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스주의 고전읽기] 맑스, 소자본론 《임금노동과 자본》을 읽자! 왜 나는, 노동자들은 열심히 일할수록 상대적, 절대적으로 빈곤해지는가?

일시: 2022년 7월 26일(화) 19시 

장소: 노정협 사무실(서울시 용산구 갈월동 93-45 4층(온오프 병행)

문의: 010-3398-0248

교재: 《임노동과 자본》(남상일 옮김, 백산서당)/《임금노동과 자본》(김태호 번역, 박종철 출판사)/《임금노동과 자본》박광순 번역, 범우사)/《임금노동과 자본》(김재기 번역, 거름출판사) 등

 

1

 

맑스의 《임금노동과 자본》은 1849년 4월 5일에서 11일에 걸쳐 <신라인신문>에 일련의 논설로 게재되었는데, 1847년 12월 후반에 브뤼셀 독일인노동자협회에서 행했던 강연들이 이 저작의 기초가 되었다. 맑스의 이 《임금노동과 자본》은 1840년대 후반기에 《철학의 빈곤》에 이어 나온 두 번째 정치경제학 저작이다.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출판된 《칼 마르크스 전기》(김라합 옮김, 소나무)에서는 이 책이 “자본주의적 착취의 본질을 해명하고 부르조아지의 지배와 임금 노동자가 사실상의 노예상태로 되어 버리는 경제적 토대를 폭로할 계획이었는데”, 이러한 작업이 필요한 이유는 우선 “많은 부르조아적 체제의 옹호자들이 노동자들은 자기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임금을 받고 있으며 공장주는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그들 자본의 대가만큼 보수를 받는 것이라고 노동자들을 기만”한 것을 폭로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본주의적 생산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의 이익 공동체를 확립한다는 온갖 공상적 구상들 역시 유포되어 있었”는데 이를 또한 폭로하기 위해서였다.

 

2

 

《칼 마르크스 전기》에서는 맑스의 이 저작이 “마르크스 경제학 이론의 완결되지 않은 발전단계를 반영”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번역본은 모두 엥겔스가 수정한 것으로 완결된 단계를 반영하고 있다.

엥겔스는 《임금노동과 자본》에 대한 [1891년 독일어판에 부치는 서설]에서 맑스의 정치경제학의 완성은 1859년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에서부터 이뤄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엥겔스는 여기에서 평소 자신의 학문적 엄격함과 정직함 그대로, “저자의 정신적 발전 속에 포함되어 있는 이러한 초기 입장도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당연한 일이며, 저자도 독자도 이러한 과거의 저술들의 수정 없는 발간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한 단어라도 고칠 생각을 꿈에서 하지 않았을 ”텐데, 이번에는 “새로운 판이 전적으로 노동자들 사이에서의 선전용인 것과 마찬가지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엥겔스가 맑스의 정치경제학적 완성 이후의 견해에 따라 《임금노동과 자본》을 수정한 부분은 “노동자는 임금을 받고 자본가에게 자신의 노동을 판다”인데, 여기서는 “자신의 노동력을 판다”는 부분이다. “노동을 판다”와 “노동력을 판다”는 음절 하나인 ‘력(力)’하나에 그치지 않고 거대한 정치경제학적 새 발견을 의미한다.

엥겔스는 인간이 노동을 상품으로 판다면 그 노동의 가치는 노동시간의 지속에 의해 결정돼야 할텐데, 그것은 한시간 노동의 가치는 한시간 노동과 동일하다고 하는 의미 없는 반복에 불과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엥겔스는 “경제학자들이 ‘노동의’ 생산비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노동자의 생산비이고, 따라서 노동력의 생산비인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노동자는 노동을 파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대가(임금)를 받고 살아 있는 자신의 노동력을 파는 것이다. 자본가는 애초에 생산을 하기 전에 구매하는 원료, 기계 등 생산수단과 함께 노동자의 노동력을 구매하여 일정 시간 동안 노동력에 대한 처분권을 가지게 된다. 자본가는 이 노동력을 구매한 비용 이상으로 노동자에게 노동을 시키는데 이것이 바로 자본가의 이윤의 원천이 된다. 다시 말하면 자본가는 노동자가 노동력을 사용하여 산출한 노동의 결과물 중 일부는 임금으로 제공하고 나머지는 자기의 이윤으로 가져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지불 노동, 즉 남의 노동의 결과물을 무상으로 가져가는 착취인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상품생산이 지배적인 사회인데 인간의 노동력조차도 특수한 상품이 되는 사회이다. 인간 노동력이 특수한 상품인 이유는 새로운 “가치 창조의 힘을 갖고 있으며, 더욱이 적절이 다루면 그것 자체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가치의 원천이 되는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를 고용한 기간만큼 노동력에 대한 처분권을 가지고 노동자들을 “더욱이 적절히 다루”면 최대한의 이윤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한사코 임금을 삭감하려 들고, 노동강도를 강화하고, 노동시간을 연장하며 노동통제를 강화하며 노동자를 자신의 (임금)노예로 삼는 것이다. 심지어 자본가들은 이윤이 되지 않거나 이윤이 손해가 날 것 같으면 위험시설에 대한 투자를 거부하거나 노동자들을 태연하게 죽음으로 내모는 사실상의 사회적 살인조차도 서슴지 않는다.

