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학살론을 왜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가?

_ 김남기(《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 역사의 진실》저자)

 

한국과 베트남과의 관계가 점차 좋아지면서, 베트남 전쟁 당시 벌어진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은 정치적으로 상당히 이슈가 된 문제다. 1990년대 김대중 대통령이 과거사에 대한 발언을 꺼낸 이래로 한국군 민간인 학살 문제는 한국인들에게 많이 각인되었다. 이에 따라 사과해야 한다는 입장이 많이 강해졌으며, 사실상 주류적 흐름이 되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에 의문을 표하는 집단들도 있다. 이는 인터넷 상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대개는 “한국군 민간인 학살은 증거가 없다.”, “베트콩이랑 민간인이랑 구분이 안 된다.” 그리고 “월맹군이나 베트콩도 학살을 많이 했다.”로 요약이 된다.

우선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국군 민간인 학살의 경우 증오비나 위령비가 있을 정도로 베트남 내에서도 확실한 증거들이 있다. 과거 하미 마을 학살 추모비를 세우는데 돈을 보탰던 한국군 참전용사들이 기록삭제를 요구하려 했던 행동들도 드러났다.(《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 204쪽) 이런 점을 보았을 때,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은 역사적 사실이며, 이에 대한 부정론은 역사왜곡 및 몰역사적 반동적 시각이다.

그들이 얘기하는 것처럼 적과 민간인 자체가 구분이 없는 게릴라전인 점을 생각해 보았을 때, 한국군의 학살은 가릴 수 없는 것이다. 그 이유는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기본적으로 양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전쟁을 전개하기 때문이다. 이는 퐁니 퐁넛 학살에 대해 증언한 베트남전 참전용사 류진성씨의 증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한국군이 작전 수행 중 베트콩들이 민간인을 집단 살해하고 사라지는 게 불가능하다”고 증언했다.(“비무장 민간인 학살을 무용담처럼”…베트남 참전 해병대원의 고백, 뉴스1, 2021년 11월 16일)

한국군 민간인 학살을 부정하는 이들은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학살을 자행했다고 하며, 그 규모가 크다고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들에 의한 학살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는 한국전쟁과 마찬가지로 구조상 좌익의 학살이나 테러가 우익보다는 현저하게 적을 수밖에 없다. 또한 이들은 적어도 사람을 가려가며 처형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예시는 다음과 같다.

“앞서 보았듯이 제네바 협약은 호치민에게 베트민군 전체를 남부에서 철수시키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철수가 완료된 뒤에도 베트민을 지지하는 수십만의 게릴라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각기 집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고 있었지만 여전히 경계태세로 대기하고 있었다. 그래서 디엠의 테러 정책은 곧바로 보복 테러를 당했다. 그러나 디엠의 폭력 행위는 그가 적으로 간주한 주민 전체를 대상으로 했던 반면 베트민은 디엠의 앞잡이들만 테러 대상으로 삼았다. 거의 아무도 테러 당한 앞잡이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하지 않았다. 이처럼 디엠은 농민을 멀리했고, 베트민은 가톨릭 신자를 제외한 거의 모든 사람에게 지지를 받았다.”(《호치민 평전》, 280쪽, 2001년에 출간된 호치민 평전으로 듀이커가 쓴 《호치민 평전》이 아니다.)

대표적으로 한국군 민간인 학살을 부정하는 이들이 주장하는 베트콩의 학살이 있다. 그것은 바로 후에 학살(Massacre of Hue)다. 그러나 이 후에 학살의 특징은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한 것이 강조 받는 한편 도시의 70%를 파괴한 미군 폭격에 대해선 입을 닫는 다는 점에서 정보의 편향성이라는 문제점과 여론조작 및 각색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닉 터스(Nick Turse)가 2013년에 쓴 ‘Kill Anything That Moves’에 따르면, 최소 3,800명 이상의 후에 시민이 폭격과 함포사격 그리고 포격 및 미군의 화력에 의해 죽었으며, 11만 6,000명이 집을 잃었다고 한다.(Kill Anything That Moves, 103쪽)

