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눈의 평양 시민>: 그의 선택은 쉽게 비난할 수 없다

_ 김남기(《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역사의 진실》 저자)

 

월북 미군 제임스 조셉 드레스녹, 1962년에 월북한 그는 젊은 시절부터 사망할 때까지 북한에서 살았다. 그의 자식들은 현재 북한에서 살고 있다.)

 

1962년 여름 한국 DMZ에서 근무하던 한 미군 병사가 탈영하여 월북했다. 그는 단독으로 비무장지대(DMZ)를 건너 21살의 젊은 나이에 월북했다. 미군 병사의 이름은 제임스 조셉 드레스녹(James Joseph Dresnok)이다. 북한에서 사용한 이름은 홍철수로 ‘홍’자는 붉을 홍(紅)자라고 한다. 그는 젊은 나이에 월북하여 대부분의 인생을 북한에서 보냈고, 평생을 북한에서 살았으며, 자신이 한 선택을 끝까지 믿고 지켰다. 그는 왜 그런 것일까? 그리고 왜 한 평생을 북한을 믿으며 살았던 것일까? 그러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 2006년 영국에서 만든 다큐멘터리이자 영화인 <푸른 눈의 평양 시민(Crossing The Line)>을 감상했다.

1962년부터 1965년까지 DMZ에 근무하던 미군 병사 4명이 탈영하여 월북했다. 첫 번째로 월북한 인물은 래리 앨런 앱셔(Larry Allen Abshier)로 사병 출신이다. 두 번째로 월북한 인물이 바로 사병 출신 제임스 조셉 드레스녹이며, 영국에서 만든 다큐멘터리 <푸른 눈의 평양 시민>의 주인공이다. 세 번째로 월북한 인물은 특수 요원 출신인 병사 제리 웨인 패리쉬(Jerry Wayne Parrish)이며, 앱셔와 드레스녹이 월북한지 1년 뒤인 1963년에 월북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로 월북한 미군 병사는 하사관 출신인 찰스 로버트 젠킨스(Charles Robert Jenkins)로 1965년 1월에 월북했다. 월북한 이유와 동기를 떠나서 이들 모두 북한에서 오랜 삶을 살았고, 이들 중 3명은 북한에서 생을 마감했다.

첫 번째로 월북한 앱셔는 1983년 40세의 나이로 북한에서 사망했고, 세 번째로 월북한 패리쉬는 1998년 5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네 번째로 월북한 젠켄스는 2004년 납북되었다 일본으로 간 일본인 아내를 따라 일본에 정착했다. 결과적으로 2000년대 이후 북한에 유일하게 남은 월북 미군은 두 번째로 월북한 드레스녹이었다. 다큐멘터리 <푸른 눈의 평양시민>에서 드레스녹은 북한을 옹호하며, 자신의 선택한 길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얘기한다. 오히려 북한에 왔기 때문에, 더 나은 삶을 살게 된 것임을 주장하고 있다. 반공주의 정서가 강한 한국 사회에선 드레스녹의 주장을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드레스녹이 이와 같은 주장을 하는 데에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 우선 그가 살아온 인생을 보면 그의 선택이 단순하게 판단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가 미국에서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한번 보도록 하자.

 

1. 드레스녹의 어린 시절과 미군 복무

 

제임스 조셉 드레스녹은 1941년 미국 버지니아 주 리치먼드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힘들게 살았다. 그의 어머니는 술집에서 일했고 아버지와 매일같이 싸웠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 그의 어머니는 드레스녹을 포함한 자식들을 데리고 집을 나갔으며,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 시절 드레스녹은 차 뒷자리에서 자며 아무거나 주워 먹으며 살았었다. 쉽게 말해 사실상 노숙 생활을 한 것이다.

