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이 서야 조국이 산다” 이준석 식 무한착취와 경쟁논리를 깨부수고 연대의식과 역사의식으로 새 사회를 열자!

1. 이준석은 청년들의 열망을 왜곡하여 비뚤게 표출한다

2. 이준석은 ‘자유민주주의’의 극우적 사도다

3. 이준석 당선은 반공파시즘의 쇠락을 의미하는가?

 

1. 이준석은 청년들의 열망을 왜곡하여 비뚤게 표출한다

 

약간은 수그러진 것 같지만, 최근 떠들썩하게 부각되고 있는 이준석 현상은 마치 청년층의 분노와 좌절, 열망을 대변하고 있는 듯이 보이고, 그렇게 보이도록 언론들은 포장한다. 최근 조선일보에서는 MJ세대 운운하며 마치 자신들이 청년층의 이해를 대변하는 듯 가장한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장년 노동자의 임금삭감을 의미하는 임금피크제를 주장하고, 노조를 비난하며 노동자 내부의 세대갈등을 적극 조장하고 있다. 이는 궁극적으로 노조를 파괴하기 위한 속셈이다. 청년들의 미래는 생물학적으로 중장년이 되는 것인데, 오늘 청년들은 임금피크제로 인해 자동으로 고용과 임금이 인상될 리 없는 반면 내일은 필연적으로 구조조정과 임금삭감을 당하게 된다. 노조약화와 파괴로부터 직접 이익을 챙기는 것은 오로지 조선일보와 자본가들 같은 지배계급일 뿐이다.

“분열시켜 통치한다”가 지배계급의 기본 통치 원리인 것처럼, 이러한 남녀분열, 세대분열 역시 피착취 계급 내 분열을 극대화 시켜 효과적으로 계급통치를 지속, 강화하려는 전형적 수법이다.

청년들 내에서 ‘공정성’ 요구와 열망이 분출되는 것은 원래 이 사회 내에 특권과 부정, 반칙이 판치고, 재산상, 학력상의 차이로 차별과 배제, 억압을 당하고, 취업상 불이익을 당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정성 문제는 권력과 재산을 가진 자들과 못 가진 자의 불평등, 부조리 같은 이 사회 자체의 문제고, 이는 곧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노동자 계급및 여타 근로민중과 자본가 계급과 그 일파 간의 문제이다.

이준석은 청년들 전반의 진보적, 사회변화 요구를 대변하지 않는다. 이준석 현상은 사회의 상당수 청년들의 불만, 좌절, 욕망, 열망을 일부 반영한다. 하지만 그것은 자본주의적, 시장적 신자유주의적 체제 가치 내에 극우반공주의적으로 전도되고 비뚤어진 방식으로 표출되도록 한다. 이준석이 청년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척하면서 내거는 ‘공정’ 가치의 실체는 무엇인가?

적잖은 논란이 되고 있는 이준석 표 능력주의는 불공정한 국가의 개입과 이른바 586들의 가족 세습능력주의를 비판하는 청년들의 처절한 외침에 대한 메아리다. 2019년에 펴낸 대담집 공정한 경쟁에서 이준석 대표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는 자유”이며 “공정은 그 위에서 하는 달리기 게임”이라고 표현했다.

당연히 그는 원칙 없이 정치의 선심 쓰듯 진행된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소리 높여 반대해왔다.([장훈 칼럼] “이준석, 도덕·담합·위선 정치를 넘다”/본사 칼럼니스트·중앙대 교수, 중앙일보, 2021.06.18.)

이준석의 능력주의는 “불공정한”이라는 수사가 붙어 있지만, “국가의 개입” 최소화다. 이준석이 내거는 ‘공정’은 바로 “공정한 경쟁”이며, 그것은 바로 ‘자유’ 위에서 실현되는 가치이다. 이준석이 내거는 기치는 바로 국가개입의 최소화를 요구하는 ‘신자유주의’의 기치이며, 이 기치는 자본이 자유롭게 경쟁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매사 국가개입의 최소화가 아니다. 신자유주의는 자본의 자유로운 활동에 대해서는 국가가 간섭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율배반적으로 국가가 자본에 대해서는 전폭적으로 지원할 것을 요구한다. 또한 신자유주의는 노동자와 민중 복지에 대해서는 국가가 개입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노동자투쟁에 대해서는 국가가 공권력을 동원해서라도 폭력적으로 진압할 것을 요구한다.

