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탈자를 수탈하자! _ 부자들 곳간을 터는 것은 역사적, 과학적, 도덕적으로 정당하다!

향내 나는 맛있는 술은 천 사람의 피요(淸香旨酒千人血)

잘게 다진 진귀하고 맛좋은 음식은 만백성의 살이다(細切珍羞萬姓膏)

촛농이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 떨어지고 (燭淚落時民淚落)

풍악 소리 높은 곳에 백성의 원성이 높다(歌聲高處怨聲高)

 

새해벽두부터 조선일보를 위시로 서울신문, 문화일보, 매일경제신문 등이 “부자들의 곳간을 털자”는 말에 경악하여 일련의 사설로 민주노총과 민중운동 진영에 대해 악랄한 비난을 퍼부어 댔다.

조선일보는 민주노총이야말로 노동귀족이고 불평등의 주범(“기득권 민노총이 이제 ‘부자들 곳간 털자’는 말까지 한다”)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서울신문 역시 사설에서 “불평등을 키우는 주범 중 하나인 기득권 노조가 기업과 부자들을 적대시하며 강경 투쟁을 선동하고 있는 것이다”(“‘부자 곳간 털자’는 노조 눈치만 보는 입법 포퓰리즘”)라고 악선전을 해대고 있다.

매일경제신문은 더 노골적이다. “‘부자들 곳간 털자’ 민주노총 시무식서 나온 섬뜩한 발언”이라는 사설에서 “민주노총은 더 이상 핍박받는 약자가 아니다. 오히려 법 위에 군림하며 갑질과 횡포를 일삼는 거대한 기득권 집단이…‘약자 코스프레’를 하면서 국민이 정당하게 쌓은 부를 강탈하자고 하면 누가 납득하겠나. 현 정부 들어 ‘촛불청구서’로 기세등등해진 민주노총은 자신들의 특권을 지키기 위해 온갖 폭력과 불법, 몰상식을 저질러 국민적 분노가 임계치를 넘은 상황이다”라고 국민적 분노를 조장하여 실은 자신들의 적개심을 토해내고 있다. 이들 언론들은 사전에 입을 맞춘 듯이 기조를 통일하여 민주노총을 극렬 비난하고 있다.

자본의 나팔수들이 적반하장으로 수조, 수십조 재산을 가지고 있고 국내토지의 대다수를 소유하고 몇 %의 지분으로 전체 계열사를 지배하는 재벌들이 아니라, 민주노총이 불평등의 주범 운운하는 기사를 보노라면 저들의 파렴치함과 뻔뻔함의 경지에 기가 찰 따름이다. 자본은 유연화된 이윤축적 전략을 내세운 죽음의 외주화·하청화로 저임금 불안정 노동의 비정규직을 대폭 늘리고, 노동자들을 비참한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는 만성적으로 실업자를 양산하고 있다. 그런데도 비정규직과 (청년)실업자들을 내세워 도리어 투쟁하는 비정규직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가고 있는 민주노총을 비난하는 작태를 보노라면 이러한 쓰레기언론들이야말로 청산해야할 최우선적 적폐임을 실감하게 된다.