드레스녹이 1941년생인 걸 감안하면, 적어도 10대 전후의 이야기일 것이다. 그 시절의 드레스녹인 대략 10대 전후라고 생각 했을 때, 적어도 1940년대 후반이나 1950년대 초반인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 성장과 호황을 거듭하던 시절이다. 특히나 1950년대 미국 사회의 풍요로움과 자본주의적 이상은 현재 맥도날드에서 파는 1955 버거로 대표될 정도로 이상적인 것이다. 즉 그런 호황의 시기에 어린 드레스녹은 빈민 생활을 경험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어린 시절 드레스녹은 고아가 되었다. 노숙자 생활을 하던 드레스녹은 20달러와 자전거를 훔쳤는데, 경찰에게 붙잡혀 재판에서 집행 유예 6년을 선고 받고, 교도소 생활도 했다. 어린 시절이라 결국 일찍 풀려났던 것으로 보이며, 오버스트리트란 목사가 오갈 데 없는 그를 거뒀다고 한다. 참고로 오버스트리트는 갈 곳이 없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집을 개방하여 거둬들였으며, 그들이 잘 자라도록 도운 훌륭한 목사였던 것으로 보인다. 오버스트리트가 거둔 이후 드레스녹은 서니 지터라는 같은 고아 출신의 친구도 사귀었고, 17살이 되는 나이에 미군에 입대했다. 드레스녹이 미군에 입대한 이유는 분명했다. 가난에서 벗어나 먹고 살 수 있는 방법이 군 입대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쉽게 말해 숙식 제공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1960년대 당시 DMZ 주변을 정찰하는 미군들

군에 입대한 그는 교회에서 만든 캐서린 린우드라는 여자와 결혼했고, 서독에 있는 미군기지에 배치되어 2년간 독일에서 군복무를 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2년간의 군복무를 마칠 때 생겼다. 그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부인이 바람을 펴 헤어지게 된 것이다. 미국으로 돌아온 드레스녹은 이혼 후 곧 바도 미군에 재입대 했다. 그리고 1962년 5월 한국에 배치됐다. 드레스녹은 인터뷰에서 당시 미국을 떠날 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리치먼드를 떠날 당시 모든 게 지겨웠어요. 다 싫었죠. 죽든 살든 상관없었습니다.”

그만큼 이혼의 충격은 컸고, 그는 한국에서 최전방인 DMZ에 배치됐다. DMZ에 배치된 그는 사실상 전투현장 수준의 위험한 곳에 있었다. 당시 DMZ에서는 남북한 측의 소규모 군사 충돌이 있었으며, 군대 훈련도 강도가 높았다. 다른 한편, 미군 기지가 있는 인근 마을에는 미군을 대상으로 하는 매춘업소가 번성했다. 서독 근무 시기 부인 외에는 그 어떤 여자와도 관계를 갖지 않았던 드레스녹은 그 시기 인생을 절반쯤 포기한 상태였고, 따라서 휴가를 얻는 순간 마다, 자신이 가진 돈을 성매매에 사용했다. 그러던 중 월북을 선택했다. 그가 월북을 선택한 이유에는 상관이 부당하게 가중처벌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DMZ에 있는 지뢰 지역을 건너 월북했다. 그를 체포했던 인민군 병사는 한국전쟁 시기 미군에게 가족을 잃은 것으로 추정되는 인사였지만, 반미감정을 잠시나마 억누르고 드레스녹을 죽이지 않고 체포했다. 드레스녹은 잠시 조사를 받은 뒤, 평양으로 이송됐고 장기간의 심문을 마치고 나서 앱셔와 만나게 됐다.

