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수 선생님들의 자서전을 읽으며

_ 이범주

 

가끔 장기수 선생님들의 자서전을 읽는다. 삼사십 년 그 오랜 세월 감옥에 갇혀 모진 고통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그 분들로 하여금 전향을 거부하고 마지막까지 버티게 만든 힘은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해보곤 하는데 그 형극의 세월이 너무나도 엄청나 나로서는 그분들 인내심과 신념의 정도를 가늠할 수조차 없다.

임방규 선생님의 자서전이다. 그 분의 아버지, 형님 모두 해방 이후 미군정 하에서 입산투쟁 하셨고 그분의 고등학교 친구들, 동네 선후배들 중 많은 분들 역시 입산해서 빨치산투쟁을 했다고 한다. 시골의 평범한 백성들이 투쟁에 참가한 것이다.

그 분들이 싸웠던 이유는 당시 대부분 인민들이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독립국가를 건설하려는 꿈에 부풀어 있었는데 일제 패퇴 후 미군이 들어와 군정을 실시하면서 일제에 부역했던 소수 매국적 부일부역자들을 내세워 반도의 남쪽을 일본에 이어 지배하고 분단을 영구화하려 했기 때문이다. 당시 그 분들이 주장했던 건 대략 세 가지다. 1. 이 나라를 지배하려는 미제국주의를 반대하여 자주적인 독립국가를 건설하자. 2. 분단을 받아들일 수 없다. 즉 통일된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겠다는 것이다. 3. 일제에 부역했던 매국노들을 처벌하고 민족정기를 세우자. 이는 당시로서는 너무도 당연한 거라서 극소수의 부일 부역자들 빼놓고는 대부분 인민들이 모두 공감했던 슬로건이었다.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봉기했던 분들의 격문, 제주도 진압파견 명령에 거부하여 여수에서 봉기했던 14연대의 격문에도 미제국주의 반대, 분단 반대 주장이 선명하게 나온다. 재언하자면 당시에는 반미와 통일이 거의 대부분 사람들이 공유했던 상식적 요구였던 셈이다.

1945년 8월 15일 이후 전쟁이 끝나는 시점까지 약 8년의 세월 동안 남쪽에서 미국의 지배와 분단에 반대했던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학살당했고 설령 살았어도 한 마디 말도 못하고 강요된 침묵의 세월을 견뎌왔다. 한홍구 교수의 표현에 의하면 이는 거의 “멸균적 수준”의 학살이라고 했다. 그리곤….역사에 단절이 왔다.

75년이면 실로 긴 세월이다. 그렇다면 그 긴 세월 동안 이 나라에는 질적인 변화가 있었는가. 말하자면 이 나라에 대한 미국의 지배는 종식되었고 이제 분단은 별 문제로 되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 겉으로는 멀쩡한 독립국처럼 보이지만 이 나라에는 한미방위조약과 한미행정협정에서 보듯 군사주권도 없고, (미국이 요구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군사기지 지어 바쳐야 한다는 점에서) 영토주권도 없으며, 이 나라의 주요 기간산업과 은행이 외세에 지배되어 있다는 점에서 경제주권이 없다. 사상, 예술, 학문, 교육, 언어….거의 모든 영역이 미국 지향적이다. 요컨대 이 나라에 대한 미국의 지배는 의연할 뿐 아니라 점점 더 정도가 심해지고 있다. 분단은 이대로 지속되어도 될 만큼 사소한 문제인가. 분단을 근거로 하는 국가보안법으로 인해 정치에서의 초보적인 민주주의도 요원하다. 55조에 이르는 막대한 국방비와 매년 현금으로 바치는 1조 수천억 원의 방위비 분담금….등 분단이 이 나라에 들씌운 고통은 차마 말로 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부일부역자들은 처벌받았는가. 말하자면 75년 전이나 지금이나 (미국에 대한) 예속과 분단은 여전하고 그로 인한 고통은 점점 커지는 형국이니, 외양이 어떠하건, 본질적으로 변한 게 없다는 말이 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에서 통일과 미제(美帝)반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다. 그건 일종의 금기의영역에 속한 것이라서 일반적인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논할지언정 통일과 반미투쟁을 말하지 않는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과학적 사회주의의 이름으로 통일운동을 순진한 민족주의적, 비과학적, 비계급적 운동이라 평가절하하고, 미국에 대한 예속의 문제는 국내의 계급문제를 해결함으로써 동시에 해결된다 주장하기도 한다. 분단과 예속은 계급문제의 외적표현이라는 것이다. 또한 어떤 이들은 맑스-레닌주의의 이름으로 북에 대한 무관심을 조장하고 더 나아가 혐오와 적대를 드러내기도 한다.

난 그런 사람들 보면, 일정한 진보성과 진정성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결국은 미제와 미제에 결탁한 이 나라 지배계급이 쳐놓은 구도 안에 포박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어떤 구도? 미국의 지배에 대해 문제제기 하지 말라는 구도, 분단을 자연스런 것으로 인정하라는 구도, 북을 적대시 하라는 구도, 적대시까지는 아니더라도 현실적으로 우리와는 다른 남이라는 걸 받아들이라는 구도….

알아보려 노력하지 않으면 장기수 선생님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 늙으신 분들….무엇이 무서워서 역대 정권들은 그 분들을 수십 년 잔혹하게 감옥에 가둬야 했을까. 그분들이 존재 그 자체로서 드러내는 역사, 5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평범한 민초들에게까지 상식이었던 역사를 가리고자 하는 의도가 아니었을까…그 역사가 까발려지면 지들의 부도덕하고 초라한 몰골이 백일하에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해서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들은 역사를 지우려 하는 것이다. 지금 사회를 횡(橫)으로 잘라 역사의 흐름이 갖는 시원과 그 시원이 역동적 과정을 거쳐 마침내 가닿게 될 도달점을 알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자주를 지향하여 진정한 독립을 이루고 마침내 통일에 가 닿으려는 저류(底流)를 막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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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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