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지원한 인도네시아 대학살

_ 김남기(《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역사의 진실》 저자)

 

냉전 시기 미국이 지원한 수많은 국가들에서 대량학살이 일어났다. 친미국가의 대량학살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소련과 경쟁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는데, 그 규모가 매우 컸다. 그러나 이를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당장 일제 패망 이후 미군정을 경험했던 한반도만 하더라도 한국전쟁이 시작되기 전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에 의해 1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무참히 도륙 당했으며, 제주 4.3 항쟁에서만 하더라도 최소 3만 명에서 6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이승만과 미군정이 보낸 경찰 및 군대 그리고 서북청년단에 의해 무참히 학살당했다. 이런 소름끼치는 양민학살은 대부분의 경우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에 일어났던 대학살이었다.

제주도 대학살처럼 비슷한 일이 1960년대 인도네시아에서도 일어났다. 그것이 바로 인도네시아 대학살(Indonesia Genocide)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인도네시아는 일본의 지배로부터 벗어났다. 그러나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베트남과 라오스, 캄보디아는 프랑스, 말레이시아와 버마는 영국)들과 마찬가지로 서구 세력의 재침략을 받았다. 인도네시아를 다시 통치하려 들어온 세력은 바로 네덜란드였다. 물론 인도네시아는 독립운동 지도자 수카르노(Sukarno)의 지도와 단결 아래 협상과 전쟁을 통해, 궁극적으로 네덜란드로부터 독립을 쟁취했다. 1949년 인도네시아는 인도네시아연방 국가들을 통합하여 인도네시아 공화국이 되었고, 수카르노가 대통령이 되었다.

인도네시아 독립운동 지도자이자 국부인 스카르노

 

대통령이 된 수카르노는 1955년 이른바 ‘반둥회의(Bandung Conference)’를 열어 이집트의 나세르,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등과 더불어 이른바 제3세계 노선을 걸었다. 이 과정에서 인도네시아는 소련의 지원을 받기도 했으며, 이에 따라 반식민지 민족해방 노선을 걸었다. 물론 수카르노 또한 말년에 의회를 무시한 독재정치와 몇몇 문제들 때문에 현재 인도네시아에서도 평가가 좀 엇갈리긴 하지만, 그가 독자적인 노선을 걸으며 반식민지 투쟁을 지지하고 지원했던 것만큼은 높게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인도네시아는 독립 과정에서 서방의 지원을 받았다. 인도네시아의 독립도 미국의 마셜 플랜 과정에서 네덜란드가 압박을 받았던 것도 있으며, 미국이 인도네시아 독립을 간접적으로나마 지지한다고 표명한 이유도 있었다. 심지어 1947년 당시 소련의 스탈린 또한 비사회주의권인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정부를 공식적으로 인정했지만, 당시 프랑스에 맞서 독립전쟁을 벌이고 있던 호치민의 베트남민주공화국은 1950년 1월에 가서 공식적인 합법정부로 인정받았다. 즉 인도네시아의 국가적 독립은 냉전 초기 서방의 지원을 받은 것도 있었다.

그러나 1955년 인도네시아 대통령 수카르노가 제3세계 노선을 천명하면서 인도네시아에 대한 미국의 태도는 적대적으로 바뀌었다. 특히나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John Foster Dulles)는 수카르노를 미워했다. 그는 제3세계 반식민주의 노선을 추구한 수카르노의 움직임을 매우 싫어했으며, 미국 CIA는 1955년에 수카르노 암살을 검토했다. 특히 수카르노가 소련 흐루쇼프와 중국 마오쩌둥을 만나고, 동유럽에서 무기를 구매하며 인도네시아 공산당(Communist Party of Indonesia)과의 연립정부 구성을 보다 광범위하게 하면서, 미국 정치인들의 반수카르노 감정은 더 커졌다.

1960년대부터는 반미감정이 인도네시아에서 커졌으며, 수카르노 지지층도 인도네시아 공산당을 포함한 좌파세력들이 강했다. 반면 반수카르노 세력은 반공주의자들과 군부 세력이었다.

수카르노의 소위 제3세계 노선은 이른바 반미주의로도 흘렀다. 1964년 3월 수카르노는 미국의 원조 제의에 대해 “원조와 함께 지옥에나 가라”라며 반미감정을 드러냈고, 1965년 8월 17일 인도네시아 독립기념일에선 ‘반제국주의 자카르타-프놈펜(시아누크)-하노이(호치민)-베이징(마오쩌둥)-평양(김일성) 축’을 선언했다. 수카르노는 확실히 반미진영에 섰던 것이다.

수카르노가 제3세계 노선을 선택한 이후 미국은 1950년대 말에 반공주의 성향의 인도네시아 군부와 광범위한 관계망을 구축했다. 당연히 이 인도네시아 군부 장성들의 1/3은 미국인들로부터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1965년 9월 30일 수카르노 휘하에 있던 군부 장성중 하나인 수하르토(Suharto)는 소위 공산당이 일으킨 폭동을 진압한다는 명분을 들어, 수카르노를 축출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권력을 장악한 군부는 4개월 이내에 인류역사상 가장 광범위하고 또 잔인한 학살극 중 하나를 꾸미기 시작했으며, 실제로 실행에 옮겼다.