 

2. 북한에서의 적응 과정과 영화 출현

 

북한에 오게 된 드레스녹은 자신보다 3개월 빨리 온 앱셔와 빨리 친해졌고, 1963년에 월북한 패리쉬하고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그러나 1965년 1월 하사관 출신의 젠킨스가 오면서, 관계가 좀 싸늘해졌었다고 한다. 드레스녹 본인에 따르면 젠킨스가 계급을 내세우며 자기 멋대로 하려 했기 때문에 충돌했다고 한다. 젠킨스는 하사관 출신이었지만, 드레스녹 보다 신체가 작았다. 결국 젠킨스는 드레스녹과의 몸싸움에서 졌다. 사실관계를 떠나서 이후 젠킨스가 자서전에서 드레스녹에게 많이 맞았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면, 그가 드레스녹에게 힘으로는 상대가 안 됐던 것 같다.

 4명의 월북 미군 사진

사실 월북 미군 4명은 초기 북한 생활에 적응하기 힘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미국의 기본적인 생활과 북한의 생활은 다소 질적으로 차이가 있었고, 문화도 달랐고, 인종도 달랐으며, 식습관도 달랐다. 또한 한국전쟁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라 북한의 반미정서는 극에 달했던 시점이다. 무엇보다 한국전쟁 시기 미군의 무차별 폭격을 경험했던 북한 사람들은 미국인들을 매우 싫어했다. 그 때문에 월북 미군들은 간혹 북한 시민들에게 “저 미국놈들 지나간다!”와 같은 증오 섞인 말을 듣기도 했었다. 1966년 월북 미군 4명은 북한을 나오기 위해 소련 대사관에 찾아가 망명 신청을 했다. 그러나 소련 대사관 측은 이를 북한 당국에게 알렸고, 이들은 북한 사회에서 보다 더 많은 사상교육을 받게 되었다.

드레스녹에 따르면 이 시기 주체사상과 혁명사, 문화, 삶, 습관 등을 더 많이 배웠고, 드레스녹 스스로도 더 배우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드레스녹이 문화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는 것도 이 시기 언어를 열심히 배웠기 때문일 것이다. 1972년 북한 정부는 이들의 재교육이 충분히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여, 이들에게 북한 시민권을 부여했다. 또한 집과 배급권 그리고 자동차도 국가에서 지급해줬다. 이에 따라 이 월북 미군들은 북한 정부를 위해 일하게 됐으며, 김일성의 아들 김정일의 영화 산업에도 참여했다. 월북 미군 4명은 1978년에 북한에서 개봉한 영화 <이름 없는 영웅들>에 배우로 참여했다. 여기서 드레스녹은 포로수용소 소장인 아서 드레스콕 역할을 맞았다.

북한 영화 <이름 없는 영웅들> 중국 포스터, <이름 없는 영웅들>은 북한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대작 중 하나다.)

<이름 없는 영웅들>에 배우로 참여한 이들은 북한 사회에서 유명한 대 스타가 되었다. 드레스녹은 이후에도 북한 사람들에게 ‘아서’로 불리기도 한다. 이러한 명성을 토대로 드레스녹은 1986년부터 평양외국어대에서 교편도 잡았었으며, 2000년대 까지도 간혹 초정되어 영어 강연도 적잖게 했다. 이후 외국에서 온 한 백인 여성이랑 결혼하여 두 명의 자식을 얻었으며, 그 이후엔 콩고계 혼혈인 여성과 결혼해서 자식 한명을 얻었다. 자식들은 평양외국어대를 나왔으며, 그들은 이후 재미교포인 노길남씨의 인터뷰에 응해 2017년에 존재를 드러내기도 했다.

 

3. 젠킨스의 거짓말에 대해서

 