난폭하게 질주하는 자유로운 자본활동에 의해 비정규직이 무차별적으로 확대되었다. 새롭게 일자리를 구하는 청년들의 일자리 태반은 비정규직이 되었다. 청년들은 어렵사리 일자리를 구해도 언제 해고를 당할지 모르고, 저임금으로 고통 받게 되었다. 외주화, 하청화로 인해 청년들은 극단적인 노동조건, 장시간 노동, 위험한 노동에 시달리다가 직업병, 중대재해에 더 심각하게 노출되었다. 이러한 경쟁의 자유, 자본이 마음 놓고 활동하는 사회로 인해 오늘날 청년들은 무복지 사각지대에서 빈곤에 빠졌다.

극히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이른바 일류대학 입학은 그 출발 자체부터 가난한 집안의 학생들이 넘볼 수 없는 요새가 되었다. 일류대학 입학은 고3때 개인의 노력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인생 첫출발부터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느냐 여부에 달려 있다. 태어나서부터 경제적으로 안정된 교육환경, 부모들의 학벌, 값비싼 사교육, 자사고, 외고, 국제고 등 특수목적고가 일류대학 입학의 조건이다, 강남/비강남, 서울/지방 등 어느 집안에서 태어나고, 어디에서, 누구로부터, 어떻게 교육받느냐가 일류대학 입학을 좌우한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전설은 그야말로 전설이 되었다. 교육불평등은 어디에서 왔는가? 바로 가난한 자들과 부자들, 자본가들과 노동자들 사이의 계급불평등에서 왔다. 이준석이 말하는 ‘가족 세습능력주의’는 바로 계급불평등과 무관하지 않다. 자본가들은 자신들이 독점하는 기업소유권을 온갖 불법과 편법을 동원해 재생산하는 반면에, 고위관료, 교수 같은 이 사회의 상위 계급들은 학벌의 재생산으로 자신들이 누리는 부와 권력과 직위를 자녀들에게도 재생산하려 한다.

반면 대학일반에 대해 말하자면, 대학은 점점 더 기업활동에 값싸고 숙련된 노동자를 공급하는 생산예비 기지로 전락되었다. 대학 자체가 대학자본들의 수익처가 되었다. 비싼 등록금 마련을 위해 대부분 학생들은 알바를 전전하거나 은행의 채무노예가 되어 부채를 안고 사회 첫출발을 한다.

이처럼 자유라는 기치 위에서 진행되는 공정은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 위에서 달리기를 하는 것이며, 어느 한 쪽은 고급 승용차를 몰고 질주하고 대다수 다른 쪽은 맨땅에서 맨발로 달리는 지극히 ‘불공정’한 달리기 게임이다. ‘자유’ 위에서 실현되는 공정은 무한대의 착취와 약육강식의 경쟁사회다.

 

2. 이준석은 ‘자유민주주의’의 극우적 사도다

 

이준석이 말하는 ‘자유’는 바로 ‘자유민주주의’다. 이준석은 자유민주주의라는 기치의 대변자다. 이준석이 박근혜 키즈로 출발했던 것은 바로 그러한 극우적 이념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이는 곧 이준석이 박근혜와 철학을 공유하며 극우파쇼 박정희와 이념을 공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학살만행자 박정희의 사악한 사도, 박정희의 이념적 대변자였던 김기춘은 한나라당 국회의원이었던 시절인 2005년 7월 12일 인터뷰에서 그 신념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초지일관 갖고 있는 원칙이 있어요. 그거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 경제라는 이 헌법적 체제가 인류가 발명한 최선은 아니지만 우리 인류의 자유를 확대하고 또 국민의 복지를 증진시키는데 차선의 제도라고 믿어요. 그거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어요. 그런 신념이 남달리 투철하기 때문에 보수다 그렇게 말한다면 난 보수임을 자처할 수 있습니다.(한겨레TV, [해방 70돌 특집 다큐] 반.역.사(1945-2015) – 2부 중에서)

김기춘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 경제라는 이 헌법적 체제”를 신봉하는 “신념이 남달리 투철한” 보수다. 한국사회에서 이 투철한 신념은 바로 극우파쇼적 반북반공주의 신념으로 나타나 김기춘으로 하여금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간첩조작과 고문, 학살을 자행하며 백색테러 체제의 잔학한 집행자로 나서게 했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 경제”의 옹호라는 이러한 김기춘의 반동적 사고는 극단적으로 잔인한 멜더스적 경제학 전통에 입각하고 있다.

