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듯, 《평양선언》역시 생활력을 발휘하여 6개월 뒤에는 140여개 당들, 1년 뒤에는 170여개 당들이 서명을 하였으며, 선언 발표 25주년이 되는 2017년에는 300여개의 당들이 지지 서명을 하게 되었다. “생활력의 발휘”, 즉 시련과 난관을 극복하고 역사적 검증을 거치며 현실성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돈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자본주의사회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가 지배하고 극소수 착취계급이 주인행세를 하는 《부익부》, 《빈익빈》의 불공평한 사회이며 정치적 무권리와 실업과 빈궁, 마약과 범죄, 인간의 존엄을 유린하는 온갖 사회악을 필연코 동반한다.

“사회주의는 과학이다”라는 언명은 이윤이 중심이 되는 무정부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한 편으로는 불시에, 주기적으로 들이닥치는 파괴적 공황과 불평등과 실업, 빈곤, 범죄의 만연, 인간성의 타락과 모순의 증대, 제국주의가 자행하는 전 세계적 약탈과 전쟁 속에서 점점 더 진리가 되고 있다. “사회주의는 과학이다”라는 언명은 다른 한편으로는 제국주의 말살 책동 속에서도 시련을 극복하며 진보적 인류의 열망과 대안이 있기 때문에 점점 더 진리가 되고 있다.

오직 사회주의만이 온갖 형태의 지배와 예속, 사회적 불평등을 없애고 인민들에게 실질적으로 자유와 평등, 참다운 민주주의와 인권을 보장해 줄 수 있다.

우리는 사회주의를 고수하고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를 반대하여 싸우는 세계 모든 진보적 정당, 단체, 인민들과 굳게 단결하여 사회주의 기치를 높이 들고 전진할 것이다.

모두 다 사회주의 위업에 대한 확고한 신심을 가지고 인류의 미래를 개척하기 위하여 끝까지 투쟁하자.

종국적 승리는 사회주의를 위하여 단결하여 투쟁하는 인민들에게 있다.

사회주의 위업은 필승불패이다. 

《공산당선언》은 진보적 인류가 만들어가는 역사발전의 도정에서 난관과 시련과 후퇴와 시행착오가 있었고, 앞으로도 필시 그러하겠지만, 역사는 그것을 뚫고 발전해 왔기 때문에, 숱한 곡절이 있었지만 “부르주아지의 몰락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는 똑같이 불가피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21세기에도 다시 확신에 차서 《공산당선언》의 마지막 문장의 전투적 호소를 다시 외칠 수 있게 되었다.

프롤레타리아가 혁명으로 잃을 것은 쇠사슬이요, 얻을 것은 전 세계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노/정/협

이 기사를 총 259번 보았습니다.

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