드레스녹의 동료인 젠킨스는 1980년대 납북된 일본인 여성과 결혼했다. 드레스녹이나 패리쉬와 달이 한국말을 거의 하지 못했던 젠킨스는 두 명의 딸을 얻었지만, 일본인 여성은 이후 납북된 지 24년 만에 일본으로 귀환했고, 그와 딸 두 명은 북한에 남겨졌다. 결국 그는 어떻게든 일본에 가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2004년에 일본으로 갔다. 물론 이는 북한 정부에서 그가 알아서 선택하도록 방조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젠킨스는 탈영한지 39년 만에 미군 부대에 복귀했다. 1965년 1월 그가 북한으로 월북했던 이유는 북한에 정착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이 점이 드레스녹이나 다른 월북 미군과 달랐던 점이다. 무엇보다 그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여 이유 없이 죽기 싫었기 때문에 월북을 선택한 것이었다. 물론 그는 월북하여, 소련을 거쳐 미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했다. 실제로 서독에 있던 미군들 중 일부가 베트남 전쟁 참전을 피하기 위해 동독으로 탈출하여 소련을 거쳐 미국에서 감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즉 젠킨스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월북했던 것이다. 아쉽게도 그에게 돌아갈 길은 없었고, 결국 39년간 북한에서 생활했다.

 찰스 로버트 젠킨스, 1965년에 월북하여 39년 동안 북한에서 살았던 그는 2004년 일본으로 가서 북한과 드레스녹에 대한 온갖 악담을 했다.

일본으로 간 젠킨스는 부인과 만났고, 그 둘의 사연은 일본 전역을 흔들었다. 당시 일본의 총리였던 고이즈미는 미국의 부시 대통령에게 경미한 처벌을 직접적으로 요구했다. 하지만 그 시기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을 치르고 있었고, 탈영병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았다. 결국 젠킨스에 대한 처벌 회피는 불가능했고, 젠킨스는 자수 전 마지막 카드를 사용했다. 그것은 바로 미국 기자와의 독점 인터뷰를 하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젠킨스는 자신이 북한에서 경험한 것을 밝혔다. 그러나 그 내용 대다수는 믿기 힘든 거짓 이야기도 많았다.

예를 들면 젠킨스는 “북한 당국에 반하는 행동을 하면, 드레스녹한테 자주 맞았다고” 했다. 그러나 드레스녹은 “젠킨스와 싸운 횟수가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다”고 반박했다.

젠킨스는 “팔에 소총 2대를 X자로 새기고 그 밑엔 미군을 새겼는데 북한에서 마취도 없이 미군이란 글자를 잘라냈다”고 했지만, 반면 드레스녹은 자신이 스스로 지운 문신 자국을 보이며 이건 내 스스로 한 것이다. 젠킨스도 본인 스스로 했다고 주장했다. 젠킨스는 “북한이 유럽과 중동 사람들을 강제로 억류해서 그 사람들이 아이를 낳으면 애들을 간첩 프로그램에 이용한다”고 주장했지만, 드레스녹은 정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반박했다. 결론적으로 드레스녹은 젠킨스가 한 말에 대해 “자기만 살려고 날 모함한 것입니다”고 했다. 일종의 면피용 거짓말인 것이다.

일각에서는 드레스녹이 면피용으로 급하게 반박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탈북자들이 적잖게 여러 거짓말들을 한 사례를 보았을 때, 젠킨스도 그러한 과장과 각색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이 경미하게 처벌 받기 위해 과거 북한에서 쌓였던 불만과 더불어 그렇게 거짓말을 이용한 것이다. 거기다 당시 북한은 미국 부시 정부에 의해 악의 축(Axis of Evil)로 규정된 상태였고, 앞에서 언급한 다소 자극적인 말들은 좋은 반북 친미의 소재였다. 따라서 젠킨스의 그런 주장들은 의도적인 거짓말임을 감안해야 한다. 이후 젠킨스가 일본어로 출간한 그의 자서전은 그러한 각색들을 의도적으로 추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큐멘터리에서 드레스녹은 젠킨스의 거짓말을 보며,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먼저 간 친구들이 이걸 못 보는 게 정말 유감스럽군요.”

