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단상 _ 크리스맑스(ChristMarx)날에 빨치산 선생님들을 생각하며

김남기(《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 역사의 진실》 저자)

 

1960년 12월 캄보디아 국경지대에 있는 남베트남의 한 마을에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Mặt Trận Dân Tộc Giải Phóng Miền Nam Việt Nam, The National Liberation Front In South Vietnam)이라는 조직이 창설됐다. 당시 이 조직은 미국과 남베트남의 친미 꼭두각시 정권인 응오딘지엠(Ngo Dinh Diem)에 의해, 경멸하는 의미로 베트남 공산주의자(Vietnam Communist)라고 불렸다. 이들이 바로 베트콩이었다.

베트콩은 보통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에 맞서 게릴라전을 치른 것으로 대중매체에 많이 묘사된다. 물론 이는 사실이며, 이들의 피흘린 투쟁으로 남베트남을 해방시켰으며 미국 제국주의의 침략을 무찔렀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이 베트콩이라는 조직이 어떻게 해서 만들어 졌는지에 대해선 크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저 베트남 전쟁 시기 미국에 맞서 싸운 존재로만 생각할 뿐이다.

그러나 베트콩에 대해 보다 자세히 공부해보면, 놀라운 사실들이 발견된다. 이들은 일제와 불제시기(프랑스 식민지 시기), 일본 제국주의와 프랑스 제국주의에 맞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독립투사들이었고, 프랑스가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The Battle of Dien Bien Phu) 이후 물러가고 미국이 응오딘지엠 친미 제국주의 국가를 세우자마자 신식민주의에 맞서 싸운 항불ㆍ항일 ㆍ항미 독립투사들이었다. 반면 미군의 지원을 받는 남베트남 군대의 지휘관들은 죄다 친불 군대 출신의 매국노들이었다.

이들은 남녀평등 ㆍ소수민족 자치권 및 권리 보호ㆍ지주 및 자본가들의 재산 몰수 및 분배ㆍ세계평화 옹호ㆍ민간기업 국유화 등의 진보적 강령을 내세웠다. 그리고 이러한 가치들은 게릴라전을 전개하며, 대중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것이 바로 베트콩이 미제국주의에 맞서 싸워 승리하고, 남베트남 꼭두각시 정부를 무너뜨릴 수 있었던 이유였다.

많은 이들이 잘 모르겠으나, 베트콩과 같은 독립투사들은 한반도에도 존재했다. 그들이 바로 이현상 사령관이 지휘했던 ‘남부군’으로 대표되던 ‘빨치산(South Korean Partisan)’이다. 남한의 빨치산은 해방 후 미군정의 탄압이 극심해지던 1948년에 형성된 조직이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고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이에 맞선 민중의 투쟁이 곳곳에서 전개됐다. 민중의 투쟁은 10.1 대구 항쟁과 제주 4.3 항쟁 그리고 여순민중항쟁의 형태로 나타났으며, 1950년 한국전쟁 이전까지 대략 10만 명의 양민이 미국과 이승만 세력에 의해 학살당했다.

특히나 ‘14연대 반란’이라고 불렸던 여순항쟁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이른바 빨치산을 형성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여순항쟁이 일본군 장교출신 김종원을 포함한 진압군들에 의해 잔인하게 진압되었지만, 여순항쟁을 주도했던 이들은 빨치산이 되어 지리산에서 항쟁을 이어갔다. 이것이 바로 빨치산 탄생 배경이다.

빨치산들은 구빨치산과 신빨치산들로 나뉜다. 구빨치산은 여순항쟁때 형성된 인사들이고, 신빨치산은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 이후 낙동강 전선이 밀리자 북으로 후퇴하지 못하고 지리산으로 퇴각한 인사들이었다. 빨치산의 투쟁은 주로 1948년부터 1953년까지 전개됐으며, 이현상 사령관이 토벌대에 사살당한 이후에도, 일부 인사들은 외로운 투쟁을 전개하며 1950년대 중후반까지 싸웠다.

