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4.19혁명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_ 김남기(《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역사의 진실》 저자)

 

1960년 이른바 ‘4.19혁명’이 일어나 이승만 독재를 무너뜨렸다. 1948년 국가 폭력으로 탄생한 대한민국 제1공화국은 정치탄압과 학살·사상통제·투옥 등 경찰국가였으며, 친미반공주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였다. 1960년 4.19 혁명은 바로 이러한 체제에 대한 도전이었으며, 실제로 잠시나마 사회의 분위기를 바꿔놓았다. 비록 1년 후 박정희와 그의 조카사위인 김종필을 중심으로 하는 장교 250명과 사병 3,500명이 5.16 쿠데타를 개시하면서, 한국은 다시 한 번 “반공을 제1의 국시로 삼는 국가”가 되었지만, 4.19 혁명은 그 자체로서 혁명적인 의미를 갖는다. 4.19 혁명 62주년을 맞이하며 그 의미를 한번 되새겨 보도록 하자.
미국의 제국주의적 분단정책에 의해 탄생한 대한민국은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벌레 보듯이 하는 사회였고, 현재도 그러한 반공주의적 기조가 사회 곳곳에 남아 있을 정도다. 당연히 이러한 분단의 결정적인 책임은 미국에게 있다. 한반도 이남에 점령군으로 들어온 미국은 일제 강점기 당시 친일한 인사들을 대량으로 등용했는데, 당시 경찰의 최소 85% 이상은 친일 경찰이었다. 즉 이러한 모순 속에서 탄생한 나라가 대한민국이었고, 소위 뉴라이트들이 말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건국’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뉴라이트들이 주장하는 대한민국의 건국은 정당성도 정통성도 없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한국전쟁을 전후로 한국은 극단적인 반공주의 국가 체제를 유지했던 것이다. 20세기 미국이 세운 친미 국가들이 일반적으로 그러하듯이, 한국 또한 매우 가난한 반공 국가였다. 한국전쟁 이후 한국 경제는 이른바 미국의 원조물자에 의존하는 ‘원조경제’였고, 극심한 실업과 빈곤, 굶주림이 사회 전체에 만연했다. 1959년 기준으로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85달러도 안됐으며, 친일파 민족반역자 세력들의 부정부패가 판을 치는 사회였다.
미국이 세운 이승만 정부는 반공주의를 내세운 권력이었다. 이승만은 부산정치파동과 사사오입 개헌을 통해 자유당 독재체제를 구축했다. 이승만과 이기붕 일가의 자유당 독재 체제는 ‘서구식 민주주의’ 기준으로도 도저히 부합하지 않는 체제였다. 이승만에 대한 찬양 및 숭배도 극에 달했다.

한국 사회 곳곳에는 이승만 찬가가 울려 퍼졌고, 이승만 동상이 세워졌다. 정치깡패이자 어용 예술인인 임화수는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이라는 어용 영화를 제작했을 정도다. 1958년 이승만의 83회 생일을 맞아 자유당 정권은 이른바 <이승만 찬가>을 배포했는데, 아래의 내용을 보면, 그의 우상화가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 알 수 있다.

“우리나라 대한나라 독립을 위해
여든 평생 한결 같이 몸바쳐 오신
고마우신 리 대통령 우리 대통령
그 이름 길이길이 빛나 오리라
오늘은 리 대통령 탄생하신 날
꽃피고 새 노래하는 좋은 시절
우리들의 리 대통령 만수무강을
온 겨레가 다 같이 비나옵나이다

우리들은 리 대통령 뜻을 받들어
자유평화 올 때까지 멸공전선에
몸과 맘을 다 바치어 용진할 것을
다시 한 번 굳게 맹세 합니다
몸과 맘을 다 바치어 용진할 것을
다시 한 번 굳세게 맹세합니다.”