이들의 주장은 직접적으로는 “정권 교체를 넘어 체제 교체의 요구를 전면화해 자주·평등 세상을 앞당겨야 한다”는 민주노총 양경수 위원장의 신년사와 “부자들의 곳간을 털지 않고 한국 사회에 만연한 불평등을 누가 해결할 수 있단 말인가”라는 한상균 노동자대통령 후보의 시무식 발언을 비난하는 것이지만 이를 기회로 민주노총과 민중운동 진영을 비난하기 위함이다. 이를 통해 당장은 박근혜 퇴진의 도화선이 됐던 민중총궐기가 5년만에 다시 열리는 것을 훼방 놓으려 한다. 장기적으로는 민주/국힘 양대 보수진영과 대결하는 노동자 민중의 자주적 정치적 진출을 막고 민중으로부터 진보진영을 고립시킴으로써 양당지배체제를 영구적으로 존속시키기 위함이다. 이 양당지배체제는 돌려막기로 노동자 민중이 이 체제와 직접 싸우는 것을 막는 방패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들 언론들은 “부자 곳간을 털자”는 주장은 헌법에 보장된 사유재산권을 위협하는 망언이자 계급투쟁을 부추기는 시대착오적인 폭언이다. ‘부자를 타도해 노동자 세상을 만들자’는 공산주의식 선동이나 다름없다”고 비난한다. 그리하여 이것을 선량하게 돈 벌어 부자가 된 사람들의 재산을 강탈하는 무도한 강도와 도둑으로 취급하려고 한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하면 부자들과 자본가들의 곳간을 털어 불평등을 해결하고 평등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은 역사적으로나 과학적으로나 심지어 도덕적으로도 지극히 정당하다.

 

민중의 피와 살과 눈물이 봉건지배자들의 향락의 원천이었다

 

봉건시대 왕과 그 일족들, 고위 관리들, 대지주들은 수십, 수백 명의 하인들을 부리며, 창고와 집에는 수백 수천가마니의 쌀과 값비싼 폐물이 넘쳐 났다. 대지주들은 곳간에 식량이 썩어 내버리거나 쥐새끼들의 먹이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곳간을 열지 않았다.

대지주들이 배에 기름이 차는 동안 수백만의 소작인들과 가족들은 굶주림으로 죽어나가거나 초근목피로 연명을 했다.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속담은 현실을 은폐, 호도하는 기만적인 거짓말이었다. 나라님과 그 일족들이 바로 최대 악질 지주들이었기 때문이다. 소작인들과 민중 대다수의 가난과 굶주림은 천재지변처럼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라, 대개는 대지주들이 고액 소작료로 소작인들이 뼈 빠지게 일해 거둔 곡식들을 빼앗아갔기 때문이다. 흉년에도 대부분 고액 소작료를 그대로 납부해야 했기 때문에 굶주림은 훨씬 더 심각해졌다. 여기에 봉건 지배계급은 탐관오리들을 동원해 각종 세금 명목으로 또다시 수탈해 갔다.

농민들은 도처에서 민란을 일으켜 봉건 지주와 통치배들의 학정에 저항했다.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는 분기점에 일어난 갑오농민전쟁은 반봉건, 반외세를 내건 역사상 가장 위대한 민중항쟁의 하나였다. 봉건지배계급은 청나라 군대와 일본군대를 끌어들여 농민군 지도자를 처형하고 수만 명의 농민군들을 무참하게 살해해서 저항을 진압했다.

조선 봉건체제는 사대부 양반들의 글과 유교의 도덕으로 지탱한 사회가 아니었다. 농민들을 중심으로 한 민중의 생산으로 지탱한 사회였다. 사대부들이 만든 종교와 도덕은 봉건착취 질서를 정당화 하고 저항을 막는 수단에 불과했다. 봉건지배체제는 폭력으로 지주의 소작인 착취를 보장해 줬다. 유럽의 중세사도 수백 년 동안 억압과 착취에 맞섰던 농민반란으로 점철되었다.

곳간에 쌓여 있는 쌀을 터는 행위는 강도짓도 아니고 도둑질도 아니었다. 지주들에 의해 굶주린 자들이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정당한 저항이었다. 더욱이 곳간에 쌓인 곡식들은 굶주린 소작 농민들이 생산한 것이었다. 기생적인 지주들은 생산에 전혀 기여도 하지 않으면서 중간 착취자인 마름을 내세워 소작인들을 끝없이 쥐어짰다. 탐욕스런 지주들의 곳간을 털고 더 나아가 그 탐욕의 원천이 되는 토지를 농민들한테 돌려주는 행위는 너무나 정당하고 자연스런 것이었다.