지금 하루에 18페니를 버는 사람이 부자들의 기부에 의해서 갑자기 5실링을 얻는다고 하자. 아마 그들은 편안하게 살 수 있으며, 매일 저녁 식사에는 고기 한 덩이를 먹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될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잘못된 결론이다. …… 하루에 18페니 대신 5실링을 받으면 모든 사람은 자신이 비교적 부자이며 많은 시간의 여가를 즐길 수 있다고 환상을 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생산적 산업에 강력하고도 즉각적인 억제가 될 것이며, 얼마 안가서 그 국가가 가난해질 뿐만 아니라 하층 계층 사람들은 하루에 18페니를 받을 때 보다 더욱더 궁핍하게 될 것이다.(E.K. 헌트, 《경제사상사》, 127쪽, 멜더스의 <인구론> 초판 중에서 인용)

부자의 자선은 적선이다. 이 자선은 부자들의 자애로움의 표현이 아니라 부자들의 사악함과 파렴치함을 은폐하고 알량한 적선으로 굶주린 민중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게 해 이 체제를 영속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이뤄졌다. 이것이 구빈법이고, 현대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부자들의 기부와 사회복지다. 이러한 복지조차도 노동자 민중의 격렬한 투쟁이 없었다면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멜더스는 이러한 기부조차도 거부한다. 노동자들이 ‘도덕적 해이’에 빠지고 일을 게을리 하여 자본가들에게 손해를 끼치고 국가의 부를 강탈해간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멜더스적 경제학 논리는 세이, 바스티아, 시니어 등 속류경제학을 거치면서 오늘날 자본의 자유로운 활동을 가로막는 모든 규제개혁과 노동자의 임금과 복지 감소를 촉구하는 현대 오스트리아 학파와 시카고학파로 이어지고 있다. 이것이 바로 신자유주의의 지적 전통이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 경제”의 옹호자 김기춘과 멜더스와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는 자유”이며 “공정은 그 위에서 하는 달리기 게임”이라는 이준석의 신념이 하나라도 다른 게 있는가?

그렇기 때문에 이준석은 “원칙 없이 정치의 선심 쓰듯 진행된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소리 높여 반대해왔”던 것이다. 이준석의 “공정한 경쟁” 논리에 열렬히 환호를 보내고, ‘공정성’의 화신이 된 청년들 일부는 오늘날 인천공항, 철도, 지하철, 건강보험공단 등에서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을 반대하고, 더 나아가 직고용 전환이 공정성의 파괴라고 소리 높여 외친다. 이들은 더 나아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현장 앞에서 피켓을 들고 반대 선전을 하고 심지어 서명을 통해 집단행동으로 비정규직 파업을 분쇄하는데 앞장섰다.

‘박근혜 키즈’ 이준석이 박근혜 탄핵이 정당하다며 자신을 발탁한 박근혜를 하루아침에 배신하고 광주에서는 오월광주의 민주화 정신을 찬양하며 ‘합리적 보수’로 가장하는 것은 시류에 영합하는 기회주의적 처신에서 나오는 것이다.

“저에게 80년 광주민주화운동은 단 한 번도 광주 사태였던 적이 없고 폭동이었던 적도 없다”는 이준석이 박정희 파쇼 독재자의 딸인 박근혜를 통해 정치에 입문하고, 전두환 살인마가 만든 당의 후신인 당에 들어갈 수 있는가? 게다가 이준석은 당대표가 되자마자 5.18은 ‘북한이 배후’라는 발언을 했던 한기호 사무총장 같은 극우파쇼 인사를 당 사무총장에 임명하고 춘천의 대표적인 극우파쇼 국회의원이었던 김진태를 찾아가 손을 잡았다.

이준석은 일제시대에는 관동군 장교로 복무하며 독립군들을 때려잡고 해방 뒤에서는 세상이 바뀔 것 같으니 좌익으로 변모하고, 이후 미제의 주구로 반공투사가 되었던 박정희의 기회주의적 처신을 그대로 모사하고 있다.

 

3. 이준석 당선은 반공파시즘의 쇠락을 의미하는가?