자본가들은 자신은 자본을 투자한 몫을 정당하게 가져간다고 하는데, 맑스는 자본이라는 것이 “직접적인 산 노동력과의 교환을 통해서 증식되는 것에 의해서” 만들어진다고 밝히고 있다. “직접적인 산 노동에 대한 축적된 과거의 대상화된 노동의 지배가 축적된 노동을 비로소 자본으로 만”드는 것이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피땀 흘려 창조한 과거의 집단적 노동의 축적물인 자본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는 자본의 지배를 보장하는 고도로 조직된 물리적 힘으로 자본의 집행위원회라 할 수 있다.

원시적 축적, 시초축적이라고 해서 역사적 관점으로 볼 때도 자본가들이 가진 자본은 과거 노예노동이나 식민지 무역, 식민지 원료 약탈, 농민들의 토지로부터 축출 등으로부터 비롯되며, 자본가가 소요한 기계나 원료 같은 생산수단 같은 경우에도 과거 노동자들이 노동으로 만들어낸 생산물들로부터 비롯된다.

그럼에도 오늘날 거대 자본가가 “애초에 나는 나의 개인 노동으로 최초 자본을 마련하였다”라고 주장한다면, 그것만큼은 바로 자본가 자신의 노동의 결과물인 것이 맞고 그에 대한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정당하다. 새로운 사회가 된다면 그것에 대해서는 충분하게 보상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거대한 자본을 보유한 자본가들의 자본 중 그러한 최초의 자기노동은 조족지혈만큼도 되지 않는다. 대신 거대 자본은 거의 모두 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땀 흘려 일한 노동의 성과물들이기 때문에 그것은 바로 노동자들의 것이다. 심지어 오늘날 관리업무로부터도 자본가들은 벗어나 있다. 그리하여 역사적으로 보나, 논리적으로 보나, 도덕적으로 보나 기업과 공장은 노동자들의 집단적 소유여야 한다.

맑스는 자본은 일정한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다고 하는데, 노동자를 착취하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자본이 만들어지고, 자본의 소유자가 바로 자본가들이다. 그 원리에 따라 형성된 체제가 바로 자본주의다. 반면 자본가에게 자신의 노동력의 처분권을 맡기고 착취당하는 것이 바로 노동자들이다.

“흑인은 흑인이다. 일정한 관계들 속에서 그는 비로소 노예가 된다. 면방적기는 면방적을 하는 기계이다. 일정한 관계 속에서만 그것은 자본이 된다. 이러한 관계들로부터 떼어 내어졌을 때 그것은 자본이 아닌데, 이는 마치 금이 그 자체로서는 화폐가 아니거나 혹은 설탕이 설탕 가격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일정한 관계”, 즉 자본주의 착취관계를 철폐하면 노동자들은 임금노예가 아니라 해방된 노동을 하게 된다. 반면 자본가들은 타인들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착취자계급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평등한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해방은 인간해방으로 나아가는 길이 된다.

 

3

 

맑스는 “자본은 임금 노동을 전제하고, 임금 노동은 자본을 전제한다. 그것들은 서로 조건지으며, 서로를 산출해 낸다”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 이를 근거로 노동자와 자본가의 협조가 가능하다는 노자 또는 오늘날 유행하고 있는 노사정협조를 주장한다면 그것은 맑스주의에 대한 심각한 왜곡이며, 자본과 노동자가 서로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심각한 왜곡이고 현실의 모순을 은폐하는 것이다.

맑스는 “그럭저럭 살 만한 노동자의 처지를 위해 필수 불가결한 조건은 생산 자본의 가능한 한의 급속한 성장”인데, 그때조차도 “산 노동 위에 군림하는 축적된 노동의 힘의 성장이다. 노동자 계급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지배의 성장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노동자는 자본이 성장하는 시기에도 자본에 대한 노예적 종속이 심화될 따름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노동자의 처지가 부분적으로 개선되는 이러한 시기에도 자본가들의 성장과 지배력은 더욱더 거대해지면서 상대적 빈곤은 더 심화된다고 주장한다.