후에 학살은 보통 월맹군이 2,500명에서 최대 6,000명의 민간인을 죽인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 또한 과장되었다는 점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터스는 후에 학살을 언급한 부분에서 각주로 여러 자료들을 인용했는데, 거기 인용된 각주에 따르면, 미국의 역사학자 마릴린 B. 영은 후에 학살로 월맹군에게 죽은 희생자는 300~400명이며, 수천 명이라는 숫자는 매우 과장되었다고 주장했다.(Kill Anything That Moves p.306) 그 외에도 노엄 촘스키나 에드워드 허만 그리고 가레스 포터 등이 후에 학살에 대한 반론과 미국의 여론조작을 폭로한 저서들이 다수 있다.

노엄 촘스키는 저서 <여론조작>에서 후에 전투를 취재했던 영국의 사진 기자 필립 존스 그리피스(Philip Jones Griffiths)의 주장을 인용하며, “후에 탈환으로 발생한 수천 명의 민간인 희생자들은 미국의 무차별적인 화력 사용으로 죽임을 당한 뒤 공산주의자에 의한 학살의 희생자로 탈바꿈되었다”고 증언했다.(《여론조작》, 371쪽)

월맹군에 대한 학살 및 테러에 대한 자료를 담고 있는 것으로는 미국의 친미성향의 역사학자 권터 루이(Guenter Lewy)의 《America in Vietnam》이 있다. 책에 따르면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1957년부터 1972년까지 총 3만 6,725명의 민간인을 죽인 것으로 나온다.(《America in Vietnam》, 272~273쪽) 이는 을유문화사에서 출간한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에도 미군의 전쟁범죄 피닉스 작전과는 별개로 이 숫자를 인용하며, “전쟁 초기에는 어림잡아 약 3만 7,000명이 게릴라들에게 저항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목숨을 잃었다.”(《베트남 10000일의 전쟁 》, 469쪽)고 서술했다. 이러한 숫자가 과연 정확한지는 다소 의심을 품을만하다. 그런 의심과는 별개로 권터 루이의 책에선 베트남 전쟁 시기 미군과 남베트남군에 의한 바디 카운트로 죽은 민간인이 22만 명 이상인 것으로 보고 있다.(《America in Vietnam》, 450~451쪽)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적어도 베트콩이나 북베트남군에 의한 민간인 희생이 미군이나 남베트남군에 의한 희생보다 1/6 내지는 1/7 수준으로 적다는 것이다. 이러한 추산은 한국전쟁 당시 좌익의 학살과 우익의 학살을 비교했을 때, 나타나는 수치와 비슷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가 2011년에 쓴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미국인의 감수성에는 크게 불편하겠지만, 기록은 공산주의자들의 잔학 행위가 전체 사례에서 대략 1/6에 지나지 않으며 이들이 사람을 가려가며 처형했다는 사실(이를테면 한 곳에서는 지주 8명, 다른 곳에서는 경찰 14명 같은 식이었다)을 보여준다.”(《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276~277쪽)

이러한 커밍스의 주장은 앞에서 언급한 호치민 평전의 저자 찰스 펜의 주장과 어느 정도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 권터 루이의 주장을 인용하면서, 북베트남군이나 베트콩의 학살의 숫자를 어느 정도 의심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그러한 이유는 바로 촘스키나 허만 등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이들의 학살과 테러에 대한 보도가 미국 언론에 의해 조작되고 각색되는 사례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일본인 기자인 가츠이치 혼다는 사이공의 미군 총정보국에서 나온 “베트콩의 테러활동”이라는 제목의 주간 보고서를 조사했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을 발견했다.