인도네시아 대량 학살은 1965년 10월 말부터 중부 자바에 공수부대가 상륙하면서 시작됐다. 11월말 공수부대가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동부 자바로 옮겨졌으며, 학살은 12월 중순경에 이르러 발리 섬까지 옮겨졌는데, 군부가 보낸 부대는 마을에서 잔인한 학살을 자행했다. 군부는 학생들에게 ‘공산주의자’들을 가려내라는 지시를 내렸으며, 공산주의자로 규정된 사람들은 즉석에서 가족과 함께 전부 총살당했다. 그냥 단순한 말 한마디 혹은 손가락질 한 번으로 끌려가 죽임을 당했으며, 학살 규모가 너무나 커서 동부 자바와 북부 수마트라에서는 위생 문제가 제기될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학살은 1968년과 1969년까지도 지속됐으며, 최종적으로 4년간 전개됐다. 심지어 1969년 초 어느 단일 사건에서만도 군과 중부 자바의 지역 자경단은 인도네시아 공산당 추종자로 선발된 사람 3,500명을 쇠막대기로 목을 치는 방법으로 살해했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휴양지로 놀러가는 인도네시아 섬 발리는 한국 제주도와 함께 피의 역사로 물든 섬이다. 이 섬에서 수하르토가 지휘한 인도네시아 군부는 무차별적으로 민간인을 학살했다.

학살 작전을 직접 지휘하는 스하르토

 

대부분의 희생자들은 제주 4·3 때처럼 잡히는 족족 즉결 처형을 당했다. 총살이면 운이 좋은 편에 속했다. 사람들은 산 채로 사지가 절단됐고, 참수되기도 했다. 몇몇 증언에 따르면, 산 채로 피부를 벗기는 식의 죽음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는 잔인한 방법도 공공연히 사용됐다. 학살은 대부분 자경단에 의해 벌어졌고, 자경단은 공산주의자들이 보이는 족족 사람들을 죽인다는 정부 측의 거짓 선전을 사실로 받아들였다. 이러니 제대로 된 재판을 거쳤을리 없다. 그저 지목된 사람이 끌려 나와 자신에게 덧씌워진 혐의를 반박하지 못하면 그 자리에서 처형당했다. 섬 인구 200만 명 중 10만 명 많게는 20만 명이 이렇게 학살당했다.

수하르토와 군부가 저지른 인도네시아 대학살은 아무리 적게 잡아도 최소 50만 명 이상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는 1976년 10월에 발표된 수치이며, 당시 인도네시아 국가보안기구 의장인 수도모 제독이 네덜란드의 한 TV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증언했다. 1976년 당시만 해도 사망자를 50만 명으로 규정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망자 수는 계속 늘어 하비비 전 대통령은 100만 명이라고 했고, 학살을 지휘한 사르워 에디 위보워 장군은 300만 명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최소 100만 명에서 150만 명 많게는 200만에서 300만 명의 인도네시아인이 미국의 지원을 받은 수하르토 정권에서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국제사면위원회는 1977년 기준으로 5만 5천 명 내지는 10만 명 이상의 정치범이 수하르토 정권 하에 있다고 추산했으며, 체포된 75만 명 중 약 800명이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대부분 사형선고를 받았다. 정치범을 수용한 형무소에서는 고문과 폭력이 즐비했다. 노엄 촘스키(Noam Chomsky)가 쓴 『미국 대외정책론』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13세 이하 소녀들, 노인들, 연약하고 병든 사람들도 고문에서 면제되지 않았다. 고문은 심문을 위해서만 사용된 것이 아니다. 형벌로써 그리고 가학성 취향 때문에 사용되기도 했다. 여인네들에 대한 강간사건과 극도로 잔인한 사례들이 국제사면위원회에 보고되었다. 1960년대 말까지 고문치사의 예가 빈번하고 보고 되었다. 현재도 국제사면위원회는 심문 때 고문이 행사되는 예를 보고 받고 있다. 최악의 예는 좌익성향의 혐의를 받고 있는 군 장교 내지 군인들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동료장교들로부터 고문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자카르타에 있는 공군조사대는 잔인한 고문을 장기간에 걸쳐 하는 것으로 특히 악명이 높았다.”(『미국 대외정책론』, 245~246쪽)

이처럼 인도네시아 대학살을 저지른 수하르토 정권은 잔인하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공포통치를 실행했다. CIA의 지원을 받아 정권을 잡은 수하르토는 인도네시아에서 이런 대량 학살을 저질렀고, 31년간 독재정치를 실행했다. 한국 사회는 한국전쟁 당시 맥아더 신화와 미국 신화에 빠져 미국을 자유민주주의 수호자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1960년대 미국 CIA가 지원한 인도네시아 대량 학살은 그것이 얼마나 허구적이고 기만적인지를 아주 명백히 보여주는 예다. 1969년 미국 대통령이 된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은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를 만나서 “미국인들은 당신이 시도하고 있는 모험을 함께 하기를 바란다”고 말하며, 이 정권을 지지했다. 1980년대 인도네시아를 방문한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대통령은 수하르토의 독재 및 학살정치를 알고 있으면서도, “인도네시아 전 지역에 자유의 바람이 불고 있다”는 망언을 했다. 이것이 과연 미국이 말하는 민주주의의 가치일까? 인도네시아 대학살을 통해 이에 대해 되물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노엄 촘스키, 임채정(역), 『미국대외정책론』, 일월서각, 1985

올리버 스톤 피터 커즈닉, 이광일(역),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 들녁, 2015

소병국, 『동남아시아사』, 책과함께, 2020

정문태, 「발리는 제주의 아픔을 안다」, 『한겨레』, 2013.11.08.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610413.html

환타, 「[소소한아시아]낙원의 섬 발리에서 56년 전 생긴 일」, 『시사IN』, 2021.06.05.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4662

이 기사를 총 354번 보았습니다.

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