일제시대 대다수 소작인, 자소작인들은 친일 지주와 일제에 의해 이중삼중의 착취를 당하며 고율소작료를 강탈당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일제시대와 해방 직후 소작을 금지하고 “토지는 농민에게”라는 경자유전은 너무나 정당한 요구였다.

일제가 물러난 이후 조선에서는 전국적으로 인민위원회와 농민자치기구가 만들어지고 친일 지주들이 보유한 토지는 무상으로 몰수해 무상으로 농민 자신들에게 돌아갔다. 잠시나마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찾은 것이다. 그러나 미군정이 새 점령군으로 들어오면서 농민들이 일시 보유한 토지는 다시 미군정과 친일지주들과 자본가들이 강탈해 갔다. 친일파들은 이제 수많은 민중을 총칼로 학살하며 자신들의 사적소유권을 비호해주는 미군정에게 충성을 다 바쳤다. 반면 북에서는 산업국유화, 노동자, 여성의 권리가 철저하게 보장되고 경자유전 원칙으로 농민들이 해방되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도 과연 농민들이 굶주림을 면하고 빼앗긴 곡물을 되찾기 위해 지주들의 곳간을 터는 것이 무엇이 잘못 됐단 말인가? 이들 쓰레기 언론들은 부자 곳간을 터는 것이 지주들의 신성한 사적소유권을 침해한다고 하면서 가난한 소작농민들을 악랄하게 비난하며 지주들의 착취와 탐욕을 옹호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착취자는 지주로부터 생산수단을 넘겨받은 자본가들이다

 

지금 조선일보를 비롯한 언론 사주들은 상당수가 친일파이거나 친일파들의 자식들이다. 이들은 반역의 역사를 따라 민중을 영속적으로 억압, 착취, 수탈하기 위해 친미 반공주의자들이 되었다. 미군정과 이승만 민중 도살자들의 주구가 되었다. 일제가 남기고 간 적산을 불하 받은 자본가들과 함께 이들 지주들 상당수는 자본주의 발전과 더불어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악랄한 자본가들로 변신했다.

자본가들과 자본의 언론들은 일제시대에는 일제에 봉사하고, 해방 이후에는 미군정에 충성하고, 군사독재 시절에는 박정희 파쇼독재자와 전두환, 노태우 신군부 정권을 옹호해왔다.

일제시대 총독부 지배가 그러했던 것처럼, 미제국주의 지배는 자본가들에게는 공기와 같이 필수적인 것이었고 미제의 보호령 하에서 노동자 민중을 착취하고 수탈하며 오늘날 재벌들과 그 일족들이 형성됐다. 쓰레기 언론들은 자본가들의 소유거나 언론자체가 거대자본이 되어 이 체제의 억압에 저항하는 세력들에게 ‘빨갱이’ 운운하며 악랄하게 비난을 퍼부어대며 이른바 국민여론이라는 것을 만들어내고 있다. 국민여론이라는 것은 실은 이 사회를 지배하는 통치계급의 사상인 것이다.

언론들은 부자라는 말로 슬쩍 물타기 하지만 현대의 부자들은 실은 대다수 (국내외)자본가들을 일컫는다. 부자들, 실은 재벌을 포함한 자본가들과 그들과 이해를 같이 하는 일가들, 족속들은 이 사회의 최상층 집단들로서 노동자 민중의 집단적 생산과 판매, 서비스로 기생적으로 살아가면서도 탐욕적이고 부패하고 파렴치하고 심지어는 폭력적이다.