“집은 클 수도 작을 수도 있다. 주위의 집들이 한결같이 작다면, 그 집은 주택에 대한 사회적 요구를 충족시켜 준다. 그러나 작은 집 옆에 궁전이 하나 솟아 있다면, 그 집은 오두막으로 오그라들 것이다 … 그리고 문명의 행로 속에서 그 작은 집이 아무리 커진다 하더라도, 옆에 있는 그 궁전이 동일한 정도로 혹은 더 큰 정도로 높이 치솟는다면, 상대적으로 작은 집의 거주자는 자신의 사면 울타리 안에서 자신이 더욱더 불쾌하고, 불만스럽고, 짓눌린 기분을 느끼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맑스는 또한 16세기 아메리카에서의 더 풍부하고 더 쉽게 가공할 수 있는 광산들의 발견으로 유럽에서 유통되는 금과 은이 증가했던 사례나 1847년 겨울 흉작으로 인한 농산물 가격의 상승을 예로 들면서, 노동력의 대가로 받은 일정한 양의 화폐 가격, 즉 임금이 명목적으로는 그대로일 수 있지만 실질임금은 하락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밖에도 맑스는 자본가 이윤과 노동자 임금이 서로 반비례한다는 사실, 즉 자본가 이윤이 늘어나면 노동자 임금이 줄어들고, 노동자 임금이 늘어나면 자본가 이윤이 줄어든다는 사실로부터 노자 간의 관계는 필연적으로 대립할 수 없다고 주장과 분업, 새로운 기계도입 등이 노동자의 노동을 단순하게 만들고 노동자의 숙련을 가치 없게 만들며, 이로 인해 노동자 간 경쟁 격화로 임금을 삭감하게 만든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맑스는 대자본에 의해 밀려나는 소자본가의 파산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그럭저럭 자본이 성장하는 시기에 노동자와 인민의 삶과 노동의 조건이 그렇다면 자본주의에서 주기적이며 필연적인 공황이 닥쳐오면 어떻게 되는가?

“고상하면서도 야만적인 그 주인은 자기 노예들의 시체를, 공황시에 몰락하는 노동자 제물들 전체를 무덤 속으로 함께 끌고 간다.”

베른슈타인이 중심이 되어 엥겔스 사후 대두된 맑스주의의 수정자들은 공황 극복과 노동자 삶의 개선, 복지제도 확충 등을 근거로 맑스의 궁핍화론을 반박했다. 피라미드 구조가 아니라 항아리 구조 운운하며 중산층이 증가했다는 주장도 계급모순과 계급적대를 부정하는 근거로 사용됐다.

한국사회에서도 어떤 인사는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는 사례를 들어 노동자가 이만하면 살만하게 됐으니 이제 계급적대감을 버리고를 노자협조, 상생을 통해 권리를 확보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당시 아직 맑스주의를 자처하고 있었던 카우츠키는 베른슈타인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상대적 궁핍화론을 사용했다.

그러나 맑스주의에서 궁핍화론은 절대적, 상대적 궁핍화론이다. 이는 맑스주의 이론 자체의 원칙이기도 하며 현실과도 정확히 부합한다. 엥겔스는 《잉글랜드 노동자계급의 상태》에서 심지어 노동자 일부의 범죄와 도덕적 타락조차도 탐욕스런 자본지배의 결과라고 했으며, 맑스 역시도《자본론》에서 한 쪽에서의 현기증나는 자본의 축적과 부의 극단적 증가가 다른 한 쪽에서의 격심한 빈곤과 노동의 고통 심화, 자본에 대한 노예화와 심지어 도덕적 타락을 낳는다고 주장하였다.

오늘날 노동자들의 상태가 조금이라도 개선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노동자들 자신의 투쟁 덕분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한국사회만 보더라도 노동자들은 여전히 주기적인 공황과 장기침체, 만성적인 실업과 저임금, 비정규직 급증 등으로 고통받고 있다.

빈곤 때문에 한 가족 전체가 자살하는 비극이 연이어 들리고 있으며, 청년과 노인들의 자살이 속출하고, 노동자들은 중대재해로 참혹하게 일터에서 죽어나가고 있다. 특히 외주화는 자본의 이윤을 극대화하고 노동자들의 집중과 단결을 가로막는데, 이 외주화는 ‘죽음의 외주화’로 불리며 노동자 살해의 직접적 원인이기도 하다. 주택문제와 가계부채 문제는 중대한 빈곤의 지표일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노동자들의 자본에 대한 예속이 심화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갚아야할 장기 주택 부채를 가지고 있는 노동자들이 어떻게 자본에게 저항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 주로 2, 30대 청년세대들 사이에서는 성별로 나눠져 첨예한 갈등이 벌어지고 있는데, 실업과 빈곤 등으로 고통 받고 있는 청년 피착취 계급 내 분열은 자본주의 불평등을 은폐하고 계급지배를 공고화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노동자들의 상태는 자연상태가 아니고 자본의 지배가 가져온 필연적 결과이다. 사회양극화는 극단적인 계급불평등의 결과이다. 공정성 논리는 계급불평등을 혁파하기 위해 자본의 지배와 싸우는 수단이 아니라 피지배 계급 내 분열과 갈등을 부추기는 수단이 되고 있을 뿐이다.

부제목에서 “왜 나는, 노동자들은 열심히 일할수록 상대적, 절대적으로 빈곤해지는가?”라고 했는데, 이런 고민에 답을 찾고자 한다면 맑스의 《임금노동과 자본》을 공부해야 한다. 노/정/협

이 기사를 총 442번 보았습니다.

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공유하기