 

현상은 본질을 반영하기도 하지만 본질을 교란하고 심지어 은폐하기도 한다. 특히 그 현상을 거꾸로 바라볼 때에는 더더욱 그렇다. 그렇기에 작금의 이준석 현상은 후자의 진실에 가깝다. 진실을 교란, 은폐하는데 언론들이 앞장서고 있다. 조선일보에서조차도 “보수도 이제는 반공·국가주의에서 벗어나 글로벌 보수로 바뀌어야 한다”(“이준석 돌풍에 질투, 정치 입문.. 다음 총선도 순천 출마”, 조선일보, 2021.06.14.)라는 인터뷰를 싣기도 했다.

분단에 근거한 반공보수의 낡은 틀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됐다는 점도 사실이다. 반대로 미국식 경험에 편중된 이준석의 거친 공정 담론이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공정과 배치되는 능력만능주의라는 비판은 앞으로 새로운 논점이 될 것이다.([정대화의 더 정치] “정치권 거센 변화 바람… 새 정치는 세대교체 넘어선 미래비전”, 서울신문, 21-06-21)

보수야당은 자유한국당→미래통합당→국민의힘에 이르는 4년간 열성 지지층인 ‘태극기 부대’와 확실하게 결별하지 못했다. 생각이 다르면 ‘빨갱이’, ‘사회주의자’로 몰고 독재정권을 추앙하는 식의 반공주의는 시민들에게 설득력을 잃은 지 오래다. 그럼에도 여전히 ‘국민의힘’ 하면 연상되는 이념 중 하나였다.

보수의 강렬한 정권심판 열망은 반공·수구 색채가 없는 이준석을 선택했다. 이런 점에서 그의 당선은 “반공주의가 시효를 다했음을 상징한다”(김규항 작가)는 평가를 받는다. 김규항 작가는 “반공파시즘의 쇠락”에 대해 “이준석 대표가 그것과 관련해 뭘 해냈다기보다는, 다른 기성 보수정치인이 이 흐름을 따라가지 못해 그가 수혜자가 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이준석 열풍..반공수구 누르고 ‘정글보수’가 등장했다, 경향신문, 2021.06.19.)

박근혜가 탄핵 당하고 나자 언론에서는 이제 반공수구 세력들이 퇴장하게 됐다고 앞 다퉈 분석들을 내놓았다. 그러나 박근혜 탄핵 이후에도 이 사회의 반공주의는 전혀 퇴장하지 않았다. 이준석의 당선이 “분단에 근거한 반공보수의 낡은 틀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됐”는데, 김일성 주석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출판 이후 벌어지고 있는 출판사 압수수색과 서점의 판매중단, 출판금지 소동과 ‘빨갱이’ 마녀사냥은 무엇인가? 또한 “회합통신” 운운하며 자행되고 있는 일련의 국가보안법 침탈과 간첩조작극들은 또 무엇인가?

이러한 파쇼적 사태들이 이준석 당선 직전에 벌어진 일이었으니 이준석 당선 이후에는 반공주의가 갑자기 시효를 다하고 사라졌다는 말인가? 결국 이준석 현상을 둘러싸고 호들갑스러운 분석들과 다르게 진행되는 실제 현실은 이러한 분석들이 얼마나 가당찮으며 현실을 호도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현재 민주당과 국민의힘이 주도하는 부르주아 양당체제는 해방 이후 일제를 대신해 들어선 미군정의 통치와 이 파쇼체제 하에서 성장, 발전하였던 우리사회의 정치적 토대를 조금도 변화시키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다.

국가보안법이 존재하는 한 우리사회에는 ‘합리적 보수’니, ‘자유주의’니 하는 말조차도 성립할 수조차 없다. 박정희, 전두환 파쇼 독재의 후신인 국민의힘은 말할 것도 없고 문재인 정권과 민주당조차도 똑같이 ‘한미동맹’을 맹목적으로 우상숭배하고 반북주의를 통치이념으로 삼고 있다. 또한 국가정보원을 통해 정적들을 사찰하고 노동자 민중을 통제하고 있으며, 국가보안법을 내세워서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짓밟고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있다. “간첩 잡는 게 국정원”이라며 국가보안법을 존속시켜야 한다는 시대착오적 망언은 바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사형선고까지 받은 김대중의 정치적 적자를 자처하는 박지원 국정원장에게서 나왔다. 박지원의 국정원이 최근 자행한 일련의 파쇼적 광란극들은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준석 현상에서 오로지 하나의 진실이 있다. 그가 나이가 젊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준석은 생물학적으로 나이를 먹어갈 수밖에 없다. 이준석에게 청년 정치인이라는 것도 가변적인 상대적 진리에 불과하다. 결국 이준석 현상을 둘러싸고 호들갑스러운 분석들이 난무하지만 진실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이준석이 말하는 공정한 경쟁 논리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철저한 불평등, 자본가와 노동자, 부자와 가난한 자들 간의 극단적인 사회양극화를 은폐한다. 불공정한 이 체제의 기반 위에서, 이 체제를 수호하려는 논리 위에서의 공정이다.