이승만의 ‘이’씨 정치는 이기붕을 자신의 수하로 들었다는 점에서 극명히 들어난다. 친자식이 없던 이승만은 1957년 이기붕의 장남 이강석을 양자로 들였고, 이강석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부정 입학시킬 정도로 이승만은 이기붕 일가를 지원했다. 이승만과 이기붕 밑에 있던 정치깡패 이정재는 민주당 인사들이 시위하는 곳에 쳐들어가 폭력을 휘둘렀고, 이승만은 이기붕 일가를 어떻게든 정치권력 안에 놓기 위해 온갖 부정적인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또한 이승만은 자신의 노욕을 위해선, 어떤 범죄행위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1959년 조봉암의 사법살인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승만이 이러한 행위를 할 때마다 내세우는 논리는 반공주의였다. 1949년부터 그는 북진통일론을 주구장창 주장했는데, 이는 이승만이 정권에서 물러날 때까지 유지한 통일관이었다. 따라서 조봉암이 꿈꾸던 남북의 평화통일은 이승만 정부에 의해 노골적으로 거세당했고, 한 독립운동가의 생명까지 잃게 했던 것이다.
앞에서 잠시나마 언급한 부산정치 파동이나 사사오입 개헌 등 이승만과 이기붕은 자신들의 정권 유지를 위해선 어떤 일이든 서슴지 않았다. 설사 그것이 부정투표라 하더라도 말이다. 이들의 범법행위는 1960년 3.15 부정선거에서 절정에 달했다.

1960년 2월 이승만은 내무장관 최인규의 이름으로 선거사상 최악의 부정선거 지령문을 전국 시장·군수·경찰서장에게 내렸다. 당시 이승만이 내린 지령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자연기권표, 선거인 명부에 허위 기재한 유령 유권자표, 금전으로 매수하여 기권하게 한 표 중 합계 유권자 4할에 해당하게 하는 표를 사전에 자유당 입후보자에게 기표하였다가 투표개시 (오전 7시) 전에 무더기로 투표함에 투입할 것. (소위 4할 사전투표)
2. 자유당 입후보자에게 투표하도록 미리 공작하는 유권자로서 3인조 또는 9인조를 편성하여 그 조장이 조원의 기표상황을 확인한 후 다시 각 조원이 기표한 투표용지를 자유당선거위원에게 제시하고 투표함에 투입토록 할 것. (소위 3인조 또는 9인조 공개투표)
3. 자유당 유권자로 하여금 자유당 완장을 착용하고 투표케 함으로써 투표소 부근 일대의 분위기를 자유당 일색화하여 야당 측 유권자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하여 자유당에게 투표토록 한다.
4. 민주당 참관인을 매수하여 참관 못하게 하거나, 그것이 불여의할 경우에는 변기를 투표소 내에 가지고 왔다는 등 구실로 시비를 걸어서 투표소 밖으로 축출할 것.”

3월 15일 선거가 게시되자 실제로 전국 곳곳에서 이런 부정행위가 저질러졌다. 중앙선관위의 선거결과 발표에 따르면 전국의 유권자 1,119만 6,498명 중 1,050만 9,482명이 투표에 참가하여 963만 3,376표로 이승만이 제4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부통령에는 833만 7,059표를 얻은 이기붕이 당선되었다. 장면은 184만 4,257표, 김준연은 24만 5,526표, 임영신은 9만 9,090표였다. 즉 이승만은 전체 유권자의 92%를 이기붕은 78%를 득표한 셈이다. 말 그대로 부정투표가 아니고선 나올 수 없는 득표율이었다.
이런 부정투표가 자행되자, 민중은 들고 일어났다. 특히 경남 마산에서 시민들과 학생들이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고, 경찰은 이를 진압했다. 시위를 진압한 책임자는 최인규였다. 비록 반공 드라마지만, 드라마 야인시대를 보면 당시 최인규가 어떠한 생각을 가졌는지 보여준다. 드라마 상에서 시위대를 지켜보며 최인규가 하는 대사를 인용하겠다.

“최인규: 막아! 어떤 일이 있든 데모는 막아야해! 경찰력을 총동원해서 막으란 말이야! 데모를 조장하는 건 빨갱이 새끼들이야! 철저히 색출해! 다 두들겨 잡아, 학생이고 시민이고 다 잡아다 족쳐. 내 앞에서는 장사가 없다. 저 빨갱이들은 죽어도 싸다!

경찰 지휘자: 네, 각하! 하지만 이미 학생과 시민 여럿이 죽었습니다. 나중에 큰 문제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최인규: 얘기했잖아! 몇 명쯤 죽어도 상관없다고! 문제는 저 데모를 막느냐 못 막느냐 하는 거야!”