삼성 이건희의 집단 성매수 사건과 조선일보 방씨 일가의 성상납 사건,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부인인 이명희 일우재단 이사장의 여직원 폭행 사건과 딸 조현아 부사장의 땅콩회항 사건, 영화 베테랑의 모티브가 됐던 SK그룹 회장 최태원의 사촌동생인 최철원 마이트앤메인 대표이사의 노동자에 대한 맷값 폭력 사건, 불법 음란물 유통을 일삼으며 직원을 무차별 폭행하고 엽기적인 짓을 자행해 왔던 양진호 한국미래기술 회장, 현대중공업 실소유주인 정몽준 막내 아들의 “국민정서가 미개하다”는 세월호 참사에 대한 막말처럼, 지극히 일부 사례만 들어도 재벌들과 그 족속들이야말로 반사회적인 패륜집단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평소 알고 지낸 피자집을 응원한다면서 해당 가게가 기념품으로 내놓은 붉은색 지갑과 피자를 손에 들고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리면서 게시물에 “#난공산당이싫어요”라는 해시태그를 다는가하면 젓갈 사진과 숙취해소제 사진을 찍어 올리면서 뜬금없이 ‘멸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난 공산주의가 싫다”는 글을 인스타그램 게시물에 올리는 신세계그룹 정용진 부회장의 행태를 보노라면 저들 인간 쓰레기들이 얼마나 유치하고 속물적인지 적나라하게 알 수 있게 된다. 저들은 1960년, 70년대 군사독재 시대의 시대착오적 반공주의 세계관으로부터 하나도 진화하지 않은 채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재벌들과 그 재벌들 뒤의 거대 해외 자본들, 그리고 그들로부터 나오는 부와 권력과 이권을 공유하며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은행이사진들, 대다수 국회의원 나리들, 타락한 교단 종교계의 극우 지도자들, 조선일보를 비롯한 거대 언론 주필들, 똥별이라 불리는 고위 장성들, 검경 수뇌부들, 정보기관 고위 수장들, 고위 관료들, 대장동과 전국의 대장동들에 파리떼처럼 몰려드는 전현직 법관, 검사, 법무법인의 변호사들로 구성되는 투기자들로부터 지방토호들까지 수만에서 수십만에 달하는 자들이 부와 권력, 이권을 공유하며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영화 <내부자들>에서 보듯 이들은 담합하여 지배한다. 심지어 재벌들은 재벌가들 간, 국회의원, 고위 관료들과 정략결혼으로 지배 카르텔을 공고히 한다.

저들이 가진 힘은 개인의 힘이 아니라 저들이 가진 자본과 권력의 힘으로부터 나온다. 저들 족속들의 끝없는 오만함과 파렴치함과 추악함은 무소불위의 자본과 권력의 힘으로부터 생겨난다. 봉건 착취배들이 주지육림을 일삼고 음풍농월을 즐길 수 있었던 물질적 기반을 굶주린 농민들이 제공했듯이, 오늘날 재벌들과 일파들이 누리는 부와 풍요와 권력은 절대 다수 노동자들과 근로인민들이 제공했다. 심지어 오늘날 지배계급은 봉건통치배들의 제한된 생산력, 곡식 저장의 제한성으로 인해 제한돼 있었는데 반해, 훨씬 더 거대하고 무한축적을 하는 자본의 특성상 봉건 통치배들의 그것은 소박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런데 오늘날 자본가들이 소유한 기업은 자본가들의 것이 아니다. 주식회사 제도만 보더라도 사회의 유휴화폐 자본을 집중시켜 소유형태만으로도 사회화된 기업이 되었다. 주식 발행자들은 주식 액면가를 분할 발행함으로서 수많은 소액주주자들을 분산시키고 분열시키는 반면, 재벌들은 몇% 안 되는 총지분으로 계열사 전체를 지배하는 마술을 부린다. 지주회사 제도는 전체 계열사를 합법적으로 지배하게 한다.

소유의 실제 형태만이 아니라 생산도 사회화돼 있다. 기업들이 누리는 생산력 발전은 전 사회적 수준에서의 과학기술발전 없이는 이뤄질 수 없다. 더욱이 자본 자체가 노동자들과 생산자들의 기획, 생산, 판매, 서비스, 물류 같은 집단적 노동으로 이뤄진 것이다. 자본가들이 소유한 기계만 보더라도 노동자들의 과거 노동의 산물이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노동의 결과물들 중 일부만 임금 형태로 지불하고 나머지는 무상으로 수취했다. 이것이 이윤이다. 자본주의는 과거가 현재를 지배한다고 하는데 그 말은 노동자들의 집단적인 과거의 노동이 자본이 되어 그 자본의 전유자들인 자본가들이 생산자들을 도리어 지배한다는 말이다.