 

4. 드레스녹의 선택은 쉽게 비난할 수 없다

 

드레스녹의 인생 스토리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푸른 눈의 평양 시민>은 2006년에 나온 작품이다. 드레스녹은 다큐멘터리에서도 자신이 북한에서의 삶을 선택한 것을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드레스녹의 선택은 진심이었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선, 그가 한 평생을 후회하지 않으며 북한에 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북한에 끝까지 남았고, 2016년 북한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그의 자식들은 현재 북한에서 살고 있으며, 김정은 위원장에게 충성하고 있다.

2017년 당시 드레스녹의 아들을 인터뷰했던 노길남 씨

이번에 본 <푸른 눈의 평양 시민>은 여러모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무엇보다 월북 미군 입장에서 바라본 북한과 인생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선택이 결코 미친 것이 아닌, 합리적이고 당연한 이유가 있었음을 객관적으로 입증했다. 나는 이 다큐멘터리가 월북을 선택하여 북한에서의 삶을 선택한 드레스녹의 인생사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보여줬다 생각한다.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선택(Choice)을 한다. 누군가는 이 사람이 월북한 것은 제 발로 지옥불에 들어간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사람의 선택이 단순히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 의문이다.

물론 나는 이 사람의 인생을 따르자고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드레스녹이 이것을 선택한 이유를 자세히 들어다 보면, 그가 한 선택은 그의 입장에서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당연하게도 미국과 북한의 경제력은 차이가 많이 난다. 특히 생활수준 부분에 있어서 미국과 유엔의 경제제재를 받고 있는 북한은 경제사정이 어려울 수밖에 없는 국제적인 구조에 놓여있다. 하지만 드레스녹의 경우 젊은 시절의 삶은 매우 가난했다. 그는 미국 사회에서 사실상 최하층 빈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가 미군에 입대한 것도 빈곤한 삶에서 벗어나기 위한 선택이었으며, 1962년 한국에 배치되었을 때, 월북을 선택했다.

영화 <푸른 눈의 평양시민> 포스터

그는 월북하여 평양에 사는 북한 시민으로서 북한 정부로부터 많은 혜택과 배려를 받았다. 그 덕분에 무상으로 집도 받았고, 무상으로 3명의 자식을 대학에 보내 공부시킬 수 있었으며, 아플 때 병원에서 무상으로 치료받을 수 있었다. 또한 북한이 가장 경제적으로 힘들던 고난의 행군 시기에 굶지 않고 배급을 받았다. 만약에 미국 최하층 빈민의 삶을 살던 드레스녹이 계속 미군에 있으며, 미국사회에 살았다면 가족들에게 무상으로 집을 나눠주고, 무상으로 대학까지 교육을 시킬 수 있었을까?

나는 이 점에서 정말 많은 생각을 했다. 물론 드레스녹이 미군에 있다가 엄청난 사업 능력을 발휘해 미국의 사업가가 되었다면, 얘기가 달랐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는 월북하여 크게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다 2016년에 세상을 떠났다. 나는 그가 한 선택이 단순히 조롱과 비난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보며, 그의 입장에서도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그가 거쳤던 변화와 입장을 말하는 차원에서 <푸른 눈의 평양 시민>에서 드레스녹이 했던 말을 인용하며 마치겠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이들(월북미군들)과 함께 공산주의의 길로 전진한다.’

인종도 피부색도 다르지만 제길, 이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배울 꺼라 맹세했죠.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습니다.

조선어도 배우고, 풍습도, 인사법도 배웠고 생활도 배웠죠.

‘아, 이렇게 생각하고 저렇게 해야 하는구나.’

전 주체사상도 공부했습니다.

조선혁명사와 위대한 수령님의 고매한 덕목도 배웠죠. 조선노동당의 정책도 거의 다 배웠습니다. 조선사람들과 똑같이 학습했어요. 이 학습은 온전히 우리의 삶을 구성했죠.

진심으로 공감했던 건, 인간은 자기 삶의 주체라는 것이었습니다. 주체사상 중에 그 견해는 동감했습니다. 꽤나 감동적이었어요. 점차 조선사람들을 이해하게 됐죠.”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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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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