이준석이 2, 30대의 주로 젠더문제를 둘러싼 남녀 간, 세대 간 대립과 갈등으로부터 이른바 ‘이대남’의 입장을 대변한다고 한다. 이준석이 2, 30대 여성의 성차별, 억압을 대변하지 못하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이준석이 이로부터 ‘이대남’을 제대로 대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준석 식의 자유경쟁, 공정으로부터 청년들의 실제적 삶이 하나라도 나아질 수 있는가?

이준석과 이준석 현상을 시끌벅적 떠들어대는 언론과 정치인들이 3포, 4포, 5포로 체념에 빠진 청년들을 구원할 수 있는가? 이준석이 청년실업 해결을 위해 싸워온 적이 있는가? 이준석이 2, 30대 남성들 상당수에게 영향을 미치는 최저임금 인상을 위해 발언한 적이 있는가? 싸울 의사가 있는가? 이준석이 청년들의 부채문제와 주택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이준석이 과연 청년들의 고용을 안정화 시킬 수 있는가?

이준석은 반대로 자기 저서에서 “쉬운 해고”를 강조하고 ‘엘리트주의’를 강조했다. 엘리트주의는 민중이 역사발전의 주역이 아니라 한 줌도 안 되는 엘리트가 세상을 발전시키는 주역이라고 사고한다. 엘리트주의는 민중을 보잘 것 없는 하찮은 존재로 본다. 엘리트주의는 민중의 적이다. 엘리트주의는 곧 청년대중의 적이기도 하다. 이준석은 청년의 대변자가 아니라 극우파쇼 정당 국민의힘의 이념적, 정치적 대변자다. 이준석은 청년들의 삶을 파괴하고 ‘불공정’의 배후에 실질적으로 존재하는 불평등을 조장, 심화시켜온 반동적 인사에 불과하다.

이준석 돌풍에 화들짝 놀란 민주당에서는 25세 대학생을 청년담당 비서관으로 임명하고 대선 경선 공동기획단장에 청년 세대를 대변하는 인물을 선임하기로 했다. 그런데 부르주아 정치는 민중의 이해를 대의하기는커녕 자본의 이해를 대변한다. 부르주아 정치는 청년들의 진실한 열망을 대변하기는커녕 청년들의 삶과 미래를 파괴하고 절망으로 몰아넣는 적이다. 점입가경의 청년 운운은 기만적 대의제 놀음에 불과하다.

청년들은 원래 단일한 계급은 아니지만, 4.19와 80년대의 반제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서 보듯 역사의 고비마다 앞장서서 투쟁하며 역사의 진보에 기여해 왔다. 그러나 오늘날 대다수 청년들은 역사와 사회 진보에 대한 전망을 상실했다. 이 체제는 제도권 교육과 언론을 통해 청년들이 역사인식을 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이 체제는 국가보안법으로 반북반공주의를 내세워 청년들이 반북주의에 빠지게 만든다. 이로써 청년들이 정치적 전망을 가지지 못하게 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리게 만든다. 대신에 각자도생의 살벌한 자본주의 경쟁원리를 청년들에게 심어 놓는다. 청년들에게 공동체 인식, 약자에 대한 존중과 배려 대신에 극도의 이기주의와 불신과 상호대립을 부추긴다.

“청년이 서야 조국이 산다”

청년들이여! 저들이 조장하는 ‘공정’ 이데올로기로 은폐하는 불평등한 현실, ‘공정’으로 조장되는 무한경쟁, 무한착취를 분쇄해야 한다. 각자도생의 자본주의를 깨부수고 공동체의식, 연대의식, 역사의식으로 진보적 세계관으로 무장하고 새 사회를 열자.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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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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