이후 마산에서는 총으로 무장한 경찰들이 삼엄한 경계를 폈고, 학생들과 청년들 그리고 시민들을 마구 잡아들였다. 경찰들은 무차별적으로 연행하면서, 잡아들인 사람들에게 고문을 가했다. 경찰들은 잡은 이들을 ‘빨갱이’로 몰아 고문을 가했으며, 경찰들은 이 항쟁을 사전에 계획된 폭동이자 배후에서 공산당이 개입한 것으로 만들려고 했다. 심지어 경찰은 ‘인민공화국 만세’, ‘이승만을 죽여라’라고 쓰인 전단을 시위 도중 사망한 학생들의 주머니에 집어넣기도 했다. 마산을 시작으로 서울과 부산, 대구, 광주 등에서도 시민들의 시위가 확산됐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확산이 되는데, 부정선거에 책임이 있는 이기붕은 “총은 쏘라고 (일부는 ‘쓰라고’로 들었다 함) 준 것이지 가지고 놀라고 준 것은 아니다”라는 망언을 했다. 당연히 이기붕의 이러한 망언은 시위진압에 나선 경찰들이 시민에게 총을 발포해도 된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던 4월 11일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 시체가 떠올랐는데, 머리와 눈에 최루탄이 박힌 참혹한 모습이었다. 그 시신은 바로 17살의 김주열 군의 시신이었다. 정말 기막힌 사실은 김주열군에게 정면에서 최루탄을 쏴 죽인 마산 경찰서 경비주임 박종표는 일제시대 당시 악질 경찰출신이다. 2010년 MBC에서 만든 드라마 <누나의 3월>에는 김주열군의 어머니와 주인공의 대화에서 그가 일제시대 악질 경찰임이 드러난다.

“김주열군 어머니: 그놈이 어떤 놈인지 알고 그런 부탁을 했소잉? 데모 군중에게 발포 명령을 내린 놈이여 그놈이!”

주인공: 저도 신문에서 봤습니다.

김주열군 어머니: 그놈은 사람도 아닌 놈이 랑께. 일본이름으로는 아라이, 친일 앞잡이 헌병출신이지라잉. 해방 전에 부산에서 독립운동하는 사람들을 말도 못하게 고문하고잉, 당시엔 아라이 켄페이(헌병)라는 말만 들어도 독립운동 하는 사람들이 치를 떨었던 악질이지라잉. 해방 직후 반민특위에선 무기징역까지 받았는디. 이승만이가 특별사면 해줘 가지고, 아직도 저렇게 살아있는 놈입니다요잉.”

이 대사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당시 민주화 운동을 전개한 학생과 시민들을 반공주의적 이데올로기에 근거하여 탄압한 주체가 바로 친일파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즉, 해방 후 친일파를 숙청하지 못한 분단 모순이 우리 사회에 이렇게 남아있었다고 할 수 있다.