맑스주의에서도 착취는 남의 노동의 결과물의 일부를 지불하지 않고 앗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도 봉건시대 착취는 눈에 보이는 반면에 현대자본주의는 임금노예를 부리면서도 마치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에게 임금이라는 시혜를 베푸는 것으로 착취를 은폐한다.

“부자 곳간을 털자”는 말은 “망언”도 아니고 “시대착오적인 폭언”도 아니다. 역사적으로나 과학적으로나 심지어 도덕적으로도 정당하다. 원시적 기독교의 건강성이 살아 있을 때에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며 부자들이 쌓아올린 부가 부정하다고 분명히 인식했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했다. 하물며 일하지 않는 자들이 직접 생산자들의 생산의 결과를 독차지 하고 천문학적 부를 누리며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현실은 완전히 거꾸로 뒤집힌 세상이다.

오늘날 대다수 자본가들은 심지어 직접 노동은 물론이고 관리노동으로부터도 배제되어 있다. 기업은 한 줌도 안 되는 기생충들이자 흡혈귀인 자본가들의 것이 아니다.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삼성전자, SK 같은 거대 기업들은 사회 전체의 과학기술 성과를 향유하고 있으며 수많은 노동자들의 집단적 노동, 심지어 야간 장시간 노동과 직업병과 중대재해로 희생되며 만들어진 땀과 피눈물의 결정체이다. 당연히 기업은 집단적 생산자들인 노동자들에게 귀속되어야 한다.

국가보안법을 내세워 헌법상 보장된 사상과 양심, 표현의 자유, 평등권과 행복추구권을 짓밟던 자들이 헌법을 내세우는 것은 가증스런 짓이다. 그런데 언론들은 사유재산권이 “헌법에 보장” 됐다고 하는데, 법은 기본적으로 권력을 가진 자들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다. 1948년 제헌헌법은 민중의 집단학살하며 만들어졌다. 1987년 헌법체제는 민중의 투쟁과 희생 하에서, 민중의 투쟁이 체제를 벗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들어졌다. 법률이 사적소유권이라는 지배계급의 이해에 철저하게 복무하면서도 기만적이고 형식적으로라도 피억압계급의 권리를 마지못해 명시한 것은 그 때문이다.

“신성한 사적소유권”은 이처럼 법률의 역사와 본질을 아는 순간 전혀 신성하지도 않다. 더욱이 착취의 본질을 과학적으로 인식하는 순간 쓸어버려야할 역사의 폐기물임을 알 수 있다. 헌법은 다수 노동자 민중이 권력을 잡아 한 줌도 안 되는 자본가들과 통치배들의 이해가 아니라 절대 다수의 인민의 의지, 복리와 번영, 행복, 정치적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다시 제정되어야 한다.

계급이 존재하지 않고 착취와 억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민주노총과 민중운동 진영에서는 돈키호테처럼 망상에 빠져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적들과 싸우고 있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이를 무시하면 그만일 텐데 언론들이 일제히 나서 왜 이토록 격렬하게 성토하고 나서고 있는 것일까? 언론들은 “부자들의 곳간을 털자”는 주장이 “계급투쟁을 부추기는 시대착오적인 폭언이”라고 막말을 쏟아 내고 있는데, 착취와 계급불평등,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계급투쟁을 부정하는 언론들이 이토록 격렬하게 민주노총과 민중운동 진영을 극렬하게 비난하는 것이야말로 계급투쟁이 아니면 무엇인가? 다만 민주노총과 민중운동 진영의 계급투쟁은 노동자들과 가난한 자들의 부자들과 자본가들에 대한 계급투쟁이고, 쓰레기 언론들의 계급투쟁은 부자들과 자본가들의 편에 서서 노동자들과 가난한 자들의 투쟁을 중단시키려는 계급투쟁이다.