당시 빨치산 출신이었던 이태는 ‘남부군’이라는 소설을 썼다. 이 소설은 이후 1990년에 영화로 개봉했다. 영화를 보면, 이들의 인적 구성이 어땠는지 잘 나온다. 앞에서 언급한 베트콩 처럼, 빨치산 또한 남녀평등ㆍ토지개혁ㆍ기업 국유화 등과 같은 진보적인 강령을 내세웠고, 실제로 베트콩 처럼 여성 전투대원들도 많았다. 이 여성대원들은 남성대원들과 동등한 권리를 누렸다.

한국전쟁(Korean War) 당시 남하한 인민군들과 북상한 빨치산들이 접선하여 낙동강 전선에 배치되기도 했으며, 이현상이 지휘했던 구빨치산 대원들은 낙동강을 건너 미군 탱크를 상대로 전투를 치르기도 했다. 이들 중 한 여성 대원은 “인민공화국 만세!!”를 외치며, 미군 탱크와 함께 폭발하는 자발적인 희생정신까지 보였다.

빨치산들은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다시 지리산으로 후퇴했으며, 이 과정에서 북상하지 못한 다수의 인민군들도 빨치산으로 합류했다. 이들은 1953년 휴전협정 이전까지 온갖 고난과 역경 속에서 투쟁했다. 1951년부터는 간도 특설대 출신인 친일파 백선엽이 이현상과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나섰다. 빨치산 사령관 이현상은 일제시기 독립운동가였고, 빨치산을 지휘했던 다른 인사들 또한 다수가 일제시기 독립운동을 했던 독립운동가들이었다. 친일파가 독립운동가를 토벌하는 것이, 해방정국과 한국전쟁 당시 빨갱이 소탕의 본질이었다.

또한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이 그랬던 것 처럼, 한국전쟁 당시 미군은 지리산에 있는 빨치산들을 토벌한다는 목적아래, 네이팜 폭탄을 투하했다. 즉 현재 반달가슴곰 생태 보호 및 여러 야생동물 및 생태계가 보존된 지리산은 미군의 네이팜 폭격으로 상당부분 파괴됐다. 물론 이에 따른 인명 피해도 많았으며, 적잖은 민간인 희생자가 속출했다.

미군의 무차별 네이팜 폭격과 백선엽의 토벌로 인해 지리산의 투쟁은 결국 한국전쟁 종전 전후로 해서 사실상 종결됐다. 이들 중 전향을 거부한 이들은 대부분의 생애를 감옥에서 보냈다. 20년에서 30년 많게는 40년이라는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당연하게도 비전향장기수들을 감옥에 가둔 것은 국가보안법이었다.

크리스마스에 지리산에 오니, 과거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을 위해 제국주의에 맞서 싸웠던 빨치산 혁명가들이 생각이 난다. 사실 작년에 나는 빨치산 기행을 따라가 당시 투쟁에 참가했던 비전향장기수 어르신들을 만났다. 이 분들은 현재까지도, 이 사회의 모순을 잘 알고 있으며, 자본주의와 미제국주의에 맞선 투쟁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안타깝게도 이들의 역사는 레드 컴플렉스(Red Complex)에 의해, 얘기 한 번 제대로 꺼낼 수 없는 것이 우리사회의 현실이다.

현재 우리가 살고있는 사회는 그분들이 저항했던 그 모순들이 시퍼렇게 살아있다. 남녀평등ㆍ미제국주의ㆍ자본주의의 횡포ㆍ부익부 빈익빈 등 우리가 투쟁을 통해 쟁취해야할 것들이 많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사회에는 미제국주의가 시퍼렇게 살아있다. 그랬기에 5.18 광주 학살자 전두환이가 천수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이고, 주한미군이 코로나를 퍼뜨려도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현실에서 미제국주의를 몰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들에 맞선 투쟁은 노동해방과 더불어 선행되야할 과제 중 하나다. 따라서 반미투쟁은 어떤 형태로든 이 사회에서 지속되야 한다. 과거 빨치산 선생님들이 쟁취하고자 했던 것들을 현재 우리가 쟁취해야 한다. 그 분들의 투쟁정신은 우리에게도 계승되야 하며, 앞으로 계속 전개될 반미자주집회에 노동계급이 참가해서 목소리를 높여야 할 것이다. 지리산에서 크리스마스를 지내며, 이렇게라도 반미투쟁 의지를 다지는 글을 마친다.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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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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