김주열군의 시신이 발견된 이후, 시위는 더욱 격렬해졌다. 이승만은 뻔뻔하게도 3.15부정선거에 항거하는 마산 시민ㆍ학생들을 끝까지 ‘공산당 조종’이란 용공사건으로 몰아 위기를 벗어나고자 했다. 심지어 이승만은 유지광 임화수 등의 정치깡패들을 동원해서 시위를 벌이던 고려대학교 학생에게 구타를 가했다. 구타는 쇠망치, 도끼자루, 벽돌, 몽둥이가 동원됐으며, 최소 40명 이상의 학생이 다쳤다. 이것이 바로 4.18 고대생 습격 사건이었다.
전국적으로 번진 시위는 정권교체를 위해 한걸음 나아갔다. 4월 19일 서울에서 일어난 시위는 학생과 시민들이 합류하며 규모가 확장됐고, 심지어 초등학생과 중학생까지도 시위에 가담했다. 시위대의 규모는 서울에서만 20만 명을 넘었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군을 동원하여 진압할 생각을 했다. 이승만은 오후 1시를 기해 서울 일원에 국무원 공고 83호로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계엄사령관에 육군 참모총장 송요찬 중장을 임명했지만, 송요찬 중장은 시위 진압을 거부했고, 오히려 시민들 편에 섰다. 이승만과 이기붕이 동원한 경찰들은 1960년 혁명 기간 동안 시민들에게 발포했다. 그 과정에서 200명 이상이 사망하고 6,00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미국은 이승만에게 접근하여 사태에서 물러날 것을 주장했고, 이승만은 결국 4월 26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그로부터 2일 뒤, 이기붕 일가는 아들 이강석과 함께 집단 자살했고, 이승만은 아내 프란체스카와 함께 하와이로 망명했다. 이렇게 되면서 제1공화국은 몰락하게 되었고, 민중은 4월 혁명을 통해 승리를 쟁취했다. 1960년 한국의 4.19 혁명은 민중이 투쟁하여 이승만 반공 독재정부를 몰아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으며, 자랑스러운 투쟁의 역사다.
물론 이승만이 계엄을 선포해서 민중을 진압하려 했던 것도 사실이고, 그러지 못한 것이 미국의 영향력이 막강했기 때문인 것도 사실이다. 특히나 주한미국대사인 매카나기와 미군 매그루더 장군의 입김이 이승만 하야에 큰 영향을 미쳤다. 물론 이러한 점에서 보면, 4.19 혁명이 미국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부분적으로 사실이다. 또한 4.19 혁명의 성격이 친미주의적 성격이 있었다. 4.19 혁명 이후 이승만의 동상은 차례차례 철거되었는데, 인천상륙작전의 영웅으로 알려진 더글라스 맥아더의 동상에는 ‘민주주의의 영웅’이라며 헌화가 바쳐졌다. 즉 이러한 친미주의의 영향이 4.19 혁명과 그 이후에도 남아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 점에서 4.19 혁명을 단순히 민주주의 혁명으로 보려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4.19 혁명의 또 다른 성격에 더 큰 의의를 둔다. 물론 앞에서 언급한 사례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4.19 혁명 과정에서 반공청년단이 들어있는 반공회관에 불이 치솟았으며, 민중에 맞서 반공독재를 수호하려고 했던 주체는 친일 경찰들이었다. 즉,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 과정에서 비록 목적과 방법은 달랐지만, 이승만 정부에 맞서 싸웠다. 무엇보다 4.19 혁명 이후 이승만 정부가 만들어 놓은 반공주의 체제에 도전하는 움직임들이 한국 사회에서 있었다. 기존에 이승만 반공 정권이 일방적으로 강요했던 정복주의적 비젼인 북진통일론에 대립되는 통일 방안이 학생들 입에서 나왔다. “가라 북으로! 오라 남으로!”로 대표되는 평화통일론을 당시 급진적인 지식인과 학생들이 주장했다. 또 이들은 자립적 경제 발전을 원하기도 했고, 이는 종종 반미 구호를 통해 표현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는 다음과 같이 책에 집필했다.

“서울의 지배 집단의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시련이, 전쟁 전의 시기를 상기시키는 시련이 시작되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명백한 좌경화 경향이었다.”

커밍스의 주장대로 이러한 움직임이 4.19 혁명 이후 한국 사회에서 있었다. 또한, 해방 이후 우익들에 의해 무차별 민간인 학살을 당했던 유족들이, 유족회를 만들어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운동 및 조사를 진행했다. 1961년 당시 제주와 여순 그리고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희생자 유족들은 해방정국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대략 10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이승만과 우익들에 의해 학살당했다는 사실을 밝혀내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회적 움직임은 분명 이승만의 극단적 반공주의에 대립하는 행위였다. 따라서 4.19 혁명은 극단적 반공주의에 대한 도전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며, 좌파라면 가져야할 생각이라고 생각한다.
1961년 5.16 쿠데타로 한국은 다시 한 번 이승만식 극단적 반공주의 사회로 변모했지만, 4.19 혁명이 잠시나마 선물한 그 유산은 분명 의미가 있다. 1789년에 시작된 프랑스 혁명이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그 성격이 부르주아적으로 왜곡되며, 혁명가 로베스피에르의 역할이 축소된다는 점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프랑스 혁명도 로베스피에르 집권기 여러 진보적인 정책들이, 부르주아 학자들에 의해 묻힌다면, 4.19 혁명 또한 그러한 성격이 한국 사회에서 다소 거세당한 측면이 있다. 따라서 맑스주의를 추구하는 좌파라면, 프랑스 혁명에서 로베스피에르의 혁명적인 역할을 재평가하듯이, 4.19 혁명의 혁명적인 의미를 앞에서 언급한 측면에서 재평가해야할 것이다.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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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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