언론들은 지금 사회는 “탈자본주의”이고 4차 산업혁명의 시대이기 때문에 계급투쟁이 시대착오적이라고 한다. 맑스가 《자본론》에서 말한 자본주의의 정의는 생산물이 교환을 위해 생산되며 상품생산이 지배적인 사회, 심지어 인간 노동력조차도 상품이 되는 사회이다.

만약 21세기 현 사회가 “탈자본주의”라면 상품생산이 사라지거나 인간 노동력이 상품으로 판매되지 않는 사회로 전환했어야 한다. 가령 그렇다면 현대자동차 회장 정몽구가 상품으로 자동차를 판매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소유하기 위해서 생산한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기업을 자본가들이 독점적으로 소유해서는 안 된다.

언론에서 말하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는 더더욱 계급모순이 격해지고 계급투쟁이 격렬해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4차 산업혁명의 시대는 점점 더 자동화, 무인화로 되면서 노동자들을 필요로 하지 않기에 대량해고가 더 빈번해지고 실업이 더 만성적으로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맑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주장했던 착취와 불평등은 현대자본주의에 와서 더 극심해 졌다. 현대자본주의 사회는 80대 20의 사회도 모자라, 10대 90의 사회, 심지어 1대 99의 사회로 1% 최상층 자본가들이 99를 지배하는 극단적으로 양극화되고 불평등한 사회가 되고 있다. 저들의 악선전과 달리, “부자들의 곳간을 털자”는 우리들의 계급투쟁은 진실에 입각하고 있으며 절대 다수 노동자 민중의 편에 선 정의로운 것이다. 만인의 평등과 복리를 위한 진보적 투쟁이다.

“부자들 곳간을 털자!” 착취자들의 착취를 종식시키자! 수탈자들을 수탈하자!

* 사진은 케테 콜비츠, 폭발 <농민전쟁>연작의 다섯 번째 작품, 1902-1903

<슐레지엔의 직조공>(1844)

_ 하이네

 

침침한 눈에는 눈물이 말랐다.

그들은 베틀에 앉아 이를 간다.

독일이여, 우리는 너의 수의를 짠다.

우리는 그 속에 세 겹의 저주를 짜 넣는다.

우리는 철거덕거리며 옷감을 짠다.

우리는 철거덕거리며 옷감을 짠다.

 

첫 번째 저주는 신에게

추운 겨울에도 굶주리며 그에게 기도하였건만

우리의 바람과 기다림은 헛되었다.

그는 우리를 원숭이처럼 놀리고 조롱하고 바보로 만들었다.

우리는 철거덕거리며 옷감을 짠다.

우리는 철거덕거리며 옷감을 짠다.

 

두 번째 저주는 국왕에게, 부자들을 위한 국왕에게

우리의 비참한 삶을 본체도 않고

우리를 협박하여 마지막 한 푼까지 앗아가고

우리를 개처럼 쏴 죽이게 한다.

우리는 철거덕거리며 옷감을 짠다.

우리는 철거덕거리며 옷감을 짠다.

 

세 번째 저주는 잘못된 조국에게

이 나라에는 오욕과 수치만이 판을 치고

꽃이란 꽃은 피기도 전에 꺾이며

모든 것이 썩어 문드러져 구더기가 득실거린다.

북은 나는 듯이 움직이고 베틀은 삐걱거리며

우리는 밤낮으로 옷감을 짠다.

썩어버린 독일이여, 우리는 너의 수의를 짠다.

우리는 그 속에 세 겹의 저주를 짜 넣는다.

우리는 철거덕거리며 옷감을 짠다.

우리는 철거덕거리며 옷감을 짠다.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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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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