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노동하는 사람들의 것

_ 이범주

 

다양한 생각들이 있다. 그 생각들은, 산정에서 발 딛은 지반에 따라 아래로 펼쳐지는 경치가 달리 보이듯, 사람들의 사회적 처지에 따라 다르다.

사업하는 이들은 돈 버는 것이 목적이므로 세상을 돈 중심으로 생각할 것이다. 연구실의 학자들은 자기 생각의 논리적 완결성과 학문적 근거에 대해 관심을 가질 것이다. 늦은 가을…따뜻한 연구실에서 늦도록 연구하다 퇴근하며 듣는 풀벌레 소리는 얼마나 그윽한 낭만적 서정을 불러 일으킬 것인가. 나도 한때 그런 삶 꿈꾼 적 있었다. 자영업 하시는 분들은 매일매일 매출에 애를 새카맣게 태우며 일희일비하겠지……이렇듯 다들 제 지반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제 존재가 생각과 세상에 대한 느낌을 규정한다.

난 사람들 각자의 다른 처지에서 기인하는 다양한 생각들이 다양성의 이름으로 동일한 무게로 받아들여져선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고되게 자신의 근육과 신경을 쓰고 소모하면서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는 사람들 처지의 생각과 그들이 생산해 낸 것을 향유하거나 빼앗는 사람들 처지의 생각을 동일한 자격과 의미를 지닌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요컨대 노동을 중심으로 세상과 사람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을 중심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은 노동하는 사람과 노동의 결과물 나누는 방식을 중심으로 세상을 본다는 말이다.

내가 아는 거의 대부분 사상가들은 현실에 존재하는 구체적 사람들의 노동과 그 노동성과물의 분배방식에 대해 그리고 그 분배방식의 도덕적 정당성에 대해 구체적으로 고민하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기론 맑스/엥겔스가 거의 처음으로 노동과 노동하는 사람들을 제 학문의 핵심으로 삼았다. 난 그 이유로 난 맑스를 좋아한다.

요즘은 맑스/엥겔스 그리고 그들의 생각을 계승, 발전시킨 이후 혁명가들의 사상이 똥 친 작대기 취급받는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사람 먹고 사는 것, 그 먹고 사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노동, 그것도 구체적인 역사적 사회적 조건에서의 노동만큼 중요한 것도 없다. 이슬 받아 먹고 사는 존재도 아니고 먹고 자고 입고 싸며 살아야 할 존재로서 사람에게 그것 빼놓고 도대체 뭐가 더 중요하단 말인가. 이런 이유로 난 맑스와 그의 사상적 제자들의 생각을 다른 사상들과 동일한 무게를 지닌, 그저 1/n 정도의 지분을 지닌 것으로 생각하는 견해에 공감할 수 없다.

요즘 이 사회에서 노동과 (노동하는 사람인) 노동자에 대한 논의는 늘 빠져있다. 노동은 일상적으로 숨겨진다. 가격은 늘 변화하는 수요와 공급 조건이 신비하게 일치되는 지점에서 결정되니 수요가 늘면 생산은 (노동없이, 노동자의 생산활동 없이) 자동으로 늘고, 생산이 늘면 수요는 상대적으로 줄어든다. 생산하고 소비하는 ‘사람들’이 없다. 노동자와 농민 등 생산의 현장에서 땀 흘리고 피와 땀과 뼈를 갈아 넣어가며 생산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노동자, 농민 등 구체적인 생산자가 보이지 않으니 사람들이 소비하는 상품은 (생산자 없는) 추상적 수요가 만들어 내는 것처럼 보인다.

늘 안 보이던 노동자들이 가끔 존재를 드러낼 때가 있다. 아무런 시끄런 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일만 하면 딱 좋겠는데, 평소엔 존재감 없이 한시도 쉬지 않는 심장처럼 일만 하다가, 익명의 다중으로 흩어져 있던 그들이 갑자기 뭉쳐서 뭔가를 발언하려 할 때, 마치 심근경색이 주는 극한 통증처럼 그들, 노동자들의 존재가 홀연히 등장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 사회는 깜짝 놀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선량한 ‘시민’이라 불렀던 그들을 마치 불온한 존재라도 되는 듯 ‘불법 폭력노조원’의 딱지를 붙인다.

이런 작태를 보면 노동자, 농민 등 생산에 종사하는 다수 사람들이야말로 이 사회를 굴리고 운영해가는 실질적 주인이라는 생각을 새삼스레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건희 죽고 이재용이 감옥 갔을 때 삼성 굴러가는 데 아무 지장 없었고 오히려 삼성전자 주가가 올랐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면 된다. 그러나 노동하는 사람들이 활동을 멈추면 세상은 즉시 올스톱. 이건희, 이재용같은 자들은 그냥 노동하는 거대한 사람들의 등골에 빨대를 꽂은 존재들에 불과하다.

이런 이유로 난 맑스와 그의 후계자들 경멸하는 걸 능사로 하는 지금의 시대 조류에 동참할 수 없으며 기꺼이 시대 조류에서 배제된 극소수에 기꺼이 동참한다. 세상은 노동으로 굴러가므로 세상은 노동하는 사람들 것이어야 하고 그들이야말로 세상의 참된 주인이며 그들이 주인공으로 되는 세상이라야 비로소 가히 도덕적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그리 생각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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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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