“놀랄 만큼 야만적이고 지속적인 테러가 정기적으로 발생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 테러는 사이공의 ‘정보통제’에 의해 일반의 조사로부터 사실상 은폐되고 있었다. 살인사건이 결코 베트콩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곧 드러났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격화하는 베트남 전쟁의 무대 뒤에는 비밀스럽게 숨겨지고 있던 ‘끔찍한 사실’들이 수없이 많았던 것으로 생각된다.”(《미국 대외정책론》, 417쪽)

1970년 10월 북베트남의 포탄이 안호아에 있는 한 고아원에 떨어진 적이 있었다. 그런 사건이 일어나자 ABC의 조지 왓슨(Geroge Watson)은 겁에 질려 “아무도 이 학살에 대비하지 못했다. 이것은 북베트남인이 안호아에서 저지른 비이성적인 살인이다”라는 논평을 했다. 그러나 민간인 사상자는 압도적으로 미군의 화력에 의해 발생했다. 하지만 텔레비전이 지적한 책임 소재는 7/10의 비율로 적군에게 돌아갔고, ‘계산적인 테러작전’은 미군의 작전에 의한 불행하지만 정당한 부작용과는 대조를 이루었다.(《여론조작》, 344~345쪽)

1968년 미군이 자행하여 504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던 미라이 학살에는 일부 생존자들이 남베트남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1972년 봄 남베트남군의 공습 및 포격으로 이 수용소가 파괴되면서 미라이 학살 생존자들이 사망했는데, 이는 베트콩의 테러로 왜곡되었다. 촘스키와 허만이 쓴 미국 대외정책론에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다른 경우에 있어서는 그러한 사실들이 단순한 사고로서 등장하기도 하였다. 한 가지 특히 기이한 예를 들자면, 미라이 학살 사건의 생존자들이 강제 소개되어 있던 수용소가 1972년 봄 남베트남군의 공습 및 포격으로 대부분 파괴됐다. 이 파괴는 통상 그렇듯이 베트콩의 테러로 돌려졌다. 이 사실은 그 지역에 있던 퀘이커 봉사단원에 의해 폭로되었다.”(《미국 대외정책론》, 417쪽)

그 외에도 술에 취한 남베트남 정부군 병사가 자신들끼리 언쟁을 벌이다가 수류탄을 던져 옆에 서 있던 구경꾼들을 죽인 것도 이른바 ‘베트콩의 테러행위’로 보도됐다.(《미국 대외정책론》, 417쪽) 이러한 사실들을 보았을 때,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에 의한 테러와 학살은 많은 부분에서 조사와 의심을 해봐야 할 사항이며,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학살로 알려진 후에 학살만 보더라도 여러 부분에서 의구심과 조작 그리고 과장이 있었으며, 도시 70%가 미군 폭격에 의해 파괴되고, 수천 명의 민간인이 미국과 남베트남의 화력에 의해 죽은 것에 대해선 언급이 전혀 되고 있지 않다.

한국군 민간인 학살을 부정하는 이들은 후에 학살이나 몇몇 베트콩의 테러행위를 언급하며, “북베트남군이나 베트콩이 한국군 보다 민간인 학살을 더 많이 저질렀다”며 자신들 만의 위로를 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에는 이러한 반론도 가능하다. 그렇다면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으로 참전한 캐나다군이 민간인 60명을 학살했는데, 이는 인민군이나 좌익이 한 규모에 비해 작으니, 캐나다군은 잔인하지 않은 건가?(캐나다군의 양민학살 관련 자료는 <한국전 때 ‘캐나다군 범죄’, 캐는 프라이스 교수, 한겨레, 2005년 8월 11일>가 있다.)

학살의 규모가 어떠하든 캐나다군의 학살은 미군의 노근리 학살이나 한국의 국민 보도연맹 학살과 같은 맥락에서 해석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개입의 성질이 바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등장한 미국의 신제국주의적 정책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누가 전쟁을 먼저 일으켰느냐와는 다른 문제다.

베트남 전쟁의 부분도 마찬가지다. 만약에 친미주의자 권터 루이의 통계를 바탕으로 한국군이 양민 9,000명을 학살한 것보다 좀 더 크다 할지라도,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의 개입이 제국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점이 부정될 수는 없다. 따라서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한 혁명적 테러리즘과는 별개로 한국이 제국주의적 전쟁에 참전하여 민간인을 학살한 것에 대해선 당연히 반성해야 하는 것이다.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에 대한 테러와 학살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대다수 미국이나 남베트남 측의 조작 및 각색 그리고 본질적 맥락 생략이라는 문제가 심각하게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부분에 대한 검증과 비판 없이 미국과 남베트남측의 자료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히 사료를 바라보는 관점에 문제를 제기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 학살로 물타기를 시도하는 것은 기본적 맥락 생략이라는 심각한 문제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후에 학살을 언급할 때, 단순히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에 대한 언급만 할 것이 아니라, 미군의 가공할 만한 화력으로 죽은 민간인에 대해서도 언급해야한다. 적어도 베트콩이나 북베트남군 학살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들에게선 그러한 시도를 찾아볼 수 없다.

마지막으로 미군의 전쟁범죄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대략 200~300만의 민간인을 죽였다. 사망자 대다수는 폭격과 고엽제 그리고 미군 군사작전에 의한 것이다.(《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 역사의 진실》, 197~198쪽)

1968년 베트남 국영 출판사에서 출판한 《The American Crime of Genocide in South Vietnam》에서는 1967년 1월 기준으로 미군의 화력에 의해 25만 명의 남베트남 아이들이 사망한 것으로 확인된다. 1967년 1월 램파트 잡지(Rampart Magazine)에 뉴욕 머시 칼리지의 아동기관 위원이었던 윌리엄 페퍼(William Pepper)에 따르면, “총 25만 명의 남베트남 아이들이 미군 화력에 의해 사망하고 또 다른 75만 명이 부상당했다”고 한다.(《The American Crime of Genocide in South Vietnam》, 20쪽)

그러나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학살을 주장하는 한국군 민간인 학살 부정론자들은 이를 보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그것은 바로 반공주의적으로 세계를 해석하기에 주요모순을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참고문헌

박주희, 한국전 때 ‘캐나다군 범죄’ 캐는 프라이스 교수」, 『한겨레』, 2005.08.11. https://m.hani.co.kr/arti/international/america/56791.html#cb

이장호, 「”비무장 민간인 학살을 무용담처럼”…베트남 참전 해병대원의 고백」, 『뉴스1』, 2021.11.16. https://www.news1.kr/articles/?4495022

저자 불명, 『The American Crime of Genocide in South Vietnam』, Gial Phong Publishing House, 1968

Guenter Lewy, 『America in Vietnam』, Oxford University, 1978

노엄 촘스키, 에드워드 허만, 임채정(역), 『미국 대외정책론』, 일월서각, 1985

찰스 펜, 김기태(역), 『호치민 평전』, 자인, 2001

마이클 매클리어, 유경찬(역),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을유문화사, 2002

노엄 촘스키, 에드워드 허만, 정경옥(역), 『여론조작』, 에코리브르, 2006

Nick Turse, 『Kill Anything That Moves』, PICADOR, 2013

박태균, 『베트남 전쟁』, 한겨레 출판, 2015

브루스 커밍스, 조행복(역),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현실문화, 2017

비엣 타인 응우옌, 부희령(역),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 더봄, 2019

김남기, 『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 역사의 진실』, 어깨걸고, 2021

* 기사 사진은 학살당한 시신을 찾은 민간인들의 장면이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학살을 북베트남과 베트공이 저질렀으며, 수천 명이 학살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추산이 지극히 과장되었다는 반론이 있으며. 미군의 폭격에 의한 희생자가 대다수이고 미국과 남베트남 측에 의해 각색되었다는 점은 외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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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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